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거리에서 ‘대한민국 영웅, 명예 찾기!’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1조 오프라인 미션 수행기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1조입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유달리 매섭듯, 가을을 시샘하는 늦더위의 기세도 만만치 않은데요, 이처럼 무더위로 인해 대지의 만물도 모두 녹아버리는 듯했던 지난 8월 20일, 신촌 연세로에 검은 조끼를 입은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저희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조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저희는 왜 이 더운 날씨에 신촌에 있었을까요? 바로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오프라인 홍보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날씨만큼이나 뜨거웠던 현장의 열기 속으로 다함께 들어가보시겠습니다!



젊은 청년층을 공략하라!


오프라인 홍보행사를 준비하면서 저희가 가장 먼저 고민했던 점은 ‘누구를 대상으로 홍보할 것인가’ 였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주로 참전용사가 속한 노인층을 대상으로 홍보가 이루어진 점을 주목했습니다. 동시에 시간이 갈수록 청년층의 역사의식은 흐릿해져가고 있다는 점에도 함께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역발상으로 청년층을 대상으로 홍보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 그리고 6·25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에 대해 미래 대한민국의 주역이 될 청년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저희는 젊음의 거리, 신촌에서 오프라인 홍보 행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원한 얼음커피 한 잔 하실래요?


행사 당일인 20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저희는 아직 거리가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행사 장소로 향했습니다. 거리에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부랴부랴 천막을 설치하고, 사진을 나열하는 등 부지런을 떨다보니 어느새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길을 오가는 시민들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오전 10시! 드디어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조의 오프라인 홍보 행사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날씨가 더운 점에 착안하여, 홍보 부스를 ‘간이 카페’ 형식으로 준비했습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잠시 다리쉼을 할 수 있도록 대형 천막 아래 의자들을 배치하고, 누구든 와서 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아울러 즉석에서 시원한 얼음커피를 제조하여 시민들에게 나눠드렸는데요, 시민들이 커피 한 잔 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련 사진들을 부스 주위로 전시했습니다.



(사진: 젊음의 거리 신촌에 설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 부스)


열정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내다


그런데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홍보 부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저조했기 때문입니다. 길거리 홍보행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저희들 역시 무관심한 시민들의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쭈뼛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 탓에 점점 미지근해지기 시작하는 커피를 보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각성한 저희 조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떠나 한 목소리가 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길 가는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시원한 얼음커피를 내밀며 홍보 부스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려 노력한 것입니다. 이런 저희의 열정에 시민들도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부스 앞에 멈추는 발걸음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희 부스를 찾은 첫 손님은 할머니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저희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내 사촌오빠가 6·25 전쟁 때 금화지구 전투에서 돌아가셔서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요.



(사진: 홍보 부스를 찾은 첫 손님은 전사자 유가족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지금까지 이런 사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설마 6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오빠를 찾을 수 있겠냐”며 회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꼭 찾아드릴 수 있다”고 약속드리며, 꼭 국유단으로 연락해주실 것을 신신당부했습니다. 이처럼 시작부터 특별한 손님을 맞이한 저희는 오프라인 홍보 행사의 효과를 새삼 느끼며 홍보에 더욱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사진전시회를 열다


시작은 커피 한 잔이었습니다. 단순히 목을 축이러 부스를 방문했던 시민들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전시된 사진들을 보고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져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국유단 예비역 병장 출신인 김경준 서포터즈의 이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발굴병 출신 서포터즈답게 전문 지식을 동원한 설명은 관람객들에게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페루 출신 한 외국인 관람객은 ‘설악산 상봉 유해발굴작전’ 사진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한국 관광지에 여러 번 가봤고, 설악산도 잘 알고 있다”며 “이 높은 산꼭대기에도 유해가 있느냐”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봉 유해발굴현장에서 직접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던 김경준 서포터즈는 “상봉 꼭대기 바위틈에서 조명등을 비춰가며 유해를 발굴했다”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설명으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사진: 유달리 사진전시회에 관심을 보였던 페루 관광객)




(사진: 발굴병 출신의 경력을 되살려 국유단을 홍보하는 김경준 서포터즈)


전시된 사진들은 유해의 발굴과정부터 입관, 약식제례를 마치고 감식 절차를 거쳐 유가족에게 인도되기까지의 전 과정 뿐 아니라, 중국군 유해 인도 행사와 한·미 공동감식까지 국유단의 사업을 설명할 수 있는 사진들을 순서대로 전시하였는데요, 사진들을 유심히 관람하던 한 중년의 여성 관람객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는 줄은 몰랐다”며 “군대 가 있는 아들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데, 하물며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60년 넘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분들을 기다리는 유가족들의 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할 수 있는 작은 사진전시회 개최 모습)


