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창(旗槍) 교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집에서 개인수련을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전수에 나오는 걸로는 당연히 공(功)을 쌓을 수가 없으니까요. 다행히도 함께 무예를 수련하는 형님께서 기창을 선뜻 빌려주셨습니다. 현재 일이 바빠 수련터에는 못 나오고 계시는데, 기창은 집에 보관하기가 버겁다고 수련터에 맡겨놓고 가셨거든요. 제가 잘 관리하는 조건으로 빌려왔습니다.



기창을 가져오기 위해 어제 수련터에 갔는데, 창 끝이 빠져있길래 사부님과 본드를 이용해 수리했습니다. 하루 정도는 그대로 놔두라고 하셔서, 어제는 수련을 못 하고 오늘 드디어 옥상에 올라가 휘둘러봤습니다. 수련터에서 쓰는 공용 기창보다는 가벼운 듯한데, 아무래도 봉 재질이 훨씬 가벼운 재질인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무게가 덜 나가는 걸로 자세를 연습하고, 점점 무거운 창으로 심화시켜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창날이 예리하게 갈려있지는 않지만, 창 끝은 뾰족합니다. 그라인더 같은 걸로 갈면 아마 진짜 위험한 흉기(?)가 될 것 같습니다. 워낙 긴 데다가, 창 끝이 뾰족하다보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기창이라는 단어 뜻 그대로, 원래는 깃발이 달려있어야 합니다만 따로 달아놓지는 않은 상태더군요. 이게 깃발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상당히 큽니다. 그냥 하는 것보다 깃발이 펄럭이는 게 훨씬 뽀대(?)도 나고, 펄럭펄럭 소리가 경쾌하여 휘두르는 맛이 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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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수련 중에 '허공의자'라는 수련이 있다. 무예24기를 수련하며 배운 것인데, 등을 벽에 바싹 붙이고 허리를 낮춰 의자에 앉은 것마냥 허공에 앉아 버티는 수련이다. 중국무술의 마보와도 비슷한데, 마보만큼이나 힘든 수련 중 하나다.


이 자세는 척추를 바르게 하고, 기혈을 뚫어주어 내기(內氣)의 순환을 원활하게 만드는 자세라고 한다. 앉아서 버티는 자세이니 하체 단련이 되는 것은 묻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다. 하루 10분씩 3개월 이상 꾸준히 하면 뱃살도 들어간다고 한다.


처음 이 자세를 배웠을 때는, 1분을 버티기도 힘들었다. 그때 사부님이 "여학생들도 10분 이상은 한다"고 하길래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군대 있을 때는, 매일 같이 이 자세를 연습하기도 했다. 그때도 3~4분을 넘기기 힘들었던 것 같다.


허공의자 수련은 결코 쉽지 않은데, 우선 하체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들기 때문이다. 중국무술의 마보 자세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허리를 낮추고 앉아 오랜 시간 버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지루함' 역시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다. 가만히 앉아서 5분, 10분 버틴다는 게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허공의자를 하는 도중에 '얼마나 됐을까' 하며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게 되는데, 고작 1분 지났을 뿐이다. 이런 지루함을 이겨내보고자 일부러 TV를 보면서 하기도 했고, 음악을 틀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지루함을 다소 덜 수는 있었지만,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너무 힘든 수련인지라, 사실 무예를 수련하면서도 은근슬쩍 이 수련은 거르곤 했다. '오늘은 몸이 피곤하니까 생략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갖은 핑계를 대면서 내 자신과 타협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사부님으로부터 허공의자의 효용성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계속 듣다보니, 꾸준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내 자신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평생 무예를 수련하며 대가가 되겠다고 다짐해놓고서는 힘들다는 이유로 수련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완벽한 '자기모순'도 없을 것이다. 사부님이 내게 자주 하는 말씀 중에 하나가 "그래가지고 무슨 대가가 되겠다는거야?"다. 확실히 이런 말을 들으면 자극이 된다.


