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명의 역사학자들이 정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약사(略史)다. 부록(연표)을 제외하면 175페이지로 매우 얇다. 두꺼운 연구서를 읽기 벅찬 일반 독자들을 위한 맞춤형 교양서다.


책이 얇다고 안에 담긴 내용도 얄팍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임정 연구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9명의 학자(한시준, 김희곤, 한상도, 장석흥 교수 등)들이 1부 상해 시기, 2부 이동 시기, 3부 중경 시기의 세 파트로 임정의 활동상을 나누어 정리했다. 임정의 성과와 한계를 두루 조명하려 한 점이 눈에 띈다.


이 책의 초판은 2009년에 나왔다. 그리고 좌우 세력 간 역사전쟁을 불러일으켰던 '건국절' 논란은 2008년에 시작됐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도 건국절 논란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반박이 제시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정확한 근거를 들어 건국절 논란을 반박한 게 벌써 9년 전인데 아직까지도 건국절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는 현실이 웃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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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사극 영화가 세 편이나 개봉했습니다. <안시성>, <물괴>, <명당>입니다. 개인적으로 셋 다 크게 기대했던 작품은 아닙니다. 사극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닥 구미가 당기는 작품들은 아니었습니다. 


어쨌거나 추석 전후로 <안시성>과 <명당>을 보았습니다. <물괴>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네티즌들의 감상평이 좀 안 좋더군요. 상영관에서도 슬슬 내려가기 시작한 것 같고... 기회가 되면 보는 걸로.


아래는 각 영화에 대한 촌평입니다.


1. 안시성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사실 초반엔 보다가 졸았습니다. 이번에 안시성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저는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영화를 잘 못 보는 성격인 듯합니다. 안시성은 안시성에서 벌어지는 고구려군과 당군의 전투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터라, 기본적으로 안시성을 벗어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전투의 반복일 뿐입니다. 그리고 전투란 것도 사실 마지막의 '토산 전투'를 제외하고 나면 칼로 베고 찌르며 활 쏘고 돌 던지는 뻔하디 뻔한 공성전의 반복이라... 너무 지루한 나머지 창칼이 맞부딪끼면서 내는 요란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초반엔 너무 졸려서 한참 잤습니다.


조인성의 연기는 확실히 사극톤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조인성만의 매력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대조영>의 임동진 선생이 중후한 카리스마의 양만춘 대장군 상을 정립했다면, 조인성의 양만춘은 친구 같은 젊은 리더의 상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실제 양만춘의 얼굴을 우리는 본 적도 없으니 어떻게 표현하든 그건 감독과 배우의 재량이라고 봅니다.


스토리 전개가 너무 뻔합니다. 저는 원래 머리가 둔해서 반전 예측도 잘 못하고, 해석이 필요한 영화는 질색입니다. 당장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도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극찬을 하는데, 저는 대체 뭔 소린지 몰라서(심지어 해석을 봐도 이해가 안 가더라는) 보자마자 바로 시간 날렸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둔한 저조차도 너무나도 쉽게 예측이 가능했습니다. 뭐 하나 떡밥이 나오면 바로 '이 떡밥은 나중에 이렇게 활용이 되겠군' 하고 머릿속에 쫙 그려지더군요. 당 태종이 못 당기는 주몽의 신궁을 양만춘이 당겨서 당 태종을 쏘아맞춘다는 뻔한 설정, 그리고 활을 쏠 때 "고구려의 신이 함께 당겨주실 거다"라며 노골적으로 민족주의적 코드에 기대는 대사들까지. 아쉬움만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2. 명당


안시성보단 훨씬 낫습니다. <관상>, <궁합>, <명당> 등 동양철학 3부작 중 마지막 시리즈라고 하는데, <관상>보단 못 하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았습니다. 조승우야 <암살> 이후로 믿고 보는 배우인만큼 연기력 면에서 완벽했고, 백윤식 선생 역시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관상>에서는 충신을 <명당>에서는 간신을 연기하면서 극과 극의 캐릭터를 보여주었는데, 둘 다 너무나도 잘 어울릴만큼 역시나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지성'을 재발견했습니다. 지성이 나온 작품을 많이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명당>을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야욕과 광기에 휩쓸린 흥선군의 역할을 정말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두 눈빛에 서린 광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스토리는 감독이 지어낸 허구인 줄 알았는데,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더군요. 솔직히 저도 역사를 전공했지만 흥선군이 자손이 천자가 되려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그곳에 있던 사찰을 불태워버리고 묘를 썼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보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언급이 된 부분이라고 하는군요. 아마 야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찌 됐건 근거를 가지고 제법 개연성 있게 스토리를 풀어나간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신흥무관학교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관심사(독립운동사)를 정확하게 관통하는 코드라 매우 흡족했고요. 엄청 잘 만든 수작은 아니지만, 킬링타임용으로는 제법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졸지도 않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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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무인과 거문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중국무림 3대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서 꽤나 흥미를 끌었더랬습니다.


