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SBS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나도펀딩'이라는 펀딩 사이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도 6.25 전쟁 발발 제66주기를 맞아, 뭔가 의미 있는 펀딩을 한 번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SBS와 공조하여 의미 있는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의 목적은 바로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이 쓸 물품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요즘 날씨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많이들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고생이 많을 이들은 바로 군인이란 직업을 가진 이들이겠지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불철주야 전/후방에서 고생하는 우리 국군 장병들... 이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요. 


특히나 제가 소속되어 있던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을 생각하면 참 안쓰럽습니다. 우리들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더위를 잠시나마 식히고 있는 그 시간에도, 우리 국유단 발굴병들은 여전히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이름 모를 산야를 오르고 또 오르고 있습니다. 


저도 발굴병으로서 군 복무를 하며, 두 번의 여름을 지내봤기에 그 열악한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더운 이 날씨에, 무거운 발굴장비와 물자를 짊어지고서 높은 산을 오르는 건 정말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유해가 식별되기라도 하면,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정밀발굴을 실시해야 합니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아래, 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유해를 노출하는 과정도 결코 녹록지는 않습니다. 달려드는 산벌레 떼는 말할 것도 없고요. 여름에 발굴할 때는, 지쳐서 말할 힘도 없더군요.


그래서 현장에서 고생하는 우리 후임 발굴병들을 위해, 작게나마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이번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은 7월 31일까지 진행되며, 목표액은 200만원입니다. 모금된 금액은 더위에 고생하는 국유단 소속 발굴병들을 위한 물품(아이스패드 및 물수건 등) 후원 비용 및 발굴된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례비용으로 쓰일 것입니다.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소액이라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액마저도 부담스럽다면, 주위 지인들에게 알려주기만이라도 해주십시오. 애국은 꼭 총들고 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야만 애국은 아닙니다.


펀딩 프로젝트 링크: http://nadofunding.sbs.co.kr/project/51/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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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35008265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설악산 상봉/신선봉을 가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1)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연재!


​여러분! 저는 2014년 8월부터 2016년 4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에서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였는데요,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며 겪은 에피소드들을 바탕으로, 이번 6월부터는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라는 주제의 시리즈를 연재하려 합니다. 서포터즈 중 유일한 국유단 출신으로서, 앞으로 여러분께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를 가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좀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중 하나라는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에서의 유해발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그때 그 당시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잊을 수 없는 그곳, 설악산 상봉/신선봉


유해발굴병들은 보직의 특성상,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 유해발굴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러다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요, 제겐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이 그랬습니다.



▲ 설악산 상봉 발굴현장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2014년 7월에 입대하여 아직은 어리바리한 이등병 시절이었던 그해 10월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속한 발굴4팀은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에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는데요, 이곳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는 1951년 5월 당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제6사단 및 제12사단에 맞서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밀고 밀리는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였습니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기에, 이곳에서 산화한 호국영령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끔찍한 악몽으로만 다가왔던 상봉과의 첫 만남


상봉에 오르기 위해,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이나 지났을까요?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저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제가 메고 있던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저 역시 다시 이를 악물고 오르기 시작했는데요,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야만 했습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제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 신선봉의 첫 기억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현장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도착한 정상. 하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도 잠시, 이내 제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곳에 유해가 있단 말이야?’




▲ 상봉에서 유해를 발굴하는 병력들의 모습


정상에 오른 제 눈앞에 펼쳐진 발굴현장의 모습은, 그동안 봐왔던 발굴현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온 사면이 바위로 뒤덮인 산에서 대체 어떻게 발굴을 진행하며, 이곳에 과연 유해가 있긴 한 것일까...


발굴기법 역시 생소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보통 유해발굴은 삽과 호미 등을 이용해,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사면을 깊게 파면서 퇴적층 내 유해의 매장 여부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굴토를 진행하는데요, 상봉은 이런 기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답니다.



▲ 스크린(발굴장비)을 이용해 조각유해를 찾는 필자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에, 모두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식별된 첫 유해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지며, 차츰 전쟁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된 순간!