인기만점이었던 O.X 퀴즈


작은 사진전시회와 함께 저희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국유단 O.X 퀴즈’였습니다. 사전에 미리 엄선하여 준비한 5가지의 질문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즉석에서 퀴즈를 푸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특히 퀴즈의 정답을 모두 맞히는 시민들에게는 특별 주문제작한 ‘국유단 보틀’을 경품으로 지급했는데요, 모두들 보틀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퀴즈 풀이에 임하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국유단 O.X 퀴즈’)


자, 그럼 현장에서 출제했던 O.X 퀴즈 문제를 한 번 옮겨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함께 풀어보실까요?


[국유단 O.X퀴즈]


1. 전세계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실시하는 나라는 2개 뿐이다?

2. 유해발굴사업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된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3. 북한군의 유해와 중공군의 유해는 발굴하지 않는다?

4.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 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2% 미만이다?

5.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총 2개 팀으로 구성되어있다?


[정답]


1. O (대한민국, 미국)

2. X (2000년 김대중 정부 당시,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

3. X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하고 있음. 북한군 유해는 파주 적군묘지에 안장하고 있고, 중국군 유해는 2014년부터 중국 측에 송환하고 있음)

4. O (국군 유해 9,182위 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115위)

5. X (조사/발굴/감식/영현/대외협력/계획운영/본부중대 등 7개 부서로 구성)


여러분 정답을 얼마나 맞히셨나요? 많이 어려우셨나요? 


네, 현장의 시민들도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요. 실제로 문제를 2개 이상 맞히는 시민들이 별로 없었답니다. 그만큼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낮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언론매체와 예능을 통해 우리 사업을 홍보해왔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인식이 낮은 것을 보면서 저희가 하고 있는 홍보행사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더위를 잊고 홍보에 전념하는 저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 특별 주문제작하여 경품으로 지급한 국유단 보틀)


O.X 퀴즈의 정답을 맞히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 많자, 저희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틀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즉석에서 국유단 홍보 부스를 촬영해 개인 SNS에 업로드하는 시민들에게 보틀을 선착순 지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에 많은 시민들이 앞다투어 저희 홍보 행사 소식을 SNS에 올리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준비한 보틀도 금세 동나고 말았답니다.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던 외국인 관광객들


행사를 진행하는 내내 정말 많은 시민들이 저희 부스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셨는데요, 특히 신한은행 대학생 홍보대사 팀도 홍보활동을 하던 와중에 저희 부스에 방문하여 즉석에서 O.X 퀴즈를 풀고 사진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또 저희 부스 옆에서 홍보행사를 하던 식품의약품안전처 서포터즈들과 상호 교류 차원에서 서로의 부스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식약처 서포터즈들 역시 “이런 사업이 있는 줄은 몰랐다. 좋은 정보를 배우고 간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습니다. 



(사진: 신한은행 대학생 홍보대사들과 함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내 시민들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페루 관광객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홍보 부스로 모여드는 바람에 저희 조원들은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부족한 어학능력을 느끼면서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습니다.


이때 구세주처럼 신선정 서포터즈가 등장했습니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외국인 관광객들과의 대화를 주도하며 사업의 의미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선정 서포터즈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6·25 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자, 6·25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사진: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열심히 통역하며 국유단을 홍보하는 신선정 서포터즈)


이에 발을 맞추듯 하지영 서포터즈와 이다솜 서포터즈 역시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으며, 국유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열정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현장에 바람이 불어 현수막이 찢어지고, 사진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등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가 수시로 벌어져 계속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두 서포터즈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답니다. 이렇듯 저희 조원들은 언제부터인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손발을 착착 맞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준비과정부터 행사까지 많은 것을 배웠던 시간


지금까지 젊음의 거리 신촌에서의 국유단 홍보행사 현장을 보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셨나요?이번 행사를 마치는 저희들의 소회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사실 이번 오프라인 행사를 준비하면서, 장장 수개월에 걸친 아이디어 회의가 있었습니다.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열정 많은 대학생들답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각자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으로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알려야한다’는 큰 뜻에는 다들 공감했고, 이에 따라 서로의 입장을 한 발짝씩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점점 하나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프라인 미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조원들 간의 양보와 배려, 단합과 소통이라는 덕목을 배울 수 있었기에, 저희에게도 뜻 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홍보부스를 찾아 진지하게 설명을 경청해주신 많은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홍보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행사의 의의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포터즈들의 소감 한 마디


그럼 행사를 진행하며 느꼈던 서포터즈들의 소감 한 마디씩을 들어보실까요?