요즘은 그래서 개인수련을 하게 되면, 무조건 허공의자부터 먼저 한다. 최소 10분을 기준으로 허공의자를 수련하는데, 며칠 전부터 허공의자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엔 항상 힘들다. 하지만 1~2분 정도 시간이 지나고 자세가 완전히 잡히면, 어느 순간 하체가 시원해지며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오늘은 그 느낌이 절정에 달했다. 너무 편안해서 졸음이 올 지경이었다. 오늘은 TV나 음악도 켜지 않았다. 사부님 말씀대로 온전히 호흡에만 집중했다. 그랬는데도 지루함은커녕 편안함이 느껴졌다. 몸이 편안해지니 마음도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하체가 부들부들 떨리고, 땀이 비오듯 줄줄 흘렀을텐데 오늘은 땀도 그닥 안 나고, 하체도 일체의 요동이 없었다. 다만 등에는 땀이 나서 자꾸 미끄러지는 바람에 하체가 계속 허리 아래로 낮아지는 바람에 자세를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했던 게 아쉽다. 그럴 때마다 다시 자세를 잡곤 했지만, 한 번 풀린 자세를 다시 잡는 게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시간을 정확하게 재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20분 가까이 한 것 같다.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이 자세를 하고 나서 호흡을 하면 정말 공기가 맛있다"고 하는데, 나는 원체 감각이 둔한지라 아직까지는 그런 느낌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르면 허공의자가 편안해진다'는 말에는 공감할 정도가 된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낀다. 꾸준히 하다보면 나중에는 공기가 맛있다는 말에도 공감할 정도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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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 기창(旗槍)


增(증)


창날 길이 9촌, 자루 길이 9척, 붉은 칠을 한다. 주석판 이하에서는 검은색·흰색 칠을 모두 5마디로 하고, 혹은 누런색이나 붉은색의 작은 기를 단다. 


『엄주사부고( 州四部藁)』에 이르기를, "문황제(大明 成祖황제)의 어창(御槍: 임금님의 창)은 오문루(午門樓)의 포좌(座:어탑) 오른쪽에 두었는데, 창은 칠한 합죽으로 자루를 알고, 검은 정기를 달았는데, 약호(若號)중에 늘어뜨린 단 중에는 여러 가지 별들을 수놓았다. 창자루에는 칼자국이 세 군데나 있고, 화살 구멍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문황(文皇)이라 칭했다. 


그는 매번 대적을 만나면 문득 용감한 기병(驥騈)을 거느리고 중견으로 부딪쳐 들어가서(中堅:『후한서』「광무제전」에 '그 중견을 부딪쳐 들어가서...' 注에 중군장 지존이 기거하므로 견고하고 정예로써 스스로를 도우게 되어 있기 때문에 중견이라 한다.) 적 후방을 에워 싸고 깃발을 흔들면 군사들이 다투어 분전하니 적은 순식간에 크게 무너진다."


『고려사』「여복지(輿服志)」에 이르기를, "임금의 수레에 의장병으로 소기창대(小旗槍隊)의 장교(將校)가 2명이 연등한다(고려에는 팔관 연등회가 있다)." 기는 노부(의장병이다. 진·한 때부터 그 이름이 시작된다)은간 (작은 대나무) 작은 기창 이다.


案(안)


문황의 창은 기병의 무기이다. 『고려사』「여복지(輿服志)」에 실려있는 것은 의장용 무기이다. 기를 단 창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이다. 무릇 군의 행렬(5열 종대이기 때문에 군오(軍伍)라 함)은 각각의 장수가 무기를 잡고 이어서 치고 받는 자세를 연습한즉 대저 깃대를 단 창대에 날을 붙인 것은 그 치고 찌르는 술(무예기법)을 전하려 하는 것이니 오히려 현명하지 않겠는가? 호미와 고무래(『회남자』주에는 흙덩이를 부수는 연장이다)도 병기가 된다. 이에 별도로 하나의 창으로 갖추어 그 자세를 익힌다.


번역문 출처: 한국전통무예연구소(www.muye24ki.com)


[초식]


1. 용약재연(龍躍在淵)

2. 거극(擧戟)

3. 야차탐해(夜叉探海)

4. 중평(中平)

5. 중평(中平)

6. 진왕마기(秦王磨旗)

7. 한신점기(韓信點旗)

8. 중평(中平)

9. 복호(伏虎)

10. 퇴산색해(堆山塞海)

11. 거극(擧戟)

12. 은교출해(銀蛟出海)

13. 중평(中平)

14. 복호(伏虎)

15. 우일자(右一刺)

16. 좌일자(左一刺)

17. 후일자(後一刺)

18. 전일자(前一刺)

