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이분들은 한결 같이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살기 좋아졌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임시정부에서 비서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후손은 손목에 '이니시계'를 차고 다녔고, 만주 국민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진성 선생의 후손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드디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만 들어도 '문재인 대통령이 참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방부에서도 광복군을 뿌리로 하는 국군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극우세력들은 이조차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다.


당장 국방부에서 만든 이 영상만 봐도 그렇다. 광복군을 우리의 뿌리로 가르치는 영상을 두고서 '주적을 북한이 아닌 일본으로 교묘하게 바뀌치기함으로써 적화통일로 이끄려는 문재인 정권의 술수'라는 기가 막힌 발언도 눈에 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더 이상 안 나오게 하겠다는, 그리고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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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항일영화' 전성시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줄지어 개봉하고 있는 요즘이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을 시작으로 2016년 작년 한 해에만 <동주> <귀향> <덕혜옹주> <밀정> 등 무려 네 편의 영화가 잇달아 개봉한 것이다. 올여름에도 벌써 <박열> <군함도> 등 두 편의 항일영화가 개봉을 앞둔 가운데, 28일 개봉 예정인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13일 언론 및 일반 시사회를 통해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 부부의 이야기


영화 <박열>은 1920년대 일본을 무대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 박열(1902~1974)과 그의 아내이자 동지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1923년 일본 열도를 뒤흔든 '관동대지진' 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유례없는 대지진으로 일본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자 수습책을 논의하던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살포한다. 


광기에 휩싸인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보이는 족족 학살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일본 정부 역시 본토 내 불령선인(일제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얕잡아 부르던 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아나키스트 조직 '불령사'를 이끌며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작전'을 준비하던 박열(이제훈 분)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가 체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사진: 영화 <박열> 스틸컷 - 출처: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이준익 감독, 마침내 <동주>를 뛰어넘다


영화는 대역죄 혐의로 체포된 박열 부부의 옥중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공간적 배경은 대부분 좁은 감옥과 재판정에 국한된다. 영화 <암살>과 <밀정> 속에서 묘사된 아슬아슬한 총격전이라든지 스크린을 뒤흔드는 폭파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 박열은 황태자 암살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체포된 탓이다.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 동안 이렇다 할 액션 장면이 없다는 점은 자칫 관객들이 지루함을 유발케 할 우려도 있었다.


실제로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가 그랬다. 윤동주 시인의 삶이야 그 자체로 흠잡을 데 없이 고귀했고, 시인의 역할을 맡아 달콤한 목소리로 시(詩)를 읊었던 배우 강하늘의 모습은 팬심을 사로잡을 만했다. 그 결과 입소문을 타고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선전했다. 그러나 영화적 재미가 있었던 작품이라고 말하기엔 선뜻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장면 없이 시종일관 느릿하고 조용한 템포로만 흐르던 <동주>의 전개는 다소 밋밋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극의 한계일 수도 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시를 무기로 독립운동을 했던 윤동주 시인에게 총을 쥐여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박열>은 전작 <동주>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관객들의 눈을 현혹하는 자극적인 전개 없이 역사적 고증에만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영화적 재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 열쇠는 바로 '해학'에 있었다.


한국인 특유의 해학적 정서로 그려낸 암울한 시대


실제 역사가 그랬듯이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시대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시대다. 주권을 잃은 채 노예적 삶을 강요받는 식민지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일 수가 없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항일영화는 시종일관 진지함과 엄숙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늘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왔던 게 사실이다.


반면 <박열>은 한국인 특유의 해학적 정서로 암울한 시대를 경쾌하게 그려냈다. 일제에 의해 피체되는 험악한 상황에서조차 박열 부부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즐기는가 하면, 다 함께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하며 유치장을 뮤지컬 무대로 둔갑시킨다.


