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안식처로의 인도자들, 영현병을 만나다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2)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짧았던 장마도 지나고, 7월 초복(初伏)이 지나 이제는 완연한 여름 날씨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폭염에 몸도 마음도 지치기 쉬운데요, 이럴 때일수록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건강관리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릴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국유단에 소속된 조금 특별한 병사들의 특별한 임무수행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년 365일 현충원에 상주하면서, 그들만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다


착, 착, 착... 한 눈에 봐도 경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발을 맞추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엄숙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데요, 지켜보는 이들도 절로 숙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정체는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영현소대’ 병사들이었습니다. 영현소대 병사들은 호국영령의 유골함을 높이 받은 채, 그들이 마지막 안식을 취할 충혼당(납골당)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영현병들의 경건하고 엄숙한 인도에 따라, 호국영령들 역시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지난 3월에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에서 중국군 유해를 인도하는 영현병들)


​오늘은 바로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들, 국유단 영현병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영현소대와 영현병


​국유단 본부중대에는 발굴병들이 소속된 ‘발굴소대’, 감식병들이 소속된 ‘감식소대’와 더불어 영현소대라는 독립소대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소대에 소속된 병사들이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요, 이들을 일컬어 ‘영현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현(英顯)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표현’으로서, 호국영령을 의미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영현병은 대체 어떤 보직이며, 이들이 소속된 영현소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먼저 그 유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현소대의 탄생과 역사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현병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부산에서 ‘묘지등록중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영현소대는 1952년 9월 ‘81영현중대’로 부대 명칭을 개정한 뒤, 1986년 10월 5군수지원사령부, 53군지단을 거쳐 2006년 8월 국방부 근무지원단 의장대대에 예속되었습니다.


하지만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반영구적 국가사업으로 활성화되고, 그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면서, 국유단 휘하 소대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그 편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2009년 6월에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던 ‘영현 및 의장중대’가 해체됨에 따라, 국유단 영현소대가 영현행사를 담당하는 전군 유일의 특수소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2010년에는 병참병과의 특기로 사무처리를 의미하던 영현등록병(2112)에서 행사지원의 영현행사병(1111)으로 직책 명칭 및 특기가 변경되면서, 영현병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로써 국유단 영현소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유일의 영현 전담 특수소대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쯤 되면 영현병들이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만하죠?



(사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영현소대)


영현병들은 어떤 임무를 수행할까


그렇다면 영현병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될까요?


영현병들은 6·25 전사자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한 국가유공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충원에서는 매일 두 차례씩 국가유공자의 안장식이 거행되는데요, 영현병들은 바로 이 행사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안장행사는 평일/주말 구분 없이 매일 열리기 때문에, 영현병들 역시 주말의 달콤한 개인정비(휴식) 시간을 반납하고 행사 지원을 나가는 게 일상이라고 합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행사 지원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자신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숭고한 가치를 알기에 자부심 역시 남다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년 연말마다 국무총리 주관으로 열리는 ‘6·25 전사자 합동봉안식’ 및 사단/군단 단위의 영결식·합동봉안식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북한에서 미군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인도받거나, 국유단이 발굴한 미군 유해를 미국 정부에 인도하는 행사가 개최될 때면, 우리 영현병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진: 2015년 12월에 열린 ‘6·25 전사자 합동봉안식’에서 영현병들이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사진: 지난 4월 28일 열린 ‘한·미 전사자 유해 상호 봉환행사’에서 미군으로부터 인도받은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특히 2014년부터는 중국 정부와의 협약으로 ‘중국군 유해 인도 행사’가 매년 한 차례씩 개최되면서, 국유단에서 발굴한 중공군 유해를 중국 정부에 인도하는 행사에서 영현병들의 임무수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진: 지난 3월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에서 우리 영현병이 중국군 의장대 병사에게 유해를 인도하고 있다)


저 역시 전역하기 전에 이 행사를 참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요, 중국군 의장대 병사들 앞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보무도 당당했던 우리 대한민국 영현병들의 늠름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행사를 지켜보는 내내 영현병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생각에, 새삼 영현병들이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주특기 훈련