그 당시의 솔직한 감정은 ‘놀라움’과 ‘당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곳에 유해가 있었다니!”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저처럼 의문을 갖고 있던 발굴병력들 역시 “정말 이 땅에 전쟁이 있긴 있었구나!”하며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습니다.



▲ 상봉에서 식별된 조각유해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러나 식별된 유해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놀랐던 감정은 차츰 안타깝고 숙연한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발굴되는 유해들의 형태가 그 부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 발굴된 유해를 정성껏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보통 많은 사람들은 유해발굴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유해의 형태를 떠올리곤 합니다. 실제 발굴현장에서는 두개골 포함 잔존율이 60% 이상인 유해에 대해서는 ‘완전유해’라 부르고, 그 미만인 유해는 ‘부분유해’라고 명명합니다. 하지만 상봉에서 발굴된 유해는 부분유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게 ‘조각유해’라 불리웠는데요, 정말 심하게 훼손된 유해 중에는 성인 남성의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유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유해를 입관하고, 태극기로 관포하는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왜 유달리 조각난 유해들이 많이 식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양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설악산 상봉에 올라서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는데요, 바로 적의 군함들이 동해바다에서 이곳 상봉에 주둔한 아군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많은 호국영령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산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의 형태를 보면서, 당시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 유난히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유난히 먹먹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설악산 발굴


당시 현장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제 심경은 복잡했습니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에도 힘든 이 험한 산에서,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넋들... 6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국의 ‘귀환’ 명령만을 기다리며 외로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안타까운 영혼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려왔기 때문입니다.



▲ 약식제례 및 유해봉송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은 사실상 신원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DNA 대조를 위해서는 유해에서 시료 채취를 해야만 하는데, 이처럼 작은 조각유해에서는 DNA 시료 채취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설악산에서 유해를 수습할 때의 기억은 가장 가슴 먹먹한 기억으로 제게 남아있습니다.


​잊지 말자, 그들을...


​2016년 4월 13일, 마침내 1년 9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면서 저는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현장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는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과,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하던 기억, 조각유해들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리고 혹여나 우리의 불찰로 인해 미처 찾지 못해 여전히 그곳 어딘가에 잠들어있을지도 모르는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호국영령의 유해들이 여전히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조국의 품으로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바로 ‘그들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아울러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호국영령들의 신원확인을 위해, 유가족 DNA 시료 채취에도 적극 동참하는 것. 이것이 호국영령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사진을 제공해주신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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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번째 호국영웅,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가족의 품

- 故 양만승 경위 유해송환 행사 현장에 다녀오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오늘은 서포터즈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행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귀환 행사인데요, 처음에는 덤덤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했던 저도,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어느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니, 여러분도 어떤 행사인지 많이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겠습니다.


호국영웅 귀환행사가 열리다


지난 5월 18일, 경기도 수원의 어느 식당 앞 골목.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던 골목이 갑자기 외부인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웅의 유해가 유가족에게 인도되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호국영웅은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그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의 신분으로 적과 싸우다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는데요, 그의 생애를 잠시 알아보고 갈까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무궁화꽃 한 송이


故 양만승 경위는 1927년 4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양 경위가 24세 때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고, 적화통일의 위기에 처하자, 경찰 역시 ‘軍과 더불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신념 아래, 적극적으로 국토 보위에 나서게 되었는데요,


1950년 7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벌어진 ‘호남지역 전투’에 양 경위 역시 해남경찰서 소속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호남지역 전투는 전라북도 일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6사단에 맞서, 우리 국군 5사단과 7사단 그리고 경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벌인 방어 전투였습니다. 이때 해남경찰서 소속 1개 소대 병력들은 영광 삼학리 지역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방어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7월 23일, 치열한 접전 끝에 양 경위는 적군의 총탄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렇게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발굴되기까지 6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113번째 신원확인의 주인공


유가족 송환 행사는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은 행사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유가족인 외조카 김점덕 씨의 손을 맞잡으며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이에 김점덕 씨는 “감사합니다. 국방부에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어 김종성 감식과장에 의해 故 양만승 경위를 발굴하게 된 과정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습니다. 