19. 야차탐해(夜叉探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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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24기란 정조의 명을 받은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무예의 달인 백동수가 1790년에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의 24가지 무예를 말합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전래의 무예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우수한 무예를 적극 수용하여 '24기(技)'로 정리한 무예교범서로서 부국강병의 실학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완료한 정조는, 이 책을 당시 중앙 오군영(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 어영청)에 보급하여, 군영마다 제각각이던 군사들의 기예를 통일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이 확립된 탓에, 무예를 지도하는 별도의 무관(武館)이 존재하지 않았고, 아버지나 장인어른 등 무관직을 지낸 어른들로부터 무예를 전수받는 문화였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무벌가문이 형성되었고, 가문마다 전해져오는 기법들도 제각각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역시 장인어른이 무예 스승이었다죠. 그래서 옛 기록을 살펴봐도, 군영마다 무예의 명칭부터 제각각입니다. 동작들도 제각각이었겠죠.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정조는 무예의 명칭을 통일하는 동시에, 실제 동작들도 통일하기 위해 「무예도보통지」를 적극적으로 보급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정조 본인의 호위를 위해 창설했던 특수부대 '장용영(壯勇營)'에도 「무예도보통지」를 보급하였지요. 무예24기로 단련된 장용영 군사들은, 당대 최고의 호위무사들이었을 겁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대통령 경호원' 격이랄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조상들은 무예를 보존해야 할 하나의 전통문화로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더해 갑작스러운 개화의 물결로 인해 급진적으로 군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무예24기는 역사의 물결 속에 사라져버리고 말았죠.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암흑기(일제강점기와 6.25 등)가 워낙 길었던 탓에, 전통무예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못했죠.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경당, 십팔기를 비롯한 여러 전통무예연구단체들이 복원을 시도했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복원 스타일에 따라 유파를 형성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가 소속된 무예24기 한양류의 경우는 경당-무예24기보존회의 계보를 이은 단체로, 보존회의 해석과는 달리 자체 해석으로 복원한 기법들도 상당합니다. 복원무술이다보니 열린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긴 합니다. 타 유파의 기법 중에 차용할 만한 것들은 적극적으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짜깁기'라는 비판도 있지만, 복원무술이 안고가야 할 한계라고 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가지 않는 이상 '100% 원형복원'은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이런 노력을 하다보면 '무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날이 올 거라 봅니다.


이 홍보 영상 속에 등장하는 무예24기 시범단원들은 현재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시범단' 소속으로, 매일 같이 수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주 화~일요일 오전 11시에 신풍루 앞에서 무료공연을 하고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구경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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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http://news.donga.com/3/all/20130502/54850209/1

 

[최형국의 무예 이야기] 조선시대 무예의 요체 4가지

 

담력 기르고 힘 키운 뒤, 정교하게 다듬고 속도로 완성


누구라도 ‘무예(武藝)’란 말을 들으면 강한 주먹이나 날렵한 몸놀림부터 먼저 떠올린다. 그래서인지 무예를 익힌 사람 주위에는 허무맹랑한 무용담이 떠돌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다. 중국 무협영화에 등장하는 신비한 무공비급이나 특정 무술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신명이 난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무예란 개인의 생명, 나아가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존재다. 조선시대 군사들은 늘 무예의 핵심에 대해 고민했고, 그것을 실전에서 재현하기 위해 끊임없는 훈련을 반복했다.


임진년의 뼈아픈 기억


1592년 4월에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은 조선이란 국가의 시스템을 순식간에 마비시킬 정도로 커다란 재앙이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겪으며 가장 많은 혼란과 변화를 겪은 곳은 다름 아닌 군대였다. 이후 조선군은 그동안 유지 발전시켜 온 무예를 대대적으로 개조해야 했다. 


전쟁을 시작한 지 20일도 못 되어 수도 한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군인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게다가 조선은 국왕이 수도를 버리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 국경선 근처 의주로 피란해야 하는 한계 상황까지 내몰렸다. 물론 이후 북쪽에서 명나라 구원군이 도착했고 남해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내륙에서는 관군과 의병이 활약해 전세를 만회할 수는 있었다.


이렇게 불리한 전황을 극복하기 위해 군대 시스템을 재편하고 군사무예의 변화를 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에는 ‘변화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압도적으로 작용했다. 승부와 직결되는 군사들의 무예 훈련은 조선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런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국왕이 직접 무예서 편찬을 지시하게 됐다. 즉각 당대 최고의 병법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예의 요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훈련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당시 조선의 최고 이론가들이 정리한 군사무예의 핵심은 일담(一膽), 이력(二力), 삼정(三精), 사쾌(四快)로 정리할 수 있다. 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 조선시대 군사무예의 존재 의미를 간결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먼저 담, 즉 용기다(一膽). 우리는 “간담이 서늘하다”는 말을 흔히 한다. 간장과 쓸개는 용기를 나타낸다. 담력은 예로부터 무예의 요체 가운데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실제 전투상황과 직결된다. 창칼이 번득이고 화살과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는 담력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담력이 부족한 병사는 실전에서 주변의 전우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아군에 득보다는 실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전 군대에서는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담(膽)을 가장 먼저 훈련시켰다. 요즘 군대의 이른바 ‘악으로, 깡으로’ 식의 군사훈련도 그 근원이 같다. 


