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비>에 이어 올해 기대작 중 하나였던 <1987>을 어제 조조로 보고 왔습니다.


<1987>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죽음에 이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하 박종철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면서 고문 사실에 대해 은폐와 조작을 시도하지만 양심 있는 이들에 의해 그 진실이 폭로되면서 한국 사회를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됩니다. 


영화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사건의 진실을 감추려는 이들에 맞서 그 진실을 파헤치고 알리려는 양심 세력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인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화장을 시도하는 경찰을 제지하는 최 검사(하정우), 박종철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는 윤 기자(이희준), 부검 결과에 대한 조작을 거부하는 국과수 황 박사 등이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감탄했던 것은, 놀라우리만치 고증에 충실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 박종철 사건을 최초 보도한 신성호 전 중앙일보 기자의 <특종 1987>이라는 책을 한 번 읽고 갔더랬는데, 책에서 본 사건의 전개과정이 스크린에서 그대로 흘러나오고 있더군요. 극중 연희(김태리)라는 인물 빼고는 전부 실존 인물이라고 하는데, 각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실명과 신분이 자막으로 뜨고 있어 다큐멘터리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1987>에는 박 처장(김윤석)을 제외하고는 단독 주연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따로 없습니다. 하정우, 유해진, 설경구, 강동원, 김의성, 여진구, 박희순, 이희준, 오달수 등등 정말 많은 주·조연급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전부 비슷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6월 항쟁을 이끌어낸 것은 몇몇 '영웅'이 아니라 각자 자기 위치에서 양심을 지키고자 한 평범한 소시민들이 다함께 거둬낸 결실임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감독의 의도 자체는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가 분산되어 약간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특히 김태리와 강동원의 로맨스는 굳이 넣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아쉽습니다.


<신과함께>를 봤을 때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습니다만, 가슴이 매우 먹먹해지는 영화였습니다. 백골단이 길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하는 장면이나, 경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장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각종 고문을 당하는 장면, 대학생들이 최루탄을 맞아가며 싸우는 장면, 서울시청 앞 광장이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찬 장면들을 보면서 몇 번이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던 것 같습니다. 


1987년이면 제가 태어나지도 않은 해입니다. 그래서인지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정말 저랬단 말이야?' 하고 믿기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현대사 수업 도중의 일이었습니다. 전두환 정부에 대한 설명을 하시다말고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가는데 여기저기서 총 소리가 나더라. 그런데 그게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쿠데타였다"면서 "그게 불과 3~40년 전 이야기라 나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새삼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저분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겪지 못했던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생각에 묘한 이질감이 들었더랬지요.


그리고 '저 당시에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과연 앞에 나서서 최루탄 가스 마셔가며 열심히 돌을 던질 수 있었을까. 단순한 가정일 뿐임에도 쉽게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만큼 두렵고 험난한 길이기 때문이지요. 30년 전,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위해 싸운 순국선열들에 대해 더욱 감사함을 느끼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편안한 삶을 구걸하는 대신 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어간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제가 누리는 자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그렇거니와 영화 <1987>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 선열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오늘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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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링크: http://omn.kr/oxn5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지난 6일 공개된 영화 <1987>의 메인 예고편에서는 경찰 조사 중 사망한 한 대학생의 죽음을 두고 사건의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과 파헤치려는 이들의 숨 막히는 대결이 묘사됐다. 예고편이 공개되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아래 박종철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던 22살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범행 직후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위장,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결국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 <19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박종철 사건 뒤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30년 만에 공개된 특종기자의 취재수첩


그래서 준비했다. 영화 개봉에 맞춰 함께 읽어보면 좋을 '가이드북'이다. 올해 1월 박종철 사망 30주기에 맞춰 출간된 <특종 1987>이다. 박종철 사건의 전개 과정 뿐만 아니라, 박종철 사건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들 그리고 박종철 사건이 한국 민주화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다뤄내고 있어 1980년대의 정치적·사회적 흐름까지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인 신성호 전 중앙일보 기자는 1987년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으로 박종철 사건을 최초 보도한 장본인이다. 박종철 사건을 세상에 알린 특종 기자로서 그는 30년 전 자신이 취재하며 보고 들은 진실을 낱낱이 공개한다. 덕분에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풍성하다.


그렇다면 박종철 사건은 세상에 어떻게 알려질 수 있었던 걸까. 1987년 1월 15일 오전, 중앙일보 사회부 법조 출입기자였던 저자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대검찰청 취재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평소 친분이 있던 이홍규 공안4과장이 "경찰, 큰일 났어"라며 저자에게 툭 한 마디 던진 것. 젊은 기자의 '촉'이 즉각 발동됐다. 이른바 박종철 특종의 시작이었다.


