열정대학 2016년도 3학기 기자학과 사전과제


■ 책의 제목


정의를 부탁해/권석천 저/동아시아


■ 저자에 관하여(저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 포함) (300자)


이 책을 쓴 저자 '권석천'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법대 출신들이 가는 일반적인 코스(사법고시)를 걷지 않고, 언론계로 진출했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법에 애착을 느낄 수 없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하지만 막상 신문사에 들어가니 법의 울타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한다. 법학이라는 그의 전공이, 그의 기자 생활을 규정지어버린 것이다. 


그는 사실 문화부 기자를 꿈꾸었지만, 신문사에서는 그의 전공이 '법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조 기자'로 보내버린다. '개인의 사정은 조직의 필요 앞에 무력했다'는 그의 고백에서 무력감과 분노를 읽은 것은 나 뿐일까. 


여하간 그는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지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중앙일보에서 논설위원을 하며 '권석천의 시시각각'이라는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한 주마다 중앙일보 지면에 실리는 그의 칼럼은 독자들에게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때로는 분노를 제공한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한국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벗어나, 합리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사회의 현안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대중들에게 그가 '균형 있는 언론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나 역시도 이번에 그가 쓴 책을 읽으며, "아직까지도 이런 언론인이 남아있었다니..."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인상 깊은 구절 (25개 이상/각 구절 당 번호와 쪽수를 넣어주세요)


1. '칼럼은 편견이다.' 언젠가 읽은 작가 김훈의 한마디가 위안이 돼주었습니다. 그래, 꼭 정답일 필요는 없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을 보여주면 돼. 텅 빈 모니터, 깜빡이는 커서 앞에 진실하면 되는 거야. (p.5)


2. 가장 큰 난관은 용기였습니다. 팩트와 팩트를 논리로 이어가다보면 이 선을 넘어도 되는 걸까. 고민되는 지점이 나타나곤 합니다. 자기검열의 경고등이 켜지는 순간이지요. 기자로서의 양심에 비춰 문제가 없다면, 단순히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면, 글을 완성하기 위해 피할 수 없다면 눈을 질끈 감고 그 선을 넘었습니다. (p.6)


3. 매너가 신사를 만든다면 기자는 사건이 만드는 것입니다. (p.11)


4. 더 심각한 것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야, 자기기만쯤은 멋지게 해낼 수 있어야 먹이사슬의 위쪽에 설 수 있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데 있다. (p.23)


5. 2015년의 사건들은 세월호와 인과의 끈으로 묶여 있진 않더라도 최소한 겹쳐져 있다. 부끄러움의 자정 능력을 상실한 사회에서 항용 나타나는 현상이요, 징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자기기만의 시스템을 더 높이 쌓아올리는 것인지 모른다. (p.24)


6. 시스템은 중요하다. 다만 시스템이 우릴 구조해줄 것이라 믿는 건 오산이다. 착각이다. 우리를, 우리 아이들을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 건 선장, 해경, 장관, 총리,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움직여줘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 스펙이 화려하다고, 신망이 높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진정성과 용기, 열정과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p.28)


7.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병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 것들, 예를 들어 건강함, 성실함, 순수함 등은 이를테면 의지, 그러니까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의지의 산물이죠. (p.32)


8.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선 희생하는 사람과 봉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피고인)는 국가를 위해 희생했고, 나(검사)는 봉사했다. (p.36~37)


9. "사도세자의 칼에 죽어간 환관과 나인이 1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의 죽음은 무시해도 되느냐"는 일갈이었다. 칼럼의 골격을 보면 사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초들은 돌아보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과연 우린 영조의 관점, 혜경궁 홍씨의 관점, 조선 사관의 관점에 묶여 있는 것일까. 뒤주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내버려진 환관과 나인들은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p.45)


10.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생각과 표현의 자유는 북한식 전체주의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가치다. 한 로스쿨 교수는 "종북이란 과장된 공포의 언어로 시민들을 위축시키는 일이야말로 북한의 유일사상 체제를 뒤따라가는 것, 즉 종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p.60)


11. 우리가 할 일은 생경하고 철 없는 말들을 종북으로 뭉뚱그리는 게 아니다. 종북세력이 '무해한 광신도'가 되게끔 헌법 정신을 뿌리내리는 것이다. 항균 능력을 키워 '건강하게'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얻은 건강이 진정 우리의 삶을 지켜주고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해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p.61)


12. 민주적 기본질서의 의미는 전체주의 정당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의미를 자유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로 한정하는 경우 다원성과 가치상대주의, 정당의 자유를 제한하여 오히려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p.62~63)


13. 하지만 그들을 해산시키더라도 그들의 생각가지 해산시킬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은 정부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평가되고 걸러져야 한다. (p.64~65)