1950년 7월 23일, 영광 삼학리에서 적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양 경위는 함께 전사한 동료 37명과 함께 집단으로 임시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7년의 어느 날. 영광 삼학리에서 전사한 경찰관들의 유해가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은 유해발굴감식단은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이 지역 일대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38위의 호국영령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독수리 문양 뱃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 뱃지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들이 소지하고 있던 뱃지라고 하는데요,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해남경찰서의 경찰사(史)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였고, 그 결과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현 발굴지점에서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것으로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전사한 경찰들의 유가족을 찾아 시료 채취를 한 뒤, DNA 대조로 38위 중 9위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29위의 호국영령은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용사’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이 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로 양 경위도 있었습니다.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다시 유가족을 수소문해 찾기 시작했고, 추가적으로 9위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 경위 역시 이 과정에서 유가족을 찾아 신원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요, 이로써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이루어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선진국의 척도


김종성 감식과장의 브리핑이 끝난 뒤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유가족 위로패’와 양 경위를 발굴할 당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를 담은 ‘호국의 얼’ 함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이학기 단장은 국방부 장관을 대신하여 유가족에게 ‘전사자 신원확인 통보서’를 전달함으로써 행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경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김태수 수원중부경찰서장은 “6·25 전쟁 당시 많은 경찰관들이 전사했는데, 경기도에서만 6,700여명이 전사했다. 아직 못 찾은 분들도 많은데, 나라를 지킨 호국영웅들에 대한 보답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행사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요, “아직 못 찾은 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유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분들을 찾아서 전사자 신원확인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찰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군을 대표하여 참석한 51사단 168연대장 박일권 대령 역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故 양만승 경위의 유해를 발굴해주어서 다행스럽다”며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국가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얼마나 잘 대우해주는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을 찾아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남매의 상봉


故 양만승 경위에게는 유일한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 결국 오빠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15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양 경위의 여동생은 임종 직전, 자식들에게 “나중에라도 꼭 너희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마침내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 외조카 김점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그녀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외삼촌을 찾아 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다”고 연신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양 경위의 매제인 김용길 씨 역시 “아내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반갑겠는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오빠였으니까...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무 아쉽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 이제는 하늘에서 남매가 상봉하여,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남매의 정(情)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았습니다.


15년 만에 받든 어머니의 유언


행사가 끝난 뒤, 또 다른 유가족인 김철현 씨(외조카)에게 오늘 행사를 지켜본 소회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며 “갑자기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가족 모두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또 그는 “외삼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께서 누누이 외삼촌에 대해 말씀하셨다”며 “어머니께서는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에게 꼭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회고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유가족 DNA 시료 채취, 그리던 가족을 찾는 길


이처럼 유해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것이 곧 국가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들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책무라고도 할 수 있으며, 6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유가족의 한(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발굴된 유해가 모두 신원을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번에 귀환한 故 양만승 경위 역시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되었는데요, 유해발굴감식단이 15년 동안 발굴한 국군 전사자는 총 9,100여위. 그중 단 1.2%의 유해만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신원확인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 유가족의 DNA를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유해발굴 뿐만 아니라, 전사자를 찾지 못한 유가족의 DNA 시료 채취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에, 유가족 DNA 시료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또 유가족 DNA 시료 채취라는 것에 대해 생소한 분들은 복잡하고 무서운 병원검사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가족 DNA 시료 채취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면봉으로 입 안의 타액(침)을 적시는 것만으로, DNA 시료가 충분히 확보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단 1분의 투자가 여전히 60년 동안 차디찬 땅 속에서, 혹은 ‘무명용사’라는 이름 아래 현충원에 잠들어있는 호국영웅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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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18173026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한 후, 처음으로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글!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첫 번째 글이, 내가 쓴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특성상, 내가 보낸 원본 글이 100% 다 실리지 못하고, 반토막 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잘 써서 다 올리고 싶었지만, 용량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담당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블로그 포스팅이란 것 자체가 너무 길면 또 지루해질 수도 있어서... 포인트만 담아 글을 짧게 쓰는 것도 중요한 글쓰기 요령인데, 나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볼까나.