사기(士氣)는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각 군사의 용기를 군대라는 집단으로 모아낸 개념이다. 군사의 기상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야말로 군대의 미덕이다. 예전 군대의 가장 기초적인 훈련이 담력을 기르는 것이었던 이유다.


두 번째는 힘이다(二力). 담력을 어느 정도 갖게 된 사람은 반드시 ‘힘(力)’을 기르는 훈련으로 나아가야 한다. 조선시대의 전투는 맨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병장기를 들고 하는 것이었다. 무거운 병장기를 자유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힘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군사들은 때론 일부러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로 훈련하거나 실전에서 쓰는 무기보다 무거운 장비를 사용해 근력을 단련했다. 또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의 무기가 망가지거나 분실되는 경우가 많아 타 병종의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일도 훈련에 포함되곤 했다.


무예의 요체… 담력, 힘, 정교함, 빠름


세 번째는 정교함이다(三精). 용기를 갖추고 힘을 기른 후에는 이를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하고 그 힘이 태산을 무너뜨릴 정도로 거세다면 일단 절반의 승리는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각 군사들의 무예실력이나 진법훈련이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하다면 어느새 상대방의 공세에 틈을 보이고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고대 로마시대의 시민군은 정교한 전법과 진법으로 전략적 능력이 떨어지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마지막 미덕은 바로 신속함이다(四快). 실전에서는 빠르고 통쾌한 한 방을 준비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나아가 적의 창칼보다 빠르게 움직여야만 전투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적보다 총알이나 화살을 더 빠르게 쏴야만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용기, 힘, 정교함이 모두 부족한데 빠르기만 해서도 곤란하다. 이런 자는 전투에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옛 사람들은 무예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 중요도를 지키는 것이 효과적인 무예훈련이라고 보았다.


현대인들은 흔히 ‘사는 것이 전쟁’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만큼 혹독한 경쟁 속에서 하루를 보내기 때문인지 요즘 여기저기서 ‘힐링(치유)’이라는 말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온다. 삶이라는 전투에서 심신의 상처를 입었으니 넉넉히 보듬어 달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인 셈이다. 


전쟁과도 같은 개개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힐링하기 위해 조선시대 무예의 요체인 담-력-정-쾌(膽-力-精-快)를 적용해 봐도 좋을 것이다. 자신이 부닥친 일에 대해 용기와 힘을 갖고 대응하며, 그것을 정교하고 빠르게 처리한다면 우리 모두가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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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링크: http://omn.kr/ke6h


신간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라는 책을 읽고, 제가 쓴 서평 기사가 방금 전 <오마이뉴스>와 네이버 메인에 배치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예24기를 수련하는 입장에서, 이 책의 출간 소식은 반갑기그지 없었습니다. 출간되어 오프라인 서점에 풀리자마자 폭염을 뚫고 서점까지 달려가 앉은 자리에서 읽고 쓴 서평기사입니다. 


저자인 최형국 박사님 말로는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썼다"고 하십니다. 정말 앉은 자리에서 술술 읽을 수 있더라고요. 아래는 제가 페이스북에 올린 간단한 책 소개입니다. 


기사 링크를 클릭하시면 보다 자세한 책 내용을 보실 수 있으니, 꼭 읽어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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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올린 간단한 책 소개>


또 한 권의 재미있는 책이 나왔다.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라는 책이다.


사극 속 고증 오류에 대해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가며 비판하고, 올바른 조선 무인의 상(像)을 고증하고 있는 책이다. 조선시대 군인들은 어떻게 칼을 차고 다녔는지, 군장 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그리고 전투에 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싸웠는지까지...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지식들을 쉽게 전달하고 있다.


이를 보다보면 그동안 사극 속에서 묘사된 옛 무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비상식적으로 그려져왔는지 깨닫게 된다. 오죽하면 저자는 "(정규군이) 오와 열도 맞추지 않아, 시정잡배의 패싸움으로 전락해버렸다"고 한탄을 한다.


