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끝나고 홈플러스에서 사온 저렴한 영국산 위스키로 혼술을 하며, 그렇게 나의 2017년을 보냅니다. 


항상 힘들었지만 유난히 힘들었던 올해도 그렇게 갑니다. 


시련과 고난도 함께 가거라, 내년에는 지금보단 그래도 살맛 나는 일들만 오거라. 


그렇게 술 한 잔 앞에 놓고 빌어봅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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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읽고 있던 <김영삼 회고록> 2권 정독을 완료했다.


올해 초부터 읽은 책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었더랬다. 마침 읽고 있던 <김영삼 회고록>이 거의 종반부에 이른 상태라 좀만 스피디하게 읽으면 리스트에 한 권이라도 더 올릴 수 있겠다 싶어 조금 급하게 읽었다. 사실 내일 읽어도 상관 없는 건데, 그냥 나의 결벽증적인 증상 때문이랄까.


덕분에 63권으로 마무리될 뻔 했던, 올해 읽은 책 리스트는 64권으로 결산됐다. 당초 100권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고작 반 조금 넘은 수치다. 어디 갈 때면 항상 옆구리에 책 한 권 끼고서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도 100권 채우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런 거 보면 속독하는 양반들 참 대단하고 부럽다.


물론 많이 읽는 게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느리게 읽더라도 깊이 있게 읽을 수만 있다면 그게 더 낫지 싶다. 하지만 워낙 책 욕심이 많은 성격인지라, 책장에 쌓여만 가는 책들을 보면 서둘러 읽고 빨리 빨리 다른 책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래서 나는 속독을 지향하는 완독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아래는 올해 읽은 책을 정리한 것.


1. 거짓말이다

2. 최순실과 예산 도둑들 (2017.1.8)

3. 남과 북의 오작교가 되어 (2017.1.12)

4. 서평 쓰는 법 (2017.1.15)

5. 박근혜의 권력 중독 (2017.1.19)

6. 커피가 죄가 되지 않는 101가지 이유 (2017.1.31)

7.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 (2017.2.3)

8. 흐린 세상 맑은 말 (2017.2.6)

9. 정본소설 사임당 (2017.2.13)

10. 대한민국이 묻는다 (2017.2.20)

11. 밤이 선생이다 (2017.2.26)

12. 서른, 정치를 공부할 시간 (2017.3.6)

13. 이재명은 합니다 (2017.3.11)

14. 대통령 노무현은 왜 실패했는가 (2017.3.19)

15. 라면을 끓이며 (2017.3.24)

16. 채식주의자 (2017.3.26)

17. 대통령 선택의 심리학 (2017.4.2)

18. 독립정신 (2017.4.6)

19. 82년생 김지영 (2017.4.12)

20.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 (2017.4.17)

21. 전두환 회고록 1 (2017.4.30)

22. 페미니스트 모먼트 (2017.5.4)

23. 이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2017.5.10)

24. 보이차를 알면 건강이 보인다 (2017.5.10)

25. 위스키의 지구사 (2017.5.17)

26. 결혼불능세대 (2017.5.19)

27. 북한의 역사 1 (2017.5.21)

28. 대통령 없이 일하기 (2017.5.28)

29. 무예 인문학 (2017.6.1)

30. 쿨 레이디 (2017.6.2)

31. 북한의 역사 2 (2017.6.8)

32.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2017.6.14)

33.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2017.6.18)

34. 왕따의 정치학 (2017.6.24)

35.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2017.7.4)

36.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2017.7.11)

37.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2017.7.17)

38. 공터에서 (2017.7.20)

39. 너답게 살아갈 너에게 (2017.7.24)

40. 시골무사 이성계 (2017.7.28)

41. 지적 생활의 즐거움 (2017.8.3)

42. 덩케르크 (2017.8.15)

43. 서간도에 들꽃 피다 7 (2017.8.22)

44. 허형식 장군 (2017.8.30)

45. 정조와 정조 이후 (2017.9.13)

46. 프로불편러 일기 (2017.9.18)