수행하는 보직 자체가 특수한 임무이기 때문에, 영현병들이 받는 주특기 훈련 역시 독특할 수밖에 없는데요, 영현병들은 훈련소 혹은 신교대에서 5주 간의 신병훈련을 수료한 뒤, 바로 국유단으로 전입을 와 선임들로부터 직접 ‘주특기교육’을 받게 됩니다. 선임들 역시 그동안 수많은 행사를 치르며 축적되어 온 노하우를 신병에게 전수하며, 영현병으로서의 몸가짐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받는 훈련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훈련으로는 ‘발걸음’ 훈련을 들 수 있습니다.


영현병들은 일반적인 걸음보다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중간에 공중에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지면을 내딛는 방식의 걸음걸이를 계속 반복 연습하는데요, 앞 사람과의 거리는 4보로 유지해야하며, 행진을 마치고 도열할 때에는 오른발의 무릎이 지면과 90도를 이루도록 올려준 자세를 2초 간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군 복무를 하며 가까이서 지켜본 영현병들은 쉬는 시간, 일하는 시간 구분 없이 수시로 소관을 들고 발걸음을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역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은 참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진: 영현병들이 발을 맞추는 것은 고인에 대해 최고의 예를 다하기 위함이다)


이런 규칙의 명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1955년 국군묘소가 설립되고 의장행사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미국 의장병들의 행진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하는데요, 유래가 어찌되었든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에 최고의 예를 다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해 영현소대를 이끄는 영현소대장 함성제 상사는 “국유단에 영현소대가 창설된 이래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영현소대만의 고유한 규범과 의전 절차를 확립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영현병들이 받는 훈련으로는 ‘영정과 영현 인수하기’, ‘우천 시 우산 인수와 우산 펴기’, ‘유가족에게 영현 인도’ 등 다양한 의전 훈련이 존재합니다. 영현이 모셔진 유골함을 감싸는 봉송천(소창) 매듭법도 익혀야 하며, 복장 역시 언제나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림질 등을 통해 수시로 정비한다고 합니다.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만큼, 복장과 몸가짐에 있어서 한 치의 실수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 영현병들의 임무 수행은 사전에 철저한 훈련을 반복-숙달한 뒤에 이루어진다)


이처럼 영현병들의 임무 수행은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내려놓았다간 큰 실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영현병들의 임무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열리는 행사지만 한 번 행사를 할 때마다 사전에 철저한 연습을 통해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영현병들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


그렇다면 영현병들이 임무수행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영현병들은 하나같이 “행사가 끝난 뒤, 유가족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를 가장 보람 있는 순간으로 꼽았습니다.


실제로 영현병들이 행사를 집전하는 동안, 유가족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를 지켜보게 되는데요, 최고의 예(禮)를 다해 자신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를 모시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사가 끝난 뒤에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는 유가족들도 있다고 하는데요, 영현병들은 바로 그 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보직을 맡았으면 이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영현병으로 선발되어 온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고도 고백했습니다.


묵묵히 임무수행하는 그들에게 응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국유단에는 발굴, 감식병 외에도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영현병들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정성 어린 인도가 없었다면, 호국영령들 역시 편안한 안식을 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진: 지난 3월에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를 마치고 촬영한 단체사진)


영현병들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의 숭고한 가치를 알기에, 한 마디 불평 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임무 수행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영현병들이 앞으로도 자신의 임무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임무 수행에 임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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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35008265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설악산 상봉/신선봉을 가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1)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연재!


​여러분! 저는 2014년 8월부터 2016년 4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에서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였는데요,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며 겪은 에피소드들을 바탕으로, 이번 6월부터는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라는 주제의 시리즈를 연재하려 합니다. 서포터즈 중 유일한 국유단 출신으로서, 앞으로 여러분께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를 가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좀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중 하나라는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에서의 유해발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그때 그 당시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잊을 수 없는 그곳, 설악산 상봉/신선봉


유해발굴병들은 보직의 특성상,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 유해발굴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러다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요, 제겐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이 그랬습니다.



