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명의 역사학자들이 정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약사(略史)다. 부록(연표)을 제외하면 175페이지로 매우 얇다. 두꺼운 연구서를 읽기 벅찬 일반 독자들을 위한 맞춤형 교양서다.


책이 얇다고 안에 담긴 내용도 얄팍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임정 연구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9명의 학자(한시준, 김희곤, 한상도, 장석흥 교수 등)들이 1부 상해 시기, 2부 이동 시기, 3부 중경 시기의 세 파트로 임정의 활동상을 나누어 정리했다. 임정의 성과와 한계를 두루 조명하려 한 점이 눈에 띈다.


이 책의 초판은 2009년에 나왔다. 그리고 좌우 세력 간 역사전쟁을 불러일으켰던 '건국절' 논란은 2008년에 시작됐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도 건국절 논란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반박이 제시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정확한 근거를 들어 건국절 논란을 반박한 게 벌써 9년 전인데 아직까지도 건국절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는 현실이 웃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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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역사를 통해 의식의 분단부터 극복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취지에는 적극 공감한다. 적어도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역사학도들이라면 '통일사학'의 기치를 들고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로 봉합할 수 있는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줄기차게 주창해온 터다.


그런데 남과 북이 공동으로 기념할 수 있는 독립운동사업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이다.


북한에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와 독립운동사를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일본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항일투쟁이었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투쟁을 이끌어 간 주체에 대해서 북한은 오로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 한 명만 추앙하고 있다.


사실상 북한에서는 '독립운동사=김일성 일대기'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외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실패한 인물로 묘사한다. 심지어 김일성이 그렇게 존경했다던 안중근조차도 김일성보다 아래로 보고 깎아내린다.


독립운동사의 상징적 존재인 백범 김구 선생도 예외는 아니다. 김구 선생을 민족의 스승으로 높이 추앙하는 남한 사람들에겐 매우 불쾌할 수밖에 없는데, 북한에서는 김구 선생이 김일성에게 '귀의'했다고 가르친다.


노령의 김구 주석이 30대의 젊은 김일성을 만나 "수령님의 탁월한 영도력에 감명을 받았다. 저는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이제부터 수령님의 품에 안기겠다"며 무릎 꿇고 임정 주석의 인장을 갖다바쳤다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지점이 확연하게 다르다. 특히 어느 지점에 있어서는 함부로 얘기를 꺼냈다가는 자신들이 받들어 모시는 수령님의 신성한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되레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더욱이 문 대통령은 내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번 사업을 제안했다.


임정은 북측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역사다. 대한민국은 국호(대한민국), 국기(태극기), 국가(애국가) 그리고 정체성(민주공화정)까지 임정의 법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수립되었는데 만약 임정의 역사를 인정한다면 북측 스스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우려일 뿐이다. 남북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학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100% 공감하는 바이다. 그저 정부에서 잘 추진해서 이런 우려가 그냥 헛된 망상에 불과했음을 증명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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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면 '부고'란이 있다. 웬만해선 잘 보지도 않고, 본다고 해도 무심코 넘기는 코너다. 남들 죽었다는 소식을 유의 깊게 볼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더욱이 유명인의 부고라면 부고란이 아니라 톱뉴스로 크게 실릴테니 일부러 부고란을 찾아볼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신문을 넘기다 무심결에 부고란을 봤을 때, 유독 뜨끔하면서 가슴이 저미어지는 때가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들의 별세 소식을 들을 때다.


솔직히 연세가 연세인지라 이상할 게 없지만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분들이 한 분, 두 분 우리 곁을 떠날 때마다 가슴 한쪽이 쓰라리다.


지난 8일 밤에 백범 김구 선생의 경위대장(오늘날의 경호실장)이셨던 원로애국지사 윤경빈 선생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윤 선생은 1945년 1월, 장준하 선생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고, 나중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을 호위했던 분이다. 생존해있는 몇 안되는 광복군 출신이라 늘 만나뵙고 싶던 분이셨다.