14. 법치주의는 법 만능주의가 아니다. 권력자의 횡포를 막고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 못지않게 법을 제대로 만들고 공정하게, 신중하게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법질서가 힘 있는 자의 편에 서 있는 건 아닌지,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을 내모는 도구로 쓰이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지 않는다면 또다른 억압일 뿐이다. (p.71)


15. 나는 공권력이란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라 권한이다. 권한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p.75)


16. 하지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듯 문장력은 학력 순이 아닙니다. 문장력을 뒷받침하는 생각의 질은 어떤 고등학교 나와 어떤 대학 갔느냐에 좌우되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자신의 삶에 진지하고 솔직했느냐,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느냐,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느냐에 따라 생각의 질이 달라진다고, 저는 믿습니다. (...) 진정한 글의 힘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 아닐까요. (p.100~101)


17. 사과는 반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왜 분노하는지 상대방 말을 듣는 데서 시작돼야 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해야 한다. 반드시 상대방 눈을 보면서 해야 하고, 때를 놓쳐서도 안 된다. 그래야 사과하는 사람도, 사과 받는 사람도 마음을 열고 변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p.138)


18. 국가의 명예란 국가가 스스로 그 명예를 주장하며 국가와 정부를 비판하는 국민을 처벌하거나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고 하여 지켜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비록 악의적이고 상당성을 잃은 비판이라 할지라도 국민에 대한 설명과 설득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다. (p.150)


19. 감히 말씀드리건대 소통은 너(상대방)를 아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상대방을 자기 식대로 이해하고 해석한다고 공감이 이뤄지는 게 아니다. 소통과 공감은 오히려 나 자신을 제대로 알려는 노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p.171)


20. 시스템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만드는 것이다. (p.174)


21. 총구에선 권력이 나오지만 투표함에선 권한이 나올 뿐이다. 민주공화국이라면 대통령이라도 공식적으론 권한이라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권력을 인격화하고 우상으로 받들며 그 앞에 대(大)라는 수식어까지 붙여주고 있다. (...) 권력엔 부패가 따르지만 권한엔 책임이 따른다. (p.178)


22. 한바탕 칼춤 뒤엔 억울한 혈점(피가 맺혀 살갗에 생긴 점들)들 부지기수요, 원(怨)과 한(恨)이 봄날 벚꽃처럼 구천에 흩날렸으니, 탓할 것은 칼이 아니요, 그 칼 쓰다 각자도생(各自圖生) 떠난 자들 아니던고. (p.214)


23. "검찰에 있을 땐 정의냐, 불의냐, 나쁜 사람이냐, 아니냐로만 봤습니다. 그런 이분법으로는 그 무엇도 재단할 수 없다는 것, 저 자신을 포함해 대부분의 인간은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을..." (p.235)


24. "민주주의가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과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이들이 선거에서 패하게 하는 것이다. 멀고 험하고 귀찮은 길을 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면역력을 강하게 만든다." (p.275)


25. 그들은 취재 대상이나 피사체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름과 사연을 묻고 셔터를 누르는 것까지 '기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장에 급파되는 기자들은 재난자들에 대한 취재 기법과... 취재, 보도 과정에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지침을 전달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고백에서 <중앙일보>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사가 자유롭지 못하다. (p.332)


26. 기자에게는 끝까지 믿음을 저버려선 안 된다는 '신뢰 의무'가 있다. 그 약속이 무너지면 언론도 무너진다. (p.333)


27. "언론이, 기자들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해부할 만한 전문성과 집요함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옳다, 그르다, 당위론에 머무르는 것 아닙니까." (p.340)


28. 언론의 조폭성은 현장 상황을 사소하게 여기면서 내부의 생각을 강요하는 데서 나온다. 존경받는 성자도 모든 상황에서 옳을 순 없다. 보수든, 진보든 모든 언론이 듣기 싫은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반대쪽에 선 이들의 다른 면도 보려고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p.341)


29. 정의와 취향은 반대쪽에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 정의로운 사회는 다른 이의 취향을 철저히 존중해주는 곳일 것이다. (p.345)


30. 사실과 거짓을 가리지 않고 받아쓰는 행태가 신뢰를 저버린다는 문제 제기였다. 실제로 언론의 공신력이 낮아진 데는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진영논리의 스피커 노릇을 해온 영향도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기자들은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의식을 잃은 채 특정 진영의 종군기자, 개별 언론사 샐러리맨이 돼왔다. (p.348)


31.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히어로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p.415)


■ 감상평 (600자 이상)


