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블로그를 통해서도 소식을 공유한 바 있습니다만, 지난 6월부터 제가 직접 주도했던 소셜펀딩이 하나 있었습니다. 땡볕에서 고생하고 있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발굴병들에게 위문품을 후원하기 위한 펀딩이었습니다. 당시 펀딩 소식은 <오마이뉴스> 등에서도 6.25 특집 기사로 메인에 올라갔고, 저 역시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펀딩을 홍보하고 다녔지요.


그렇게 7월 31일부로 펀딩이 종료되었는데, 최종 모금액은 48만원이었습니다. 200만원을 목표액으로 힘차게 시작했는데, 달성률 24%에 불과해 아쉽던 차였습니다. 애시당초 모금액으로는 더위에 고생하는 발굴병들에게 아이스패드를 사서 지급하고, 차액으로 어렵게 살고 계시는 6.25 참전용사 분들을 후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최종 모금된 금액만으로는 한참 모자라겠더라고요. 부득이하게 집행 용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써야하나 고민이 컸습니다.



펀딩을 대리했던 <나도펀딩> 측에서는 "전액을 참전용사 후원에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제안해왔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물론 그쪽이 더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펀딩의 취지는 '고생하는 발굴병을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알리고 펀딩을 진행해서 모금한 건데, 취지에서 다소 벗어난 용도로 집행을 한다면 네티즌들을 속이는 게 아닌가 하는 찝찝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돈은 오로지 발굴병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후임들을 위해 쓰고자 결정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41만원(세금 떼고 나니 이렇게 또 줄어들더군요)으로 50명이 넘는 발굴병들에게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죠. 국유단 출신 동기와 선임 그리고 아직 복무 중인 후임들에게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먹을 게 남는 거다'라고 외치더군요. 


군인들은 늘 굶주려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역시 군 생활 당시에는 늘 굶주려 있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세 끼 밥 꼬박꼬박 먹이는 곳이 군대지만, 이상하게 밥 먹고 돌아서면 금세 허기 지는 곳이 군대이기도 합니다. 개인정비시간(휴식)이면 대부분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걸그룹 아니면 먹방을 보는 모습이 자주 연출되곤 했죠. 사회에서야 언제든 사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지만, 출타의 자유가 없는 사병들에게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거니와 대다수 병사들이 출타를 앞두고서는 '나가서 먹을 음식' 리스트부터 작성하곤 했지요.


당장 이 돈이 돌아가야 할 후임 병사들도 그렇고, 제 개인의 경험에 빗대서도 그렇고 먹을 것으로 전달하는 게 낫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추석 특식'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40만원이라는 한도 내에서, 50여명이 넘는 인원들을 골고루 먹여야 하다보니, 메뉴 선택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KFC에서 '타워박스' (7,300원)와 '고구마너겟'(2,000원)을 주문하기로 했습니다. 1인당 한 세트씩 돌아갈 수 있게 했으니, 저도 군 생활 중에 꿈꿔보지 못한 호화 만찬이나 다름 없었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추석 특식 수송 작전'


발굴병들이 추석 연휴를 쇠기 위해, 잠시 자대인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복귀한 어제를 D-day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부대에 연락해서 잔류인원 파악하고, 인원 수에 맞춰 KFC에 단체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걸 혼자서 짊어지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양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겁니다. KFC 측에서도 "몇 박스는 될 거다. 절대 혼자 오시면 안된다"고 만류하더군요. 운전면허도 없고, 같이 들고 갈 만한 사람도 없는지라... 결국 군 생활 중 직속상관으로 모셨던 중대장님께 S.O.S를 요청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중대장님이 자가운전하는 차량에 동승하여 햄버거 세트를 수송해올 수 있었습니다. 중대장님은 "너 때문에 살다 살다 별 짓 다한다"고 투덜거리셨지만, "그래서 중대장님 것도 하나 샀지 말입니다"라고 하니, 금세 좋아하시더군요.



