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이분들은 한결 같이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살기 좋아졌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임시정부에서 비서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후손은 손목에 '이니시계'를 차고 다녔고, 만주 국민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진성 선생의 후손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드디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만 들어도 '문재인 대통령이 참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방부에서도 광복군을 뿌리로 하는 국군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극우세력들은 이조차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다.


당장 국방부에서 만든 이 영상만 봐도 그렇다. 광복군을 우리의 뿌리로 가르치는 영상을 두고서 '주적을 북한이 아닌 일본으로 교묘하게 바뀌치기함으로써 적화통일로 이끄려는 문재인 정권의 술수'라는 기가 막힌 발언도 눈에 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더 이상 안 나오게 하겠다는, 그리고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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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omn.kr/rvdw


공동의 역사를 통해 의식의 분단부터 극복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취지에는 적극 공감한다. 적어도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역사학도들이라면 '통일사학'의 기치를 들고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로 봉합할 수 있는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줄기차게 주창해온 터다.


그런데 남과 북이 공동으로 기념할 수 있는 독립운동사업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이다.


북한에서는 기본적으로 우리와 독립운동사를 전혀 다르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일본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항일투쟁이었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투쟁을 이끌어 간 주체에 대해서 북한은 오로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 한 명만 추앙하고 있다.


사실상 북한에서는 '독립운동사=김일성 일대기'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외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실패한 인물로 묘사한다. 심지어 김일성이 그렇게 존경했다던 안중근조차도 김일성보다 아래로 보고 깎아내린다.


독립운동사의 상징적 존재인 백범 김구 선생도 예외는 아니다. 김구 선생을 민족의 스승으로 높이 추앙하는 남한 사람들에겐 매우 불쾌할 수밖에 없는데, 북한에서는 김구 선생이 김일성에게 '귀의'했다고 가르친다.


노령의 김구 주석이 30대의 젊은 김일성을 만나 "수령님의 탁월한 영도력에 감명을 받았다. 저는 지금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이제부터 수령님의 품에 안기겠다"며 무릎 꿇고 임정 주석의 인장을 갖다바쳤다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지점이 확연하게 다르다. 특히 어느 지점에 있어서는 함부로 얘기를 꺼냈다가는 자신들이 받들어 모시는 수령님의 신성한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되레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더욱이 문 대통령은 내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번 사업을 제안했다.


임정은 북측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역사다. 대한민국은 국호(대한민국), 국기(태극기), 국가(애국가) 그리고 정체성(민주공화정)까지 임정의 법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수립되었는데 만약 임정의 역사를 인정한다면 북측 스스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우려일 뿐이다. 남북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학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100% 공감하는 바이다. 그저 정부에서 잘 추진해서 이런 우려가 그냥 헛된 망상에 불과했음을 증명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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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면 '부고'란이 있다. 웬만해선 잘 보지도 않고, 본다고 해도 무심코 넘기는 코너다. 남들 죽었다는 소식을 유의 깊게 볼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더욱이 유명인의 부고라면 부고란이 아니라 톱뉴스로 크게 실릴테니 일부러 부고란을 찾아볼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신문을 넘기다 무심결에 부고란을 봤을 때, 유독 뜨끔하면서 가슴이 저미어지는 때가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들의 별세 소식을 들을 때다.


솔직히 연세가 연세인지라 이상할 게 없지만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분들이 한 분, 두 분 우리 곁을 떠날 때마다 가슴 한쪽이 쓰라리다.


지난 8일 밤에 백범 김구 선생의 경위대장(오늘날의 경호실장)이셨던 원로애국지사 윤경빈 선생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윤 선생은 1945년 1월, 장준하 선생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했고, 나중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을 호위했던 분이다. 생존해있는 몇 안되는 광복군 출신이라 늘 만나뵙고 싶던 분이셨다.