중국무술 중 하나인 '형의권(形意拳)' 문파의 3대 명사(상운상-한백언-한유)의 이야기를 3대인 한유의 구술로 정리한 책입니다.


참고로 한유의 구술을 책으로 정리한 사람은 중국의 영화감독인 서호봉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왜구의 무기>, <명궁 류백원>, <사부 - 영춘권 마스터> 등 마니아틱한 무술 영화를 연출한 감독입니다. 실제로 무술을 연마한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형의권에 대해 설명하자면, 중국 청나라 때 만들어진 무술로 내가 3대 문파(태극권, 형의권, 팔괘장)의 일종으로서 강맹하고 직선적인 공격을 특징으로 하는 무술로 유명합니다. 국내에는 건강체조로도 널리 알려진 태극권에 비해 그 인식이 미미합니다만 중국 내에서는 3대 명권(名拳) 중 하나라고 꼽힐 정도로 유명한 권법입니다. 


특히 형의문의 유명한 인물인 곽운심이란 분은 반보붕권(반보로 내딛으며 주먹을 지르는 기술)으로 중국무림을 평정함으로써 여기에서 '반보붕권 타편천하(半步崩拳 打遍天下: 반보의 붕권으로 천하를 때린다)'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상운상이란 분 역시 곽운심의 제자로, 형의문이 배출한 유명한 권법가입니다. 이분은 만화 <권법소년>에도 등장하지요. 머리와 몸이 둔해서 간단한 기술 하나조차도 습득하지 못하는 탓에 스승이 붕권 하나만 가르쳐줬더니 무려 3년 동안 그 기술 하나만 연습해서 날고 기는 사형제들을 다 꺾어버린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내려옵니다.


그 상운상 노사가 어떻게 제자들을 가르쳤고, 무림에서 대련 신청(소위 도장깨기)이 들어오면 어떻게 상대했는지 그 당시의 일화들을 증언의 형태로 구술하고 있어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은 일화 한 토막이 있어 소개합니다.


어느 날, 상운상 노사가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데, 웬 노인이 찾아와 대결을 청했다고 합니다. 상운상 노사와 노인이 손을 맞대자마자 둘 다 훌쩍 뛰어오르며 반대편으로 착지했는데 제자들은 그걸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스승을 상대로 필적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한 상운상 노사 역시 제자들에게 "모두 나가라"고 한 뒤에 문을 닫아걸었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제자 한백언이 몰래 창틈으로 엿보니 상운상 노사가 달마상에 향불을 피워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향을 올리고 뒤돌아서는 상운상 노사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했다고 합니다. 평소 자신의 사부의 얼굴이 아닌 전혀 다른 얼굴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대련에 임한 상운상 노사는 가볍게 노인을 제압했습니다. 