47. 주진우의 이명박 추적기 (2017.9.22)

48. 조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2017.9.23)

49. 상도동 그소설 (2017.9.26)

50. 송곳 1 (2017.10.2)

51. 송곳 2 (2017.10.3)

52. 송곳 3 (2017.10.3)

53. 문재인노믹스 (2017.10.5)

54. 아리랑 (2017.10.13)

55. 다행히 졸업 (2017.10.31)

56. 오래된 생각 (2017.11.2)

57. 문제는 검찰이다 (2017.11.5)

58.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들 (2017.11.8)

59.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017.11.30)

60. 굿바이 MB (2017.12.3)

61. 특종 1987 (2017.12.7)

62. 김영삼 회고록 1 (2017.12.17)

63. 조선과 중화 (2017.12.30)

64. 김영삼 회고록 2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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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비>에 이어 올해 기대작 중 하나였던 <1987>을 어제 조조로 보고 왔습니다.


<1987>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죽음에 이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하 박종철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면서 고문 사실에 대해 은폐와 조작을 시도하지만 양심 있는 이들에 의해 그 진실이 폭로되면서 한국 사회를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됩니다. 


영화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사건의 진실을 감추려는 이들에 맞서 그 진실을 파헤치고 알리려는 양심 세력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인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화장을 시도하는 경찰을 제지하는 최 검사(하정우), 박종철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는 윤 기자(이희준), 부검 결과에 대한 조작을 거부하는 국과수 황 박사 등이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던 것은, 놀라우리만치 고증에 충실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 박종철 사건을 최초 보도한 신성호 전 중앙일보 기자의 <특종 1987>이라는 책을 한 번 읽고 갔더랬는데, 책에서 본 사건의 전개과정이 스크린에서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더군요. 극중 연희(김태리)라는 인물 빼고는 전부 실존 인물이라고 하는데, 각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실명과 신분이 자막으로 뜨고 있어 다큐멘터리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1987>에는 박 처장(김윤석)을 제외하고는 단독 주연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따로 없습니다. 하정우, 유해진, 설경구, 강동원, 김의성, 여진구, 박희순, 이희준, 오달수 등등 정말 많은 주·조연급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전부 비슷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6월 항쟁을 이끌어낸 것은 몇몇 '영웅'이 아니라 각자 자기 위치에서 양심을 지키고자 한 평범한 소시민들이 다함께 거둬낸 결실임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감독의 의도 자체는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가 분산되어 약간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특히 김태리와 강동원의 로맨스는 굳이 넣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아쉽습니다.


<신과함께>를 봤을 때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습니다만, 가슴이 매우 먹먹해지는 영화였습니다. 백골단이 길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하는 장면이나, 경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장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각종 고문을 당하는 장면, 대학생들이 최루탄을 맞아가며 싸우는 장면, 서울시청 앞 광장이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찬 장면들을 보면서 몇 번이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던 것 같습니다. 


1987년이면 제가 태어나지도 않은 해입니다. 그래서인지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정말 저랬단 말이야?' 하고 믿기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현대사 수업 도중의 일이었습니다. 전두환 정부에 대한 설명을 하시다말고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가는데 여기저기서 총 소리가 나더라. 그런데 그게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쿠데타였다"면서 "그게 불과 3~40년 전 이야기라 나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새삼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저분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겪지 못했던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생각에 묘한 이질감이 들었더랬지요.


그리고 '저 당시에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과연 앞에 나서서 최루탄 가스 마셔가며 열심히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 단순한 가정일 뿐임에도 쉽게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만큼 두렵고 험난한 길이기 때문이지요. 30년 전,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위해 싸운 순국선열들에 대해 더욱 감사함을 느끼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편안한 삶을 구걸하는 대신 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어간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제가 누리는 자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그렇거니와 영화 <1987>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 선열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오늘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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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한답시고 정말 힘들었던 졸업 전 마지막 학기.

힘들었던 만큼 학점으로 보상을 해주는 건가.