마침내 지난 2013년, 경교장에서 윤 선생을 만나뵌 적이 있었다. 그해 여름, 일본군을 탈출해 6천리 장정 끝에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해 광복군이 된 청년들의 장정 루트를 따라 걷고 돌아왔던 차였기에 70여년 전 그 길을 먼저 걸었던,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계셨던 분을 만나뵀다는 사실에 몸둘 바를 몰랐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이미 거동도 불편하셨거니와 귀도 잘 안 들리셨지만 내가 충칭에 다녀왔다는 말은 정확하게 알아들으셨다. 그 말에 반색하시면서 내 귀에 대고 "경교장은 민족정기의 상징이나 꼭 보존해 나가야한다"고 당부하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다시는 뵙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쓸쓸하다. 독립운동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후로, 생존 애국지사들을 만나뵐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분들의 부고 소식이 들려올까봐 늘 조마조마하다. 그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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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http://www.i815.or.kr/2017/news/magazine.php


독립기념관에서 매월 발행하는 <월간 독립기념관> 회보에 2018년 한 해 동안 고정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방학 때 독립기념관 소속으로 일본 역사탐방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탐방 수기를 조금 가다듬어서 1년 12개월 동안 12편에 걸쳐 연재할 예정입니다.


어디 내놓기 민망한 글인데 먼저 연재를 제의하고 결정해주신 독립기념관 측에 감사드리면서, 많은 분들도 읽어주십사 소식을 공유합니다.


PS. 위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웹진 형태로 PC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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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 선발하는 '2017 나라사랑 역사탐방단'에 최종 선발됐습니다.


사실 해당 행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는데요, 과 선배가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셔서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바빠서 계속 미루다가 신청 마감날 급하게 써서 냈는데 운 좋게도 선발됐군요. 30명 뽑는데 86명 지원했더군요. 최종 선발된 덕분에 올 여름 일본여행을 가게 됐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 참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인 것 같습니다.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여행도 많이 못 다녀봤는데 입학 후 1학년 때부터 안중근의사기념관,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장준하기념사업회, 청년백범에 이르기까지... 매년 여름마다 지역을 달리해 중국 내 항일독립운동사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때 사진을 보면 정말 중국에 다녀왔던 기억들이 꿈같기도 합니다.


다만 졸업하기 전까지 일본을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던 차였습니다. 실제로 전 태어나서 일본에 가본 적이 없거든요. 어쩌면 제 전공과도 가장 밀접한, 만악(萬惡)의 근원인 일본에 가보지 못했다는 게 모순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졸업하기 전에 이렇게 대학생의 특권을 이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일본 답사를 다녀오게 됐습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 그리고 의열단원들의 흔적을 좇아갑니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도 간다고 합니다. 과연 그곳에 가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벌써부터 감정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일본 열도에 남아있는 선열들의 흔적과 여전히 살아숨쉬는 극우정치의 망령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돌아오겠습니다.


참가비는 40만원이라고 하는군요. 요새 재정적으로 쪼들려서 난감한 상황입니다만, 미친듯이 글을 기고해서 원고료를 벌어야겠습니다. 오랜만에 여권도 만들고 분주하고 보내겠군요. 가서 사진도 많이 찍고, 돌아와서 <오마이뉴스>에 기행문을 기고해서 여러분과 경험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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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8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다녀왔다. 주제들을 살펴보니 흥미롭기는 한데, 대부분 기존에 널리 알려진 내용들이라 그냥 사실을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발표가 이뤄질 듯 싶었다. 어쨌든 내가 몰랐던 내용이 있을 수 있으니 가벼운 마음과 옷차림으로 다녀왔다.


그 넓은 회의장에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이런 학술회의는 전역 하고 참 오랜만에 오는 듯 싶었다. 논문집이나 한 권 챙겨올 요량으로 가볍게 차려입고 갔는데, 너무 초라하게 입고 갔나. 아무튼 이쪽에서 활동하다보니 역시 아는 얼굴들도 많이 만났다. 논문집을 살펴보니 역시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래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내용들이라 복습하는 차원에서 좋았던 것 같다. 몰랐던 사실들도 있었고. 


오늘날 세워진 대한민국의 뿌리가 임시정부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문헌적으로 완벽히 반박 가능한 사실이거늘, 아직도 1948년 건국론을 부르짖는 세력의 의도가 뭘까 궁금하다.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이런 적폐들도 모조리 청산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의미 있는 회의현장에 참석할 수 있어 좋았는데, 막판에 별 거 아닌 일로 좀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행사 관계자로부터 '밥' 문제로 무안을 당했다. 보통 학술세미나 현장에 가면 주최 측에서 점심을 제공하곤 하는데, 한 번도 밥 문제로 무안을 당한 적은 없었다. 하필이면 또 아는 사람들 앞이었다. 순간 울컥했지만 뭐 따질 상황도 아니었고... 그냥 불쾌한 감정을 품은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냥 나가서 따로 사먹든지 해야겠다. 그깟 공짜 밥 먹겠다고 온 것도 아니고 없는 사람 취급받는 건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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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를 봤습니다.