김경준 서포터즈: “군 복무 당시 수행했던 임무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알리는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사진 속 현장에 내가 있었음을 설명하자, 많은 시민들이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느껴서 뿌듯했다”


하지영 서포터즈: “준비 당시에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유해발굴 사업을 칭찬해 주시던 분, 말없이 전시된 사진을 계속 보시던 분, 한국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열심히 설명을 들어주시던 외국인 등등 많은 시민들을 만나며 걱정이 기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시민들의 관심을 통해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다솜 서포터즈: “오프라인 미션이 처음이어서 긴장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잘 마무리되어서 뿌듯하다. 아쉬웠던 것은 이런 행사가 처음이라 초반에 다소 헤맸던 점이다. 렌트한 테이블과 천막의 크기가 맞지 않아서 급하게 부스 구조를 바꾸기도 했고 당일 아침에 물품을 구매하는 등 돌발 상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르신, 외국인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 한 편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을 보면서 ‘영문 리플렛’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선정 서포터즈: “6·25 전쟁에 참전한 참전국의 외국인들이 우리의 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해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을 받았다. 한편으로 젊은 층들의 관심과 참여도는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반기에는 상반기의 미흡한 점을 바탕으로 좀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홍보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비석)


행사는 끝났지만, 이번 신촌 오프라인 행사는 시작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그들을 조국의 픔으로 모시는 그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 여러분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은 기간까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의 활약도 꾸준히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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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발굴병 24시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3)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그동안 연재해왔던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도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그동안 다뤄왔던 주제들이 다소 무거운 주제들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여러분께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바로 ‘유해발굴병’의 24시간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와 함께 발굴병들의 일상으로 들어가보실 텐데요, 다들 준비되셨죠? 그럼 출발!



기상! 출동 준비! (AM 5:30~06:30)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어느 군부대 막사의 복도. 기상나팔이 울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생활관이 보이네요. 바로 발굴병 생활관입니다.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걸까요? 아직 덜 깬 눈으로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는 윤 이병에게 물어봤습니다.


“작전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섭니다. 부대에서 발굴지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조기 기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06시 30분 기상이 원칙이지만, 숙영부대에서 발굴지점까지 이동시간만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조기 기상은 부득이하다고 합니다. 기상과 동시에 기계와 같이 빠른 동작으로 세면과 환복을 하고, 이른 아침식사를 한 뒤 다시 출동준비를 하는 모습이 매우 정신없어 보이는군요. 분대장 김 병장이 살짝 귀띔을 합니다.


“발굴병들은 사실 아침이 제일 바쁩니다. 혹시라도 빠진 게 없나 재차 점검하고, 아침식사도 다른 병력들보다 일찍 하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아직 밥이 준비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취사장에 앉아 하릴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발굴병들이 출동준비로 정신없는 사이, 발굴팀장님께서 출근하셨네요. 팀장님은 간밤에 병사들이 잘 잤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혹시라도 몸이 좀 안 좋은 병사가 있으면 생활관에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의무대로 보내 진료를 받게 한다는군요. 다행히 오늘은 모두 건강한 모습입니다.


팀장님의 인솔 하에 차량을 타고 발굴지까지 이동한 발굴병들. 차에서 내리자마자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한 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분대장부터 이등병 막내까지 공평하게 나눠서 진다지만, 등에 멘 장비들이 상당히 무거워보이는데요. 힘들지 않나요? 


(사진: 발굴병들의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들. 발굴병들은 매일 같이 이 짐들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이등병 때는 맨 몸으로 산에 오르는 것도 죽을 맛이었지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보니 이젠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체력 좋아보이는 염 일병의 답변이 믿음직스럽군요.


오전 유해발굴작전 (AM 09:00 ~ PM 12:00)


드디어 작전 개시! 보통 유해발굴작전은 100명 단위의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데요, 이들을 ‘기초발굴병’이라고 합니다. 발굴하려는 지점에 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굴토를 하며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초발굴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전문발굴병인 국유단 발굴병들은 기초발굴병력의 뒤에서 기초병력들이 제대로 발굴을 하고 있는지, 혹시 유해를 놓치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하며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한답니다.


그런데 그때! 


“팀장님, 유해 나왔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순간 발굴팀장님과 발굴병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려갑니다. 유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식별되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뜯어보며 토의한 결과 인골(人骨)로 판정되었습니다. 