막사에 도착해 방송으로 후임병들 집합시키니, 애들이 슬금슬금 생활관으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뾰루퉁한 표정으로 들어오던 애들이 제 얼굴을 보고 1차 충격을 받더니, 뒤에 쌓인 햄버거 박스들을 보고 2차로 놀랍니다.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엽더군요. (처음에 뾰루퉁했던 건,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정신교육이라도 시키나 싶어 그랬답니다 ㅎㅎ)


행정계원들이 인원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햄버거 양이 모자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지만, 이제 곧 집에 갈 말년들이 "어차피 우린 나가서 먹으면 된다"고 양보하는 덕분에 다들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못내 미안하더군요.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애들에게 특식을 나눠주고, 일일이 찾아가서 이번 특식의 의미를 전달해줬습니다. "너희 발굴병들이 현장에서 고생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 네티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성금으로 산 거니까, 나한테 감사하지 말고 성금을 모아준 네티즌들에게 감사하면서 먹자"고 말이죠. 애들도 퍽이나 감동 받은 눈치였습니다. 체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햄버거를 입 안 가득 욱여넣는 녀석들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안쓰럽기도 하고 '역시 특식으로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사들의 고충은 전역자가 더 잘 아는 법


저희 부대 최고 어른이신 단장님(육군 대령)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시고, 저를 소환하셨습니다. 그래서 단장님과 만나 차 한 잔 하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냐"면서 격려해주시더군요. 사실 전역하고서도 서포터즈다 뭐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부대를 방문해서 일도 돕고, 후임들하고 놀아주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단장님께서도 "너 대체 언제 전역하려고 그러냐. 그러지 말고 아예 말뚝 박아라.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돈도 주고... 얼마나 좋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뚝을 권유하시더군요.


저도 제가 평소 품었던 생각을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전역하면 보통 자기가 복무했던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우리 부대에서 복무했던 전역자들도 전역하고나면 부대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부대만큼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라는 숭고한 보직을 수행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대에 자긍심을 갖고, 자주 부대를 찾아 고생하는 후임들을 격려하는 게 전역병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구자가 되어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싶었다. 그리고 군 생활을 해보니까 아무리 사병 복지를 늘린다고 해도, 간부와 사병이 느끼는 인식의 차이는 큰 것 같았다. 전역한 내가 그래도 병사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늘 배고파하는 후임들에게 특식으로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어제 그렇게 특식을 전달하고 오니 마음 한 구석이 많이 뿌듯합니다. 사실 이번 펀딩 초기에 "사병들의 복지가 중요하지만, 그걸 왜 펀딩으로 도우려 하느냐. 군 차원에서 해야 될 일 아니냐"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성과가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그 말에도 동의합니다. 저 역시 일부 비리군인들이 방산비리로 해먹은 돈만 풀어도, 사병 복지가 지금보단 훨씬 좋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펀딩은 어디까지나 "국민들도 너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부디 힘내!"라고 격려해주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일에 치이고, 간부들에게 치이고... 위로 받을 구석 하나 없는 사병들에게는 한 마디의 따뜻한 위안과 격려가 절실한 법입니다. 저 역시 군 생활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고요. 그런 순수한 마음까지 왜곡되고, 저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것에는 다소 서운한 마음도 들더라고요.


뭐 어찌되었건 몇몇 뜻 있는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주신 성금 덕분에, 50여 명의 발굴병들이 호화로운 추석 특식을 즐기며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이 친구들만 고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맘 편하게 귀성길에 올라 고향에서 가족 품에 안길 때, 여전히 전/후방 각지에서는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60만 국군 장병이 있습니다. 펀딩을 주도했던 한 사람으로써, 마지막 한 가지를 더 제안하고자 합니다. 잠시나마 국군 장병 여러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봤으면 합니다. 주위에 군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면 덕담 한 마디 건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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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발굴병 24시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3)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그동안 연재해왔던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도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그동안 다뤄왔던 주제들이 다소 무거운 주제들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여러분께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바로 ‘유해발굴병’의 24시간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와 함께 발굴병들의 일상으로 들어가보실 텐데요, 다들 준비되셨죠? 그럼 출발!



기상! 출동 준비! (AM 5:30~06:30)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어느 군부대 막사의 복도. 기상나팔이 울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생활관이 보이네요. 바로 발굴병 생활관입니다.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걸까요? 아직 덜 깬 눈으로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는 윤 이병에게 물어봤습니다.