사실 당대 무인들의 몸짓은 책상에 앉아 사료만 들춰서는 결코 상상해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정통 역사학자인 동시에, 한국전통무예연구소를 운영하며 실제 무예를 수련하는 무인이기도 한 저자의 이력이 빛을 발한다. 몸소 말에 올라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당대 무인들의 몸짓을 올바르게 복원하고자 한 것.


뒤에 실린 참고문헌만 봐도 이 책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이 간다. 『조선왕조실록』, 『무예도보통지』와 같은 1차 사료만 57종에 논문 87편, 단행본 50권을 참고했단다. 참고문헌 10편 내외의 대중역사서가 판을 치는 요즘에, 이 정도면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대단한 노력이다. 그만큼 신뢰도도 높다.


역사서라 딱딱할 것 같다는 편견도 읽다보면 금세 깨진다. 영화 <명량>을 비롯하여 드라마 <주몽>, <정도전> 등 실제 사극 속 고증 오류의 사례를 스틸컷까지 첨부하여 세세히 분석하고 있어 훨씬 가독성이 높다. 특히 비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향후 사극 제작에 있어 고증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어 눈여겨볼 만 하다.


그동안 생각 없이 주인공의 수려한 외모나 의상, 혹은 자극적인 스토리에만 집중해서 사극을 보던 시청자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드라마를 보는 시각 자체가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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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차게 기획하고 시도했던 열정대학 학생선택과목 '함께 무예 배워볼과'가 조기 종강되었습니다. 아니 폐강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싶습니다. 정해진 이수기간을 채우지 못했고, 종강조차 소리소문 없이 이루어졌으니까요.


원래는 7월 16일이 종강 예정일이었습니다. 종강일에는 수강생들과 다함께 모여 종강파티를 할 예정이었고, 제 구상으로는 사당 본부전수관에 가서 사부님께 최종 점검을 받는 형식으로 추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종강파티는커녕 공식적인 종강을 알리지도 못하고 그냥 흐지부지 끝나버렸습니다. 이미 종강예정일이 지났으니, 종강은 했다고 봐야하겠죠. 더 이상 수업을 진행할 의사도 없으니까요.


사부님도 기대가 컸고, 저 역시 야심차게 준비했던 과목이었기에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는데, 안타깝기만 합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초반엔 매끄럽게 잘 진행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등으로 워낙 사회가 뒤숭숭하다보니, 호신술을 지도하는 과목이 개설되었을 때 오히려 여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함께 무예 배워볼과'도 저 포함 총 7명이 수업에 함께 했는데, 저 빼고 6명 전원이 여학생이었습니다.


저 역시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습니다. 기본 틀은 무예24기의 권법을 지도하는 것이었지만, 그동안 제가 배운 무술들의 기법을 응용한 호신술도 조금씩 지도했고, 그 기법에 대한 무예24기만의 방어법도 고안해서 지도했습니다. 일단 무예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죠. 과하게 수련하면 오히려 지치고 질려할까봐, 수강생 개개인의 신체 여건에 맞춰 꼼꼼히 지도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원래는 토요일 하루 수업이었지만, 주말에 시간이 안된다는 수강생들을 위해 평일 저녁 시간까지 할애해가면서 별도의 클래스를 추가 개설했고요. 수강생들에게 매 수업 후 수련일기를 블로그에 올리도록 과제를 부여했고, 꼼꼼히 읽으며 일일이 피드백해주었습니다. 제가 모르는 부분은 사부님께 대신 물어봐가면서까지 성실하게 답변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반 몇 주 동안은 반응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다들 수련 시간에 열심히 나와주었고, 심지어 추가적으로 또 나와서 보강을 받는 수강생도 있었습니다. 수련일기도 다들 꼼꼼히 잘 써주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더군요. 갑자기 다들 바쁘다고 수련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해서 첫 번째 결강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열정대학 건물이 아닌 사당 전수관을 대관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다들 전수관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했는데, 당일 날 취소하려니 사부님께도 면이 안서더군요.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두 번째 결강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토요반 수강생들이 계속 나올 생각을 안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아예 토요반을 전격 폐지해버렸습니다. 평일에 꾸준히 나오는 수강생 대상으로만 하겠다고 선포했죠. 그렇게 2주 연속 결강 사태를 맞이한 제 심정도 우울했고, 수강생들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 제 지도 방식에 문제가 있나 싶어 수강생들에게 기탄없이 의견을 제시하라고도 했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바빠서 그런거고 열심히 해주고 계신다고 위로를 해주더군요.