유해로 판정이 나자, 발굴병들은 각자 임무를 분담해 일사천리로 수습에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유해가 식별된 지점 주위로 나무 말뚝을 박고, 노란색 테이프로 사방을 두릅니다. 이 ‘접근금지’ 라인 안으로는 국유단 발굴병 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현장 훼손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이 공간을 전문용어로 ‘트렌치’라고도 합니다. 발굴병 역시 트렌치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여 유해 훼손에 대비한다는군요.



(사진: 유해수습을 하는 국유단 발굴병들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수습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이 매우 진지합니다. 전문발굴병의 숙련된 손길에 6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호국영령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분은 대체 왜 이곳에, 어떤 사연으로 잠들게 되신 걸까요. 드러나는 유해를 보며 발굴병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꿀맛 같은 잠깐의 휴식 (PM 12:00 ~ 13:00)


“오전 발굴작전 종료! 밥 먹고 하자!”


벌써 점심시간이군요. 유해 수습에 전념하던 발굴병들도 그제야 허리를 펴며 한숨을 돌리네요. 임무를 수행하느라 지친 병사들이 그늘 진 곳에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달콤한 휴식 시간입니다. 병사들은 전투식량으로 허기를 달래며 즐거운 휴식을 만끽합니다. 매일 같이 먹는 전투식량이 물리지는 않을까요?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사진: 발굴병들의 주식인 ‘전투식량’)


“당연히 물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 주먹밥을 만들어오기도 합니다.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는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전우들과 함께 나눠먹는 밥은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특히 산에서 먹으니 운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병사들 중에는 돗자리에 누워 쪽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네요. 국유단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Y씨는 “점심 먹고 한창 나른할 때, 산바람 맞으며 잠깐 누워 자던 그 잠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유해발굴작전 개시 (PM 13:00 ~ 17:00)


잠깐의 달콤한 휴식도 끝나고, 오후 작전이 개시됩니다. 오후 작전은 오전에 비해 좀 더 바쁘게 돌아갑니다. 오전에 식별한 유해를 오늘 안에 수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해발굴작전의 원칙 중 하나는 바로 ‘당일 수습’이라고 합니다. 유해를 현장에 방치하고 내려올 경우, 까마귀와 같은 산짐승들이 유해를 물어가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인지 발굴병들의 손길 역시 오전보다 더욱 분주해보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국영령의 모습이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60여 년 전 당시 모습 그대로 당신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노출이 완료된 유해의 형태는, 전사 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착잡한 표정으로 노출된 유해를 바라보던 박 일병이 입을 열었습니다.


“보통 유해라고 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것처럼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많이들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영화와 다릅니다.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수류탄에 온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여기 누워계신 이분 역시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참혹한 양상으로 전사하신 게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사진: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노출된 유해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사진: 태극기로 관포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유해의 노출을 마무리한 발굴병들은 유해의 노출 양상을 직접 그림과 사진 등으로 기록하고, 정성을 다해 입관 절차에 들어갑니다. 이제 또 한 분의 호국영령께서 60여 년 만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작전 종료 및 막사 복귀 (PM 17:00 ~ 18:00)


금일 작전 종료. 하산 준비를 마친 병력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수습한 호국영령을 보내드릴 시간입니다. 태극기로 정성스레 싸여있는 관 앞으로 제기상이 놓이고, 발굴부대를 대표하여 대대장님이 직접 제주를 올립니다. 


‘부대 차렷! 호국영령님께 대하여 경례! 일동 묵념!’


발굴팀장님의 구호에 맞춰, 병력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거수경례와 묵념을 올립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60년 동안 오매불망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호국영령이시여. 이제 편히 쉬소서.



(사진: 약식제례를 지내는 모습)


유해봉송을 마친 발굴병들도 하산길에 오릅니다.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을 모셨다는 생각에 뿌듯함과 홀가분한 감정을 가지고 내려가는 발굴병들의 발걸음이 가벼워보입니다. 함께 내려가던 김 일병이 이런 말을 덧붙이네요.


“만약 오늘 안에 수습을 하지 못했다면, 조명장비까지 이용해서 야간 발굴을 했을 겁니다. 예전에는 밤늦게 하산한 적도 있었습니다.”


작전 종료 후에도 이어지는 임무수행 (PM 18:00 ~ 22:00)


막사로 복귀한 발굴병들의 표정을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하네요. 하지만 발굴병들의 일과는 막사 복귀 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복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 수습한 유해에 대한 기록을 전산화하는 것. 현장에서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받아 적은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키아티스(KIATIS: 6.25 전사자 종합정보체계)라는 국유단 고유의 전산망에 업로드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오늘 작전 수행 간 사용한 발굴 장비의 정비와, 내일 작전을 위한 출동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아니, 그럼 대체 언제 쉬나요?