나중에 한백언이 그 까닭을 여쭈면서 "신령의 도움이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상운상 노사가 답하기를 "정성이 지극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사람이 간절하면 이로움이 생긴다"고 에둘러 말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과장과 허풍이 심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웬만한 스승의 허물은 감추고 싶은 게 제자의 심리일텐데, 무림계에서는 대선배이자 고수로 명성을 떨친 상운상 노사조차도 무술만 하다보니 밥벌이를 제대로 못해서 아내에게 구박받는 장면이 묘사되는 걸 보면 나름 진솔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상운상 이후 제자 한백언이 문화대혁명 당시 고초를 겪었던 일, 홍위병들을 무술로 깜짝 놀라게 한 일 등이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청나라에서부터 중화민국을 거쳐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시절로 이어지는 근현대 중국의 사회상을 민중사적 관점으로엿볼 수 있는 것 같아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무슨 장풍 쏘고 날아다니는 무협 판타지를 기대하시는 분들에겐 환상이 깨질 수 있으니 비추합니다. 차라리 근현대 중국사에 관심 많은 분들이 오히려 더 흥미롭게 보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읽는 게 좀 고통스러울 수 있으니 그 점은 미리 밝혀둡니다. 이 책을 번역한 출판사가 번역을 어찌 이리도 엉망으로 해놨는지,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걸 떠나서 읽다가 짜증이 날 정도입니다. '난 참을성이 많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에게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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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대표 역사카페 '부흥'에서 주최한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번에 <중국사 인물과 연표>(이하 중국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중국이란 나라를 무척 좋아합니다. 거대한 땅덩어리만큼이나 다채로운 문화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영웅의 로망을 품게 해준 중국무협문화부터 눈과 혀를 즐겁게 해주는 중화요리들까지. 어떻게 보면 역사적으로 우리와 늘 함께 공생해왔던 나라지만 그 문화는 너무나도 다른 이 중국이란 나라에 오랜 시간 흥미를 갖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무릇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역사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륙 위에서 살아간 이들의 발자취를 통해 지금의 중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중국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왜 그런 사상을 품게 되었는지 역사는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너무나도 방대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중국이기에, 중국사를 '통사'로 이해하는 것은 또한 지난한 일이기도 합니다. 좁은 반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버거운 일일진대, 드넓은 대륙 위에서 몇 천 년을 살아간 중국인들의 발자취를 좇는 과정을 책 한 권에 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사>는 보기 드문 대단한 수작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5천 년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를 한 권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표 형식으로 구성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 역사를 다룬 책마다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쉽게 연표를 싣곤 하지만, 거진 책 말미에 한두 장 짧게 정리한 게 전부입니다. 그러다보니 대충 훑고 스쳐지나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 <중국사>는 오로지 연표로 구성한 데다가, 연표를 따라 역대 중국 위인들의 초상화 1,443장과 역대 제왕들의 '용맥도(계보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연표를 통해 중국 5천 년의 통사를 한 눈에 쉬이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읽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너무나도 방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이기에, 우후죽순처럼 자라난 소국(小國)들의 역사가 난잡하게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고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본인으로서는 한 번에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이는 제 개인의 학식이 부족한 탓이니 누굴 원망할 문제는 아니겠지요.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보충 설명이 있다고는 해도 중국사를 전혀 모르는 이들에겐 다소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방대한 역사를 한 권에 담아내려다보니, 그리고 연표 형식으로 정리하다보니 구체적인 설명은 많이 부족합니다. 위에도 언급한 것과 같이 너무나도 난잡한 대륙의 양상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운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으로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들은 이 책보다는 시중에 나온 가벼운 교양서적을 한 번 읽고난 뒤에 이 책 읽기에 도전하는 것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분명 복습도 되면서 중국사에 대한 이해의 차원이 훨씬 넓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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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읽고 있던 <김영삼 회고록> 2권 정독을 완료했다.


올해 초부터 읽은 책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었더랬다. 마침 읽고 있던 <김영삼 회고록>이 거의 종반부에 이른 상태라 좀만 스피디하게 읽으면 리스트에 한 권이라도 더 올릴 수 있겠다 싶어 조금 급하게 읽었다. 사실 내일 읽어도 상관 없는 건데, 그냥 나의 결벽증적인 증상 때문이랄까.


덕분에 63권으로 마무리될 뻔 했던, 올해 읽은 책 리스트는 64권으로 결산됐다. 당초 100권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고작 반 조금 넘은 수치다. 어디 갈 때면 항상 옆구리에 책 한 권 끼고서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도 100권 채우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런 거 보면 속독하는 양반들 참 대단하고 부럽다.


물론 많이 읽는 게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느리게 읽더라도 깊이 있게 읽을 수만 있다면 그게 더 낫지 싶다. 하지만 워낙 책 욕심이 많은 성격인지라, 책장에 쌓여만 가는 책들을 보면 서둘러 읽고 빨리 빨리 다른 책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래서 나는 속독을 지향하는 완독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아래는 올해 읽은 책을 정리한 것.