PS. 개인 블로그이니만큼 나중에 원본 글도 따로 올릴 생각이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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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최종 합격자 발표가 떴다.


결과는... 최종 합격!


솔직히 지원자 중 유일한 전역자 출신인데다가, 얼마 전까지 한솥밥 먹던 식구들이었는데 안 뽑아줬으면 정말... 서운할 뻔 했다. 뭐 어쨌거나 붙었으니까... ㅋㅋㅋ


어제 면접 때도 강조했지만, 나의 유일하다시피 한 강점은 '국유단 출신'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국유단 출신이라고 해서 내가 특별한 존재라거나, 남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1년 9개월 가까이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면서, 유해발굴에 대해 빠삭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점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그래도 국유단 출신인데 비국유단 출신보다 더 잘해야지,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부담감이랄까?


아무튼 전역자 출신으로서 전역 후에도 부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몸소 보이고 싶다. 그래야만 앞으로 2기, 3기가 계속 배출될 때에도 또 다른 전역자들이 열심히 지원할테니까...


PS. 다음 주 금요일 발대식 때 발굴현장 체험 간다는데... 우리 팀 발굴지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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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국립서울현충원 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에서 대학생 서포터즈 1기 면접심사가 있었다.


나 역시 1차 서류심사 합격자로서, 면접에 응하기 위해 현충원으로 향했다. 전역한 지 3주 만에 다시 현충원에 오다니...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미 현충관 앞에 도착하니 단으로 들어가는 샛길 앞에 안내판과 함께 아는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국유단 본청 전경)



(사진: 국유단 서포터즈 면접 안내판)


면접대기실인 2층 회의실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지원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면접 대기 시간 동안 국유단 관련 영상물을 시청했는데, 우리 팀이 작년에 철원 광덕산에서 발굴할 때 촬영했던 KBS <남북의 창> 영상도 나오고, <진짜 사나이 2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편>도 나오는 걸 봤다. 뭐 나야 군 복무하면서 실컷 봤던 내용들이긴 했지만, 함께 동고동락하며 발굴했던 멤버들이 등장하는지라 반가운 얼굴들 보는 재미로 감상했다.




(사진: 면접대기실로 활용된 회의실... 여기도 정말 오랜만이다)


면접 대기하는 동안, 나는 오랜만에 간부님들께 인사나 드리려고 돌아다녔다. 이번 서포터즈를 담당하는 공보장교님도 반가워하시면서 "국유단 전역자라고 해도 특별히 가산점 주고 그런 거 없으니까, 똑같이 긴장하고 열심히 보라"고 하셨다. (덕분에 긴장을 좀 더 하게 된 것 같다) 예전에 함께 당직을 서기도 했었던 탐사관 한 분은 "어떻게 왔냐"며, "사무실에 내 발굴복 있으니까 갈아입으라"고 농담도 하셨다. 하여간 마주치는 간부들 대부분 "어떻게 왔냐"는 반응이다 ㅎㅎ.. 심지어 지역대장님은 "이제 전역하려고 인사하러 왔나?"고 하셔서 당황... 분명 전역하기 하루 전날에 인사도 드리고, 간부사관 관련 상담도 길게 했던 것 같은데... 아직도 내가 전역 안 한 줄 알고 계실 줄이야... ㅜㅜ


면접 보기 직전에 공보장교님 인솔 하에 지원자들이 1층 로비에서 전시된 유품들을 보며 유해발굴사업의 의의를 듣는 시간이 있었다. 임시감식소도 들어갔는데, 마침 한-미 공동감식 관련하여 미국 DPAA 쪽 관계자들도 와 있었다. 감식소에서 일하던 감식병들은 내 얼굴보고 깜짝 놀라고, 나는 그저 그 상황이 웃겨서 웃어주고...ㅎㅎㅎ