“작전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섭니다. 부대에서 발굴지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조기 기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06시 30분 기상이 원칙이지만, 숙영부대에서 발굴지점까지 이동시간만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조기 기상은 부득이하다고 합니다. 기상과 동시에 기계와 같이 빠른 동작으로 세면과 환복을 하고, 이른 아침식사를 한 뒤 다시 출동준비를 하는 모습이 매우 정신없어 보이는군요. 분대장 김 병장이 살짝 귀띔을 합니다.


“발굴병들은 사실 아침이 제일 바쁩니다. 혹시라도 빠진 게 없나 재차 점검하고, 아침식사도 다른 병력들보다 일찍 하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아직 밥이 준비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취사장에 앉아 하릴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발굴병들이 출동준비로 정신없는 사이, 발굴팀장님께서 출근하셨네요. 팀장님은 간밤에 병사들이 잘 잤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혹시라도 몸이 좀 안 좋은 병사가 있으면 생활관에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의무대로 보내 진료를 받게 한다는군요. 다행히 오늘은 모두 건강한 모습입니다.


팀장님의 인솔 하에 차량을 타고 발굴지까지 이동한 발굴병들. 차에서 내리자마자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한 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분대장부터 이등병 막내까지 공평하게 나눠서 진다지만, 등에 멘 장비들이 상당히 무거워보이는데요. 힘들지 않나요? 


(사진: 발굴병들의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들. 발굴병들은 매일 같이 이 짐들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이등병 때는 맨 몸으로 산에 오르는 것도 죽을 맛이었지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보니 이젠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체력 좋아보이는 염 일병의 답변이 믿음직스럽군요.


오전 유해발굴작전 (AM 09:00 ~ PM 12:00)


드디어 작전 개시! 보통 유해발굴작전은 100명 단위의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데요, 이들을 ‘기초발굴병’이라고 합니다. 발굴하려는 지점에 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굴토를 하며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초발굴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전문발굴병인 국유단 발굴병들은 기초발굴병력의 뒤에서 기초병력들이 제대로 발굴을 하고 있는지, 혹시 유해를 놓치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하며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한답니다.


그런데 그때! 


“팀장님, 유해 나왔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순간 발굴팀장님과 발굴병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려갑니다. 유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식별되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뜯어보며 토의한 결과 인골(人骨)로 판정되었습니다. 


유해로 판정이 나자, 발굴병들은 각자 임무를 분담해 일사천리로 수습에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유해가 식별된 지점 주위로 나무 말뚝을 박고, 노란색 테이프로 사방을 두릅니다. 이 ‘접근금지’ 라인 안으로는 국유단 발굴병 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현장 훼손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이 공간을 전문용어로 ‘트렌치’라고도 합니다. 발굴병 역시 트렌치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여 유해 훼손에 대비한다는군요.



(사진: 유해수습을 하는 국유단 발굴병들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수습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이 매우 진지합니다. 전문발굴병의 숙련된 손길에 6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호국영령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분은 대체 왜 이곳에, 어떤 사연으로 잠들게 되신 걸까요. 드러나는 유해를 보며 발굴병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꿀맛 같은 잠깐의 휴식 (PM 12:00 ~ 13:00)


“오전 발굴작전 종료! 밥 먹고 하자!”


벌써 점심시간이군요. 유해 수습에 전념하던 발굴병들도 그제야 허리를 펴며 한숨을 돌리네요. 임무를 수행하느라 지친 병사들이 그늘 진 곳에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달콤한 휴식 시간입니다. 병사들은 전투식량으로 허기를 달래며 즐거운 휴식을 만끽합니다. 매일 같이 먹는 전투식량이 물리지는 않을까요?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사진: 발굴병들의 주식인 ‘전투식량’)


“당연히 물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 주먹밥을 만들어오기도 합니다.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는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전우들과 함께 나눠먹는 밥은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특히 산에서 먹으니 운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병사들 중에는 돗자리에 누워 쪽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네요. 국유단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Y씨는 “점심 먹고 한창 나른할 때, 산바람 맞으며 잠깐 누워 자던 그 잠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유해발굴작전 개시 (PM 13:00 ~ 17:00)