1. 거짓말이다

2. 최순실과 예산 도둑들 (2017.1.8)

3. 남과 북의 오작교가 되어 (2017.1.12)

4. 서평 쓰는 법 (2017.1.15)

5. 박근혜의 권력 중독 (2017.1.19)

6. 커피가 죄가 되지 않는 101가지 이유 (2017.1.31)

7. 대통령님, 촬영하겠습니다 (2017.2.3)

8. 흐린 세상 맑은 말 (2017.2.6)

9. 정본소설 사임당 (2017.2.13)

10. 대한민국이 묻는다 (2017.2.20)

11. 밤이 선생이다 (2017.2.26)

12. 서른, 정치를 공부할 시간 (2017.3.6)

13. 이재명은 합니다 (2017.3.11)

14. 대통령 노무현은 왜 실패했는가 (2017.3.19)

15. 라면을 끓이며 (2017.3.24)

16. 채식주의자 (2017.3.26)

17. 대통령 선택의 심리학 (2017.4.2)

18. 독립정신 (2017.4.6)

19. 82년생 김지영 (2017.4.12)

20.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 (2017.4.17)

21. 전두환 회고록 1 (2017.4.30)

22. 페미니스트 모먼트 (2017.5.4)

23. 이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2017.5.10)

24. 보이차를 알면 건강이 보인다 (2017.5.10)

25. 위스키의 지구사 (2017.5.17)

26. 결혼불능세대 (2017.5.19)

27. 북한의 역사 1 (2017.5.21)

28. 대통령 없이 일하기 (2017.5.28)

29. 무예 인문학 (2017.6.1)

30. 쿨 레이디 (2017.6.2)

31. 북한의 역사 2 (2017.6.8)

32.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2017.6.14)

33.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2017.6.18)

34. 왕따의 정치학 (2017.6.24)

35.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2017.7.4)

36.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2017.7.11)

37.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2017.7.17)

38. 공터에서 (2017.7.20)

39. 너답게 살아갈 너에게 (2017.7.24)

40. 시골무사 이성계 (2017.7.28)

41. 지적 생활의 즐거움 (2017.8.3)

42. 덩케르크 (2017.8.15)

43. 서간도에 들꽃 피다 7 (2017.8.22)

44. 허형식 장군 (2017.8.30)

45. 정조와 정조 이후 (2017.9.13)

46. 프로불편러 일기 (2017.9.18)

47. 주진우의 이명박 추적기 (2017.9.22)

48. 조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2017.9.23)

49. 상도동 그소설 (2017.9.26)

50. 송곳 1 (2017.10.2)

51. 송곳 2 (2017.10.3)

52. 송곳 3 (2017.10.3)

53. 문재인노믹스 (2017.10.5)

54. 아리랑 (2017.10.13)

55. 다행히 졸업 (2017.10.31)

56. 오래된 생각 (2017.11.2)

57. 문제는 검찰이다 (2017.11.5)

58.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들 (2017.11.8)

59.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017.11.30)

60. 굿바이 MB (2017.12.3)

61. 특종 1987 (2017.12.7)

62. 김영삼 회고록 1 (2017.12.17)

63. 조선과 중화 (2017.12.30)

64. 김영삼 회고록 2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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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비>에 이어 올해 기대작 중 하나였던 <1987>을 어제 조조로 보고 왔습니다.


<1987>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죽음에 이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하 박종철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면서 고문 사실에 대해 은폐와 조작을 시도하지만 양심 있는 이들에 의해 그 진실이 폭로되면서 한국 사회를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됩니다. 


영화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사건의 진실을 감추려는 이들에 맞서 그 진실을 파헤치고 알리려는 양심 세력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인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화장을 시도하는 경찰을 제지하는 최 검사(하정우), 박종철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는 윤 기자(이희준), 부검 결과에 대한 조작을 거부하는 국과수 황 박사 등이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던 것은, 놀라우리만치 고증에 충실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 박종철 사건을 최초 보도한 신성호 전 중앙일보 기자의 <특종 1987>이라는 책을 한 번 읽고 갔더랬는데, 책에서 본 사건의 전개과정이 스크린에서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더군요. 극중 연희(김태리)라는 인물 빼고는 전부 실존 인물이라고 하는데, 각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실명과 신분이 자막으로 뜨고 있어 다큐멘터리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1987>에는 박 처장(김윤석)을 제외하고는 단독 주연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따로 없습니다. 하정우, 유해진, 설경구, 강동원, 김의성, 여진구, 박희순, 이희준, 오달수 등등 정말 많은 주·조연급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전부 비슷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6월 항쟁을 이끌어낸 것은 몇몇 '영웅'이 아니라 각자 자기 위치에서 양심을 지키고자 한 평범한 소시민들이 다함께 거둬낸 결실임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감독의 의도 자체는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가 분산되어 약간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특히 김태리와 강동원의 로맨스는 굳이 넣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아쉽습니다.