“유해가 많이 나올 경우에는 그만큼 업무량이 많아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군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기기 때문에 지금은 예전보다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빠듯하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각자 체력 단련이나 독서 등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이젠 발굴병 생활에 도가 텄다는 한 상병의 답변에 여유가 넘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있는 사람 (PM 22:00)


막사 내 모든 불이 꺼집니다. 이제 발굴병들도 취침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침상에 등을 붙이자마자 다들 금세 곯아떨어지는군요. 오늘 하루도 참 고단했나봅니다. 그런데 분대장 김 병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군요. 혹여 후임들이 잠에서 깰까봐, 이불 속에 들어가 라이트펜을 켜고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분대장 수첩이라는 겁니다. 매일 매일 작성하는 건데, 우리 발굴 팀의 일기와도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 임무수행 간 있었던 실수나, 분대장으로서 좀 더 매끄럽게 지휘하지 못했던 점, 고민이 있거나 아픈 병사들이 있는지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아무래도 호국영령을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니, 이런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일은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작전에 임해야겠노라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진: 분대장은 매일 병사들의 애로사항과 임무수행의 결과를 기록한다)


발굴병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여러분, 지금까지 발굴병들과 하루 일과를 함께 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에 놀라셨나요? 실제로 발굴병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사명감이나 자부심 없이는 하기 힘든 임무라는 생각까지 드는데요,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S씨에게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이등병 때는 산 타는 것도 힘들었고, 임무수행 간 잦은 실수 탓에 선임들에게 혼나면서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매일 밤 침상에 누우면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지더군요. 호국영령을 모시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정도 고생도 감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나약하게만 느껴졌던 겁니다. 매일 매일이 반성의 연속이었죠. 전역한 지금은 오히려 발굴병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사진: 정교한 손길로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이처럼 오늘도 호국영령을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이 있기에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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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35008265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설악산 상봉/신선봉을 가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1)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연재!


​여러분! 저는 2014년 8월부터 2016년 4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에서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였는데요,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며 겪은 에피소드들을 바탕으로, 이번 6월부터는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라는 주제의 시리즈를 연재하려 합니다. 서포터즈 중 유일한 국유단 출신으로서, 앞으로 여러분께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를 가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좀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중 하나라는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에서의 유해발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그때 그 당시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잊을 수 없는 그곳, 설악산 상봉/신선봉


유해발굴병들은 보직의 특성상,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 유해발굴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러다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요, 제겐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이 그랬습니다.



▲ 설악산 상봉 발굴현장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2014년 7월에 입대하여 아직은 어리바리한 이등병 시절이었던 그해 10월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속한 발굴4팀은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에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는데요, 이곳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는 1951년 5월 당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제6사단 및 제12사단에 맞서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밀고 밀리는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였습니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기에, 이곳에서 산화한 호국영령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끔찍한 악몽으로만 다가왔던 상봉과의 첫 만남


상봉에 오르기 위해,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이나 지났을까요?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저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제가 메고 있던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저 역시 다시 이를 악물고 오르기 시작했는데요,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야만 했습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제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 신선봉의 첫 기억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현장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도착한 정상. 하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도 잠시, 이내 제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곳에 유해가 있단 말이야?’




▲ 상봉에서 유해를 발굴하는 병력들의 모습


정상에 오른 제 눈앞에 펼쳐진 발굴현장의 모습은, 그동안 봐왔던 발굴현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온 사면이 바위로 뒤덮인 산에서 대체 어떻게 발굴을 진행하며, 이곳에 과연 유해가 있긴 한 것일까...


발굴기법 역시 생소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보통 유해발굴은 삽과 호미 등을 이용해,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사면을 깊게 파면서 퇴적층 내 유해의 매장 여부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굴토를 진행하는데요, 상봉은 이런 기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답니다.



▲ 스크린(발굴장비)을 이용해 조각유해를 찾는 필자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에, 모두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식별된 첫 유해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지며, 차츰 전쟁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된 순간!


그 당시의 솔직한 감정은 ‘놀라움’과 ‘당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곳에 유해가 있었다니!”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저처럼 의문을 갖고 있던 발굴병력들 역시 “정말 이 땅에 전쟁이 있긴 있었구나!”하며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습니다.