마침내 지난 2013년, 경교장에서 윤 선생을 만나뵌 적이 있었다. 그해 여름, 일본군을 탈출해 6천리 장정 끝에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해 광복군이 된 청년들의 장정 루트를 따라 걷고 돌아왔던 차였기에 70여년 전 그 길을 먼저 걸었던,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계셨던 분을 만나뵀다는 사실에 몸둘 바를 몰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이미 거동도 불편하셨거니와 귀도 잘 안 들리셨지만 내가 충칭에 다녀왔다는 말은 정확하게 알아들으셨다. 그 말에 반색하시면서 내 귀에 대고 "경교장은 민족정기의 상징이나 꼭 보존해 나가야한다"고 당부하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다시는 뵙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쓸쓸하다. 독립운동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후로, 생존 애국지사들을 만나뵐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분들의 부고 소식이 들려올까봐 늘 조마조마하다. 그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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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년 전 일이다. 경북 안동으로 2박 3일 간 고적답사를 갔을 때였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안동에는 도산서원·병산서원 등이 남아있어 유림의 넋이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잠시나마 복잡했던 일상을 잊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발자취에 흠뻑 취해있을 무렵,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덧 조용한 시골마을에 자리 잡은 한 고택 앞에 멈춰섰다. 유려한 기와지붕을 얹은 서원들에 비해 볼품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에서 오랜 세월의 풍상이 느껴졌다.


김재봉의 생가인 '학암고택' 전경(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위치) ⓒ 김경준


안동의 한 고택에서 만난 죄인의 초상화


고택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사랑채에 걸려있는 웬 사내의 흑백 초상화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머리를 삭발한 채 수의를 입고 있어 영락없는 죄인의 형색이었다. 그럼에도 죄인답지 않게 표정에는 온화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어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풍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 고택의 주인이었던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이었다.



학암고택에 걸려있는 김재봉의 초상화와 안내문 ⓒ 김경준


김재봉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산파 역할을 맡아 국내에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의 초대 책임비서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김재봉이란 이름은 내게 너무도 낯선 이름이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다면서도 그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내내 민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찌 내 학문이 얕은 탓만 있겠는가. 그의 이름을 꽁꽁 감춘 채 역사의 뒤편에 밀어낸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현실 탓도 있을 게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내가 배운 독립운동사란 우익 민족주의 계열로 편향된 '반쪽짜리 역사'였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내가 본 교과서에서는 나름대로 좌·우 균형을 맞춘답시고 좌익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었지만, 그 비중은 절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김재봉이니 권오설이니 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애시당초 접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별'들에 대한 장편 서사


최근 출간된 <조선공산당 평전>을 펼치자마자 유독 반가웠던 까닭도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김재봉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이 책은 김재봉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흔히 평전이라고 하면 역사 속 인물 한 사람의 일생에 초점을 맞춰 고찰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책은 특정 인물이 아닌 '조선공산당'이라는 정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 최백순은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으며, 노동자,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이기에 사람이 아닌 '조선공산당'에 '평전'이란 말을 붙였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조선공산당 평전> 표지 ⓒ 서해문집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책에는 김재봉을 비롯해 이동휘, 권오설, 조봉암, 박헌영, 김사국, 김약수, 김알렉산드라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모두 한반도와 러시아,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있고,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이름도 있다.


저자는 이 한 권의 평전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그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하는 까닭을 강조한다.


"(조선공산당은) 참으로 오랫동안 금기시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라면 좌우를 떠나 누구나 조선공산당이 항일독립운동의 큰 흐름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인정이 결코 대중의 상식이 되어선 안 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3·1운동의 야심 찬 반복시도였던(하지만 기획자가 조선공산당이었던) 6·10 만세운동은 이름 정도만 알려지는 게 바람직했고, 해방 직전까지 국내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이들이 공산주의자임은 더더욱 널리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p.4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를 찾아


책의 시간적 배경은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제의 침략과 수탈을 피해 러시아 땅에 모인 한인들은 춥고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하나의 군락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자치조직을 만들고 신문을 발행하며 자연스럽게 러시아 사회의 일원으로 흡수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봉건왕조가 무너지자 러시아 한인사회 구성원들 역시 자연스레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접하게 된다. 혁명으로 봉건왕조를 몰아내고 세워진 볼셰비키 정권의 사회주의 이론은 새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분투하고 있던 조선의 망명정객들에게도 솔깃한 이론이었다. 자연스레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그렇게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의 길은 쉽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좌·우익의 극심한 대결이 이어졌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한인사회당 출신 이동휘도 있었다. 대통령(이승만)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열이 장악한 임시정부에서 그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갈등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김립 암살 사건'이다. 당시 코민테른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동휘의 측근인 김립이 모스크바로 건너가 이를 수령해오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을 빚게 된 사건이다.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백범 김구는 이를 '임시정부 공금 횡령' 사건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 대낮의 골목길에서 김립을 암살했다. 그러나 저자는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를 토대로 자금의 소유권자가 한인사회당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공금 횡령범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김립은 여전히 신원되지 못한 채 우리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실정이다.