"6년째 법조를 출입하고 있던 나는 이홍규 과장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검찰 간부들은 비교적 보안 의식이 철저하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말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라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 p.25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데스크(편집부)와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비밀작전에 가까운 취재가 시작됐다. 검찰과 서울대, 유족을 상대로 이중, 삼중 취재를 한 끝에, 사망한 대학생의 신원이 서울대생 박종철임이 밝혀졌다. 이미 돌아가고 있던 윤전기를 즉각 멈춰 세운 채 박종철의 사망 소식을 급하게 지면 배치했다. 그렇게 박종철 사건은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와 탄압이 극심할 무렵이었다. 저자는 박종철 사건을 보도한 직후 자신과 언론사에 가해온 정부의 압박에 대해서도 폭로한다. 당장 기사를 내리라고 해서 거절했더니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더라는 정부 고위 관계자 얘기도 우습고 황당하지만 "정보기관에 끌려갈지도 모르니 피신하라"는 동료들의 충고에 따라 밤새 잠적해 있었다는 저자의 고백은 당대 언론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어 구슬프기까지 하다.


그러나 저자의 특종을 시작으로 여러 언론사가 작심한 듯이 추가 취재와 보도에 매달렸다. 언론사 통·폐합, 보도지침 하달 등 전두환 정권의 언론 길들이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언론인들이 박종철 사건을 기화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박종철 사건의 언론사적 의의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말한다. 비로소 언론인들이 권력의 혀에서 벗어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론기관 본연의 사명을 실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 <1987> 속 하정우, 실존 인물이었다


한편 영화 <1987>에서는 진실을 쫓는 기자, 사체 화장을 막는 검사, 숨겨진 진실을 세상 밖으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교도관에 이르기까지 박종철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숨겨진 영웅들이 등장한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실제로도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용기를 낸 '의인'들이 있었다. 특히 "경찰, 큰일 났어"라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이홍규 과장의 경우 25년 만인 지난 2012년 딥 스로트(deep throat: 내부고발자)임이 밝혀졌다. 


단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흘렸던 것이다. 훗날 그는 "어린 학생이 죽었는데 이렇게 묻어야 하나 싶었다"며 "진실은 반드시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내부고발을 결심한 동기를 증언한 바 있다. 


영화 속에서 하정우가 맡은 '최 검사' 역시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 바로 사건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검사다. 그는 사건 직후 고문 사실을 은폐하고자 사체 화장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아들이 조사 받다가 죽었다는데 당장 화장해서 유골 넘겨달라고 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느냐"며 쫓아낸 일화로 유명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부검 결과에 대한 경찰의 조작 시도를 우려해 부검도 사설 대학병원에서 집도하도록 지시했다.


이외에도 물고문 의혹을 제기한 의사 오연상, 물고문 혐의를 인정한 정구영 서울지검장, 경찰의 사인 조작 지시를 폭로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 등이 박종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기여한 공로자들로 등장한다. 


저자는 1972년 당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하야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 역시 딥 스로트였던 미 연방수사국(FBI) 부국장 마크 펠트의 제보 덕분에 가능했다며 "이들이 없었다면 박종철 사건은 그 진실이 묻힌 채 전두환 정권의 여러 의문사 사건 가운데 하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의를 부여한다.


그 이후로는 역사가 설명하는 그대로다. 박종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전국의 광장은 박종철 사건 조작과 은폐를 규탄하며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함성으로 뜨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의 수용으로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30년째 풀리지 않은 의혹... 전두환 개입 여부 밝혀야


저자는 3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혹에 대해 지적한다. 바로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실체다. 박종철 사건 당시 청와대와 안기부, 경찰, 검찰 등 관계기관은 수시로 모여 사건의 대응 방향을 논의했다고 전해진다. 사건 직후 경찰이 밝힌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수사 결과 역시 이 자리에서 결정됐다. 


하지만 이 회의 구성원에 대한 실체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며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저자는 "법적 시효는 지났다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 규명에는 그 시한이 있을 수 없다"며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았음을 주지시킨다. 또 당시 권력의 꼭대기에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개입 여부도 분명히 밝혀야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박종철이라는 이름 석 자는 흐릿해진 지 오래다. 저자는 이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박종철이라는 이름이 한국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6월 항쟁 당시 시민들이 원하던 모습이고, 박종철이 꿈꾸던 세상인가? 오늘의 우리 모습이 그들이 꿈꾸던 세상과는 거리가 있다면 박종철 사건은 30년 전 끝난 게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박종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 p.239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지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 손으로 6명의 대통령을 뽑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민주화'가 시대의 화두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총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언론을 장악하고 국민을 사찰하며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역대 보수정권의 행태는 과거 군사독재정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민주화의 길이 여전히 요원하다는 씁쓸한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그러나 좌절할 이유는 없다. 6월 항쟁 이후의 실패가 곧 민중의 실패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30년이란 시간은 민주화에 대한 갈망을 더 뜨겁고 단단하게 담금질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난 겨울, 광장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혁명은 바로 그러한 갈망이 폭발한 결과였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이제부터가 시작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 안의 적폐를 청산하고 제도적 민주주의를 넘어 문화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남아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 다시 지난 실패를 답습해야만 한다. 박종철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적폐청산과 제도적·문화적 민주화가 완성되는 날, 비로소 우리는 박종철이라는 이름 앞에 떳떳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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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처음 읽었던 때 말이다. 꽤나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젠 책 속의 구절들도 가물가물하지만 소설을 읽던 당시의 감정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


