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신이 없어서 이제서야 포스팅을 합니다만, 제가 얼마 전에 <오마이뉴스>에서 작은 상을 하나 탔습니다. '2월 22일상'이라고 하는데, 이날은 <오마이뉴스>의 창간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올해 2월 22일은 창간 17주년이 되는 날이었고요, 그날을 기념해서 제정된 상이라고 합니다.


수상 소식을 안 건 작년 말이었습니다. 편집부로부터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제 수상 소식을 전달해주더군요. 무척 기뻤지만 한 편으로 의아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오픈플랫폼이라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시민기자들이 기사를 써서 보내는데, 저처럼 길가다 채이는 돌부리마냥 흔해빠진 놈이 상을 받는다니. 부끄러웠지요.


시상식은 상암 누리꿈스퀘어 18층에 위치한 <오마이뉴스> 본사에서 열렸습니다. 늘 안방에서 기사만 썼지 상근기자들이 일하는 사무실은 또 처음 보는데 굉징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신없이 PC 앞에 매달려 기사쓰기에 몰두하는 기자들의 모습을 보니 그 열정적인 모습이 대단히 존경스럽고, 또 부럽기도 했습니다. 저도 얼른 졸업하고 취직해서 저렇게 바쁘게 살아야할텐데요.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생각보다 긴장이 되네요. 시상은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께서 해주셨습니다. 떨려서 수상소감을 제대로 발표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발언기회가 주어지니 무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납니다만, 살짝 과장을 보태서 아래와 같이 수상소감을 말했습니다.


"군대 있을 때 <국방일보>와 같은 어용언론에 글을 쓰다가 전역하고 <오마이뉴스>에서 자유롭게 내 얘기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솔직히 <오마이뉴스> 활동은 내게 스트레스였다. 지금도 그렇다. 언제나 그렇듯 글을 쓴다는 건 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쓴 기사들을 보며 민망함에 밤에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더욱이 다른 기자들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저 사람들은 밥 먹고 글만 쓰나' 싶을 정도로 좋은 글을 써내는 기자들을 보며 질투심도 느끼고 '나는 왜 저렇게 못 쓸까' 자괴감도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복학하는데 언론정보학과 과목을 하나 수강하기로 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도 기자이니만큼 취재요령과 윤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보다 퀄리티 있는 글을 뽑아내도록 노력하겠다. 이 상 역시 부족하지만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고 받겠다"



상을 받는 다른 기자님들의 면면도 정말 다채롭더군요. 늘 기사로만 접하던 전설적인 분들을 실제로 뵈니 신기했습니다. 정말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글을 쓰시는 분들이라, 그 내공이 대단했습니다. 특히 연세가 지긋하신 박도 기자님께선 인상 깊은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릴 적, 신문배달을 할 때 지나가는 개가 발목을 물길래 발로 걷어차면서 '야 이놈아, 내가 나중에 신문사 사장이 될 사람이야!'라고 했는데, 살다보니 기자라는 꿈과는 멀어졌다. 그런데 늘그막에 이렇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어 글도 쓰고 상도 받게 되니 드디어 꿈을 이룬 것 같다"


연륜이 묻어나오면서도 아직 식지 않은 청춘의 꿈을 불사르는 원로 시민기자님의 수상소감은 그야말로 가슴 절절하게 만드는 말이었습니다. 박도 기자님을 보면서 저도 멋진 글과 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는 그런 글쟁이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트로피와 부상으로 상금 50만원을 받았는데요, 역시 저는 가난한 대학생인지라 역시 상금 50만원에 입이 떡 벌어지는군요. <오마이뉴스>에게 너무 고마울 따름입니다. 역시 차값, 술값, 책값으로 대부분 쓰이겠지요... ^^;


시상식이 끝난 뒤에는 1박 2일로 강화도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강화도 워크숍은 지면 관계로 추가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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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링크: http://omn.kr/m1ap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 및 서평은 링크를 참조)


이번에 출간된 <동경삼재>를 읽었다. 동경삼재(東京三才)는 일본 동경(도쿄)으로 유학 간 조선인 유학생들 중 세 명의 인재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바로 당대 문필가로 이름을 날렸던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를 뜻한다.


3.1운동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독립을 부르짖었던 최남선과 이광수는 1920년대 이후 친일의 길을 걸었고, 1940년대에는 동포 청년들에게 전선으로 나가 천황을 위해 죽을 것을 독려했다. 지조를 지킨 이는 홍명희 한 사람 뿐이었다.


해방 후 홍명희는 월북하고, 최남선과 이광수는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왔다. 기회를 놓칠세라 그 둘은 스스로의 반민족행위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제 몸을 팔아서 아버지의 고난을 면케 하려는 심청의 심경밖에 있을 것이 없었다. 다른 친일파는 어떠한지 몰라도 내가 하려는 친일은 돈이나 권세나 명예가 생기는 노릇은 아니었다. (…중략…) 민족을 위해서 산다고 자처하던 나로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 이광수, <나의 고백>


"내가 친일파인가 아닌가는 나의 저서가 굉장히 잘 팔리는 것으로 보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 최남선


해방 후 이들이 내뱉은 정교한 변명을 보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들이 한때마나 민족지도자랍시고 독립만세운동을 독려하고 청년들에게 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단 말이던가. 뻔뻔하기까지 한 저들의 행태를 보며 오늘날 양심을 잃고 표류하는 지식인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가 오늘날 지식인들의 변절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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