잠깐의 달콤한 휴식도 끝나고, 오후 작전이 개시됩니다. 오후 작전은 오전에 비해 좀 더 바쁘게 돌아갑니다. 오전에 식별한 유해를 오늘 안에 수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해발굴작전의 원칙 중 하나는 바로 ‘당일 수습’이라고 합니다. 유해를 현장에 방치하고 내려올 경우, 까마귀와 같은 산짐승들이 유해를 물어가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인지 발굴병들의 손길 역시 오전보다 더욱 분주해보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국영령의 모습이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60여 년 전 당시 모습 그대로 당신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노출이 완료된 유해의 형태는, 전사 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착잡한 표정으로 노출된 유해를 바라보던 박 일병이 입을 열었습니다.


“보통 유해라고 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것처럼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많이들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영화와 다릅니다.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수류탄에 온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여기 누워계신 이분 역시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참혹한 양상으로 전사하신 게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사진: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노출된 유해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사진: 태극기로 관포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유해의 노출을 마무리한 발굴병들은 유해의 노출 양상을 직접 그림과 사진 등으로 기록하고, 정성을 다해 입관 절차에 들어갑니다. 이제 또 한 분의 호국영령께서 60여 년 만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작전 종료 및 막사 복귀 (PM 17:00 ~ 18:00)


금일 작전 종료. 하산 준비를 마친 병력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수습한 호국영령을 보내드릴 시간입니다. 태극기로 정성스레 싸여있는 관 앞으로 제기상이 놓이고, 발굴부대를 대표하여 대대장님이 직접 제주를 올립니다. 


‘부대 차렷! 호국영령님께 대하여 경례! 일동 묵념!’


발굴팀장님의 구호에 맞춰, 병력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거수경례와 묵념을 올립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60년 동안 오매불망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호국영령이시여. 이제 편히 쉬소서.



(사진: 약식제례를 지내는 모습)


유해봉송을 마친 발굴병들도 하산길에 오릅니다.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을 모셨다는 생각에 뿌듯함과 홀가분한 감정을 가지고 내려가는 발굴병들의 발걸음이 가벼워보입니다. 함께 내려가던 김 일병이 이런 말을 덧붙이네요.


“만약 오늘 안에 수습을 하지 못했다면, 조명장비까지 이용해서 야간 발굴을 했을 겁니다. 예전에는 밤늦게 하산한 적도 있었습니다.”


작전 종료 후에도 이어지는 임무수행 (PM 18:00 ~ 22:00)


막사로 복귀한 발굴병들의 표정을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하네요. 하지만 발굴병들의 일과는 막사 복귀 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복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 수습한 유해에 대한 기록을 전산화하는 것. 현장에서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받아 적은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키아티스(KIATIS: 6.25 전사자 종합정보체계)라는 국유단 고유의 전산망에 업로드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오늘 작전 수행 간 사용한 발굴 장비의 정비와, 내일 작전을 위한 출동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아니, 그럼 대체 언제 쉬나요?


“유해가 많이 나올 경우에는 그만큼 업무량이 많아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군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기기 때문에 지금은 예전보다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빠듯하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각자 체력 단련이나 독서 등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이젠 발굴병 생활에 도가 텄다는 한 상병의 답변에 여유가 넘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있는 사람 (PM 22:00)


막사 내 모든 불이 꺼집니다. 이제 발굴병들도 취침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침상에 등을 붙이자마자 다들 금세 곯아떨어지는군요. 오늘 하루도 참 고단했나봅니다. 그런데 분대장 김 병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군요. 혹여 후임들이 잠에서 깰까봐, 이불 속에 들어가 라이트펜을 켜고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분대장 수첩이라는 겁니다. 매일 매일 작성하는 건데, 우리 발굴 팀의 일기와도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 임무수행 간 있었던 실수나, 분대장으로서 좀 더 매끄럽게 지휘하지 못했던 점, 고민이 있거나 아픈 병사들이 있는지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아무래도 호국영령을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니, 이런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일은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작전에 임해야겠노라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진: 분대장은 매일 병사들의 애로사항과 임무수행의 결과를 기록한다)