비단 좌·우익의 갈등만 존재했던 게 아니었다. 같은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도 이념과 방법의 차이로 인해 격렬한 대립과 분열이 반복됐다. 당시 코민테른은 한 나라에 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1국 1당'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서로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사회주의 정당 및 단체들의 대립이 나날이 격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감시 피해 요릿집에서 만들어진 조선공산당


이들의 갈등을 지켜보다보면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념과 방법이 달랐을 뿐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에서만큼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갈등은 독립을 쟁취하고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그들의 투쟁은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당으로 결실을 맺는다.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아서원. 평범한 점심 약속을 가장한 이날의 모임은 바로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자리였다. 최재형이 첫발을 내딛었던 극동의 낯선 땅 지신허,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그 먼 길을 돌아 독립과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경성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국요릿집이었다."- p.257


김재봉 등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요릿집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후, 서둘러 코민테른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코민테른 간부회는 '9월 결정서'를 의결함으로써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다. 1918년 한인사회당 결성 이후 모두가 꿈꿔온 사회주의자들의 목표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조선공산당은 와해와 재결성을 반복하면서 부침을 겪지만,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는 투쟁의 길을 걸었다.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중국요릿집 '아서원' ⓒ 동아일보


금기의 역사는 현재진행형… 우리가 먼저 불러줘야


저자는 이들의 역사를 '남과 북이 모두 외면한 금기의 역사'라고 말한다. 해방 후 남과 북의 이념 대결 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존재는 뿌리채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해온 남한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 역시 최고권력자인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존재가 모두 지워졌다. 김재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만든 박헌영이 대표적이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미제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숙청당했다.


시간이 흘러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재봉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공적을 인정받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사회주의 전력으로 인해 발목이 묶여 있는 상황이다. 그들의 서훈 문제를 둘러싸고 지금도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역사는 여전히 금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알려지지 않은 별'들은 우리가 손을 내밀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먼저 그들의 이름을 알고 불러줄 때, 그들도 비로소 금기의 영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교과서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비중 있게 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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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http://omn.kr/kse0

(가급적 링크를 통해 원문 기사로 보는 것을 권유함)

시간이 흘러 또다시 광복절을 맞았다. 으레 그렇듯 오늘도 정부는 성대한 기념식으로 이날의 의미를 축하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광복절의 의미를 설파하고,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을 발표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의미를 새삼 언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정부의 역행하는 역사의식에 비추어봤을 때 국민들은 과연 그 말에서 어떤 신뢰를 느낄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한 애국지사가 대통령에게 던졌다는 직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로 92세의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김영관 선생이 주인공이다. 아흔을 넘긴 노령에도 불구하고 꿋꿋한 자세와 단호한 목소리로 "건국의 기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이다", "국군의 날을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9월 17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병(老兵)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사실상 현 정부의 역사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야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대통령의 면전에 대고 언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져 싸웠고, 지금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와 신념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지조로 일관하는 모습에 국민들도 감동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실 모든 이들이 이렇듯 지조로 일관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은 아니었다.

신념을 꺾고 변절한 이들

지조(志操).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에 대해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꿋꿋한 의지. 또는 그런 기개'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지조를 잃고 종국에는 변절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들은 처음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이들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친일행위를 하기도 했다.

3.1 운동을 촉발시킨 민족대표들 중 최린, 정춘수, 박희도도 그랬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주필을 지내며 민족시인으로 추앙받았던 춘원 이광수 역시 '조선인 마빡을 바늘로 찌르면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 모두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부르짖는 철저한 민족반역자로 변절했다.

기개와 충절을 덕목으로 요구하는 군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선진기술을 배워와 독립전쟁에 보탬이 되자'며 일본으로 건너갔던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마지막 생도 45명 중 실제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5명에 불과했다.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이들이 '친일'이라는 명찰을 달고 일본군 혹은 만주군에 복무하며 동포를 억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후에 지조를 꺾은 이들

그런데 정작 일제강점기에는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해방된 조국에서 변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으로 <압록강 행진곡> 등의 독립군가를 작사하며 광복군의 사기를 고취시켰던 한 소설가는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 <광복군>이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이 소설 속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박 대통령조차 어이가 없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쳤던 걸까.