▲ 상봉에서 식별된 조각유해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러나 식별된 유해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놀랐던 감정은 차츰 안타깝고 숙연한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발굴되는 유해들의 형태가 그 부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 발굴된 유해를 정성껏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보통 많은 사람들은 유해발굴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유해의 형태를 떠올리곤 합니다. 실제 발굴현장에서는 두개골 포함 잔존율이 60% 이상인 유해에 대해서는 ‘완전유해’라 부르고, 그 미만인 유해는 ‘부분유해’라고 명명합니다. 하지만 상봉에서 발굴된 유해는 부분유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게 ‘조각유해’라 불리웠는데요, 정말 심하게 훼손된 유해 중에는 성인 남성의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유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유해를 입관하고, 태극기로 관포하는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왜 유달리 조각난 유해들이 많이 식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양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설악산 상봉에 올라서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는데요, 바로 적의 군함들이 동해바다에서 이곳 상봉에 주둔한 아군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많은 호국영령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산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의 형태를 보면서, 당시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 유난히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유난히 먹먹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설악산 발굴


당시 현장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제 심경은 복잡했습니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에도 힘든 이 험한 산에서,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넋들... 6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국의 ‘귀환’ 명령만을 기다리며 외로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안타까운 영혼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려왔기 때문입니다.



▲ 약식제례 및 유해봉송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은 사실상 신원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DNA 대조를 위해서는 유해에서 시료 채취를 해야만 하는데, 이처럼 작은 조각유해에서는 DNA 시료 채취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설악산에서 유해를 수습할 때의 기억은 가장 가슴 먹먹한 기억으로 제게 남아있습니다.


​잊지 말자, 그들을...


​2016년 4월 13일, 마침내 1년 9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면서 저는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현장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는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과,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하던 기억, 조각유해들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리고 혹여나 우리의 불찰로 인해 미처 찾지 못해 여전히 그곳 어딘가에 잠들어있을지도 모르는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호국영령의 유해들이 여전히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조국의 품으로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바로 ‘그들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아울러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호국영령들의 신원확인을 위해, 유가족 DNA 시료 채취에도 적극 동참하는 것. 이것이 호국영령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사진을 제공해주신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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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가 제작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 영상입니다. 오늘 아침에 서 교수 페이스북 계정에 공개가 되었더군요.


나레이션은 걸그룹 '걸스데이'의 혜리가 맡았네요. 군 복무 시절, <진짜 사나이>를 보면서 정말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국유단이라는 인연으로 다시 이렇게 만나는군요. (실제로 인연이 없다는 게 한스럽지만...)


제가 한창 군 복무를 하던 2015년을 기점으로 우리 단에 대한 홍보가 열심히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MBC <진짜 사나이 2> 특집 프로그램부터, 각종 다큐멘터리, 언론 보도 등등... 지금 제가 활동하고 있는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도 그 산물이라고 할 수 있죠.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워낙 그 의미가 큰 국가적 보훈사업이기 때문에, 현충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만 반짝 홍보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됩니다. 의미도 의미거니와 시간이 흐를수록 남아있는 유가족들도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도 버거워지기 때문에 '시간싸움'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꾸준한 홍보 활동으로 유가족들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홍보 활동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국유단 출신이거나, 국유단에서 군 복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군 입대를 앞둔 이들에게는 한 번 하는 군 생활인데, 좀 더 보람차고 의미있는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는 방편도 될 것이고, 이미 국유단에서 군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의미 있는 군 생활을 하고 있구나"하면서 힘든 군 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랬고요.


여하간 전역하고 나서 우리 부대 이야기가 이렇게 화제가 될 때마다, 내가 수행한 임무의 가치가 남다르다는 생각에 가끔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국민적 관심도가 증가함에 따라, 국유단도 단 차원에서 좀 더 스스로 되돌아보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S. 영상에 저도 잠깐 나옵니다. 살짝 나와서 못 알아보실 수도 있겠네요.


PS 2. 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공식 블로그에서 '영상 소감 이벤트'도 진행 중입니다. 한 번 참여해보세요~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29571686)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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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2부] 28명의 호국영웅 메신저, 마침내 첫 걸음을 내딛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1부에서는 발대식에 앞서 우리 서포터즈들이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견학했던 시간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오늘 2부에서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공식적인 첫 걸음을 내딛는 발대식 현장을 생중계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발대식이 열리는 생생한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내딛은 첫 걸음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현충원 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으로 복귀한 서포터즈들은 곧바로 국유단 본청 앞에 모여 발대식 준비를 마쳤습니다. 발대식은 이학기 단장(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요, 먼저 서포터즈로서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선서식’이 있었습니다. 선서 대표로 예비역 중사 출신의 신대식 씨(27,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성우과)가 활약해주었는데요, 성우과 재학생인만큼 멋진 목소리로 28인 서포터즈의 결의를 알렸습니다.