▲ 설악산 상봉 발굴현장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2014년 7월에 입대하여 아직은 어리바리한 이등병 시절이었던 그해 10월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속한 발굴4팀은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에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는데요, 이곳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는 1951년 5월 당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제6사단 및 제12사단에 맞서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밀고 밀리는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였습니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기에, 이곳에서 산화한 호국영령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끔찍한 악몽으로만 다가왔던 상봉과의 첫 만남


상봉에 오르기 위해,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이나 지났을까요?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저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제가 메고 있던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저 역시 다시 이를 악물고 오르기 시작했는데요,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야만 했습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제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 신선봉의 첫 기억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현장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도착한 정상. 하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도 잠시, 이내 제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곳에 유해가 있단 말이야?’




▲ 상봉에서 유해를 발굴하는 병력들의 모습


정상에 오른 제 눈앞에 펼쳐진 발굴현장의 모습은, 그동안 봐왔던 발굴현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온 사면이 바위로 뒤덮인 산에서 대체 어떻게 발굴을 진행하며, 이곳에 과연 유해가 있긴 한 것일까...


발굴기법 역시 생소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보통 유해발굴은 삽과 호미 등을 이용해,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사면을 깊게 파면서 퇴적층 내 유해의 매장 여부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굴토를 진행하는데요, 상봉은 이런 기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답니다.



▲ 스크린(발굴장비)을 이용해 조각유해를 찾는 필자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에, 모두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식별된 첫 유해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지며, 차츰 전쟁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된 순간!


그 당시의 솔직한 감정은 ‘놀라움’과 ‘당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곳에 유해가 있었다니!”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저처럼 의문을 갖고 있던 발굴병력들 역시 “정말 이 땅에 전쟁이 있긴 있었구나!”하며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습니다.



▲ 상봉에서 식별된 조각유해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러나 식별된 유해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놀랐던 감정은 차츰 안타깝고 숙연한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발굴되는 유해들의 형태가 그 부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 발굴된 유해를 정성껏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보통 많은 사람들은 유해발굴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유해의 형태를 떠올리곤 합니다. 실제 발굴현장에서는 두개골 포함 잔존율이 60% 이상인 유해에 대해서는 ‘완전유해’라 부르고, 그 미만인 유해는 ‘부분유해’라고 명명합니다. 하지만 상봉에서 발굴된 유해는 부분유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게 ‘조각유해’라 불리웠는데요, 정말 심하게 훼손된 유해 중에는 성인 남성의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유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유해를 입관하고, 태극기로 관포하는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왜 유달리 조각난 유해들이 많이 식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양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설악산 상봉에 올라서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는데요, 바로 적의 군함들이 동해바다에서 이곳 상봉에 주둔한 아군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많은 호국영령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산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의 형태를 보면서, 당시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 유난히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유난히 먹먹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설악산 발굴


당시 현장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제 심경은 복잡했습니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에도 힘든 이 험한 산에서,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넋들... 6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국의 ‘귀환’ 명령만을 기다리며 외로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안타까운 영혼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려왔기 때문입니다.



▲ 약식제례 및 유해봉송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은 사실상 신원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DNA 대조를 위해서는 유해에서 시료 채취를 해야만 하는데, 이처럼 작은 조각유해에서는 DNA 시료 채취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설악산에서 유해를 수습할 때의 기억은 가장 가슴 먹먹한 기억으로 제게 남아있습니다.


​잊지 말자, 그들을...


​2016년 4월 13일, 마침내 1년 9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면서 저는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현장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는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과,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하던 기억, 조각유해들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리고 혹여나 우리의 불찰로 인해 미처 찾지 못해 여전히 그곳 어딘가에 잠들어있을지도 모르는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호국영령의 유해들이 여전히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조국의 품으로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바로 ‘그들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아울러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호국영령들의 신원확인을 위해, 유가족 DNA 시료 채취에도 적극 동참하는 것. 이것이 호국영령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사진을 제공해주신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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