(사진: 국유단 1층 로비에서 공보장교님의 설명을 듣는 지원자들)


이윽고 면접 시간이 되었다. 면접은 접견실에서 4인 1조로 이루어졌다. 사실 접견실은 전역하기 전에 짱박혀서 커피나 마시면서 접견병과 한담이나 나누던 내 집 안방과도 같은 곳이었는데, 면접이 뭐라고 또 긴장이 되는 건지... 현충원 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 볼 생각에 설레기만 했는데, 막상 면접을 볼 때가 되니 가슴이 두근두근... 내 집 안방이나 다름 없는 곳에 왔는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우스웠다.


들어가니 면접관이 세 분 계셨는데, 계획운영과장님, 공보장교님 그리고 유브레인 측 면접관 한 분이 계셨다. 한 10~15분 정도 면접을 본 것 같은데, '자기소개', '지원동기', '서포터즈가 된다면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와 같은 상투적인 질문들이었고, 유브레인 측 면접관께서 "서포터즈가 되면 팀 활동을 해야하는데, 팀 활동에 있어 중요한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는가"와 같은 제법 신선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다.


자기소개와 지원동기, 서포터즈가 되면 하고 싶은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나의 강점은 국유단 전역자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예비역들이 전역하고 나면 군 복무 한 방향으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들 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런 행동들이 스스로 수행한 임무에 대한 자긍심을 갖지 못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국유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역자 출신으로서, 내가 수행한 임무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어 지원하게 되었다"


"나의 소원은 남북의 평화통일이다. 통일부에서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우리 역사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를 제작하곤 했고, 군 복무를 하면서도 유해발굴과 통일이 어떻게 연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곤 했다. 현재 북한 지역에서는 유해발굴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데, 북한 지역에 있는 유해를 발굴하지 않는다면 남아있는 북녘의 이산가족들도 가족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여 나는 서포터즈가 된다면 나의 장기인 글쓰기를 살려, 북한 지역 유해발굴이 남북의 평화통일과 남북관계 개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런데, 활동 포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말을 좀 많이 더듬고 버벅거린 것 같다. 긴장을 한 탓인지, 제대로 준비를 안 하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는대로 말하다보니 그런 것인지... 지금 정리해보니 너무 이상하게 말한 듯... 그래도 의미전달이라도 똑바로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지난 3월 중국군 유해 인도식 당시 찍은 단체사진. 맨 왼쪽의 전투복을 입은 놈이 바로 나다 ㅎ)


면접을 마치고, 발굴과와 계획운영과에 가서 간부 및 계원들에게 인사도 하고 서로 근황도 나누었다. 간 김에 코팅지가 벗겨진 내 전역증도 다시 만들었다 ㅋㅋㅋ 본부중대에 가서 중대장님과 행보관님한테도 인사드렸다. 행보관님이 제일 반가워하신 것 같다. 옆에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전역 후 근황도 말씀드리고, 나가서 할 것도 없고 그래서 재입대도 진지하게 고려 중이라고 말씀드렸다. 행보관님도 여전하신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행보관님과 이야기하고 나오는데, 내 집이나 다름없던 5생활관에 잠깐 들러, 내가 쓰던 침상에 잠깐 앉아 감상에 빠졌다. 내 관물대와 침상은 여전히 그대로 있고, 군 생활하면서 쓰다가 전역하기 전에 두고 간 세면바구니도 그대로 있었다. 물론 3주 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軍 생활이기에... 내 침상도, 관물대도, 생활관도... 그리고 사람들도 너무 그립기만 하다.


다른 후임들하고도 만나서 얘기 좀 하다가 나왔는데, 뭐랄까... 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역하고 솔직히 어디 마음 붙일 때가 없어 힘들었다.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고, 만날 사람도 별로 없고, 아직 사회화가 덜 되어서 여전히 군대 꿈만 꾸고 있고... 그런데 내가 군 생활하던 단에 와서, 정든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나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정말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가 아닌가 싶은 착각도 들었다.