이 영화도 봐야지 봐야지 하고 있다가, 뒤늦게서야 본 영화입니다. 한 대형마트 계약직 판매원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해고 통지에 맞서 투쟁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요, 2007년에 있었던 한 대형마트에서의 대량 해고 사태를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딱히 그 사건 하나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 듯 합니다. 작금의 대한민국 곳곳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풍경이기 때문이죠.


아무튼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작년 말에 방영했던 드라마 <송곳>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엔 드라마 <송곳>이 영화로 리메이크된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이 영화가 더 먼저 개봉했더군요. 대형마트의 대량 해고 사태에 직면해 투쟁을 벌이는 여자 판매사원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회사의 부당 해고 방침과는 무관하게 자리가 보장된 정규직 남자사원이 여자 판매사원들과 연대해서 노조 투쟁을 벌이는 것도 그렇고. 놀라우리만치 드라마와 영화의 구조가 빼다박은 듯 흡사합니다. 심지어 영화와 드라마 둘 다 출연한 배우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노조 활동을 거부하거나 노조에서 탈퇴하는 이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난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내내 머릿 속을 맴돌더군요. 영화에서 보면 마트 측은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간계를 씁니다. 몇몇 주동자들에게 "당신만은 자리를 보장할테니, 노조에서 탈퇴해라"라고 유혹하죠. 사람인 상 그런 유혹에 당연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죠. 투쟁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직업 활동가'나 먹고 사는 게 충분히 보장되어 마트 알바를 그저 용돈벌이 정도로나 하는 이들이라면 별 의미 없는 제안이겠지만, 대다수의 계약직들은 벼랑 끝에 몰린 상황입니다. 그저 '반찬값' 벌러 나온 게 아니라 '생계'를 위해 뛰어나온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마트 측의 제안은 정말 달콤한 악마의 열매일 수밖에요.


결국은 이에 굴복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끝까지 남은 이들은 굴복한 이들에 대해 '변절자'라고 욕하고 매도하지만,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누가 저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당장 집에 돌아가면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데 말이죠. 어떻게 보면 끝까지 남아서 투쟁을 벌이자고 외치는 주장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드라마나 영화니까 가능하지, 실제로 당장 내 가족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내 아들이 급식비를 못내서 점심을 굶는다는데, 언제 끝날지도 모를... 그리고 이길 확률도 희박한 이 싸움을 굳이 내가 해야하는가. 이런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논리가 일제강점기의 상황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하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군요. 독립운동가들을 끊임없이 회유하기 위해 이간책을 썼던 일제와, 자식들의 생계를 위해 굴복하며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일부 조선인들... 여기에는 생계형 친일파 혹은 대다수의 힘 없는 민중들이 포함될 것입니다. 물론 두 사례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다소 어폐가 있겠지만, 결국 강자 앞에서 굴복해야 하는 약자들의 현실이나, 생계를 위해 현실과 일정 부분 타협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힘 없는 민중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여러모로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독립전선에 뛰어든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영화 <카트>에서도 대형 마트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부당해고에 끝까지 맞서 싸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지금 현실에도 존재하고 있죠. 대량 해고 사태에 몇 년, 몇십 년 동안 굴하지 않고 천막 농성을 벌이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저들에겐 도대체 어떤 신념이 있기에, 나를 버려가면서까지, 가족들의 생계를 외면하면서까지 투쟁을 벌이는 것일까. 그 신념이란 것이 일면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보다는 우리를 위하자는 마음이 신념으로 굳어진 것이 아닐까요? 지금 당장은 나나 내 가족이 고통받아도, 결국 나 하나의 희생으로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해지는 것을 꿈꾸기에... 그들은 기꺼이 투쟁에 앞장섭니다. 우리 독립운동가 선조들도 그런 마음이었겠지요.


