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항일영화' 전성시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줄지어 개봉하고 있는 요즘이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암살>을 시작으로 2016년 작년 한 해에만 <동주> <귀향> <덕혜옹주> <밀정> 등 무려 네 편의 영화가 잇달아 개봉한 것이다. 올여름에도 벌써 <박열> <군함도> 등 두 편의 항일영화가 개봉을 앞둔 가운데, 28일 개봉 예정인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13일 언론 및 일반 시사회를 통해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 부부의 이야기


영화 <박열>은 1920년대 일본을 무대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 박열(1902~1974)과 그의 아내이자 동지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1923년 일본 열도를 뒤흔든 '관동대지진' 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유례없는 대지진으로 일본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자 수습책을 논의하던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살포한다. 


광기에 휩싸인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보이는 족족 학살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일본 정부 역시 본토 내 불령선인(일제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얕잡아 부르던 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아나키스트 조직 '불령사'를 이끌며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작전'을 준비하던 박열(이제훈 분)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가 체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사진: 영화 <박열> 스틸컷 - 출처: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이준익 감독, 마침내 <동주>를 뛰어넘다


영화는 대역죄 혐의로 체포된 박열 부부의 옥중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공간적 배경은 대부분 좁은 감옥과 재판정에 국한된다. 영화 <암살>과 <밀정> 속에서 묘사된 아슬아슬한 총격전이라든지 스크린을 뒤흔드는 폭파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 박열은 황태자 암살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체포된 탓이다.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 동안 이렇다 할 액션 장면이 없다는 점은 자칫 관객들이 지루함을 유발케 할 우려도 있었다.


실제로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가 그랬다. 윤동주 시인의 삶이야 그 자체로 흠잡을 데 없이 고귀했고, 시인의 역할을 맡아 달콤한 목소리로 시(詩)를 읊었던 배우 강하늘의 모습은 팬심을 사로잡을 만했다. 그 결과 입소문을 타고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선전했다. 그러나 영화적 재미가 있었던 작품이라고 말하기엔 선뜻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장면 없이 시종일관 느릿하고 조용한 템포로만 흐르던 <동주>의 전개는 다소 밋밋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극의 한계일 수도 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시를 무기로 독립운동을 했던 윤동주 시인에게 총을 쥐여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박열>은 전작 <동주>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관객들의 눈을 현혹하는 자극적인 전개 없이 역사적 고증에만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영화적 재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 열쇠는 바로 '해학'에 있었다.


한국인 특유의 해학적 정서로 그려낸 암울한 시대


실제 역사가 그랬듯이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시대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시대다. 주권을 잃은 채 노예적 삶을 강요받는 식민지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일 수가 없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항일영화는 시종일관 진지함과 엄숙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늘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왔던 게 사실이다.


반면 <박열>은 한국인 특유의 해학적 정서로 암울한 시대를 경쾌하게 그려냈다. 일제에 의해 피체되는 험악한 상황에서조차 박열 부부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즐기는가 하면, 다 함께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하며 유치장을 뮤지컬 무대로 둔갑시킨다.


취조가 시작되자 박열 부부는 오히려 자신들이 검사를 심문하는가 하면 일본인 간수를 통해 서로 간의 '러브레터'를 주고받는 등 한마디로 이들을 '가지고 논다'. 상대적으로 일본 내각의 고위 대신들은 박열에게 휘둘리는 어리숙한 캐릭터들로 묘사된다. 캐릭터들의 해학적 묘사에 맞춰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들조차 경쾌하기 짝이 없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박열이 조선의 관복을 입고 재판정에 나타났을 때다. 박열을 지켜보는 영화 속 법정의 방청객들이 폭소를 터트리는 동시에 스크린 밖 객석에서도 폭소가 터져 나왔을 정도로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 속에 흘러간다.