어쨌거나 2주 연속 결강으로 더 이상 초기의 커리큘럼(권법 28세 진도를 모두 나가는 것)대로 수업 진행하기는 틀렸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목검을 들고 가서 서로 격검을 시키거나 호신술 위주로 지도하는 등 좀 더 흥미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평일반 수강생들도 결석 혹은 잦은 지각으로 수련 시간을 제대로 맞춰주질 않더군요. 거기에 겹친 장마로 인해 하루 또 결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대로 된 마무리도 없이 종강만 바라보게 됐네요. 그래도 유종의 미는 거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수강생들과 함께 종강파티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보려 했습니다. 가장 먼저 언제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했는데, 다들 묵묵부답입니다.


마지막이니만큼 가급적 다수의 사람들이 모였으면 하는 마음에 일부러 평일, 주말 구분없이 다 열어놓고 가능한 날짜 투표하라고 했는데... 다들 제각각인데다가 심지어 투표 참여율이 반도 안되더군요. 이건 아니다 싶기도 하고, 너무 섭섭해서 "그럼 차라리 여러분이 의견을 제시해달라"고까지 호소했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 아무도 대답을 안 하네요. 


제가 더 이상 매달려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매달릴 이유도 없기에 씁쓸하지만 그냥 단톡방을 나와버렸습니다. 이대로 종강인 거죠 뭐. 그 길로 사부님께 "가치를 모르는 이들에게 굳이 가르치려 매달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도 "이번 열정대학 사태가 네 잘못이건 네 잘못이 아니건, 뭐든지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반성해야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해주시더군요. 동감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수강생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뭔가 말 못할 불만들이 있었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한 번 곰곰이 고민을 해봤는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번 열정대학 '함께 무예 배워볼과'는 유종의 미는 거두지 못했지만, 일종의 반면교사로 좋은 교훈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2학기부터 자유학기 강사로 중학생들에게 무예를 지도하게 되는데, 이번 실패의 경험은 반드시 되새겨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뭐 사람 일이 항상 잘되란 법은 없죠. 그냥 훌훌 털어버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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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수련하고 있는 '무예24기 한양류'의 2016년 하계 정기총회가 어제 있었습니다. 


저희 단체는 2009년 창립 이래 매년 정기총회를 꾸준히 열고 있습니다.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 차례씩, 1년에 두 번 열리죠. 급하게 해결해야 할 안건이 생기면 임시총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다른 단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희 단체는 전통적인 무술 도장의 도제식 문화와는 거리가 많이 멉니다. 그래서 총회를 통해 사부님과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주어진 안건에 대해 격의 없이 토론을 벌이곤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부님께서 실험을 하고 계신 거겠죠. 매니아틱한 전통무예를 가르치는 단체이기 때문에, 무겁고 딱딱한 수련 분위기를 만들면 오히려 대중화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사부님 스스로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총회' 시스템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번 총회에서도 다양한 안건들이 나왔습니다. 주요 꼭지들만 요약해서 설명해보자면,


1. 하반기 행사 일정 점검


무예24기 공연을 요청하는 지자체나 단체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저희 스스로 그런 기회를 찾아 공연 요청을 하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한양류가 위치한 동작구 관내에서 생활체육대회 등 다양한 무대가 열린다고 합니다. 


특히 11월 말에는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서 기념관 개관 5주년 기념 행사에 공연 참가할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그쪽 기념관 관계자 분들과 제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관계로, 무예24기 공연을 의뢰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더군요. 8월 6일에 제가 한 번 방문해서 간단하게 시범 보인 뒤에 공연 여부를 결정짓기로 했습니다. 만약 공연이 성사된다면 재밌게 놀다 와야죠. 가는 김에 거기서 1박 2일로 MT도 하기로 했습니다.


2. 홍보 활동 관련 논의


무예24기 자체가 홍보는 많이 되고는 있습니다. 특히 수원화성에서 매일 하는 정기시범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고 있죠. 하지만 무예24기 공연은 공연이고, 저희 단체는 단체니까요. 그리고 저희 단체는 공연용 무술을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군사무예 복원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노선이 명확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간의 의혹(무예24기는 평생 할 수 없다, 무예24기는 무술적 가치가 없다 는 등등)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반박하고, 실력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희 단체 역시 나름대로의 홍보 활동을 펼쳐나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를 위해 타 문파를 벤치마킹한 방안들을 제시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공개참관을 의미하는 '오픈하우스'나 세미나 등을 개최하는 거죠. 초학자 대상의 '단기 전수회' 개최도 긍정적으로 논의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홍보를 위한 충분한 예산이 확보되고, 단체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시범 준비가 되면 겨울방학 때쯤에 전격적으로 추진해보기로 했습니다.