사실 장학금을 받지 않는 이상, 더 이상 학점은 무의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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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링크: http://omn.kr/oxn5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지난 6일 공개된 영화 <1987>의 메인 예고편에서는 경찰 조사 중 사망한 한 대학생의 죽음을 두고 사건의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과 파헤치려는 이들의 숨 막히는 대결이 묘사됐다. 예고편이 공개되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아래 박종철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던 22살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범행 직후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위장,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결국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 <19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박종철 사건 뒤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30년 만에 공개된 특종기자의 취재수첩


그래서 준비했다. 영화 개봉에 맞춰 함께 읽어보면 좋을 '가이드북'이다. 올해 1월 박종철 사망 30주기에 맞춰 출간된 <특종 1987>이다. 박종철 사건의 전개 과정 뿐만 아니라, 박종철 사건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들 그리고 박종철 사건이 한국 민주화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다뤄내고 있어 1980년대의 정치적·사회적 흐름까지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인 신성호 전 중앙일보 기자는 1987년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으로 박종철 사건을 최초 보도한 장본인이다. 박종철 사건을 세상에 알린 특종 기자로서 그는 30년 전 자신이 취재하며 보고 들은 진실을 낱낱이 공개한다. 덕분에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풍성하다.


그렇다면 박종철 사건은 세상에 어떻게 알려질 수 있었던 걸까. 1987년 1월 15일 오전, 중앙일보 사회부 법조 출입기자였던 저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대검찰청 취재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평소 친분이 있던 이홍규 공안4과장이 "경찰, 큰일 났어"라며 저자에게 툭 한 마디 던진 것. 젊은 기자의 '촉'이 즉각 발동됐다. 이른바 박종철 특종의 시작이었다.


"6년째 법조를 출입하고 있던 나는 이홍규 과장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검찰 간부들은 비교적 보안 의식이 철저하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라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 p.25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데스크(편집부)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비밀작전에 가까운 취재가 시작됐다. 검찰과 서울대, 유족을 상대로 이중, 삼중 취재를 한 끝에, 사망한 대학생의 신원이 서울대생 박종철임이 밝혀졌다. 이미 돌아가고 있던 윤전기를 즉각 멈춰 세운 채 박종철의 사망 소식을 급하게 지면 배치했다. 그렇게 박종철 사건은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와 탄압이 극심할 무렵이었다. 저자는 박종철 사건을 보도한 직후 자신과 언론사에 가해온 정부의 압박에 대해서도 폭로한다. 당장 기사를 내리라고 해서 거절했더니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더라는 정부 고위 관계자 얘기도 우습고 황당하지만 "정보기관에 끌려갈지도 모르니 피신하라"는 동료들의 충고에 따라 밤새 잠적해 있었다는 저자의 고백은 당대 언론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어 구슬프기까지 하다.


그러나 저자의 특종을 시작으로 여러 언론사가 작심한 듯이 추가 취재와 보도에 매달렸다. 언론사 통·폐합, 보도지침 하달 등 전두환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언론인들이 박종철 사건을 기화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박종철 사건의 언론사적 의의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말한다. 비로소 언론인들이 권력의 혀에서 벗어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론기관 본연의 사명을 실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 <1987> 속 하정우, 실존 인물이었다


한편 영화 <1987>에서는 진실을 쫓는 기자, 사체 화장을 막는 검사, 숨겨진 진실을 세상 밖으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교도관에 이르기까지 박종철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숨겨진 영웅들이 등장한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실제로도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용기를 낸 '의인'들이 있었다. 특히 "경찰, 큰일 났어"라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이홍규 과장의 경우 25년 만인 지난 2012년 딥 스로트(deep throat: 내부고발자)임이 밝혀졌다. 


단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흘렸던 것이다. 훗날 그는 "어린 학생이 죽었는데 이렇게 묻어야 하나 싶었다"며 "진실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내부고발을 결심한 동기를 증언한 바 있다. 


영화 속에서 하정우가 맡은 '최 검사' 역시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 바로 사건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검사다. 그는 사건 직후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자 사체 화장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아들이 조사 받다가 죽었다는데 당장 화장해서 유골 넘겨달라고 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느냐"며 쫓아낸 일화로 유명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부검 결과에 대한 경찰의 조작 시도를 우려해 부검도 사설 대학병원에서 집도하도록 지시했다.