<신과함께>를 봤을 때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습니다만, 가슴이 매우 먹먹해지는 영화였습니다. 백골단이 길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하는 장면이나, 경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장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각종 고문을 당하는 장면, 대학생들이 최루탄을 맞아가며 싸우는 장면, 서울시청 앞 광장이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찬 장면들을 보면서 몇 번이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던 것 같습니다. 


1987년이면 제가 태어나지도 않은 해입니다. 그래서인지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정말 저랬단 말이야?' 하고 믿기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현대사 수업 도중의 일이었습니다. 전두환 정부에 대한 설명을 하시다말고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가는데 여기저기서 총 소리가 나더라. 그런데 그게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쿠데타였다"면서 "그게 불과 3~40년 전 이야기라 나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새삼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저분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겪지 못했던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생각에 묘한 이질감이 들었더랬지요.


그리고 '저 당시에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과연 앞에 나서서 최루탄 가스 마셔가며 열심히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 단순한 가정일 뿐임에도 쉽게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만큼 두렵고 험난한 길이기 때문이지요. 30년 전,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위해 싸운 순국선열들에 대해 더욱 감사함을 느끼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편안한 삶을 구걸하는 대신 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어간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제가 누리는 자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그렇거니와 영화 <1987>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 선열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오늘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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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철비


Daum 웹툰 '스틸레인'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영화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이 두 번째로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북한 군부의 쿠데타로 최고지도자의 유고(有故) 사태가 발생한다는 시놉시스 아래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개인적으로 개봉 전부터 무척 기대가 컸던 작품이었던지라 개봉 당일 조조로 보고 왔습니다. 영화 내내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눈에 자주 띄는군요. 북한이 드론을 이용해 청와대를 공격하는 것도 웃겼고, 북파공작원 몇 명이 계엄령이 떨어진 수도 서울을 들락날락하면서 국군 부대를 가지고 노는 것도 황당했습니다. (사실 제 친구는 '우리나라 군대라면 충분히 뚫리고도 남을 거다'라며 역설적으로 너무 현실적인 반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만...)


다소 뻔하고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그럼에도 한반도 현실에 빗대어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들인지라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북한 군부의 쿠데타와 남한에 대한 핵미사일 발사 위협,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철수하는 미국, 일본, 중국까지...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못내 우울함과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북한의 잦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북한의 위협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북한의 존재를 가벼이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턱대고 책임 지지도 않을 전쟁을 부르짖는 것도 무책임하고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잠시 빌린 땅일 뿐이며,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평화롭게 물려줄 의무가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딜레마를 푸는 해법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분단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평화라는 화두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2. 신과함께 - 죄와 벌


이 작품 역시 동명의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원작을 너무 재미있게 봤던 터라 영화화 소식이 들렸을 때 기대 반 걱정 반이었습니다. 공개된 예고편만 봐도 영 아니다 싶었습니다. 원작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캐릭터(진기한 변호사)는 아예 빠져버렸고, CG 등만 보면 그냥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봉 전부터 원작 팬들 사이에서 원성이 높았는데, 막상 개봉하고나니 연일 호평이 쏟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제 친구도 "영화 보다 울었다"면서 "꼭 보라"고 강추를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조조로 보고 왔습니다.


확실히 원작과는 다른 전개로 이어집니다. 애시당초 원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감독이 아예 원작과 다른 노선을 채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험 부담이 큰 도전이었을텐데, 나름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내용은 아이를 구하다 죽은 소방관(차태현)이 저승차사들과 함께 49일 간 7번의 재판을 받으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7개의 지옥마다 심판하는 테마(거짓, 천륜, 폭력, 불의, 배신, 살인, 나태)가 있고 각각을 관장하는 대왕들이 등장합니다. 검사 역할을 맡은 판관들로 오달수와 임원희가 등장하는데 시종일관 진지한 상황에서 둘이 깐족거리는 게 눈에 거슬렸습니다. 나름 영화를 스무스하게 끌어보려는 감독의 설정이었을텐데, 저는 별로였습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저승(신)도 이승(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부각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망자가 무죄선고를 받아야 자신들도 환생할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변호하는 차사들이나, 반대로 망자가 유죄를 선고받아야 보너스를 받는 탓에 아무리 정의로운 망자여도 어떻게든 죄를 부풀려보려는 판관들을 보면 오늘날 인간사회의 재판제도를 에둘러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아니라면 손수건 한 장씩 준비하고 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보고 나온 사람들이 펑펑 울었다길래, '나는 절대 울지 않겠다'며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들어갔습니다만... 아주 두 눈이 벌개지도록 질질 짜면서 나왔습니다. 끝날 때쯤 객석도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하더군요. 감독이 사람 울리는 데 아주 재능이 탁월한 듯 합니다. (왜 그렇게 다들 우는 지는 직접 확인해보시길...)


