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시청역 근처에 볼 일이 있어 급하게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 안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의 행색이 심상치 않습니다.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이 오기 시작합니다. 손자에게 성조기를 쥐어준 채, 함께 동행한 어르신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알고보니 오늘 시청 앞 광장에서 태극기집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역사 밖을 나와 집회 현장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나 듣던 군가 <멸공의 횃불>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탄핵을 탄핵한다', '계엄령을 선포하라'의 구호가 들려옵니다. 



덕수궁 옆 테이블에는 탄핵을 비난하는 책자들이 잔뜩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수익금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에 기부금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 열심히 살펴보고 사진도 찍고 있자니 한 어르신이 다가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한다"며 "열심히 찍어서 홍보해달라"고 합니다.


또 다른 테이블로 이동해 책자를 펼쳐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책을 홱 낚아채갑니다. 테이블을 지키던 한 중년 여성이 제 행색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책을 낚아채간 것입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가라" 


순간 당황스러워 물어봤습니다.

"저 아세요? 언제 봤다고 반말이세요?"

"니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모르니까 가라고"


책을 낚아챈 것도 불쾌한 일이었지만, 초면에 반말을 내뱉는 행동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탄핵 반대 집회를 방해하는 어떤 행동과 발언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책을 보고 있던 제게 그 여성은 왜 시비를 걸었던 걸까요. 말그대로 '같은 편'이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어쨌거나 순간적으로 저도 젊은 혈기에 욱하는 마음이 들어 잠시 숨을 좀 고르고 있었습니다. 똑같이 반말을 해줘야하나, 욕을 퍼주어줘야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왔는데, 그 일로 계속 기분이 나빴습니다.



어쨌거나 그 여자가 왜 제게 시비를 걸었는지 답을 찾지 못한 채, 약속장소에 가서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앗차! 제 가방에 달려있던 노란 세월호 리본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쩌면 제게 가라고 요구했던 그 여성은 제 가방에 달린 세월호 리본을 통해 피아식별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적진 한 가운데에 뛰어든 셈이었습니다. 태극기와 성조기의 물결이 가득한 광장 한복판을 세월호 리본을 단 채 돌아다녔으니, 어쩌면 몰매 맞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태극기가 탄핵 반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세월호 리본을 찬 이들은 그들의 적으로 간주되는 이 상황도 매우 씁쓸하기만 합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광장에 핀 벚꽃들은 봄이 왔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여전히 경찰 바리케이드를 중심으로 갈라진 촛불과 태극기의 대립은 2017년 대한민국에 진정한 봄은 오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P.S 내내 기분이 나쁘군요. 얕잡아보인 것 같아서. 제가 한 덩치하고 험악한 인상이었다면 과연 그 여자가 말이나 붙였을는지. 차라리 저를 물리적으로 건드려줬으면 좋았을텐데. 그땐 그냥 확...!


P.S 2 태극기집회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디 감히 민족의 상징인 태극기를. '반국가소요', '내란선동소요'가 딱 알맞은 이름이지 싶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