이외에도 물고문 의혹을 제기한 의사 오연상, 물고문 혐의를 인정한 정구영 서울지검장, 경찰의 사인 조작 지시를 폭로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 등이 박종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기여한 공로자들로 등장한다. 


저자는 1972년 당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하야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 역시 딥 스로트였던 미 연방수사국(FBI) 부국장 마크 펠트의 제보 덕분에 가능했다며 "이들이 없었다면 박종철 사건은 그 진실이 묻힌 채 전두환 정권의 여러 의문사 사건 가운데 하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의를 부여한다.


그 이후로는 역사가 설명하는 그대로다. 박종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전국의 광장은 박종철 사건 조작과 은폐를 규탄하며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함성으로 뜨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의 수용으로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30년째 풀리지 않은 의혹... 전두환 개입 여부 밝혀야


저자는 3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혹에 대해 지적한다. 바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실체다. 박종철 사건 당시 청와대와 안기부, 경찰, 검찰 등 관계기관은 수시로 모여 사건의 대응 방향을 논의했다고 전해진다. 사건 직후 경찰이 밝힌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수사 결과 역시 이 자리에서 결정됐다. 


하지만 이 회의 구성원에 대한 실체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며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저자는 "법적 시효는 지났다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 규명에는 그 시한이 있을 수 없다"며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았음을 주지시킨다. 또 당시 권력의 꼭대기에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개입 여부도 분명히 밝혀야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박종철이라는 이름 석 자는 흐릿해진 지 오래다. 저자는 이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박종철이라는 이름이 한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6월 항쟁 당시 시민들이 원하던 모습이고, 박종철이 꿈꾸던 세상인가? 오늘의 우리 모습이 그들이 꿈꾸던 세상과는 거리가 있다면 박종철 사건은 30년 전 끝난 게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박종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 p.239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 손으로 6명의 대통령을 뽑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민주화'가 시대의 화두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총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언론을 장악하고 국민을 사찰하며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역대 보수정권의 행태는 과거 군사독재정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민주화의 길이 여전히 요원하다는 씁쓸한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그러나 좌절할 이유는 없다. 6월 항쟁 이후의 실패가 곧 민중의 실패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30년이란 시간은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더 뜨겁고 단단하게 담금질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난 겨울, 광장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혁명은 바로 그러한 갈망이 폭발한 결과였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이제부터가 시작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 안의 적폐를 청산하고 제도적 민주주의를 넘어 문화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남아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 다시 지난 실패를 답습해야만 한다. 박종철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적폐청산과 제도적·문화적 민주화가 완성되는 날, 비로소 우리는 박종철이라는 이름 앞에 떳떳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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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철비


Daum 웹툰 '스틸레인'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영화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이 두 번째로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북한 군부의 쿠데타로 최고지도자의 유고(有故) 사태가 발생한다는 시놉시스 아래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개인적으로 개봉 전부터 무척 기대가 컸던 작품이었던지라 개봉 당일 조조로 보고 왔습니다. 영화 내내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눈에 자주 띄는군요. 북한이 드론을 이용해 청와대를 공격하는 것도 웃겼고, 북파공작원 몇 명이 계엄령이 떨어진 수도 서울을 들락날락하면서 국군 부대를 가지고 노는 것도 황당했습니다. (사실 제 친구는 '우리나라 군대라면 충분히 뚫리고도 남을 거다'라며 역설적으로 너무 현실적인 반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만...)