(사진: 발대식을 통해 첫 걸음을 내디딘 국유단 제1기 대학생 서포터즈)


선서 낭독이 끝난 다음에는 ‘서포터즈 조끼 및 국유단 뱃지’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을 비롯한 발굴과, 감식과, 대외협력과, 계획운영과 등 국유단의 조직을 대표하는 과장급 간부들이 직접 서포터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끼를 입혀주고, 국유단 뱃지를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사진: 국유단 조끼와 뱃지를 수여받는 서포터즈들)


이날 서포터즈들이 입은 조끼는 실제 발굴현장에서 발굴병들이 착용하는 국유단의 상징적인 유니폼이고, 단 뱃지 역시 국유단 소속 장병들에게만 지급되는 뱃지라고 합니다. 서포터즈들이 이를 수여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다 같은 국유단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이로써 국유단 서포터즈 1기가 마침내 첫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훈훈했던 간담회 현장


발대식을 마친 서포터즈들은 2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이학기 단장과의 간담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은 간담회에 앞서, 짧게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포터즈가 된 28명 모두 독특한 이력과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유일하게 국유단에서 발굴병으로 전역한 저를 비롯해, 예비역 육군 중사, 학군단(ROTC) 소속 장교후보생, 발굴병 지원 희망자 등 그 면면이 다채로웠습니다. 특히 28명 중 여성이 15명이고 남성이 13명으로 여성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각기 개성 있는 서포터즈들의 면면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이학기 단장은 “이 자리에는 예비역 육군 병장이나 중사도 있고, 또 앞으로 장교가 되어 군을 이끌어 갈 분들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해서 다양한 꿈을 펼칠 대학생들이 다 모인 것 같다”며 국유단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원해준 서포터즈들에게 감사의 말을 표했습니다.


(사진: 발대식 플래카드)


이어 이학기 단장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의를 설명하였는데요, “전 세계에 자국의 전쟁을 수행하다 산화한 전사자들을 발굴하는 부대가 단 두 곳밖에 없는데, 하나가 미국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다”라며 “전 세계 각국의 고위 인사들이 우리 단을 방문할 때마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존재를 알고 큰 감동을 받는데, 그때마다 뿌듯하다”고 밝혔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ormnd/17218590035


또한 현재 유해발굴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요, “국유단 소속 발굴 팀이 총 8개 팀이 있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을 8개 지역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며 “지금이야 그래도 덜 힘들지만, 6~7월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발굴병들이 매일 산에 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웬만한 사명감과 책임감 없이는 임무 수행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서포터즈들은 평소 궁금했던 사항들에 대해 가감 없이 질문을 던졌는데요, 특히 한 서포터즈가 “단장님이 목에 걸고 계신 군번줄(인식표)이 인상 깊다. 항상 인식표를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좌중에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이에 이학기 단장은 “물론이다. 육사를 졸업한 이후 지금껏 퇴근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인식표를 풀어본 적이 없다”고 밝히며, “마침 인식표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러분께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 점이 있다”고 하여 좌중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진: MBC <진짜 사나이 2 – 유해발굴감식단> 편에서 인식표를 발굴하는 장면)

출처: MBC <진짜 사나이 2>


이학기 단장은 “유해가 나왔을 때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함께 나온 유품이다. 그리고 유품 중에서도 유해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식표가 확실한 증거인데, 이 인식표를 발굴하기가 정말 힘들다”며 “인식표가 없다면 유가족 DNA 시료라도 있어야 발굴한 유해의 DNA를 대조하여 유가족을 찾을 텐데, 남아계신 유가족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아 유해발굴사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운 감정을 토로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널리 알려져야 유가족 DNA 시료 채취가 활성화되고, 그래야 많은 분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서포터즈 활동에 임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간담회가 끝났습니다.


대학생 서포터즈, 어떤 활동을 하나요


이어 앞으로 서포터즈들이 수행해야 할 활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요, 국유단 서포터즈들은 앞으로 국유단과 국민 사이의 다리가 되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쉽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방편으로 매월 1건 이상의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해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게재하게 됩니다. 또한 28명을 지역별로 7개 조로 나누어 연간 2회 이상의 오프라인 팀별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전국 각지를 다니며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사진: 간담회 및 오리엔테이션이 열린 2층 회의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자원들이라는 것을 방증하듯, 오리엔테이션 내내 쉴 새 없는 질문이 쏟아져, 2층 회의실은 금세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습니다. 이에 이원웅 소령(공보장교·육군 소령)은 “여러분이 처음이라 누구보다 열의를 가지고 임하려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오히려 처음에 너무 열정을 불태우면 나중에 지칠 수 있다. 열심히 활동하되 임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항상 초심을 잃지 말아 달라”고 특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에는, 서포터즈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상견례’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 만나 어색할 법도 했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마냥 서로 명함도 교환하고, 조별로 단체사진도 촬영하는 등 금세 친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던 서포터즈들의 이야기