극중에서 염라대왕(이정재)이 남긴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하지 않은 일을 죽어서 하겠다고 한다" 죽어서 후회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잘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어서 지옥 가지 않으려면 정말 착실하게 살아야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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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년 전 일이다. 경북 안동으로 2박 3일 간 고적답사를 갔을 때였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안동에는 도산서원·병산서원 등이 남아있어 유림의 넋이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잠시나마 복잡했던 일상을 잊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발자취에 흠뻑 취해있을 무렵,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덧 조용한 시골마을에 자리 잡은 한 고택 앞에 멈춰섰다. 유려한 기와지붕을 얹은 서원들에 비해 볼품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에서 오랜 세월의 풍상이 느껴졌다.


김재봉의 생가인 '학암고택' 전경(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위치) ⓒ 김경준


안동의 한 고택에서 만난 죄인의 초상화


고택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사랑채에 걸려있는 웬 사내의 흑백 초상화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머리를 삭발한 채 수의를 입고 있어 영락없는 죄인의 형색이었다. 그럼에도 죄인답지 않게 표정에는 온화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어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풍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 고택의 주인이었던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이었다.



학암고택에 걸려있는 김재봉의 초상화와 안내문 ⓒ 김경준


김재봉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산파 역할을 맡아 국내에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의 초대 책임비서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김재봉이란 이름은 내게 너무도 낯선 이름이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다면서도 그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내내 민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찌 내 학문이 얕은 탓만 있겠는가. 그의 이름을 꽁꽁 감춘 채 역사의 뒤편에 밀어낸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현실 탓도 있을 게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내가 배운 독립운동사란 우익 민족주의 계열로 편향된 '반쪽짜리 역사'였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내가 본 교과서에서는 나름대로 좌·우 균형을 맞춘답시고 좌익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었지만, 그 비중은 절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김재봉이니 권오설이니 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애시당초 접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별'들에 대한 장편 서사


최근 출간된 <조선공산당 평전>을 펼치자마자 유독 반가웠던 까닭도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김재봉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이 책은 김재봉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흔히 평전이라고 하면 역사 속 인물 한 사람의 일생에 초점을 맞춰 고찰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책은 특정 인물이 아닌 '조선공산당'이라는 정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 최백순은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으며, 노동자,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이기에 사람이 아닌 '조선공산당'에 '평전'이란 말을 붙였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조선공산당 평전> 표지 ⓒ 서해문집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책에는 김재봉을 비롯해 이동휘, 권오설, 조봉암, 박헌영, 김사국, 김약수, 김알렉산드라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모두 한반도와 러시아,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있고,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이름도 있다.


저자는 이 한 권의 평전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그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하는 까닭을 강조한다.


"(조선공산당은) 참으로 오랫동안 금기시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라면 좌우를 떠나 누구나 조선공산당이 항일독립운동의 큰 흐름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인정이 결코 대중의 상식이 되어선 안 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3·1운동의 야심 찬 반복시도였던(하지만 기획자가 조선공산당이었던) 6·10 만세운동은 이름 정도만 알려지는 게 바람직했고, 해방 직전까지 국내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이들이 공산주의자임은 더더욱 널리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p.4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를 찾아


