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들어 술을 정말 끊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웬만큼 술을 먹어도 오바이트를 한 기억이 거의 없는데, 요근래 들어 벌써 두 번이나 오바이트를 했다. 게다가 어제는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비싼 돈 주고 사 먹은 여명이 아까울 지경이다.


무협지 속 영웅호걸들을 보면 술을 동이째 들이켜고도 내공으로 버티는데, 나는 몇 잔 술에 백기를 들고 말았으니 이거 은근히 자존심 상한다.


속이 울렁거리는 통에 도저히 택시를 타고 갈 자신이 없어서 그냥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를 지나 상도동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 40분. 무려 2시간을 걸었다. 


이렇게 오래 걸어본 건 또 오랜만이었다. 예전엔 광화문에서 집까지도 가볍게 걸어다녔는데 어제는 발도 아프고 걷다 디쳐서 중간에 여러 번 다리쉼을 했다. 


아무렴 술에 취해 평소보다 체력이 떨어진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만날 수련을 해놓고선 이렇게 지쳐버리다니... 또 한 번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 


요새 들어 술이 웬수처럼 느껴진다. 늘어나는 뱃살도 그렇고.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든 것도 그렇고. 모두 다 이놈의 술이 원인 아닐까.


마침 <어느 애주가의 고백>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도 술이 깬 뒤 찾아오는 숙취의 고통과 갈수록 나빠지는 건강을 언급하면서 술을 끊으라 권하고 있다. 


나 역시도 요새 들어서는 술 마실 때의 즐거움보다 술 마신 뒤 찾아오는 피곤함과 허무함, 고통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지는 듯 싶다. 요즘 혼술을 자제하고 있었는데 그냥 술 마시는 행위 자체를 끊어야 할 때가 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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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처음 읽었던 때 말이다. 꽤나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젠 책 속의 구절들도 가물가물하지만 소설을 읽던 당시의 감정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


답답함, 굴욕감, 분노. 차라리 이 모든 내용이 픽션이었으면 하는 헛된 바람을 품었을 정도로, 무기력하고 굴욕적인 우리네 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된 병자호란은 조선의 역사, 아니 5천 년 민족사를 통틀어 가장 굴욕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한때 '야만족'이라 깔보던 여진족들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조선 임금의 무릎을 꿇린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렇다 할 전투조차 치러보지 못한 채 너무도 빠르고 무기력하게 항복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비감에 젖게 만든다.


원작 소설의 충실한 반영


처음 영화 <남한산성> 제작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대중들은 기대보다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박희순 등 내로라하는 명품배우들을 총출동시켰다지만 적을 물리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나 극적인 반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패배와 굴종의 역사에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던 걸까. 지난 3일 개봉한 <남한산성>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매우 뜨거웠다. 개봉 직후 <킹스맨: 골든 서클>을 제치고 예매율 1위를 달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반응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비록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장면들은 없었지만 병자호란의 비극적인 역사를 스크린에 제대로 구현해냈다는 평들이 쏟아졌다. 특히 동명의 원작 소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평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영화 <남한산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얘기일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영화는 김훈 소설이 갖는 특유의 '비장미'와 '절제미'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구체성 없이 모호하면서도 은유적인 김훈만의 문장이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의 성격으로 고스란히 구현된 것이다. 


최명길과 김상헌, 과연 누가 옳을까


영화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청나라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분)과 적극적인 항전을 부르짖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 분)의 대립 구도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줄기다.


최명길은 적진과 남한산성을 끊임없이 오가며 나라와 백성이 모두 '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찾은 답은 화친이다. 조선군의 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무모한 항전이 오히려 '말(言)의 길'을 끊어 더 큰 피를 부르게 될까 고민하고 두려워한다. 


반면 대의명분으로 무장한 김상헌은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하는 전형적인 선비다. 싸워보지도 않은 채 적에게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함부로 맡길 수 없다며 "차라리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라"고 부르짖는다.


