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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2.30 드디어 해금을 장만했습니다. 2

해금을 배우기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드디어 나만의 해금을 장만했습니다. 사전에 해금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는데 "직접 가서 하나씩 만져보고 곡도 연주해보면서 자기한테 맞는 악기를 골라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시더군요. 선생님께서 미리 악기사에 연락해서 제게 맞는 악기들을 몇 대 준비해놓으라고 부탁도 해놓으셨습니다.


오늘 악기사에 갔더니, 사장님께서 아마추어용 해금을 여러 대 내놓고 '2대만 고르라'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 앉아서 일일이 조율 확인도 해보고, 스케일 확인도 하고 즉석에서 '오나라', '아리랑' 같은 곡들도 연주하면서 괜찮은 놈을 탐색해봤습니다. 솔직히 아직 초보라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꽤나 오랫동안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으려니, 사장님께서 한 말씀 하시더군요.


"촉이 오는 걸로 잡으세요. 그게 본인한테 맞는 악기인 겁니다"


그 촉이란 게 뭔지 모르겠지만, 켜봤을 때 느낌이 좋은 놈으로다가 두 대 골랐습니다. 사장님이 하나씩 직접 테스트를 해보더니 한 놈을 골라 제게 건네시더군요. 그리고 또 한 마디 하십니다.


"해금은 가르치는 선생님의 스타일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쪽 선생님한테 배우려면 이 악기가 낫겠네요"


악기면 다 같은 악기지, 촉이 온다는 것도 신기하고 지도하는 선생님 성격에 맞는 악기가 따로 있다는 것도 얼핏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저야 초보고, 이분은 국악 전문가이니 그러려니 했지요. 내심 신기했습니다. 누가 보면 해리포터가 요술지팡이 사러온 줄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금을 샀습니다. 프로용에 비하면 매우 저렴하지만, 아마추어용도 무려 55만원이나 하네요.


그동안은 대여 방식으로 중고 해금을 빌려 연습을 해왔습니다. 큰 맘 먹고 시작했지만, 언제까지 배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뜻 고가의 해금을 산다는 게 내키지 않았던 탓입니다. 기간이 만료될 때마다 연장을 해오다가 어느새 또 추가 연장을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더군요. 고민하다가 이젠 그냥 한 대 사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변이 없는 한, 꽤나 오래도록 배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매주 해금을 배우러 서울-부천을 왔다갔다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간도 투자해야 하고, 돈도 투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별 불만 없이 꾸준히 다닐 수 있었던 건, 그 과정을 즐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해금을 배우는 건 여전히 녹록치 않습니다. 반 년 이상 배웠지만 아직도 기본기를 완벽하게 숙달하지 못해 고생 중입니다. 몇 개월 전에 배운 '오나라'와 '아리랑'을 아직도 반복해서 연습하고 또 연습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함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단계를 밟아나가는 과정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연습해서 간신히 칭찬 받을 정도가 되면, 선생님은 여지없이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면 또 한숨이 나오죠. 다시 그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합니다. 어느 정도 연습해서 이제 좀 된다 싶으면 얼른 선생님께 가서 검사를 받고 싶습니다. 마치 칭찬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요. 


해금은 정직합니다. 연습을 안 하면 남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못 따라가 쩔쩔 매는 쪽팔림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노력을 해야합니다. 선생님 앞에서 검사를 받을 때, 적어도 내가 뒤처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안도합니다. 혹여 칭찬이라도 받게 되면 날아갈 듯 기쁘고요. 그런 맛에 해금을 배우러 다니는 것 같습니다.


진도 욕심을 버린 것도 해금을 즐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 듯 합니다. 스스로 둔재임을 인정한 탓에 오히려 기본기의 완벽한 숙달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지금 하고 있는 곡도 벅찬데, 선생님께서 새 곡을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마음 같아선 선생님께 기본기 교정만 집중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제 와서 음대 입시를 준비할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해금 공연으로 먹고 살 것도 아니고 그저 취미로 즐긴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니 배움이 그 자체로 즐겁습니다.


생각해보면 무예랑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네요. 예전엔 초식 하나라도 더 빨리 배우고 싶었습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안 가르쳐주시면 크게 실망스러워 하기도 했었죠. 지금은 그런 마음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래서 형의권을 수련하면서도 지루함을 별로 못 느끼고 있습니다. 질보 한 걸음을 내딛더라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완벽하게 숙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올바른 길로만 걷자는 게 제 신조가 됐습니다. 스스로 둔재임을 인정하니까 마음도 저절로 비워지더라고요.


여하간 올해 전역하기 전에 이런 저런 버킷리스트를 적어봤는데, 해금 배우기는 바로 그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버킷리스트를 스스로 실천했고,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낍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형의권 배우기'라는 새로운 버킷리스트도 실천했네요. 둘 다 꾸준히 배워서 내년 이맘때쯤 스스로에게 또 한 번 대견함을 느끼고 싶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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