뭐 어쨌거나...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원자 중 내가 유일한 전역자인 것 같던데... 유해발굴 관련해서는 그 누구보다 정통할 수밖에 없는 전역자 출신으로서, 나의 강점을 살려 한 번 열심히 해보고 싶다. 전역자들이 전역 후에도 자기가 수행한 임무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그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모범을 보이고 싶다. 그것은 곧 내 군 생활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니까.



(사진: 기념품으로 받은 수첩과 코인)


PS. 기념품으로 수첩과 코인을 받았다. 국유단 발굴병 지원 면접 때 기념품으로 받은 코인과, 전역병 간담회 때 단장님으로부터 받은 코인... 그리고 오늘 서포터즈 지원 면접 때 기념품으로 받은 코인까지... 난 국유단 코인이 무려 세 개나 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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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차 서류심사 결과가 나왔다.

나도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들어가 있다. 다음 주 면접이라고 하는데... 그럼 나는 전역한 지 2주 만에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겠군아... ㅋ


이 소식을 다른 전역자들에게 말했더니,


"ㅋㅋ 형은 진짜 전역 안 한 것 같아. 전역하고 이렇게 군대랑 못 떨어지는 사람 첨 봄"


이라고 카톡 답장이 돌아왔다.


하기사 전역한 지 이틀 만에, 발굴복 입고 관악산 등산을 하질 않나, 전역하고 9일 만에 간부들을 다시 만나지를 않나... 또 집도 자대가 있던 현충원 바로 옆 동네라, 군대와의 인연은 끈질긴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뭐 흔히들 전역하고 나면 내가 복무했던 부대 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나는 진심으로 군 시절이 그립기 때문이다.


아무튼 전역한 지 2주 밖에 안 된 국유단 출신인데다가, 간부들하고도 친하기 때문에, 다른 대외활동과는 달리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지원하긴 했다. 그래도 합격자 명단을 보니 경쟁률이 꽤 높은 것 같다. 다른 지원자들보다 '국유단 출신'이라는 게 가장 큰 메리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오히려 이 메리트를 잘 살려서, 남들보다 면접을 더 잘보려 노력해야겠다.


PS. 사실 부대랑 집이 가까워 놀러가려면 매일 놀러갈 수도 있지만, 딱히 명분이 없어 갈 생각은 못 했다. 다행히 면접이라는 명분이 생겼으니, 다음 주에는 오래간만에 간부님들께 인사도 드리고 후임들 얼굴도 보고 와야겠당. 면접보단 애들 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네~ 잇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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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국방부 직할기관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단훈을 공모한다는 소식입니다.


사실 저희 부대에는 '비례삼불 귀가국선(非禮三不 歸家國宣)'이라는 단훈이 존재하긴 합니다. 2대 유차영 단장이 직접 만든 이 단훈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비례삼불의 경우 '비례불사(非禮不思)', '비례불촉(非禮不觸)', '비례부동(非禮不動)'으로 '예를 갖추어 모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유해를 발굴할 생각도 하지 말고, 만지지도 말고, 옮기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뒤의 귀가국선은 '유해를 발굴해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국가가 앞장서서 선양해야 할 의무'라는 뜻입니다.