책의 시간적 배경은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제의 침략과 수탈을 피해 러시아 땅에 모인 한인들은 춥고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하나의 군락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자치조직을 만들고 신문을 발행하며 자연스럽게 러시아 사회의 일원으로 흡수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봉건왕조가 무너지자 러시아 한인사회 구성원들 역시 자연스레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접하게 된다. 혁명으로 봉건왕조를 몰아내고 세워진 볼셰비키 정권의 사회주의 이론은 새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분투하고 있던 조선의 망명정객들에게도 솔깃한 이론이었다. 자연스레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그렇게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의 길은 쉽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좌·우익의 극심한 대결이 이어졌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한인사회당 출신 이동휘도 있었다. 대통령(이승만)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열이 장악한 임시정부에서 그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갈등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김립 암살 사건'이다. 당시 코민테른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동휘의 측근인 김립이 모스크바로 건너가 이를 수령해오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을 빚게 된 사건이다.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백범 김구는 이를 '임시정부 공금 횡령' 사건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 대낮의 골목길에서 김립을 암살했다. 그러나 저자는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를 토대로 자금의 소유권자가 한인사회당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공금 횡령범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김립은 여전히 신원되지 못한 채 우리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실정이다.


비단 좌·우익의 갈등만 존재했던 게 아니었다. 같은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도 이념과 방법의 차이로 인해 격렬한 대립과 분열이 반복됐다. 당시 코민테른은 한 나라에 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1국 1당'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서로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사회주의 정당 및 단체들의 대립이 나날이 격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감시 피해 요릿집에서 만들어진 조선공산당


이들의 갈등을 지켜보다보면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념과 방법이 달랐을 뿐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에서만큼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갈등은 독립을 쟁취하고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그들의 투쟁은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당으로 결실을 맺는다.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아서원. 평범한 점심 약속을 가장한 이날의 모임은 바로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자리였다. 최재형이 첫발을 내딛었던 극동의 낯선 땅 지신허,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그 먼 길을 돌아 독립과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경성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국요릿집이었다."- p.257


김재봉 등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요릿집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후, 서둘러 코민테른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코민테른 간부회는 '9월 결정서'를 의결함으로써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다. 1918년 한인사회당 결성 이후 모두가 꿈꿔온 사회주의자들의 목표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조선공산당은 와해와 재결성을 반복하면서 부침을 겪지만,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는 투쟁의 길을 걸었다.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중국요릿집 '아서원' ⓒ 동아일보


금기의 역사는 현재진행형… 우리가 먼저 불러줘야


저자는 이들의 역사를 '남과 북이 모두 외면한 금기의 역사'라고 말한다. 해방 후 남과 북의 이념 대결 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존재는 뿌리채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해온 남한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 역시 최고권력자인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존재가 모두 지워졌다. 김재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만든 박헌영이 대표적이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미제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숙청당했다.


시간이 흘러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재봉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공적을 인정받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사회주의 전력으로 인해 발목이 묶여 있는 상황이다. 그들의 서훈 문제를 둘러싸고 지금도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역사는 여전히 금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알려지지 않은 별'들은 우리가 손을 내밀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먼저 그들의 이름을 알고 불러줄 때, 그들도 비로소 금기의 영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교과서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비중 있게 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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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v.youku.com/v_show/id_XMzE0ODM1ODg1Ng==.html?spm=a2hww.20027244.m_250379.5~5~1~3~A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그룹인 알리바바의 회장 마윈이 직접 출연했다하여 화제가 된 영화 <공수도> 영상입니다. 


광군제를 맞이해서 오늘 온라인에 무료공개됐습니다. 22분 44초짜리 단편 영화네요.


마윈이 태극권 고수로 등장해서 토니자, 오경, 견자단, 이연걸 등과 차례로 겨룹니다. 특히 견자단은 아예 엽문 컨셉으로 등장해서 영춘권으로 겨룹니다. 이연걸은 오랜만에 태극권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아무튼 중국어를 잘 모르는 관계로 영어자막을 보면서 봤는데 그래도 내용이 이해가 잘 안 가네요.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저는 솔직히 좀 별로인 것 같습니다. 


중국 쪽에서도 그닥 반응이 신통치 않다고 합니다. 마윈 말에 따르면 태극권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었고, 배우들도 그런 취지에 동의해 노개런티로 참여했다고 하지만 영화만 놓고 보면 그냥 마윈 자신의 태극권 실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중국 쪽 네티즌들도 "돈만 있으면 최강의 권법을 쓸 수 있는 거냐" 등의 비아냥이 쏟아진다고 하네요.