그럼 과연 이번에 출범한 서포터즈들은 어떤 지원동기를 가지고 서포터즈에 지원하였고, 또 어떤 각오로 활동에 임하게 될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앞서 선서 대표로도 활약해주었던 신대식 씨는 예비역 중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요, 실제로 군 복무 중에 국유단의 홍보 포스터를 보고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 시에 군인은 총을 들고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지만, 군 복무 당시에는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총을 들 일이 없었다”며 “그래서인지 전역하고서라도 나라를 위해 더 봉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태극기를 바라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 동기를 밝혔습니다.


(사진: 공보장교와 함께 찍은 1조 단체사진)


신드보라 씨(23, 창원대 국제관계학과)는 서포터즈를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진짜 사나이> 유해발굴감식단 편을 보고 알게 되었다”며 “주변에 국유단을 널리 알려, 국유단이 한 분의 유해라도 더 찾을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 특히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할 것이다”라는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허도휘 씨(23, 동국대 정보통신공학과)는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난 날이 되면, SNS에 관련 글을 올리거나 프로필 사진을 관련 사진으로 바꾸는 등 주위에 알리기 위해 작은 노력들을 해왔다”며 “국유단 서포터즈를 통해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해준 호국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서포터즈를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동기를 밝혔습니다.


앞으로의 활동 포부를 묻는 질문에는 “단 한 명의 유가족이라도 더 DNA 시료 채취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하겠다”며 “현재 여러 지역축제나 학교축제들이 열리는 계절이기 때문에, 젊은 층을 겨냥한 학교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을 계획 중이다”라고 하여 벌써부터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나타냈습니다.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


이처럼 뜨거운 애국심과 열정을 갖고 출범한 서포터즈들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도 남다른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부여받아, 지난 1년 9개월 동안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전역한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라는 긴 수식어는 제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사진: 16년 전반기 발굴작전 출동을 앞두고 후임들과 촬영한 단체사진)


그래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누구보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와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는 발굴병 출신으로서, 네티즌 여러분께 실제 발굴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나 유해발굴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들을 재밌고 생생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8개월 동안, 저를 비롯한 28인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들의 활동을 열심히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 2부 끝 -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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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18173026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한 후, 처음으로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글!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첫 번째 글이, 내가 쓴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특성상, 내가 보낸 원본 글이 100% 다 실리지 못하고, 반토막 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잘 써서 다 올리고 싶었지만, 용량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담당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블로그 포스팅이란 것 자체가 너무 길면 또 지루해질 수도 있어서... 포인트만 담아 글을 짧게 쓰는 것도 중요한 글쓰기 요령인데, 나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볼까나.


PS. 개인 블로그이니만큼 나중에 원본 글도 따로 올릴 생각이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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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차 서류심사 결과가 나왔다.

나도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들어가 있다. 다음 주 면접이라고 하는데... 그럼 나는 전역한 지 2주 만에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겠군아... ㅋ


이 소식을 다른 전역자들에게 말했더니,


"ㅋㅋ 형은 진짜 전역 안 한 것 같아. 전역하고 이렇게 군대랑 못 떨어지는 사람 첨 봄"


이라고 카톡 답장이 돌아왔다.


하기사 전역한 지 이틀 만에, 발굴복 입고 관악산 등산을 하질 않나, 전역하고 9일 만에 간부들을 다시 만나지를 않나... 또 집도 자대가 있던 현충원 바로 옆 동네라, 군대와의 인연은 끈질긴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뭐 흔히들 전역하고 나면 내가 복무했던 부대 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나는 진심으로 군 시절이 그립기 때문이다.


아무튼 전역한 지 2주 밖에 안 된 국유단 출신인데다가, 간부들하고도 친하기 때문에, 다른 대외활동과는 달리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지원하긴 했다. 그래도 합격자 명단을 보니 경쟁률이 꽤 높은 것 같다. 다른 지원자들보다 '국유단 출신'이라는 게 가장 큰 메리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오히려 이 메리트를 잘 살려서, 남들보다 면접을 더 잘보려 노력해야겠다.


PS. 사실 부대랑 집이 가까워 놀러가려면 매일 놀러갈 수도 있지만, 딱히 명분이 없어 갈 생각은 못 했다. 다행히 면접이라는 명분이 생겼으니, 다음 주에는 오래간만에 간부님들께 인사도 드리고 후임들 얼굴도 보고 와야겠당. 면접보단 애들 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네~ 잇힝~!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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