마지막으로 영화 <카트>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달라", "우리를 한 번만 봐달라"고. 이 외침은 우리에게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길거리에서 내몰려 천막 농성을 하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언제 한 번 따뜻한 관심 한 번 줘봤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하게 됩니다. 당장 저게 내 가족의, 내 미래의 현실이 될지 모를 일이니까요.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봐야겠다고 자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가슴이 먹먹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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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개봉한 영화 <밀정>을 보고 왔습니다. 개봉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봤더랬죠. 사실 이 영화는 제작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손꼽아 기다려왔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제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역사를 소재로 한 팩션영화(그중에서도 특히 독립운동에 관한 영화)에 대한 개봉 소식이 들려오면 늘 달려가서 보곤 합니다.



의열단을 소재로 한 팩션영화


영화 <밀정>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1920년대에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활약했던 항일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1923년에 있었던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과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 다수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한 사건입니다. 후자는 이번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사건인데, 의열단이 중국에서 직접 제조한 폭탄을 식민지 조선의 수도인 경성으로 반입해 동시다발적 폭탄테러를 벌이려던 계획이었습니다. 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 조선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지 통치기관들이었고, 암살 대상은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조선총독부 수뇌들이었지요. 


하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는 바람에 작전은 미수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 작전에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소속 경부인 황옥이 의열단의 폭탄 반입을 남몰래 도왔다고 하는데요, 재판 당시에는 자신이 의열단과 무관함을 주장하여 지금까지도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영화도 그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고요. 이렇게 때로는 역사가 밝혀주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사진: 영화 <밀정> 스틸컷 - 출처: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암살>보다 더 재밌게 본 영화


개인적으로 작년에 개봉했던 비슷한 주제의 영화 <암살>보다 더 재밌게 봤습니다. <밀정>에서 일본 경찰 이정출 역을 맡은 송강호와 역시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을 맡은 엄태구의 심리전을 보는 맛이 쏠쏠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의열단원들을 밖으로 빼내려는 이정출과 그런 이정출의 틈을 파고들며 의열단원들을 찾아내려는 하시모토의 대결은 손에 땀을 쥘 정도로 긴박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의열단 vs 일본 경찰'의 구도라기보다는 '밀정 vs 일본 경찰'의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거기에 수시로 벌어지는 총격전 역시 스릴 넘쳤습니다. 의열단원들은 실제로 명사수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제법 자주 묘사됩니다. 단총 한 자루를 가지고서 다수의 일본 경찰을 가지고 노는 장면 말이지요.


잔혹하다고 외면해서는 안될 우리의 역사


그리고 영화가 꽤나 잔혹하다는 평이 있습니다. 저 역시 보는 내내 눈을 질끈 감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고문 장면 등이 상당히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인데요, 회피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눈을 부릅 뜨고 지켜봤습니다. 마치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직시하고, 그 치욕과 분노를 가슴에 새기기라도 하듯이 말이죠. 실제로 잔혹하다며 평점을 낮게 주는 관객들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저게 진짜 우리 선조들이 겪어온 역사라고. 오히려 저기서 묘사된 장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라고. 저들의 희생과 고통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의열단장 정채산 역으로 특별출연한 이병헌. 이병헌의 연기력만큼은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약산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역할인데, 의열단 리더의 고뇌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으로 분한 조승우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처럼, 이번 영화의 가장 큰 공신 중 한 명은 역시 이병헌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모두 이병헌의 입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꼭 영화를 통해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사진: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맡은 의열단장의 모티브가 된 '약산 김원봉')


영화가 가진 저력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밀정>을 보고 나오는 내내 영화가 가진 저력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년 영화 <암살>을 보고 나오는 길에, 관객들 입에서 '김구', '김원봉'이라는 이름이 회자되는 것을 보며 새삼 고무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영화가 가진 힘에 대해 깨닫는 시간이었는데, 이번 영화를 보고 난 소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학이란 결국 대중과 소통해야 그 본연의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역사학자들이 세미나 현장에서 새로운 논문 발표하고, 초야에 묻혀 연구를 위한 연구에나 매진할지언정, 그게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면 결국 '죽은 학문'에 불과할 뿐이죠. 저 역시 우리의 잊혀져 가는 역사를 어떻게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을까에 늘 촛점을 맞추고 고민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면, 대중에 미치는 파급력만큼은 논문과 비견될 일이 아니죠. 