발굴병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여러분, 지금까지 발굴병들과 하루 일과를 함께 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에 놀라셨나요? 실제로 발굴병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사명감이나 자부심 없이는 하기 힘든 임무라는 생각까지 드는데요,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S씨에게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이등병 때는 산 타는 것도 힘들었고, 임무수행 간 잦은 실수 탓에 선임들에게 혼나면서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매일 밤 침상에 누우면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지더군요. 호국영령을 모시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정도 고생도 감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나약하게만 느껴졌던 겁니다. 매일 매일이 반성의 연속이었죠. 전역한 지금은 오히려 발굴병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사진: 정교한 손길로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이처럼 오늘도 호국영령을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이 있기에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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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후임들을 보러 현충원 부대로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군 생활 하던 당시만 해도 '전역하고 후임들 면회하는 날이 올까' 싶었는데, 정말 왔군요. 전역하던 날만큼이나 싱숭생숭한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대학생 서포터즈다 뭐다해서 전역하고도 부대를 내 집 안방처럼 들락날락하긴 했습니다만, 정작 저와 군 생활을 함께 했던 후임들은 발굴작전을 나가 부대를 가도 만날 수 없었더랬습니다. 그래서 텅 빈 생활관만을 바라보다가, 공허한 발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후임들이 엊그제 전반기 작전을 마치고 모두 자대로 복귀했다고 해서 부랴부랴 면회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부대로 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고 마음도 많이 설렜습니다.


오랜만에 애들 얼굴 보니 정말 반갑더군요. 꽤 오랜 시간 서로의 얼굴을 못 보긴 했지만, 다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얼굴 표정이 어두운 애들도 없고... 전반기 작전 출동 당시 애들 보내놓고서도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됐는데, 안심이 됩니다. 무엇보다 군대는 건강이 최고인데, 어디 다친 데 없이 다들 건강해보여서 그게 제일 다행스러웠습니다.


어제는 특별히 커피를 좀 챙겨갔습니다. 전역하고 커피 공부를 하면서, 후임들에게 직접 내린 커피 한 잔씩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아무리 잘해주려고 노력했어도 제 폭정(?)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분대장을 내려놓을 때도, 말년에 애들 보내기 전에도 그동안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럼에도 늘 미안한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커피 한 잔으로 퉁치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담아 커피 한 잔씩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가뜩이나 팍팍한 군 생활, 전역한 선임이 타주는 커피 한 잔으로 다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그래서 커피 추출 도구들을 가방에 담아갔습니다. 원두 역시 면회 전 날, 남성역 근처 '달의 둥지'라는 유명한 커피집에서 품질 좋은 원두를 공수해왔습니다. 아침 일찍 미리 갈아둔 원두를 가지고, 후임들 보는 앞에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한 잔씩 대접했습니다. 대용량으로 추출하는 건 처음이라 대충 눈대중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챙겨갔는데, 생각보다 추출되는 양이 적더라고요. 넉넉하게 돌리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도 다들 '맛있다'며 잘 마셔주어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커피 한 잔씩 마시면서, 군 생활 힘들다는 후임들 하소연도 받아주고, 예전에 함께 군 생활하던 추억도 공유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습니다. 그러고있자니 문득 제 자신이 다시 '병장 김경준'으로 돌아간 느낌이더군요. 병사로 다시 군 생활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문득 그 시절이 그립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말년에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고, 애들이랑 노가리나 까면서 놀던 재미가 있었는데... 그 시절로 돌아가 딱 일주일만 더 말년 병장으로 군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헤어지기 전에 본청 앞에서 다같이 기념사진도 찍고, 돌아가는데 모두 손 흔들어 배웅해주는 것을 보면서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전역하던 날에는, 후임들 모두 작전 출동하고 없던 터라 제대로 된 배웅 한 번 받지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배웅을 받으니, 전역하던 날보다 더 뿌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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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SBS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나도펀딩'이라는 펀딩 사이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도 6.25 전쟁 발발 제66주기를 맞아, 뭔가 의미 있는 펀딩을 한 번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SBS와 공조하여 의미 있는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의 목적은 바로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이 쓸 물품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요즘 날씨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많이들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고생이 많을 이들은 바로 군인이란 직업을 가진 이들이겠지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불철주야 전/후방에서 고생하는 우리 국군 장병들... 이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요. 


