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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20 옛 중대장님과 만난 자리에서 털어놓은 고민 1

어제는 오랜만에 현충원엘 다녀왔더랬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부대에 들러 간부님들께 안부 인사도 드리고, 부대에 잔류하고 있는 후임들하고 얘기도 하고... 뭐 전역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서포터즈다 뭐다해서 자주 들렀더니 이젠 그닥 반가워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어제는, 군 복무 당시 직속상관으로 모셨던 前 중대장님을 만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최전방인 경기도 연천에서 수색중대장으로 복무하고 계시는데, 얼마 전 소령 진급이 확정나면서 단으로 진급 인사차 오셨다고 하는군요. 안그래도 몇 달 전부터 따로 만날 약속을 잡고 있었는데, 중대장님이 먼저 서울 내려오는 김에 한 번 보자고 하셔서, 현충원에서 만나게 된 겁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롤모델이나 멘토가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CEO 혹은 정치인처럼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인사들을 롤모델로 삼죠. 저같은 경우는 현실 속에 그런 롤모델이 없다고 판단해서, 일찌감치 역사 속 위인들을 제 롤모델로 삼아왔더랬습니다. 


그런데 그런 롤모델들의 경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인물인지라,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제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 인생의 큰 줄기(삶의 가치관)를 형성하는 데는 그들의 영향이 컸지만, 소소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는 답을 얻기가 힘들었죠. 이미 죽은 이들은 말이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 제가 현실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롤모델로 삼을 만한 분을 만났습니다. 바로 어제 만난 옛 중대장님입니다. 저는 이분에게 개인적으로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군 생활이 마냥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제가 일병 4호봉 때였던가요. 후임에게 폭언 및 욕설로 영창을 다녀온(그것도 만창 15일) 선임 한 명이 저희 팀(분대)으로 배속되는 바람에 제 맞선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그래도 일병이 꺾이도록 후임이 들어오지 않아, 계속되는 막내 생활에 스트레스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선임이 늘어난 겁니다. 더욱이 사고 치고 온 선임이라니... 그때의 절망적인 심정이란... 오죽하면 제가 담당 간부한테 "후임들에게 욕하고 때리는 선임을 선임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라고까지 하면서 항명했으니까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군대란 까라면 까야하는 곳이죠. 사고치고 온 직후라, 본인 스스로도 조심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긴 했지만, 본성이 어딜 가겠습니까. 처음엔 좀 자제하더니, 가끔씩 욱하는 기질이 드러나더군요. 뭐 때리지 않았으니 그나마 개과천선했다고 봐야할까요? 그래도 욕설은 정말 많이 했죠. 특히 제 후임이 들어오면서부터 많이 심해졌습니다. 제 후임한테 뭐라고 할 때마다, 중간에 낀 제가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원래 맞후임 잘못은 맞선임이 욕 먹는게 군대 구조라...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더욱이 성추행과 같은 짓궂은 행동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제 맞후임은 나중에 저한테만 고백했는데, 이걸 상당히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밤에 남몰래 침낭 속에 들어가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하는군요. 그때 정말 선임으로서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여하간 이 당시 이야기를 글로 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중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죠. 어쨌거나 중간 과정 다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바로 옛 중대장님께서 이 선임의 부조리 행위를 적발해서 처벌해주셨던 겁니다. 최초 고발자였던 저조차도 '이걸 찌른다고 과연 해결이 될까'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지만, 중대장님은 "넌 임마, 나중에 장관도 하고 대통령도 하고 싶다는 놈이 이런 걸로 겁을 먹어?"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격려해주시더군요.


사실 군대에서 이런 사건/사고가 터지는 건, 간부들에게 그닥 반가운 소식이 아닙니다. 진급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그래서 군대에서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감추고 쉬쉬한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중대장님은 '부조리는 발본색원해야 한다'면서 일찌감치 병영 부조리 혁파에 앞장 서오신 분이었습니다. 저 맞선임을 최초로 영창 보낸 분도 바로 중대장님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쉬쉬하고 내부적으로 징계위원회 열어서 영창 보내고 끝냈을 법도 한데, 중대장님은 오히려 판을 키워서 국방부 조사본부까지 연락했더랬습니다. 덕분에 헌병 수사관들이 출동해서 저희들도 '마라톤 조사' 받고, 그 맞선임도 끝내 야전으로 전출을 가버렸죠. (후일담이지만 중대장님이 판을 키운 덕분에, 그 맞선임은 전역 후 민간 재판으로 넘어갔습니다. 빨간 줄 그어지게 생겼다며 저희에게 제발 합의해달라고 사정했을 정도로, 사안이 커졌더랬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주도한 게 바로 중대장님이었습니다.


개인적은 은혜도 은혜였지만, 이렇듯 중대장님은 병영부조리 혁파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마음의 편지'(예전으로 치면 소원수리) 제도를 활성화시킨 분도 이분이었는데, 부임 직후에 마편함을 화장실 칸마다 추가 개설해서 수시로 확인하시더군요. 덕분에 병사들도 끊임없이 마음의 편지를 썼고, 중대장님은 하나 하나 다 읽어보시고 최대한 저희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들어주려 노력하셨습니다. 심지어 중대장님에 대한 비판도 나왔는데, 그 편지 내용까지 공개적으로 읽으면서 "미안하다"며 전 병력이 보는 앞에서 쿨하게 사과까지 하셨죠.


이런 분이었으니, 어찌 존경심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개인적인 롤모델로 삼았던 것이고, 이분의 모습에 반해서 잠시 접어두었던 장교의 꿈을 다시 한 번 품어보기도 했었더랬습니다. 이분 같은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말뚝을 고민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사회가 낫다"며 주위에서 뜯어말리는 통에 결국 예비역 병장으로 전역하고 말았습니다. 말뚝 박을 용기가 없기도 했고요.


전역한 지 3개월째... 저는 지금 군문 안에서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실컷 누리는 중입니다. 군대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았기에, 지금도 하루 하루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죠. 전역 전에 작성했던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서, 해금이며 커피며, 무예며 이것 저것 새로 배우기 시작하고... 글도 쓰고 사람도 만나면서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중국어 학원도 등록할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이 공허할 때가 많습니다. 사회란 곳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사회가 좋긴 좋지만, 가끔은 서울 도심의 꽉 막힌 도로와 사람들로 붐벼 숨쉴 틈조차 없는 지옥철에 몸과 마음이 지치곤 합니다. 전역 후 백수 신세라 늘 비어있는 통장 잔고도 한숨을 불러일으키고 있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나중에 뭐 해서 먹고 살아야하나 막막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자꾸 '군대'가 생각납니다. 일종의 도피성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어릴 적부터 직업군인이 꿈이기도 했고, 전역 직전까지 말뚝을 고민했던 터라 평생 직업으로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제 오랜만에 중대장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여전히 군복만 보면 설레고, 내가 입고 있어야 할 옷은 군복인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까, 중대장님 역시 "너는 장교를 하는 게 맞다"면서 "남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아직 젊으니까 한 번 도전해봐"라고 조언해주시더군요.


제 군 생활 중 롤모델이었던 중대장님으로부터 적극적인 권유를 받으니, 마음이 다시 흔들립니다. 남자에게 가장 큰 악몽은 '재입대하는 꿈'이라고들 하는데, 이러다가 저는 정말 꿈이 아닌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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