답답함, 굴욕감, 분노. 차라리 이 모든 내용이 픽션이었으면 하는 헛된 바람을 품었을 정도로, 무기력하고 굴욕적인 우리네 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된 병자호란은 조선의 역사, 아니 5천 년 민족사를 통틀어 가장 굴욕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한때 '야만족'이라 깔보던 여진족들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조선 임금의 무릎을 꿇린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렇다 할 전투조차 치러보지 못한 채 너무도 빠르고 무기력하게 항복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비감에 젖게 만든다.


원작 소설의 충실한 반영


처음 영화 <남한산성> 제작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대중들은 기대보다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박희순 등 내로라하는 명품배우들을 총출동시켰다지만 적을 물리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나 극적인 반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패배와 굴종의 역사에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던 걸까. 지난 3일 개봉한 <남한산성>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매우 뜨거웠다. 개봉 직후 <킹스맨: 골든 서클>을 제치고 예매율 1위를 달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반응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비록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장면들은 없었지만 병자호란의 비극적인 역사를 스크린에 제대로 구현해냈다는 평들이 쏟아졌다. 특히 동명의 원작 소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평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영화 <남한산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얘기일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영화는 김훈 소설이 갖는 특유의 '비장미'와 '절제미'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구체성 없이 모호하면서도 은유적인 김훈만의 문장이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의 성격으로 고스란히 구현된 것이다. 


최명길과 김상헌, 과연 누가 옳을까


영화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청나라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분)과 적극적인 항전을 부르짖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 분)의 대립 구도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줄기다.


최명길은 적진과 남한산성을 끊임없이 오가며 나라와 백성이 모두 '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찾은 답은 화친이다. 조선군의 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무모한 항전이 오히려 '말(言)의 길'을 끊어 더 큰 피를 부르게 될까 고민하고 두려워한다. 


반면 대의명분으로 무장한 김상헌은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하는 전형적인 선비다. 싸워보지도 않은 채 적에게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함부로 맡길 수 없다며 "차라리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라"고 부르짖는다.


영화는 최명길과 김상헌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논리적 정당성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고 있을 뿐이다. 


관객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나라와 백성부터 살리고 보는 것이 먼저 아니겠냐는 최명길의 주장도, 적에게 구걸하여 얻어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김상헌의 주장도 제각각 일리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동혁 감독 역시 인터뷰에서 "(남한산성은)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며 관객들 스스로 판단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위정자들의 책임 회피에 대한 통렬한 비판


다만 영화는 또 다른 대립 구도를 설정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로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자들과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의 대립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방법은 달랐어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운 충신들이다. (사사건건 서로 반대만 할 것 같은 그 둘도 영화 속에서 때때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 둘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무겁게 여겼으며, 그 책임감에서 자신만의 신념이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각자가 목숨 걸고 화친과 항전을 부르짖은 것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반면 영의정 김류(송영창 분)를 비롯한 대다수 중신들은 상황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를 반복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데만 급급하다.


최고결정권자인 임금 인조(박해일 분) 역시 다르지 않다. 인조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신료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고 도망치려고만 한다. "나는 살고자 한다"는 그의 한 마디에 나라와 백성보다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라는 그의 무책임한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영화는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보다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선 자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더욱 강하게 비판한다. 그들의 '찌질함'을 더 노골적으로 비꼬기 위해, 영화는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대화 장면을 마치 만담처럼 우스꽝스럽고 과장되게 연출하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이 여의도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영화가 보내는 메시지가 뜨끔하게 다가오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정치적 현실이 겹쳐 보이는 탓이다. 여의도의 그 많은 정치인들 중에 자신의 가슴에 달린 '금배지'의 무게를 무겁게 여기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헌정 사상 초유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부결 사태 앞에서도 상황의 엄중함과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가 결정권을 가졌다"며 득의만만하던 한 야당 대표의 말만 봐도 병자호란 당시의 위정자들과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다. 사드·북핵 등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외교·안보적 현안 앞에서 미·중 강대국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백성들이 그랬듯 이제 우리들도 위정자들의 현명한 '선택'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선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지 않는다. 다만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으로부터 회피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책임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이다. 이제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길을 걸을 것인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길을 걸을 것인지 말이다.


[일러두기]


* 해당 글은 <오마이스타> 기사로도 보도됐습니다

* 첨부한 스틸컷의 저작권은 영화 <남한산성> 배급사인 CJ 엔터테인먼트에 있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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