(사진: 해방 후 촬영된 실제 의열단원들의 모습)


그런 점에서 이번에 개봉한 영화 <밀정>이 점점 흐릿해져만 가는 역사의 기억을 대중들에게 다시 또렷하게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를 고대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어주신 김지운 감독님과 좋은 연기 해주신 배우 분들께도 특별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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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몽양 여운형 역사탐방>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역사유적지 탐방행사에 다녀왔다. <몽양 여운형 역사탐방>은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탐방 프로그램인데, 이번이 18회째라고 한다. 


2014년 7월 6일이었던가. 군 입대를 딱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는데, 그때도 탐방 행사가 있었다. 그때는 또 1박 2일로 경남 밀양까지 다녀오는 꽤 큰 행사였다. 당시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좀 의미있는 활동을 해보고 싶었기도 하고, 그간 친하게 지냈던 기념관 관계자 분들께 입대 인사도 드릴 겸해서 참가했었더랬다.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전역하고 다시 탐방에 참여하려니 감회가 어찌 남다르지 않을손가. (그때는 12회 행사였다)



(사진: 2014년 7월 5일, 제12회 몽양 여운형 역사탐방 당시 밀양 박차정 선생 묘소에서)


어쨌건 이번 행사는 당일치기로, 그것도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짧게 진행하는 답사여서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오후 1시가 다 되어, 집결지인 삼양교통 종점 앞으로 가니 이미 많은 회원들이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나도 재빨리 대열에 합류하여, 가장 먼저 기념관의 장원석 학예사님과 강대운 시설팀장님께 오래간만에 인사를 드렸다. 입대 전 청년백범 답사단의 일원으로 함께 중국을 다녀오면서 첫 인연을 맺었고, 입대 후에도 휴가 나와 연락드렸을 때, 지체없이 달려나와 소주 한 잔 사주시며 군 생활을 위로해주던 매우 고마운 인연들이다.


일행이 다 모이자 첫 답사지인 '봉황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봉황각 앞에 도착하니, 장 학예사님이 갑자기 내 소개를 하시며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경준씨가 오늘 몸풀이 겸 모두 앞에서 국군도수체조를 지도해보라"고 즉석 주문을 하셔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사진: 봉황각으로 가는 입구)



(사진: 봉황각 입구에 모인 탐방 회원들)


할 수 없이 맨 앞에서 국군도수체조를 하긴 했는데, 사실 말년이 되고서부터는 점호 때마다 생각없이 대충 체조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조를 하긴 처음이라 동작들도 중간 중간 까먹고, 구령과 동작이 안 맞아서 애를 먹기도 했다. 


체조를 마치고 나니, 이미 군대를 다녀온 군필자 회원들은 "나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라는 말로 군 생활을 추억하기도 하고, "아까 동작이 틀렸다"며 지적하기도 했다. 심지어 "빠졌네"라고 한 마디 툭 던지는 분도 계시던데... ㅎ 얼마 전까지 말년 병장이었던 예비역한테 뭘 더 바라십니까...


한바탕 체조 소동(?)을 겪은 뒤에, 봉황각에 올라가 가이드 선생님으로부터 봉황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사진: 봉황각 전경과 설명해주시는 가이드 선생님)


봉황각은 경술국치 이후인 1912년에 천도교(동학)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 세운 목조건물이다. 손병희 선생은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천도교 정신으로 무장한 투사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투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망이 소홀한 서울 변두리에 이 봉황각을 지었던 것이다. 실제로 손병희 선생의 3.1혁명 구상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이곳을 거쳐간 많은 지도자들이 3.1혁명의 주체세력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고 하니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참고로 봉황각의 현판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였던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다고 하며, 건물의 양식은 경복궁의 건청궁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봉황각에서 좀 떨어진 곳에 오르막길이 있는데, 그 길을 오르면 봉황각의 설립자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있다. 우리는 묘소를 참배한 후에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위해,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 몽양 여운형 선생의 묘소로 향했다.