다소 뻔하고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그럼에도 한반도 현실에 빗대어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들인지라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북한 군부의 쿠데타와 남한에 대한 핵미사일 발사 위협,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철수하는 미국, 일본, 중국까지...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못내 우울함과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북한의 잦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북한의 위협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북한의 존재를 가벼이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턱대고 책임 지지도 않을 전쟁을 부르짖는 것도 무책임하고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잠시 빌린 땅일 뿐이며,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평화롭게 물려줄 의무가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딜레마를 푸는 해법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분단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평화라는 화두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2. 신과함께 - 죄와 벌


이 작품 역시 동명의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원작을 너무 재미있게 봤던 터라 영화화 소식이 들렸을 때 기대 반 걱정 반이었습니다. 공개된 예고편만 봐도 영 아니다 싶었습니다. 원작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캐릭터(진기한 변호사)는 아예 빠져버렸고, CG 등만 보면 그냥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봉 전부터 원작 팬들 사이에서 원성이 높았는데, 막상 개봉하고나니 연일 호평이 쏟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제 친구도 "영화 보다 울었다"면서 "꼭 보라"고 강추를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조조로 보고 왔습니다.


확실히 원작과는 다른 전개로 이어집니다. 애시당초 원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감독이 아예 원작과 다른 노선을 채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험 부담이 큰 도전이었을텐데, 나름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내용은 아이를 구하다 죽은 소방관(차태현)이 저승차사들과 함께 49일 간 7번의 재판을 받으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7개의 지옥마다 심판하는 테마(거짓, 천륜, 폭력, 불의, 배신, 살인, 나태)가 있고 각각을 관장하는 대왕들이 등장합니다. 검사 역할을 맡은 판관들로 오달수와 임원희가 등장하는데 시종일관 진지한 상황에서 둘이 깐족거리는 게 눈에 거슬렸습니다. 나름 영화를 스무스하게 끌어보려는 감독의 설정이었을텐데, 저는 별로였습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저승(신)도 이승(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부각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망자가 무죄선고를 받아야 자신들도 환생할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변호하는 차사들이나, 반대로 망자가 유죄를 선고받아야 보너스를 받는 탓에 아무리 정의로운 망자여도 어떻게든 죄를 부풀려보려는 판관들을 보면 오늘날 인간사회의 재판제도를 에둘러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아니라면 손수건 한 장씩 준비하고 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보고 나온 사람들이 펑펑 울었다길래, '나는 절대 울지 않겠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들어갔습니다만... 아주 두 눈이 벌개지도록 질질 짜면서 나왔습니다. 끝날 때쯤 객석도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하더군요. 감독이 사람 울리는 데 아주 재능이 탁월한 듯 합니다. (왜 그렇게 다들 우는 지는 직접 확인해보시길...)


극중에서 염라대왕(이정재)이 남긴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하지 않은 일을 죽어서 하겠다고 한다" 죽어서 후회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잘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어서 지옥 가지 않으려면 정말 착실하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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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7년이 저물어갑니다. 올해 초에 세워둔 목표가 뭐였는지 가물가물합니다만, 돌이켜보면 그닥 성취한 것은 없는 듯 합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게 늘 계획대로 이뤄지는 게 아니어서, 올 한 해도 온갖 변수를 맞닥뜨려야만 했습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변수들 앞에서 제가 했던 선택들이 늘 긍정적이고 행복한 결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즐거웠던 날들도 많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선택으로 후회와 좌절, 고통의 시간도 길었습니다. 이제 올해를 보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런 힘들었던 기억들도 같이 보내고자 합니다.


내년에도 어떤 변수가 또 저를 괴롭히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올해보다는 좀 더 행복한 날들이 많았으면 하는 게 바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 새해를 앞두고, 내년 목표를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현실적인 고민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목표 순서는 우선순위와 상관없이 생각나는대로 매긴 것입니다)


1. 형의권 수련


형의권 수련을 시작한 지 딱 1년이 됐습니다. 혼자 권가만 치다가 최근 발력 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쏠쏠한 재미를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사형들과 발력을 주고 받을 때마다 느끼는 손맛(?)에 푹 빠졌습니다. 발력이 잘 안될 때마다 답답하고 고민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련에 대한 회의감이나 슬럼프에 빠져본 적은 없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여러모로 정신적으로 힘들고 바쁜 가운데서도 수련의 끈은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취업준비생이 된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취직 준비를 해야해서 오히려 지난 1년보다도 시간을 내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형의권 수련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건 제가 생각해도 철 없는 행동 같기도 합니다. 사형들도 누누이 '생활이 먼저 안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지난 1년처럼 수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는 어렵더라도, 수련의 끈만은 놓지 않겠노라 다짐해봅니다. 적어도 하루 30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루 5분씩은 꼬박꼬박 수련을 하겠노라 목표를 세워봅니다.