취조가 시작되자 박열 부부는 오히려 자신들이 검사를 심문하는가 하면 일본인 간수를 통해 서로 간의 '러브레터'를 주고받는 등 한마디로 이들을 '가지고 논다'. 상대적으로 일본 내각의 고위 대신들은 박열에게 휘둘리는 어리숙한 캐릭터들로 묘사된다. 캐릭터들의 해학적 묘사에 맞춰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들조차 경쾌하기 짝이 없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박열이 조선의 관복을 입고 재판정에 나타났을 때다. 박열을 지켜보는 영화 속 법정의 방청객들이 폭소를 터트리는 동시에 스크린 밖 객석에서도 폭소가 터져 나왔을 정도로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 속에 흘러간다.



(사진: 영화 <박열> 스틸컷 - 출처: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물론 해학도 정도를 넘어서면 자칫 가벼워 보일 우려가 있다. 시사회에 앞서 열린 무대인사에서 이준익 감독 역시 "영화의 교훈적 의미와 재미 둘 중 하나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게 고민이었다"고 고백했다. 재미를 잡으려다 자칫 그 시대를 너무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열>은 영화적 재미와 교훈적 의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박열 부부의 유쾌한 투쟁에 웃음을 짓다가도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며 일갈하는 박열의 모습에 짐짓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시쳇말로 '웃픈 영화'인 셈이다.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한국인 특유의 해학적 정서로 풀어낸 <박열>은 그래서 항일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빛을 발한 배우들의 연기... 배우 최희서의 발견


물론 이 역시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가 뒷받침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박열 역으로 배우 이제훈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영 미덥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실제 박열의 사진을 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험상궂은 그의 외모를 표현하기에 이제훈은 너무나도 곱상한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의 우려를 깨고 이제훈은 역사 속의 박열을 현실에서 되살려냈다. 연인 가네코를 향해서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하다가도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분노를 쏟아낼 때 눈동자에 서리는 광기는 영락없는 박열 그 자체였다. 타임머신이 있어 그 시대의 박열을 마주했더라면 이제훈의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단언컨대 영화 <박열>의 최대 수혜자는 가네코 역을 맡은 배우 최희서라고 하겠다. 이미 <동주>를 통해 이준익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바 있던 그녀는 <박열>을 통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매력을 마음껏 뽐낸다. 어설픈 조선어를 구사하는 일본 여인의 억양은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 맞서 분노의 포효를 쏟아낼 때는 그 서슬 퍼런 광기에 소름마저 돋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최희서는 역사의 뒤편에 가려진 채 주목받지 못하던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인을 성공적으로 되살려냄으로써 대중들에게 그 이름을 알리는 데 톡톡한 공을 세웠다.


역사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주인공을 내세워 비교적 덜 알려진 숨은 주인공을 발굴해내는 기법은 이미 이준익 감독이 전작 <동주>에서도 효과를 톡톡히 본 방식이었다. <동주>를 통해 관객들은 주인공 윤동주(강하늘 분)보다 친구였던 송몽규(박정민 분)라는 존재에 더 주목했다.



(사진: 영화 <박열> 스틸컷 - 출처: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잊혀진 이들을 만나 반갑고 고마웠던 <박열>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 시인은 알아도 박열은 잘 모르지 않느냐"며 개봉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항일영화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역사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익히 알려진 사실들을 재구성한 사례가 많다. 그러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은 그 짧은 항일독립운동사에서조차 비중 있게 다뤄진 이름들은 아니었다.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삶을 만나는 것은 관객들의 입장에서도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역사 속 숨은 영웅들을 발굴해 오늘에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이준익 감독의 시도는 그 자체로 박수받아 마땅할 일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시대, 암울했던 삶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며 싸웠으나 역사에서마저 잊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영화 <박열>은 더욱 반갑고 고마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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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CGV용산에 가서 <덕혜옹주>를 봤습니다.



