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이분들은 한결 같이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살기 좋아졌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임시정부에서 비서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후손은 손목에 '이니시계'를 차고 다녔고, 만주 국민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진성 선생의 후손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드디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만 들어도 '문재인 대통령이 참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방부에서도 광복군을 뿌리로 하는 국군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극우세력들은 이조차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다.


당장 국방부에서 만든 이 영상만 봐도 그렇다. 광복군을 우리의 뿌리로 가르치는 영상을 두고서 '주적을 북한이 아닌 일본으로 교묘하게 바뀌치기함으로써 적화통일로 이끄려는 문재인 정권의 술수'라는 기가 막힌 발언도 눈에 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더 이상 안 나오게 하겠다는, 그리고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 지지한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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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http://omn.kr/kse0

(가급적 링크를 통해 원문 기사로 보는 것을 권유함)

시간이 흘러 또다시 광복절을 맞았다. 으레 그렇듯 오늘도 정부는 성대한 기념식으로 이날의 의미를 축하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광복절의 의미를 설파하고,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을 발표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의미를 새삼 언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정부의 역행하는 역사의식에 비추어봤을 때 국민들은 과연 그 말에서 어떤 신뢰를 느낄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한 애국지사가 대통령에게 던졌다는 직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로 92세의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김영관 선생이 주인공이다. 아흔을 넘긴 노령에도 불구하고 꿋꿋한 자세와 단호한 목소리로 "건국의 기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이다", "국군의 날을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9월 17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병(老兵)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사실상 현 정부의 역사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야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대통령의 면전에 대고 언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져 싸웠고, 지금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와 신념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지조로 일관하는 모습에 국민들도 감동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실 모든 이들이 이렇듯 지조로 일관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은 아니었다.

신념을 꺾고 변절한 이들

지조(志操).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에 대해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꿋꿋한 의지. 또는 그런 기개'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지조를 잃고 종국에는 변절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들은 처음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이들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친일행위를 하기도 했다.

3.1 운동을 촉발시킨 민족대표들 중 최린, 정춘수, 박희도도 그랬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주필을 지내며 민족시인으로 추앙받았던 춘원 이광수 역시 '조선인 마빡을 바늘로 찌르면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 모두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부르짖는 철저한 민족반역자로 변절했다.

기개와 충절을 덕목으로 요구하는 군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선진기술을 배워와 독립전쟁에 보탬이 되자'며 일본으로 건너갔던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마지막 생도 45명 중 실제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5명에 불과했다.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이들이 '친일'이라는 명찰을 달고 일본군 혹은 만주군에 복무하며 동포를 억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후에 지조를 꺾은 이들

그런데 정작 일제강점기에는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해방된 조국에서 변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으로 <압록강 행진곡> 등의 독립군가를 작사하며 광복군의 사기를 고취시켰던 한 소설가는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 <광복군>이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이 소설 속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박 대통령조차 어이가 없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쳤던 걸까.

이에 대해 또 다른 광복군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청와대로부터 돈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랬다는 것이다. 결국 돈 몇 푼에 광복군 출신이라는 명예를 스스로 짓밟은 셈이었다. 이는 그 자신 뿐 아니라 광복군 전체가 우스갯거리로 전락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가문이, 일본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사실도 존재한다. 독립운동계의 양대 산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가문과 안중근 의사의 가문도 이러한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의 차남으로 얼마 전 작고한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전투기 비행사 교육을 받은 바 있다. 그런 그도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력했다.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함께 했던 그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타이완 주재 대사, 교통부 장관 등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집권이 시작되자 제9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낸 전력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 그 자신 역시 광복군이었던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2011년 작고) 역시 김신 장군과 나란히 제9대 유신정우회에 입성하며, 독재정권에 협력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지조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물론 한 평생 지조로 일관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욕망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독립운동가의 삶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에겐 한 평생 풍찬노숙하며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 요구되었다. 

일신의 부귀영화는 꿈도 꿀 수 없었으며,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한 삶도 사치였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용기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일본 경찰의 고문을 이기지 못한 김구 선생 역시 <백범일지>를 통해 "차라리 아내가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음식을 들여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할 지경이었다.

해방 후의 삶이라고 달랐을까. 한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는 "예전에는 광복군 출신이라고 하면 취직이 되질 않아 일부러 그 이력을 숨기기도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인사들이 다시 정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알게 모르게 배제되는 상황에서 지조로 일관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시류에 순응하는 삶을 택했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냉혹하고 엄정한 법이다. 변절한 이들은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죽은 뒤 역사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이들은, 현실에선 고된 삶을 살았을지언정 역사에 위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광복절은 바로 그런 이들을 기리는 날이다. 눈앞에서 가족이 굶어죽고, 그 자신이 고문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꿋꿋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신념을 고수하며 살았던 이들 말이다. 그런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광복절을 기리는 방법이 아닐까.

그러니 이젠 우리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보자. 분명 우리들 삶에도 각자의 본분에 요구되는 지조가 있을 것이다. 군인에겐 군인의 지조가, 언론인에겐 언론인의 지조가 있다. 어찌 그들 뿐이랴. 저마다의 삶에서 지켜가야 할 신념과 가치가 있는 법이다. 이번 광복절에는 바로 우리들 스스로의 지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우리들 삶에 어떤 지조가 요구되는지, 그리고 우리 스스로 지조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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