나름대로 괜찮은 뜻이긴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단훈이 한자어라서 너무 딱딱하고 어렵다는 여론에 따라 새 단훈을 제정하자는 공론이 일었고, 병사와 간부들을 대상으로 단훈 공모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저도 단훈 공모전에 참여했었고, 全 간부/병사 투표를 통해 최종 단훈 심사까지 진행한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끝내 결정되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대국민 공모전으로 전환해서 더 기발하고 의미 있는 단훈을 찾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공모요강>


- 이해하고 기억하기 쉬운 간명화된 문장, 문구, 단어로 단훈을 표현 (30자 이내)

ex. 국가를 위한 고귀한 희생 / 조국, 희생, 선양 /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 단훈의 선정 이유와 의미에 대하여 자유 형식으로 기술


<참여방법>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공식 홈페이지(http://www.withcountry.mil.kr/)에 접속하여, '참여마당' - '단훈공모' 게시판에 '비밀글'로 등록


<유의사항>


- 소속, 이름, 연락처를 반드시 작성


<포상 및 혜택>


- 단훈 채택자에게는 소정의 포상품 지급

- 모든 참가자 중 추첨을 통해 기념품 지급


포상도 포상이지만, 내가 직접 기안한 단훈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라는 국가적 사업을 수행하는 국직기관의 단훈으로 쓰인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일까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많은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오래간만에 머리 한 번 굴려봐야겠네요.. ^^;;;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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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역했지만 그래도 나의 청춘을 바쳤고, 나의 추억이 깃든 부대라 애틋하다.

16년에도 다들 안 다치고 무사히 발굴 임무 수행했으면 좋겠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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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전역한 지 이틀째.


이미 말년 휴가 때부터 '나가서 뭐 먹고 살아야하지?'하는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했는데, 전역하고 나니 심사가 더 울적하고 불안해진다. 전역하면 마냥 즐겁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군 생활 2년 동안 남들보다 뒤쳐진데다가 나이도 있고 하니 정말 빨리 뭐라도 해야한다는 중압감에 마음이 무겁다.


이제 전역도 했으니 공식적인 '백수'가 된 셈인데,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마냥 집 안에 틀어박혀서 잠만 자는 것도 원하지 않는 일이라 오늘은 근처 관악산을 등산하기로 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산 중 하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친구 어머니 따라 가본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전역하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휴가 때만 되면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 결국 전역하고서야 오게 됐다.


특별히 준비랄 것도 없이, 그저 김밥 두 줄과 시원한 생수 한 병만 챙겼다. 물론 복장은 나름대로 완벽하게 갖추었다. 군 생활하며 입었던 발굴피복으로 완전 무장하고, 우리 단 캡모자까지 착용한 뒤에 전투화(발굴화)까지 신고보니 영락없는 발굴병의 모습이다. 사실 나한텐 이 복장이 가장 편할 수밖에 없다. 늘 산을 탈 때마다 이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산을 탔으니... 오랜만에 추억이나 느낄 겸, 일부러 발굴복으로 갖춰입고 집을 나섰다.




(사진: 오늘의 내 등산복장! 완전 발굴병 코스프레가 따로 없다)


사당역에서 관악산을 오르는 코스가 있다고 하여, 무작정 사당역으로 향했다. 내 손엔 지도도 없었다. 그저 주말에 사당역에 가보면 등산객들이 많이 몰려있었던 것만 생각하며, '어떻게든 길이 나오겠지'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평일 오전임에도 드문드문 등산객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많이 보여, 길이 맞나 싶을 때는 그 사람들을 이정표 삼아 따라갔다. 주택가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관악산 등산로 초입이 등장! 제대로 길을 찾았구나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았음에도 뒤돌아보니 경치가 아름다웠다. 저 멀리 내가 군 생활한 현충원도 보이고, 우리 집도 보이고, 63빌딩이며 한강이며 서울시내 한복판이 다 내려다보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올라갔던 것 같다. 특별히 힘들지는 않았지만, 목적지인 연주대까지 가는 시간은 정말 길어서 지루했다. 이정표 상으로는 소요시간이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나와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하러 가는 산이 아니어서 그런지 딱히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코스가 힘든 코스도 아니었고. 다만 목적지인 연주대에 다다르니 마지막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험한 암벽이었다. 






(사진: 관악산 등산 중 내려다 본 서울시내)


사실 중학생 때 처음 관악산을 탔던 기억은 내게 '악몽'으로 남아있다. 연주대를 코앞에 두고서 암벽이 무서워 한사코 안 가겠다고 버텼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일행들은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다녀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한심하다고 생각했을까. 부끄러운 일이다.