(사진: 영화 <덕혜옹주> 공식 포스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요즘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인천상륙작전>만큼이나 개봉 전부터 말이 많았던 작품이죠. <인천상륙작전>이 '반공 프로파간다 영화'라는 선입견 탓에 말들이 많았다면, <덕혜옹주>는 '역사왜곡' 논란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바 있습니다. 공개된 예고편에서 덕혜옹주가 항일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묘사되었는데요, 실제로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영화를 보니 영화 속 덕혜옹주 역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의지를 보이는 인물은 아닙니다. 예고편의 편집을 자극적으로 하려다보니 그런 부분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런 우려를 가지고 영화를 본 관객들 중에서 생각이 바뀐 사람들이 많은 것 같네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 전 전문가들의 혹평과는 달리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으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덕혜옹주> 역시 개봉 이틀 만에 높은 평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진: 영화 <덕혜옹주> 스틸컷 - 출처: 네이버 영화)


일단 영화의 막이 올라가면서 '이 영화는 허구가 가미된 팩션영화'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덕혜옹주의 비참했던 삶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상하이 망명 작전' 등은 모두 영화적 허구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그것도 엄연한 역사왜곡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겠지만, 제 생각엔 영화적 재미를 위해 이 정도의 허구는 가미되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실행에 옮겨지진 못했지만, 어쨌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계획했던 일이기도 하고, 이 장면을 넣었다고 해서 덕혜옹주가 항일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오해할 소지도 별로 없거든요. 무엇보다 인트로 부분에서 '팩션'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덕혜옹주의 실제 삶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은 뭐가 역사적 사실이고, 허구인지 스스로 검색해서 공부하는 효과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천군> 같은 영화는 아예 남북한의 군인들이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날아가 무기력한 청년 이순신을 각성시킨다는 시놉시스였는데요 뭘. 그에 비해 이 정도면 양반인 듯 합니다.


덕혜옹주는 어릴 적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서, 일본인과 정략 결혼을 해야했고 그로 인해 일찌감치 치매 증상까지 보이는 등 상당히 불행했던 삶을 보낸 여인입니다. 해방 후에도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일본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이혼한 그녀는 종적을 감추었다가, 나중에서야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죠. 뜻 있는 이들의 노력 덕에 생전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폐인이 되었기에 그녀의 삶은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사진: 실제 덕혜옹주의 어릴 적 모습)


영화에서도 그런 덕혜옹주의 비참했던 삶이 잘 묘사되었기 때문인지 중간 중간 울컥하는 장면들이 꽤 많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덕혜옹주 개인의 삶도 안타까웠지만, 그녀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굴종의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서 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계속 상상을 하게 됩니다. 한택수(윤제문)처럼 비겁한 친일의 길을 걸었을까, 김장한(박해일)처럼 총을 들고 독립운동에 투신했을까. 다 부질 없는 상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그런 상상이라도 계속 하게 되네요.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암살>과 이 영화를 같이 보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9월에는 의열단을 주제로 한 영화 <밀정>이 개봉한다고 하니, 무척 기대됩니다. 요즘 들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제 입장에서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알면 알수록 탄식만 나올 정도로 아프고 괴로운 역사지만, 그만큼 더 외면해서는 안될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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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이회영 평전

저자: 김삼웅

출판사: 책보세

출판년도: 2011년


우당 이회영(1867-1932)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내가 처음 우당 이회영을 알게 된 것은, 작년에 경술국치 100년 특집으로 방영했던 KBS 대하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솔직히 고3때나 재수 시절에나 한국근현대사를 수능 과목으로 선택해서 공부했었고, 특히 한국근대사를 중점적으로 공부한다고 하던 터에 우당 선생의 존함을 몰랐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회영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고, 드라마를 보고 난 뒤엔 그 여운에서 쉽게 벗어나오질 못했다.

 

우당 이회영.

 

그는 생각보다 매우 크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이 있다.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 쉽게 번역하자면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대기업 간부들이 요양 시설을 찾아 봉사 활동을 하고, 연말마다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성금을 기부하는 등의 행위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들의 그런 행동들은 대부분 '눈 가리고 아웅'격으로 형식적인 행동에 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는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00년 전, 바로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우당 이회영이다.