영화는 최명길과 김상헌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논리적 정당성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고 있을 뿐이다. 


관객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나라와 백성부터 살리고 보는 것이 먼저 아니겠냐는 최명길의 주장도, 적에게 구걸하여 얻어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김상헌의 주장도 제각각 일리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동혁 감독 역시 인터뷰에서 "(남한산성은)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며 관객들 스스로 판단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위정자들의 책임 회피에 대한 통렬한 비판


다만 영화는 또 다른 대립 구도를 설정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로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자들과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의 대립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방법은 달랐어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운 충신들이다. (사사건건 서로 반대만 할 것 같은 그 둘도 영화 속에서 때때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 둘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무겁게 여겼으며, 그 책임감에서 자신만의 신념이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각자가 목숨 걸고 화친과 항전을 부르짖은 것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반면 영의정 김류(송영창 분)를 비롯한 대다수 중신들은 상황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를 반복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데만 급급하다.


최고결정권자인 임금 인조(박해일 분) 역시 다르지 않다. 인조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신료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고 도망치려고만 한다. "나는 살고자 한다"는 그의 한 마디에 나라와 백성보다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라는 그의 무책임한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영화는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보다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선 자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더욱 강하게 비판한다. 그들의 '찌질함'을 더 노골적으로 비꼬기 위해, 영화는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대화 장면을 마치 만담처럼 우스꽝스럽고 과장되게 연출하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이 여의도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영화가 보내는 메시지가 뜨끔하게 다가오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정치적 현실이 겹쳐 보이는 탓이다. 여의도의 그 많은 정치인들 중에 자신의 가슴에 달린 '금배지'의 무게를 무겁게 여기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헌정 사상 초유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부결 사태 앞에서도 상황의 엄중함과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가 결정권을 가졌다"며 득의만만하던 한 야당 대표의 말만 봐도 병자호란 당시의 위정자들과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다. 사드·북핵 등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외교·안보적 현안 앞에서 미·중 강대국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백성들이 그랬듯 이제 우리들도 위정자들의 현명한 '선택'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선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지 않는다. 다만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으로부터 회피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책임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이다. 이제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길을 걸을 것인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길을 걸을 것인지 말이다.


[일러두기]


* 해당 글은 <오마이스타> 기사로도 보도됐습니다

* 첨부한 스틸컷의 저작권은 영화 <남한산성> 배급사인 CJ 엔터테인먼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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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열심히 글을 썼더니, '이 달의 게릴라'로 선정되어 부상으로 원고료 20만원을 받았습니다.


꽁돈이 생겨서 기분이 매우 좋더군요. 충동적으로 양주 한 병 질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후의 만찬 당시 즐겼던 술로 유명한 '시바스 리갈' 12년산이었습니다. 양주는 확실히 비싸더군요. 500ml 한 병이 3만원을 호가하다니... 중국 바이주나 우리 전통주가 정말 저렴한 편이었습니다. 사실 양주랑 저랑은 잘 맞지도 않는 터라... 어쩌다 한 번 기분 내려고 산 거지, 앞으로는 잘 안 먹을 것 같습니다.


원래는 혼술로 마시려고 했습니다만, 혹시 몰라 군 복무 당시 선임들과 함께 만든 단톡방에 "같이 시바스 리갈 깔 사람?" 하니 덥썩 미끼를 물어오는 친구가 있더군요. 덕분에 술 친구도 생기고 해서 좋긴 했습니다만... 술이란 게 끝도 없이 들어가는 게 함정이었습니다. 3만원짜리 양주 한 병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셔버리고, 그도 모자라 "중국 백주가 먹고 싶다"는 그 친구를 중국집으로 데려가 연태 고량주까지 두 병 마시고... 3차로 술국 하나 시켜놓고 소주를 4병이나 깠습니다.