2. 해금 재시작


전역한 직후에 배우기 시작한 취미활동 중 하나가 해금이었습니다. 형의권 다음으로 가장 큰 애정을 갖고 열심히 배웠던 악기인데, 주머니사정도 여의치 않고 시간 여유도 없다보니 지난 11월부터 학원을 잠깐 관둔 상황입니다. 집에 악기가 있긴 한데, 학원을 안 나가니 연습조차 게을리하게 됩니다. 이러다간 아예 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요새 조바심이 좀 납니다. 


남자라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악기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탓에, 해금 연습의 끈도 놓고 싶지 않습니다. 내년 초에 상황이 좀 안정되면 다시 학원에 등록해서 연습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대로 중단하기엔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돈, 열정이 너무 아깝네요.


3. 독서량 100권 달성


올해 초부터 읽은 책들의 목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60권 정도의 책을 읽었네요. 등하굣길이나 여행갈 때나 항상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음에도, 워낙 이해력이나 집중력이 떨어져서 겨우 이 정도에 그쳤네요. 


무작정 많이 읽는 게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굳이 책을 많이 읽으려는 까닭은 그냥 책 욕심이 많은 성격 탓입니다. 읽지도 않은 책들이 방에 쌓여가는데도, 좀 흥미롭다 싶은 책들이 보이면 일단 사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집안의 서가가 부족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부쩍 사놓은 책들부터 일단 후딱후딱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내년엔 100권 달성을 목표로 열심히 읽으려고 합니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부터 얼른 해치워야겠지요. 특히 이문열의 <삼국지>는 꼭 통독하려고 합니다. 여러 차례 통독에 도전해봤지만, 매번 흐지부지됐기 때문입니다. 6권까지 읽다가 흐름이 끊어졌는데, 내년에는 다시 1권부터 시작해서 10권까지 통독에 성공하는 게 목표입니다. 


4. 일본어 공부


최근 들어 일본드라마를 열심히 챙겨보다보니 일본어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난 학기 일본어 수업을 듣기도 했습니다. 일본어는 국어와 어순이 비슷해서 쉽다고 하는데, 저한텐 중국어보다 오히려 더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져서 버겁더군요. 알파벳이라고 할 수 있는 히라가나, 가타가나 외우는 것도 머리에 쥐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흥미가 있기에 끈기를 갖고 꾸준히 하면 성취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장 내일 근처 서점에 가서 일본어 독학을 위한 교재를 한 권 살 생각입니다. 토익이나 다른 자격증 취득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못하겠지만 취미 수준으로 가볍게 한 번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자격증 시험에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5. 졸업


현재 4학년 2학기까지 다 마치고 졸업 논문도 제출한 상태라서 정상적이라면 내년 2월 졸업입니다만, 졸업요건 중 하나인 '토익' 통과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수료'로 걸어놓고 졸업을 유예하게 됐습니다.  


졸업 요건 자체가 요식행위에 가까워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기준 점수는 낮습니다만, 이번 학기는 학생운동한다고 바빠서 아예 시험 자체를 응시할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루 빨리 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터라, 우선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토익 공부에 매진할 생각입니다. 내년 8월에 후기 졸업장은 받아야하니까요.


6. 취직 준비


아마 이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듯 합니다. 이제 정말 명실상부 취업준비생이 됐는데, 더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까지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고민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평소 관심 있던 분야들을 중심으로 진로 탐색과 취직 준비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특히 요새 정부에서 알선하는 '취업성공패키지'란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정부에서 청년들에게 취업장려금을 지급하면서 진로 탐색과 취직을 위한 직업훈련까지 컨설팅해준다고 합니다. 제 또래 친구들도 많이 하고 있던데, 일단 저도 이 프로그램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프로그램과 별도로 토익, 워드 같은 자격증 취득에도 도전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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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춘천 외갓댁에 다녀왔습니다.