이에 대해 또 다른 광복군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청와대로부터 돈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랬다는 것이다. 결국 돈 몇 푼에 광복군 출신이라는 명예를 스스로 짓밟은 셈이었다. 이는 그 자신 뿐 아니라 광복군 전체가 우스갯거리로 전락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가문이, 일본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사실도 존재한다. 독립운동계의 양대 산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가문과 안중근 의사의 가문도 이러한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의 차남으로 얼마 전 작고한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전투기 비행사 교육을 받은 바 있다. 그런 그도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력했다.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함께 했던 그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타이완 주재 대사, 교통부 장관 등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집권이 시작되자 제9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낸 전력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 그 자신 역시 광복군이었던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2011년 작고) 역시 김신 장군과 나란히 제9대 유신정우회에 입성하며, 독재정권에 협력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지조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물론 한 평생 지조로 일관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욕망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독립운동가의 삶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에겐 한 평생 풍찬노숙하며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 요구되었다. 

일신의 부귀영화는 꿈도 꿀 수 없었으며,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한 삶도 사치였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용기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일본 경찰의 고문을 이기지 못한 김구 선생 역시 <백범일지>를 통해 "차라리 아내가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음식을 들여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할 지경이었다.

해방 후의 삶이라고 달랐을까. 한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는 "예전에는 광복군 출신이라고 하면 취직이 되질 않아 일부러 그 이력을 숨기기도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인사들이 다시 정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알게 모르게 배제되는 상황에서 지조로 일관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시류에 순응하는 삶을 택했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냉혹하고 엄정한 법이다. 변절한 이들은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죽은 뒤 역사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이들은, 현실에선 고된 삶을 살았을지언정 역사에 위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광복절은 바로 그런 이들을 기리는 날이다. 눈앞에서 가족이 굶어죽고, 그 자신이 고문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꿋꿋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신념을 고수하며 살았던 이들 말이다. 그런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광복절을 기리는 방법이 아닐까.

그러니 이젠 우리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보자. 분명 우리들 삶에도 각자의 본분에 요구되는 지조가 있을 것이다. 군인에겐 군인의 지조가, 언론인에겐 언론인의 지조가 있다. 어찌 그들 뿐이랴. 저마다의 삶에서 지켜가야 할 신념과 가치가 있는 법이다. 이번 광복절에는 바로 우리들 스스로의 지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우리들 삶에 어떤 지조가 요구되는지, 그리고 우리 스스로 지조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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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6일. 오늘 하루 두 사람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67년 전에 오늘 돌아가신 분이고, 한 사람은 오늘 돌아가신 분입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과 탤런트 故 김성민 씨 이야기입니다.


오늘이 마침 김구 선생 67주기 기일이라, 김구 선생 묘소 참배를 위해 효창공원(효창원)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스마트폰으로 SNS를 확인하는데 '탤런트 김성민, 뇌사 판정'이라는 기사가 뜨더군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뭔가가 끓어오른다고 해야할까요? 제가 원래 남의 죽음, 특히 일면식도 없는 연예인들 사고 소식에 그렇게까지 반응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냥 그의 삶이 기구해서였을까요. 왠지 모르게 밀려드는 연민의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걸 주체하기 힘들었습니다.


하필 또 김구 선생 기일을 추모하기 위해 묘소 참배를 가던 길이라...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가는 길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마지막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더욱 착잡해지는 듯 했습니다. 자연스레 그 둘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김구 선생도 자살을 몇 번이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실제로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청년 시절, 치하포사건으로 인천감옥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일입니다. 불결한 감옥생활과 때마침 찾아온 신병의 고초를 견디다 못한 선생은 스스로 허리띠로 목을 졸라 자살시도를 했다가, 동료 간수들이 발견하는 바람에 간신히 살아남은 적이 있죠. 


이후 선생은 "자연스럽게 죽으려면 죽었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선생은 살면서 그보다 더한 수난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실제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는 신이 아닌 이상 알 길이 없습니다만... 적어도 백범일지에 드러나는 모습은 그렇습니다. 