특히나 제가 소속되어 있던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을 생각하면 참 안쓰럽습니다. 우리들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더위를 잠시나마 식히고 있는 그 시간에도, 우리 국유단 발굴병들은 여전히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이름 모를 산야를 오르고 또 오르고 있습니다. 


저도 발굴병으로서 군 복무를 하며, 두 번의 여름을 지내봤기에 그 열악한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더운 이 날씨에, 무거운 발굴장비와 물자를 짊어지고서 높은 산을 오르는 건 정말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유해가 식별되기라도 하면,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정밀발굴을 실시해야 합니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아래, 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유해를 노출하는 과정도 결코 녹록지는 않습니다. 달려드는 산벌레 떼는 말할 것도 없고요. 여름에 발굴할 때는, 지쳐서 말할 힘도 없더군요.


그래서 현장에서 고생하는 우리 후임 발굴병들을 위해, 작게나마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이번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은 7월 31일까지 진행되며, 목표액은 200만원입니다. 모금된 금액은 더위에 고생하는 국유단 소속 발굴병들을 위한 물품(아이스패드 및 물수건 등) 후원 비용 및 발굴된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례비용으로 쓰일 것입니다.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소액이라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액마저도 부담스럽다면, 주위 지인들에게 알려주기만이라도 해주십시오. 애국은 꼭 총들고 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야만 애국은 아닙니다.


펀딩 프로젝트 링크: http://nadofunding.sbs.co.kr/project/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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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전역한 지 이틀째.


이미 말년 휴가 때부터 '나가서 뭐 먹고 살아야하지?'하는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전역하고 나니 심사가 더 울적하고 불안해진다. 전역하면 마냥 즐겁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군 생활 2년 동안 남들보다 뒤쳐진데다가 나이도 있고 하니 정말 빨리 뭐라도 해야한다는 중압감에 마음이 무겁다.


이제 전역도 했으니 공식적인 '백수'가 된 셈인데,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마냥 집 안에 틀어박혀서 잠만 자는 것도 원하지 않는 일이라 오늘은 근처 관악산을 등산하기로 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산 중 하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친구 어머니 따라 가본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전역하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휴가 때만 되면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 결국 전역하고서야 오게 됐다.


특별히 준비랄 것도 없이, 그저 김밥 두 줄과 시원한 생수 한 병만 챙겼다. 물론 복장은 나름대로 완벽하게 갖추었다. 군 생활하며 입었던 발굴피복으로 완전 무장하고, 우리 단 캡모자까지 착용한 뒤에 전투화(발굴화)까지 신고보니 영락없는 발굴병의 모습이다. 사실 나한텐 이 복장이 가장 편할 수밖에 없다. 늘 산을 탈 때마다 이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산을 탔으니... 오랜만에 추억이나 느낄 겸, 일부러 발굴복으로 갖춰입고 집을 나섰다.




(사진: 오늘의 내 등산복장! 완전 발굴병 코스프레가 따로 없다)


사당역에서 관악산을 오르는 코스가 있다고 하여, 무작정 사당역으로 향했다. 내 손엔 지도도 없었다. 그저 주말에 사당역에 가보면 등산객들이 많이 몰려있었던 것만 생각하며, '어떻게든 길이 나오겠지'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평일 오전임에도 드문드문 등산객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 길이 맞나 싶을 때는 그 사람들을 이정표 삼아 따라갔다. 주택가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관악산 등산로 초입이 등장! 제대로 길을 찾았구나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았음에도 뒤돌아보니 경치가 아름다웠다. 저 멀리 내가 군 생활한 현충원도 보이고, 우리 집도 보이고, 63빌딩이며 한강이며 서울시내 한복판이 다 내려다보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올라갔던 것 같다. 특별히 힘들지는 않았지만, 목적지인 연주대까지 가는 시간은 정말 길어서 지루했다. 이정표 상으로는 소요시간이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나와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하러 가는 산이 아니어서 그런지 딱히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코스가 힘든 코스도 아니었고. 다만 목적지인 연주대에 다다르니 마지막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험한 암벽이었다. 