아무튼 영상 퍼오기가 안되서, 링크를 걸었습니다. 링크 타고 들어가시면 로그인 없이 무료로 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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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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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처음 읽었던 때 말이다. 꽤나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젠 책 속의 구절들도 가물가물하지만 소설을 읽던 당시의 감정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


답답함, 굴욕감, 분노. 차라리 이 모든 내용이 픽션이었으면 하는 헛된 바람을 품었을 정도로, 무기력하고 굴욕적인 우리네 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된 병자호란은 조선의 역사, 아니 5천 년 민족사를 통틀어 가장 굴욕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한때 '야만족'이라 깔보던 여진족들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조선 임금의 무릎을 꿇린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렇다 할 전투조차 치러보지 못한 채 너무도 빠르고 무기력하게 항복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비감에 젖게 만든다.


원작 소설의 충실한 반영


처음 영화 <남한산성> 제작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대중들은 기대보다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박희순 등 내로라하는 명품배우들을 총출동시켰다지만 적을 물리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나 극적인 반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패배와 굴종의 역사에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던 걸까. 지난 3일 개봉한 <남한산성>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매우 뜨거웠다. 개봉 직후 <킹스맨: 골든 서클>을 제치고 예매율 1위를 달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반응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비록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장면들은 없었지만 병자호란의 비극적인 역사를 스크린에 제대로 구현해냈다는 평들이 쏟아졌다. 특히 동명의 원작 소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평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영화 <남한산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얘기일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영화는 김훈 소설이 갖는 특유의 '비장미'와 '절제미'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구체성 없이 모호하면서도 은유적인 김훈만의 문장이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의 성격으로 고스란히 구현된 것이다. 


최명길과 김상헌, 과연 누가 옳을까


영화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청나라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분)과 적극적인 항전을 부르짖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 분)의 대립 구도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줄기다.


최명길은 적진과 남한산성을 끊임없이 오가며 나라와 백성이 모두 '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찾은 답은 화친이다. 조선군의 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무모한 항전이 오히려 '말(言)의 길'을 끊어 더 큰 피를 부르게 될까 고민하고 두려워한다. 


반면 대의명분으로 무장한 김상헌은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하는 전형적인 선비다. 싸워보지도 않은 채 적에게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함부로 맡길 수 없다며 "차라리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라"고 부르짖는다.


영화는 최명길과 김상헌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논리적 정당성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고 있을 뿐이다. 


관객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나라와 백성부터 살리고 보는 것이 먼저 아니겠냐는 최명길의 주장도, 적에게 구걸하여 얻어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김상헌의 주장도 제각각 일리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동혁 감독 역시 인터뷰에서 "(남한산성은)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며 관객들 스스로 판단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위정자들의 책임 회피에 대한 통렬한 비판


다만 영화는 또 다른 대립 구도를 설정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로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자들과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의 대립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방법은 달랐어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운 충신들이다. (사사건건 서로 반대만 할 것 같은 그 둘도 영화 속에서 때때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 둘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무겁게 여겼으며, 그 책임감에서 자신만의 신념이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각자가 목숨 걸고 화친과 항전을 부르짖은 것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반면 영의정 김류(송영창 분)를 비롯한 대다수 중신들은 상황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를 반복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데만 급급하다.


최고결정권자인 임금 인조(박해일 분) 역시 다르지 않다. 인조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신료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고 도망치려고만 한다. "나는 살고자 한다"는 그의 한 마디에 나라와 백성보다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라는 그의 무책임한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영화는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보다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선 자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더욱 강하게 비판한다. 그들의 '찌질함'을 더 노골적으로 비꼬기 위해, 영화는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대화 장면을 마치 만담처럼 우스꽝스럽고 과장되게 연출하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이 여의도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영화가 보내는 메시지가 뜨끔하게 다가오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정치적 현실이 겹쳐 보이는 탓이다. 여의도의 그 많은 정치인들 중에 자신의 가슴에 달린 '금배지'의 무게를 무겁게 여기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헌정 사상 초유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부결 사태 앞에서도 상황의 엄중함과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가 결정권을 가졌다"며 득의만만하던 한 야당 대표의 말만 봐도 병자호란 당시의 위정자들과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다. 사드·북핵 등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외교·안보적 현안 앞에서 미·중 강대국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백성들이 그랬듯 이제 우리들도 위정자들의 현명한 '선택'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선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지 않는다. 다만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으로부터 회피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책임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이다. 이제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길을 걸을 것인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길을 걸을 것인지 말이다.


[일러두기]


* 해당 글은 <오마이스타> 기사로도 보도됐습니다

* 첨부한 스틸컷의 저작권은 영화 <남한산성> 배급사인 CJ 엔터테인먼트에 있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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