그는 명재상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6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과 노비가 가득했고 사람들은 그를 삼한갑족(三韓甲族: 우리나라에서 대대로 문벌이 높고 부유한 집안)이라 불렀다. 한양 땅에서 우당 집안 소유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그 재산의 규모가 얼마였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조선 유교 사회의 폐단이었던 성리학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양명학을 수용한 그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노비를 해방한 뒤, 그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당시 풍속으로는 금기시되던 재혼을 한 것이다. 또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그는 6형제 모두를 설득하여 온 집안 식구의 가산을 팔아치우고 일가족 60여명(노비 포함)이 함께 간도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삼한갑족의 후예로 일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던 그의 집안이 한꺼번에 해외 망명을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엄청난 이슈였고 일제조차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우당 형제가 가산을 팔아치워 마련한 돈은 4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마저도 당시 우당이 급하게 팔아치우는 바람에 제 값을 받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최고 1조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우당은 이 어마어마한 금액을 모두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데 쏟아부었다. 그가 세운 신흥강습소는 후일 독립군 장교 양성의 요람 '신흥무관학교'가 되어 무장독립투쟁의 불꽃을 피우게 되니, 우당 이회영이야말로 한국 무장독립투쟁 역사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처럼 대단한 가문의 후예였던 우당 이회영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말그대로 몰락하고 만다. 형제들은 모두 쫄쫄 굶기에 이르렀고, 뿔뿔이 흩어져 생사여부를 알기도 어려웠다. 역시나 엄청난 거부였던 둘째 형 이석영은 심지어 굶어 죽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당은 오히려 없는 돈을 쏟아부어 동지들 끼니를 챙겨주었으니 우당 이회영과 그의 6형제는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당 이회영은 일찌감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심취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 노선, 무장투쟁노선 등으로 갈리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선에 따른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경계한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며 선각자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감투를 싫어했고, 항상 뒤에서 모든 실무를 맡아하면서도 공을 남에게 돌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중국 대륙에서 밀정을 처단하고, 일본 고위 공직자를 처단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에도 앞장섰다.

 

그는 1932년 본격적인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위해 대련으로 건너갔다가, 밀고에 의해 대련항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회영을 신고한 밀정이 바로 둘째 형 이석영의 아들 이규서였으니, 참으로 그는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같은 아비에 개같은 아들)라고 할 수 있겠다. 무장독립투쟁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리려던 우당 이회영. 그의 나이 66세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나온 이회영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나, 생각보다 문체가 잘 읽히지 않으며 맞춤법 오류가 많이 보이고 어색한 문맥이 많아 완벽하다고 보기엔 다소 힘들다. 그러나 우당 이회영의 그 위대한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적합하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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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www.korea100.kr/tc/241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운영하는 '100년 편지'란 홈페이지가 있다. 다가올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2019년)을 기념하며 만든 이벤트 홈페이지인데, 내가 김구, 안중근이 되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혹은 우리가 김구, 안중근 등 독립투사들께 편지를 써서 올리는 홈페이지다. 편지를 보내면 기념사업회의 심사를 거쳐 선정이 된 편지가 올라가며, 격주로 업데이트 된다.

언제고 한 번 써봐야지, 써봐야지 하면서도 내내 미루다가 지난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5주기를 맞아 김구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군 입대를 앞두고 더는 미룰 수 없어서다. 그리고 8일에서야 내 편지가 192번째 편지로 게재되었다.

원래는 4월 말에 야심차게 시작했던 <백범일지> 필사를 마치고 당당하게 편지를 쓰려했는데, 게으른 탓에 '상권'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입대를 하게 되어 더는 미룰 수 없겠기에... 그래서 편지 말미에 필사를 다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도 담았다.

그간 100년 편지를 쓴 분들을 보면 대부분 역사학계에서 활동하시는 교수님들이나 역사 관련 학술단체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주로 썼고 나와 같은 젊은 사람들이 쓴 편지는 드문 것 같다. 보다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심히 써주었으면... (소정의 원고료도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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