열정대학 기자학과를 수강하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독서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사전과제였다. 현재 R-POINT 수업 때문에 일주일에 책 한 권 읽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400쪽이 넘는 이 책의 두께를 보고 지레 겁을 먹었으나, 막상 책장을 펼쳐드니 도무지 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일단 이 책을 쓴 저자는 현직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서, 이 책 역시 그가 중앙일보에 매주 기고하는 논설코너 '시시각각'의 글들을 묶은 것이다. 그래서 글들의 주제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있었으며, 신문사 칼럼의 형식에 맞춰 짤막하게 구성되어 있어 지루하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신문사의 사설이나 논설에 대해 호의적이진 않은 편이다. 재미는 있지만, 스트레이트성 기사에 비해 개인이나 사측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간 글이기 때문에, 아무리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집필하려 신경썼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한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트레이트성 기사들은 기사를 쓴 기자보다는 기사의 소재가 되는 사건에 대해 독자들의 칼날이 향하는 경우가 많지만, 논설이나 사설은 사건보다는 집필한 기자에게 칼날이 향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나 보수 언론, 진보 언론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따른 언론사별 색채가 뚜렷이 구분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언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논설의 성향 역시 매우 강한 색채를 띠고 있다. 나처럼 진보와 보수, 좌와 우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신문을 읽어도 거부감이 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라는 저자 소개만 보고서, '이 책도 어쨌든 조중동이라는 보수언론의 성향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편견을 가지고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런 편견은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한꺼풀, 한꺼풀 벗겨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중앙일보> 칼럼이라는 타이틀만 없었다면, 이 논설이 어느 신문에 실렸을지 감도 잡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권석천 위원은 우리 사회와 언론을 지배하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벗어나, 최대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말 이런 기자가 있긴 하는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 때 장준하 선생을 존경해 언론계로 진출하는 것을 꿈꾸었던 나로서, 롤모델까지는 아니어도 배울 점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역시 입대 전까지만 해도 통일부, 국가보훈처 등에서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기자라는 꿈을 잠깐이나마 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군 생활 중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기자라는 꿈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꼈더랬다.


일단 보수/진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언론에서 내가 설 자리는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나는 이승만도 존경하고 김구도 존경한다. 동시에 이승만도 비판하고, 김구도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언론이 어디 그런가. 보수 언론에서 김구는 빨갱이요, 이승만은 건국대통령이다. 진보 언론에서 김구는 민족지도자요, 이승만은 독재자다. 하지만 김구든 이승만이든 각 인물의 공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는 과대로 비판하고 넘어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쪽의 잣대로, 그 인물의 생애와 사상을 한마디로 재단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사고가 아닐까. 이런 양극화된 언론계에서 과연 내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 나를 받아줄 곳은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에 쉽사리 기자라는 직업을 꿈꾸지 못했다.


두 번째로, 자신이 없었다. 내게 사건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잣대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줏대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글쓰기 능력이나 취재 능력 등은 부수적인 문제였다. 여러모로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여겼고, 늘 열등감에 시달렸다. 글 한 편 쓸 때마다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역시 글재주가 없어"라며 자신감이 위축되어 갔다.


하지만 권석천 위원의 글을 읽으며, 어느 정도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권 위원 역시 25년 이상 언론계에 몸을 담은 '베테랑 기자'이면서도, 아직까지도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매번 글을 쓰면서도, 색다른 문체와 시각으로 글을 구성하기 위해 '독백체', '편지글', '인터뷰' 등 다양한 형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노력과 시도가 존경스러웠다. 나같은 경우도 글을 쓰는 스타일이 고정적인데 사실 나만의 색채를 갖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글이 담기는 매체나 형식에 따라 글의 스타일도 자유자재로 변용하는 능력이 늘 부러웠기 때문에, 권 위원의 다양한 글쓰기 스타일은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가 분석한 현안 이슈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도 인상 깊었지만, 그가 강조하는 '기자 정신'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피해자를 취재할 때는, 그를 단순한 취재대상이나 피사체로 인식하지 말고, 피해자가 겪고 있을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감과 배려', 이분법적 프레임을 벗어나 사건을 합리적으로 보려 노력하는 '균형 잡힌 시각',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보도자료만 보고 받아쓰는 수동적 보도가 아닌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서, 사건의 근본을 인식하고 진실을 보도하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취재' 등등... 여러 글들을 통해 그가 강조하는 기자가 갖춰야 하는 자세들은, 수많은 글을 써왔던 내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하였거니와, 다시 한 번 '기자'라는 꿈을 꾸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먼 훗날, 내가 어떤 직업을 갖고 이 글을 다시 보게 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자가 되어있든, 기자가 아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든... 어쨌든 글쟁이로서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아니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이 책을 통해 받은 자극이 언제까지고 유효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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