대략 이 정도였고요. 더 많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다 내부적인 이야기라... 확실히 총회를 통해 다른 수련생들과 토론을 하다보니 생각지 못한 의견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저는 어쨌거나 무술이란 기본적으로 호신이 가능해야 그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의 내내 계속해서 '실전성 증명'과 같은 측면에 입각한 홍보를 주장했는데요, 몇몇 수련생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하더군요. 그중의 한 수련생은 좀 날카로운 지적을 했습니다.



"일본 고류검술들도 이제는 실전성 증명이 아니라 그냥 전통문화 계승 차원에서 전수를 하고 있는데, 무예24기와 같은 병장기 위주 무예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지금 시대에 칼, 창 들고 실전기술을 가르친다고 하는 건 호신이 아니라 살인행위를 가르치는 것 아니냐"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병장기를 수련하는 단체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제가 권법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는 실전성이란 '무술의 본질적 의미를 알고 수련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수원화성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무예24기 공연을 보면, 화려함을 위해 인위적으로 가미된 부분, 과장된 동작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동작들을 보고 실제 무술을 하는 분들 중에 "저런 동작은 실제로 쓰지도 못한다"고 생각하고, 무예24기의 가치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더랬습니다. 물론 당연히 쓸 수 없는 동작들이죠. 중국무술로 치면 '우슈'와 같은 표연용 무술이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그런 동작은 제대로 무예24기를 복원하고 수련하는 곳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에게 호응하기 위해 공연에서만 선보이는 동작들이죠. 저희 단체 역시 그런 점에서 공연 팀과는 명백히 노선을 달리합니다. 곤방(봉) 하나를 쓰더라도, 타점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실제 상황에서 좀 더 효율적으로 상대방의 봉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움직임을 추구합니다. 이런 게 바로 '실전'이라는 거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게 무술의 본질적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효율적인 움직임을 제대로 수련하고 있다는 점을 홍보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여하간 이런 생산적인 토론과 함께, 평소 바빠서 잘 오지 않던 수련생들도 대거 참석하여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이 마침 초복이기도 해서, 총회 종료 후에는 근처 양꼬치집에 가서 칭다오 맥주를 곁들인 양꼬치와 경장육슬, 마파두부 등의 중국요리로 몸보신을 했네요. 



그러고도 다들 아쉬웠던지, 2차로는 마트에서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들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효사정에 가서 노상 뒷풀이를 즐겼습니다. 마침 비가 와서 날이 선선한지라 한강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밖에서 술 마시기에 아주 좋더군요. 그렇게 오가는 술잔과 함께 다들 한층 더 화목해진 것 같습니다. 사부님도 뒷풀이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여러모로 벅차오르는 것 같다"고 뿌듯해 하시더군요.



여러모로 제가 몸 담고 있는 단체이니만큼 계속해서 잘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다른 무술과는 별개로 무예24기는 무예24기대로 평생 할 생각이고, 특히 이 단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체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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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쯤이던가요, 갑자기 사부님으로부터 "중학교에서 무예를 가르쳐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서울 소재 한 중학교에서 자유학기 예·체능 교육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무예24기 중 권법(拳法)을 지도해달라며, 사부님께 강사 의뢰를 했다고 합니다. 사부님은 본인 일도 바쁘고 하셔서 저한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많이 망설였을 것 같은데, 전역한 직후 백수 신세라 늘 비어있는 통장 잔고 탓에 한숨만 쉬고 있는 터에 좋은 기회다 싶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현실적인 문제가 가장 컸죠. 거기에 사부님께서 믿고 맡기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고요. 또 자유학기 강사 경험이 훗날 전수관을 차린다거나 할 때 여러모로 좋은 경험으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덥썩 한다고 수락했죠.