아마 선생은 자신이 이대로 죽기보다는 살아서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날의 자살 시도 이후 주어진 삶을 '하늘이 부여한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이후 주어진 삶 속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고,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일평생을 노력하시다가 67년 전 바로 오늘, 흉악범 안두희의 흉탄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故 김성민 씨의 죽음을 보면서, 전 왜 그 일화가 떠올랐을까요? 


김성민 씨보고 김구 선생처럼 죽지 말고 살아서 나라를 위해 애국하라... 뭐 이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김구 선생께서 한 번의 자살 시도 이후 주어진 삶을 하늘이 부여한 천명으로 받들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일평생 노력하셨다는 점에서, 김성민 씨 역시 죽을 용기로 살아남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입니다. 


특히 그가 이미 예전에도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그때 이후의 삶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더 열심히 살아야만 했던 것이 천명에 순응하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길이기도 하죠. 그것이 네티즌들이 바라는 '브라운관 복귀'든 '마약을 끊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든 말이죠.


어쨌거나 이미 세상을 뜨신 분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남겨봐야 고인의 명예에 누만 될까 싶어 황망합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홀로 끄적여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김성민 씨의 남은 가족들 역시 상처를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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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길래 확인해봤더니...


음... 벌써 김구 선생님께서 서거하신 지 67년이나 흘렀네요. 얼마 전에는 김구 선생님의 차남이신 김신 장군(제6대 공군참모총장)께서 돌아가시면서, 이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직계 자녀분들까지 모두 역사가 되셨네요. 


이렇듯 시간은 점점 흘러 조국의 독립과 수호를 위해 싸워주신 원로 애국지사들은 한 분, 두 분 점점 돌아가시는데, 우리는 지금까지도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아직까지도 좌, 우로 나뉘어 '역사전쟁'을 벌이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면 통탄을 금치 못할 지경입니다. 기껏 빼앗긴 나라를 찾아줬더니,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마치 거저 주어진 것마냥 생각하는 못난 후손들. 그들을 바라보는 그분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아무튼 이날, 김구 선생님 묘소에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부끄럽게도 전역하고 한 번도 김구 선생님 묘소 참배를 가지 않았군요. 늦었지만... 이번 주 일요일에 기념관에서 열리는 추모식에 참석하고, 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묘소에도 들러 뒤늦은 전역인사와 함께 새 출발을 고하려 합니다.


* 백범 김구 선생 추모식이 열리는 장소와 시간은 첨부한 사진을 참고하면 되고, 별도의 신청 절차 없이 자유롭게 참석이 가능합니다. 식 종료 후에는 점심도 제공하니, 많이들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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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재밌는 상상을 해보았다.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수련했던 무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해 본 것이다.

 

안중근의 경우 어릴 적부터 워낙 무예를 좋아했다고 전해지는데, 일단 그가 국궁(활쏘기)과 총포술, 수렵술, 기마술 등을 익힌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안중근 본인이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등을 통해서도 언급한 바 있기에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맨손 무예(권법)에 대한 설명은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만약 안중근이 맨손 무술을 배웠더라면 과연 어떤 무술을 배웠을까?

 

내 생각에 안중근이 맨손 무술을 배웠다면 '택견'과 '씨름'을 배웠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된다. 택견, 국궁, 씨름은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이다. 그외에 다른 전통 무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수박희'와 같은 무술도 있다고 하는데, 이 무술이 안중근이 활동하던 시절까지 전해내려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미 실전된 무술이라 알려져있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24기(혹은 십팔기)를 배웠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배웠을 확률이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무예도보통지>를 바탕으로 한 무예24기는 군용 무술이다.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하였거나, 군에 입대한 이들이 배울 수 있는 군용 무예를 안중근이 배웠을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옛부터 택견과 씨름은 그 맥이 끊기지 않고 꾸준히 수련되어 온 우리 고유의 무예이다. 그 살상력과 실용성, 무술로서의 가치가 상당한만큼 안중근이 무술을 배웠더라면 그 두 무술을 배웠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독립군은 과연 어떤 무술을 배웠을까? 과연 이들이 무술을 배우긴 했을까?