(사진: 관악산 등산 중 내려다 본 서울시내)


사실 중학생 때 처음 관악산을 탔던 기억은 내게 '악몽'으로 남아있다. 연주대를 코앞에 두고서 암벽이 무서워 한사코 안 가겠다고 버텼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일행들은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다녀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한심하다고 생각했을까. 부끄러운 일이다.


그때 당시의 기억은 약간은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기억이라, 굳이 관악산을 다시 찾은 것도, 나름 산 좀 탄다고 자부하는 국유단 발굴병 출신으로, 다시 한 번 정복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가 너무 관악산을 무시한 건지,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오만방자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시 타도 산이 험하긴 험해 겁이 났다.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길이니 우회하여 돌아가라는 경고문도 군데군데 있었다. 근데 애석하게도 우회로를 찾지 못해서, 결국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뒤를 돌아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앞으로 못 갈 것 같아서, 일부러 앞만 보고 전진했다. 암벽에 찰싹 달라붙어, 밧줄과 쇠사슬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으로 기어올라갔다. 끝 없는 암벽을 타고 올라서니 마침내 관악산 정상 도착!




(사진: 관악산 정상 도착!)


일단 무사 도착에 안도의 한숨을 푹 한 번 내쉬어주고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며 둘러보니, 평일임에도 등산객들은 꽤 있는 편이었다. 평일에도 이 정도인데, 주말엔 얼마나 사람이 많을까. 산은 역시 사람이 드문 평일에 타야 그 운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연주대는 신라 문무왕 때, 승려 의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초기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의상대'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를 듣고,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이곳을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연주대다.




(사진: 연주대를 배경으로 한 장 찰칵! 뒤에 보이는 암자가 연주대)


연주대에 가보니, 이미 많은 등산객들이 무릎 꿇고 저마다 각자의 소원을 부처님께 빌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소원 하나 빌어야겠다 싶어 합장을 하고 작은 소원(?)을 빌었다.


연주대에서 기도를 드린 뒤에, 연주대에서 조금 아래에 떨어져 있는 사찰 '연주암'에 들러 사찰 구경을 하고, 그곳에서도 부처님께 절과 기도를 드리고서, 점심을 먹은 뒤에 반대 방향으로 하산길에 올랐다. 






(사진: 관악산 연주대 근방에 위치한 사찰, 연주암)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서울대학교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길은 악명 높은 '깔딱고개'였다. 계단이 워낙 많아서 등산객들에게 정말 힘든 구간이라고 하는데, 나야 내려가는 입장이라서 힘든 줄 몰랐지만, 이쪽으로 올라왔으면 좀 힘들긴 했을 것 같다. (계단하면 또 악명 높은 화천의 무명 943고지를 잊을 수 없다)


그래도 사당역에서 정상으로 올라갈 때는 길이 너무 길어서 지루했는데, 이쪽 길은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졌다. 사실 올라가면서도, 어떻게 다시 반대로 내려가야하나 고민이었다. 그래도 이 길은 상대적으로 짧아서,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내려가다보니 어느새 서울대 캠퍼스가 나왔다. 물론 캠퍼스가 워낙 넓은지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내려가는 데 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긴 했다. 등산로를 따라 호수공원을 지나, 계속 걷다보니 어느새 서울대를 벗어나 삼성고등학교 앞까지 왔다. 마침 그곳에 정류장이 있어 버스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다.




(사진: 연주대를 배경으로 한 장)


관악산 연주대를 정복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내려오고 나니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좀만 더 천천히 오르고 내려가며 경치를 즐겼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랄까.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 수 있겠다. 발굴지에서 등산을 하면, 사브작사브작 천천히 오르는 게 아니라, 간부와 선임들의 눈치 때문에 죽기 살기로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짬이 차면 천천히 타고 싶어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빠르게 타고 있다. 덕분에 후임들은 나 따라오느라 죽을 맛이었다.


사실 난 타고난 성격도 급해서, 등산을 통해 '사브작사브작' 걸으며, 성격을 좀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싶었는데, 경치를 즐길 것도 없이 그저 빠르게 타다보니 이게 잘 안되는 것 같다. 등산모임이라도 나가야 할까봐.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도 하면서 천천히 타다보면 좀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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