지원부터 계약 체결까지는 일사천리였습니다. 학교 측에서 먼저 강사 직을 제의한지라, 면접도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나름 면접이라고 자기소개서 한 번 쭉 검토하고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도 준비해서 갔는데, 교감 선생님께서 "바로 계약 체결합시다"하고 쿨하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어제 해당 학교에 방문해서 계약 체결하고 왔습니다. 알바를 한 번도 안 해본지라, 계약서를 쓰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어요. 여긴 학교라서 계약 절차가 좀 더 복잡한 것 같았습니다. 신체검사 결과도 내야해서, 계약 맺기로 결정나자마자 곧장 보라매병원가서 부랴부랴 '공무원 채용신체검사'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교라 그런지 '성범죄 및 아동학대 관련 범죄 전력 조회 동의서'란 것도 즉석에서 자필사인한 뒤에 제출했습니다. 경찰서에서 신원조회도 한다고 합니다. 세상이 흉흉하니 이런 절차는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진: 계약서 사진입니다)


아무튼 여름방학 끝나고 2학기부터 수업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내년 2월까지가 계약 기간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이고, 6, 7교시 2시간 수업이라고 합니다. 한 반에 20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많은 수의 학생들에게 뭔가를 가르쳐보는 게 처음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교원자격증이 있는 강사의 경우, 혼자 지도할 수 있지만 없는 경우에는 학교 선생님과 Co-teaching 한다고 합니다. 애들을 가르쳐보기는커녕, 어울려 본 적도 없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노련한 선생님께서 옆에서 보조해주신다면 훨씬 수월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진: 예시로 작성해 본 수업계획서입니다)


여하간 당분간은 금전 사정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취미 생활도 당분간은 맘 놓고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이상 집에서 논다고 눈치보지 않아도 되고요. 아무튼 열정대학에서의 무예 지도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열심히 지도해 볼 생각입니다.


PS. 점점 아이들이 교육 받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 흐뭇합니다. 제가 중학생, 고등학생 때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물론 제가 다녔던 성남고등학교에서는 검도와 유도가 필수과목이긴 했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종목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일부러 무예24기를 배우고 싶어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는데, 이제 일선 교육현장에서도 접할 수 있다니, 학생들은 복 받은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도 영춘권, 무예24기, 태껸 등 다양한 무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제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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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늘 최종 점검 때 사부님이 찍어주신 사진. 결코 완벽한 자세가 아니므로, 따라하지 마세요!)


2016 하계 활쏘기 초급자 특강이 끝났다.


3주 6차 시(주 2회씩)라는 짧은 과정이었기에, 사실상 활쏘기가 어떤 것인지 맛만 보는 강의였다고 보는 게 옳은 표현일 것 같다. 


나같은 경우 입대 전에 황학정 국궁교실에서 활쏘기를 배운 바 있지만, 오랜 시간 활을 잡지 않았기에 활에 대한 감각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국궁교실 역시 교육과정이 그렇게 길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완벽한 궁체를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그래도 불완전한 상태로 활을 내려놓았다가, 몇 년 만에 다시 활을 잡으니, 나 역시 완전 초보나 다름 없는 상태에서 수강을 하게 되었다.


이번 강의에 대한 강평을 내리자면, 내 개인적으로는 오랜 기간 활을 내려놓고 있다가 다시 활에 대한 감을 잡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오늘 마지막 강의에서 최종 점검을 받았는데, 물론 지적 받은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황학정을 다닐 당시에도 늘 지적 받아 스트레스였던 '중구미 엎기'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현상'은 여전히 고질병으로 다시 나타났다. 더욱이 그때는 그래도 꾸준한 수련으로 깍지손이 단련이 되었었는데, 이제는 다시 흐물흐물한 맨살로 돌아온지라, 단련을 하는 과정의 극심한 고통으로 활을 당기기가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다시 한 번 활을 잡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아마 이번 특강을 듣지 않았더라면, 또 다시 '언젠가 배워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활을 잡지 않았을 거라 본다. 그래서 중요한 건, 중단 없이 활쏘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앞으로 집에서 개인 수련도 틈틈이 해주고, 전수관이나 사정에도 종종 나가 점검을 받을 생각이다.


명궁은 못되더라도 혼자서 취미로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기본적인 자세를 갖춰야하지 않겠는가.


PS. 처음 1, 2, 3강 후기를 꾸준히 올리다가, 갑자기 후기를 올리지 않은 까닭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4강부터는 갑자기 수업 내용이 어려워졌다. 3강에서도 얼핏 '이해하기 힘들었다'며 솔직히 고백하는 구절이 종종 보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모른다고도 고백했었다. 4강은 도저히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이론들이 많아서, 도저히 후기 작성에 대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부님께도 "더 이상 후기를 못 올리겠다"고 고백하고, 후기 작성을 중단했던 것이다. 머리 나쁘다고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온라인에 공개하여, 다른 이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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