춘천역에서 외갓댁으로 가려면 소양강을 끼고 있는 길을 지나야 하는데, 평소에는 뭐가 그리 급한지 강의 풍경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역과 집만을 왕복해왔더랬습니다.


요새 마음이 좀 심란한 터라, 강바람이나 쐴 요량으로 잠깐 들렀습니다. '소양강 스카이워크'라는 게 새로 생겼는데 2천 원인가를 내면 강 중턱까지 이어진 교각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멀리서 봐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거리인데다가 별 것도 없어 보이는 터라 굳이 돈 내고 입장권을 끊진 않았습니다.


한겨울 강바람을 쐬면서 생각이 많아지는 곳이었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좀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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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7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2018년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돌이켜보면 17년도 하반기는 학교 다니랴 동시에 학생운동하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관두고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맘고생이 심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유독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제겐 군 시절 선·후임들이 그렇습니다. 2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힘들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던 사이니 오만 정이 다 들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지요.


이번에 어쩌다보니 그 친구들과 뜻이 맞아서 함께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전역병 캠핑'. 제겐 선임이 되는 친구 세 명(전역한 지금은 제게 동생들입니다만 ㅎㅎ)과 저, 그리고 후임 한 명까지 총 5명이 함께 다녀왔더랬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간 곳은 상암에 있는 난지캠핑장이었습니다. 우선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 월드컵경기장점에 들러 밤새 마실 술과 바베큐파티용 삼겹살, 안주 등을 잔뜩 사갔습니다.


저희가 빌린 텐트는 10인용 몽골텐트였습니다. 원래 함께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인원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공간은 넉넉해서 좋았으나... 이날 바람이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중앙에 장작 난로가 있긴 한데, 문제는 저희가 장작을 때워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보다 오히려 연기를 더 많이 들이마신 것 같습니다. 불도 자꾸 꺼지고... 캠핑장에서 장작을 파는데 한 단에 1만원이나 하는 통에 장작값이 너무 비싸서 양껏 때우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고생하면서 마시는 술이 달다고, 어찌어찌 간신히 불씨를 붙여놓고서 저녁부터 다같이 바베큐파티를 즐겼습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온갖 술을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더군요. 


특히 이날을 위해 집에서 아버지가 드시던 각종 술들(죽엽청주, 북대양, 스카치 위스키)에 마트에서 사간 벌떡주, 가시오가피주들을 챙겨갔는데 아주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술을 꿀떡꿀떡 잘 마시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하더군요.


멀리 부산에서 온 친구는 부산의 지역소주인 '시원' 두 병을 준비해왔고, 오늘 캠핑을 기획했던 친구는 사돈어른이 담근 복분자주를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홈플러스에서 산 공부가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호화잔치였습니다.



난로 앞에서 다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군 시절을 돌이켜보려니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니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모르겠더군요.


특히 이날 국유단 시절 썼던 모자도 챙겨오고 군 시절 사진과 영상을 편집해서 미니 빔으로 즉석 상영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특성상 워낙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이렇듯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상당히 많은 게 장점입니다. 거기에 우리 부대 전용 OST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까지 입혀놓으니 괜히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 왈칵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즉석에서 다른 전역자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우리끼리 점호와 약식제례(유해를 수습한 뒤에 지내는 제사)도 오랜만에 재현해보고 잠깐이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시다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들 숙취 탓에 비몽사몽... 당산역까지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헤어졌습니다. 다들 숙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통에 서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쉽습니다. 저도 집에 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네요.


아무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갔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여독이 많이 남는 캠핑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라고 지금보다 안 힘들었겠냐마는(그래도 군대인데!!!) 정말 지나가면 다 그리운 추억이 되나봅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시절을 함께 헤쳐나왔기에, 유독 군 시절 선후임들이 반갑고 친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국유단 전역자 모임을 상설화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까지 나왔는데요, 정말 실현됐으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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