그때 당시의 기억은 약간은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기억이라, 굳이 관악산을 다시 찾은 것도, 나름 산 좀 탄다고 자부하는 국유단 발굴병 출신으로, 다시 한 번 정복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가 너무 관악산을 무시한 건지,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오만방자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시 타도 산이 험하긴 험해 겁이 났다.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길이니 우회하여 돌아가라는 경고문도 군데군데 있었다. 근데 애석하게도 우회로를 찾지 못해서, 결국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뒤를 돌아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앞으로 못 갈 것 같아서, 일부러 앞만 보고 전진했다. 암벽에 찰싹 달라붙어, 밧줄과 쇠사슬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으로 기어올라갔다. 끝 없는 암벽을 타고 올라서니 마침내 관악산 정상 도착!




(사진: 관악산 정상 도착!)


일단 무사 도착에 안도의 한숨을 푹 한 번 내쉬어주고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며 둘러보니, 평일임에도 등산객들은 꽤 있는 편이었다. 평일에도 이 정도인데, 주말엔 얼마나 사람이 많을까. 산은 역시 사람이 드문 평일에 타야 그 운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연주대는 신라 문무왕 때, 승려 의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초기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의상대'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를 듣고,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이곳을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연주대다.




(사진: 연주대를 배경으로 한 장 찰칵! 뒤에 보이는 암자가 연주대)


연주대에 가보니, 이미 많은 등산객들이 무릎 꿇고 저마다 각자의 소원을 부처님께 빌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나도 소원 하나 빌어야겠다 싶어 합장을 하고 작은 소원(?)을 빌었다.


연주대에서 기도를 드린 뒤에, 연주대에서 조금 아래에 떨어져 있는 사찰 '연주암'에 들러 사찰 구경을 하고, 그곳에서도 부처님께 절과 기도를 드리고서, 점심을 먹은 뒤에 반대 방향으로 하산길에 올랐다. 






(사진: 관악산 연주대 근방에 위치한 사찰, 연주암)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서울대학교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길은 악명 높은 '깔딱고개'였다. 계단이 워낙 많아서 등산객들에게 정말 힘든 구간이라고 하는데, 나야 내려가는 입장이라서 힘든 줄 몰랐지만, 이쪽으로 올라왔으면 좀 힘들긴 했을 것 같다. (계단하면 또 악명 높은 화천의 무명 943고지를 잊을 수 없다)


그래도 사당역에서 정상으로 올라갈 때는 길이 너무 길어서 지루했는데, 이쪽 길은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졌다. 사실 올라가면서도, 어떻게 다시 반대로 내려가야하나 고민이었다. 그래도 이 길은 상대적으로 짧아서,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내려가다보니 어느새 서울대 캠퍼스가 나왔다. 물론 캠퍼스가 워낙 넓은지라,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내려가는 데 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긴 했다. 등산로를 따라 호수공원을 지나, 계속 걷다보니 어느새 서울대를 벗어나 삼성고등학교 앞까지 왔다. 마침 그곳에 정류장이 있어 버스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다.




(사진: 연주대를 배경으로 한 장)


관악산 연주대를 정복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내려오고 나니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좀만 더 천천히 오르고 내려가며 경치를 즐겼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랄까.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 수 있겠다. 발굴지에서 등산을 하면, 사브작사브작 천천히 오르는 게 아니라, 간부와 선임들의 눈치 때문에 죽기 살기로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짬이 차면 천천히 타고 싶어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빠르게 타고 있다. 덕분에 후임들은 나 따라오느라 죽을 맛이었다.


사실 난 타고난 성격도 급해서, 등산을 통해 '사브작사브작' 걸으며, 성격을 좀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싶었는데, 경치를 즐길 것도 없이 그저 빠르게 타다보니 이게 잘 안되는 것 같다. 등산모임이라도 나가야 할까봐.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도 하면서 천천히 타다보면 좀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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