(사진: 의암 손병희 선생 묘소)


몽양 여운형 선생의 묘소는 강북구 변두리의 한 주택가에 조촐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인가 나도 입대 전에 이곳에 혼자 찾아왔을 때, 도저히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 기념관에 전화해 계속 위치를 물어보고, 여기저기 발품을 파는 등 한바탕 소동을 벌인 끝에야 간신히 찾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분의 묘소야말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잘 모셔져야 할 터인데, 유족들이 그건 또 원치 않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사진: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로 가는 북한산 둘레길의 와중에서... 꽃이 참 예뻤다)


여운형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후에, 우리는 백설기 떡과 막걸리로 음복을 하며 잠깐 휴식 시간을 가졌다. 휴식 시간에 잠깐 여운형 선생 묘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운형 선생의 서거 후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에서 특별히 제작해 공수해온 관에 선생의 시신을 안치하도록 배려했고, 포르말린 용액으로 방부처리를 하여 미라 상태로 입관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향후 3~40년 내로 통일이 되면 이장하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사진: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에서 참배하는 탐방단 회원들)


장 학예사님은 "이런 조치들을 했던 것을 보면,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3~40년 내로 우리가 분명 통일이 될 거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오늘까지도 우리가 통일이 되지 못한 상황이니 참 부끄럽고, 여운형 선생님 앞에 반성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게 된다"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여운형 선생의 시신이 미라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처음 듣기에 신기하기도 했거니와, 장 학예사님의 부연설명에 가슴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사진: 매번 역사탐방 때마다 고생해주시는 장원석 학예사님)


딴지는 아니지만 아마 여운형 선생의 시신이 현재까지도 미라 상태일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미라 상태로 보존 중인 김일성-김정일 시신 같은 경우도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수 억원의 비용이 투입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조금씩 시신이 쪼그라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포르말린 용액으로 한 번 방부처리한 여운형 선생의 시신이 여전히 원형 그대로일지는 의문이다. 물론, 묘를 쓸 때 조선시대처럼 회곽묘(석회로 석실을 만들어 공기가 안 통하게 안치하는 방식)를 썼다면 몰라도... 근데 그렇게까지 묘를 썼을 것 같지는 않고. 논지에서 조금 벗어났는데,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여운형 선생의 장사가 제대로 치뤄지길 고대해 볼 따름이다.


여운형 선생의 묘소를 나온 후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인근 '국립 4.19 민주묘지'로 향했다. 이곳은 1960년 4.19혁명 당시 순국했던 호국영령들과, 혁명 당시 부상을 입었던 분들의 묘역이 위치한 국립묘지다. 불과 며칠 전이 4.19 혁명 56주기이기도 해서 더욱 의미 있는 코스였던 것 같다.



(사진: 국립 4.19민주묘지의 기념탑)


우리는 이곳에서도 가이드 선생님을 따라 설명을 들으며 이동했다. 맨 먼저 기념탑 아래서 4.19혁명 당시 순국한 호국영령들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묘역을 이동하며 설명을 듣기 시작했는데, 참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분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일단 대부분 학생이었던 점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꽃다운 청춘들이었기에... 한편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에, 아니 나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도 자유와 민주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다 돌아가신 그 용기와 신념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사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 최루탄 사건'의 주인공, 김주열 열사의 가묘)


묘역을 둘러본 후에, 유영봉안소에 올라가 또 한 번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기념관에 들렀다. 기념관에서는 4.19혁명의 역사적 배경과 경과, 결과, 의의를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일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념관 관람은 좀 띄엄띄엄 보고, 2층 영상관에 올라가 10분 정도 되는 영상물을 시청했다. 4.19 혁명 전후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촬영한 흑백영상들을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가슴이 저미어왔다.


기념관 전시관람을 끝으로, 오늘의 <몽양 여운형 역사탐방>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탐방의 여운은 뒤풀이를 위해 이동한 인근 식당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여운형 선생을 추모하는 노래를 직접 지었다는 어느 어르신은 흥에 겨워 즉석에서 직접 노래 열창도 하시고, 각자 자기소개를 하며 오늘의 탐방소감을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어제 사람들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개인 블로그를 빌어 내 개인적인 소감도 말하고 싶다. 


전역한 지 열흘째... 딱히 할 일도 없어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다가 오래간만에 사람 많은 곳에 나오니,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 즐거운 시간이었다. 정말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사실 어제 탐방 같은 경우는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보다는 그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전역인사도 하고, 오랜만에 사람 많은 곳에 나가서 사람 향기를 맡고 싶다는 목적이 컸다. 그래서인지 어제는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며 맡았던 꽃향기가 더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 어제 탐방을 계기로 계속 집에만 있을 게 아니라 더 자주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지만, 계속 집에만 있다보니 여전히 사고방식과 언어습관이 군대식이어서, 사람들을 만나도 말투도 그렇고, 대하는 것도 어색하기만 하다. 


매일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하루 빨리 민간인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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