나는 이들이 분명 무술을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총과 폭탄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근대에 맨손 무술을 배웠을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총을 쓸 필요도 없이 핵 발사 하나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첨단 과학 시대에도 전세계 모든 군인들은 각 나라의 고유 무술을 수련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국군도 태권도를 열심히 수련하고 있지 않는가?) 단병접전과 기습전에서 무술만큼 유용한 기술은 없으며, 또한 무술은 단순히 호신술을 넘어 군의 기강을 바로잡고 신체를 강건히 하며, 정신을 수양하는 수단의 하나이기에 꾸준히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 역시 '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총검술과 같은 근대적 훈련 뿐만 아니라 그들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고, 신체를 단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무예 연마에 힘을 쏟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슨 무술을 배웠을까? 


김구의 경우는 이미 <백범일지>의 기록(치하포 사건을 통해 김구의 기술을 분석하여 그것이 택견의 기술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밝혀낸 연구 결과가 있다)을 통해 어렸을 적 '택견'을 수련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 적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독립군들은 어떤 무술을 배웠을까?

 

여기서부터는 일부 기록을 바탕으로 한 나의 철저히 개인적인 상상인데, 임시정부가 위치했던 지역 근방의 전통 무술을 배웠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임시정부는 상해, 광둥, 충칭 등 중국 대륙의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며 활발하게 활동을 펼쳤다. 중국 역시 임시정부가 활동하던 시기에 활발한 항일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한국을 도우려는 중국의 무술가들이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무술을 지도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상상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광둥은 중국 남부 지역으로 남권(南拳)의 총본산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홍권(洪拳), 영춘권(詠春拳) 등 지금까지도 중국의 실전 권법으로 유명한 무술들이 모두 광둥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임시정부는 광둥 지역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둥성 광저우 황푸에는 그 유명한 장제스의 <황포군관학교>가 있었다.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과 같은 한국인 항일운동가들을 배출한 학교가 바로 황포군관학교이다. 이들은 나중에 임시정부에 가서 군사 교관이 되기도 한다. 


분명 황포군관학교에서는 자신들의 국기인 중국무술을 가르쳤을 것이다. 또 황포군관학교는 광둥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광둥의 권법들(홍권, 영춘권)을 수련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임시정부의 교관으로서 후일 <한국광복군>을 이끌게 되는 주역들이 중국무술(더 구체적으로 남파 권법)을 배웠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내 상상의 결론이다. (더 나아가 광둥 지역의 항일독립운동가이자 무술가, 의원이었던 황비홍과 이들이 한번쯤 교류한 적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상상도 해보게 되는데 너무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상상이라 이쯤에서 붓을 놓는다)

 

어떻게 보면 참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그럴싸하다는 생각도 든다. 상상을 마치고보니, 내가 지금 수련하고 있는 홍권(洪拳)이 항일 독립 운동을 펼쳤던 우리 선조들이 수련했던 권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짜릿한 흥분(?)마저 든다. 지금 우리 학계에서 독립군들이 어떤 무술을 수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연구가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중에 '독립군과 무술'이라는 분야로 연구를 해서 논문을 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 이 글은 필자가 2011년에 재미로 써본 글이다. 어디까지나 상상에 많이 치우친 글임을 감안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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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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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운영하는 '100년 편지'란 홈페이지가 있다. 다가올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2019년)을 기념하며 만든 이벤트 홈페이지인데, 내가 김구, 안중근이 되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혹은 우리가 김구, 안중근 등 독립투사들께 편지를 써서 올리는 홈페이지다. 편지를 보내면 기념사업회의 심사를 거쳐 선정이 된 편지가 올라가며, 격주로 업데이트 된다.

언제고 한 번 써봐야지, 써봐야지 하면서도 내내 미루다가 지난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5주기를 맞아 김구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군 입대를 앞두고 더는 미룰 수 없어서다. 그리고 8일에서야 내 편지가 192번째 편지로 게재되었다.

원래는 4월 말에 야심차게 시작했던 <백범일지> 필사를 마치고 당당하게 편지를 쓰려했는데, 게으른 탓에 '상권'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입대를 하게 되어 더는 미룰 수 없겠기에... 그래서 편지 말미에 필사를 다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도 담았다.

그간 100년 편지를 쓴 분들을 보면 대부분 역사학계에서 활동하시는 교수님들이나 역사 관련 학술단체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주로 썼고 나와 같은 젊은 사람들이 쓴 편지는 드문 것 같다. 보다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심히 써주었으면... (소정의 원고료도 지급된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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