덕분에 그 친구나 나나 완전 꽐라됐습니다. 어떻게 집에 오긴 왔는데, 집에 온 이후로 기억이 없네요. 원래 아무리 취해도 집에 오면 무조건 씻고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고대로 뻗었더라고요. 나중에 카드 내역 확인해보니까 이날만 10만원 가까이 썼습니다. 아휴...  그 친구가 만취하는 바람에 제가 돈을 또 다 냈거든요.


꽁돈 생겼다고 너무 좋아했나봐요. 가난한 휴학생이 기분 탓에 내지른 돈 치고는 후유증이 너무 큰 듯 합니다. 차라리 이 돈으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사면 좋았을텐데,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뭔 소용인지... 당분간은 돈도 아낄 겸, 스스로에게 금주령을 내려야겠습니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살 것도 많으니, 앞으로는 돈이 들어와도 절약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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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상으로는 이미 입추(立秋)가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날씨는 무덥습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유난히 매섭듯, 가을을 시샘하는 늦더위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은 것 같군요.


확실히 날이 덥다보니까 여러모로 기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사실 핑계에 가깝지만, 날이 덥다보니까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게 사실이에요. 무예 수련도 자꾸 거르게 되고, 가만히 앉아서 독서하는 것도 힘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 두드리는 것도 귀찮네요. 집에 있는 에어컨은 누진세다 뭐다 세금 폭탄이 무서워 이미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랩니다. 


너무 더워서 집에 처박혀있는 것조차 괴롭기 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딱히 스케쥴이 없어도 아침만 되면 무작정 집을 나섭니다. 책 한 권 들고서요. 처음에는 어딜 가야할지 몰라서 무작정 도심을 배회했는데,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재밌는 구경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는 여의도 IFC몰에 갔습니다. 건물 전체가 에어컨이 빵빵하니 돌아다녀도 지치질 않더라고요. 오히려 춥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IFC몰에는 영풍문고가 있어서 거기 앉아서 밀린 독서를 했습니다. 책 읽다가 출출해지면 바로 아래층 푸드코트 가서 밥도 사먹고, 후식으로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받아들고 다시 서점가서 독서하고... 그러다 졸음이 쏟아지면 돌아다니면서 상점 구경하고...



어제는 해금을 수리하러 간 김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위치한 강남 센트럴시티에 갔습니다. 여긴 IFC몰보다 볼 거리, 즐길 거리가 더 많더군요. 이곳에 입점한 반디앤루니스는 여의도 IFC몰의 영풍문고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규모가 장난 아니더군요. 그냥 역사 코너 한 칸만 둘러봐도 그 방대한 양에 질릴 정도였습니다. 과장 좀 보태서 말하자면, 죽기 전까지 이 코너에 있는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아무튼 만날 집에만 처박혀있다가, 이렇게 도심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사람 구경, 건물 구경을 하니 나름 시간도 빨리 가고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누진세 걱정 없이 빵빵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으니, 이렇게 저렴한 피서도 없을 듯 합니다. 밀린 독서를 할 수 있으니 생산적이기도 하고요.


다만 충동구매의 유혹과 싸워야 하는 게 좀 힘듭니다. 워낙 먹을 거리, 볼 거리, 즐길 거리가 많아서요. 지갑은 얇은데, 서점에만 가도 사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고, 백화점에 가면 산해진미가 몰려있다보니 자꾸 돈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역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돈만 밝히는 속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돈 없으면 이런 것도 못 즐기는 게 사실이니까요. 늘 산해진미를 즐기고, 명품을 수집하면서 귀족처럼 살자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은 내가 먹고 싶은 게 있거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지갑 걱정할 필요 없이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은 갖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역시 젊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겠죠.


어쨌거나 이럴 때 노트북이 있었다면 시원한 카페 같은 곳에 죽치고 앉아 블로그 포스팅도 하고, 이런 저런 글도 좀 쓸텐데 휴대용 PC가 없는 게 한이네요. 어쨌거나 저녁엔 집에 돌아와야 하는데, 열대야 탓에 집에서는 집중해서 작업을 한다는 게 여전히 버겁더라고요.


그러니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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