(사진: 영화 <박열> 스틸컷 - 출처: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물론 해학도 정도를 넘어서면 자칫 가벼워 보일 우려가 있다. 시사회에 앞서 열린 무대인사에서 이준익 감독 역시 "영화의 교훈적 의미와 재미 둘 중 하나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게 고민이었다"고 고백했다. 재미를 잡으려다 자칫 그 시대를 너무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열>은 영화적 재미와 교훈적 의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박열 부부의 유쾌한 투쟁에 웃음을 짓다가도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며 일갈하는 박열의 모습에 짐짓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시쳇말로 '웃픈 영화'인 셈이다.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한국인 특유의 해학적 정서로 풀어낸 <박열>은 그래서 항일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빛을 발한 배우들의 연기... 배우 최희서의 발견


물론 이 역시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가 뒷받침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박열 역으로 배우 이제훈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영 미덥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실제 박열의 사진을 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험상궂은 그의 외모를 표현하기에 이제훈은 너무나도 곱상한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의 우려를 깨고 이제훈은 역사 속의 박열을 현실에서 되살려냈다. 연인 가네코를 향해서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하다가도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분노를 쏟아낼 때 눈동자에 서리는 광기는 영락없는 박열 그 자체였다. 타임머신이 있어 그 시대의 박열을 마주했더라면 이제훈의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단언컨대 영화 <박열>의 최대 수혜자는 가네코 역을 맡은 배우 최희서라고 하겠다. 이미 <동주>를 통해 이준익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바 있던 그녀는 <박열>을 통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매력을 마음껏 뽐낸다. 어설픈 조선어를 구사하는 일본 여인의 억양은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 맞서 분노의 포효를 쏟아낼 때는 그 서슬 퍼런 광기에 소름마저 돋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최희서는 역사의 뒤편에 가려진 채 주목받지 못하던 가네코 후미코라는 여인을 성공적으로 되살려냄으로써 대중들에게 그 이름을 알리는 데 톡톡한 공을 세웠다.


역사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주인공을 내세워 비교적 덜 알려진 숨은 주인공을 발굴해내는 기법은 이미 이준익 감독이 전작 <동주>에서도 효과를 톡톡히 본 방식이었다. <동주>를 통해 관객들은 주인공 윤동주(강하늘 분)보다 친구였던 송몽규(박정민 분)라는 존재에 더 주목했다.



(사진: 영화 <박열> 스틸컷 - 출처: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잊혀진 이들을 만나 반갑고 고마웠던 <박열>


이준익 감독은 "윤동주 시인은 알아도 박열은 잘 모르지 않느냐"며 개봉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항일영화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역사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익히 알려진 사실들을 재구성한 사례가 많다. 그러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은 그 짧은 항일독립운동사에서조차 비중 있게 다뤄진 이름들은 아니었다.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삶을 만나는 것은 관객들의 입장에서도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역사 속 숨은 영웅들을 발굴해 오늘에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이준익 감독의 시도는 그 자체로 박수받아 마땅할 일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시대, 암울했던 삶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며 싸웠으나 역사에서마저 잊힌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영화 <박열>은 더욱 반갑고 고마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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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꿈은 군대 꿈이라고 한다. 2년 가까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숨 막히는 위계질서 아래 억눌려있던 기억이 마냥 즐거웠던 추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렬했던 기억은 잔인하게도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끔씩 꿈의 형태로 다시 드러나곤 한다. 


전역한 지 꼭 1년이 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군대 꿈이라고 해서 전부 악몽은 아닌가보다. 가끔씩 꾸는 꿈 중에는 깨고 나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아련함을 품게 만드는 꿈도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가려진 봉우리, 아슬아슬한 절벽으로 이뤄진 길.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나. 생각만 해도 아련해지는 이 풍경은 군 시절 나의 추억이 깃든 한 산에 대한 이야기다.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경북 영천, 경기 포천, 강원 고성, 강릉...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내겐 강원도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이 그랬다.


설악산의 한 봉우리인 상봉은 해발 1,243m가 넘는 험준한 산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당시 이 봉우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던 탓에 이곳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던 이등병 당시, 나는 상봉을 작전구역으로 배정받았다. 워낙 높고 험한 산이었던 탓에 베테랑 발굴병들조차 쉬쉬하던 그 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리바리 이등병에게 첫 과제치곤 매우 버거운 과제였던 셈이다.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내가 메고 있던 무거운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가야만 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내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의 첫 만남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정상에 도착하니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이 펼쳐졌다. 성인 남성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구간들이 끊임없이 펼쳐진 이곳.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에 앞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말인가’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졌다. 아, 이런 곳에서도 전쟁이 있었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의 흔적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나는 놀라움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높은 산을 오르느라 죽상이던 발굴병력들 역시 탄성을 내질렀다. 책으로만 접하던 전쟁의 기억을 두 눈과 양 손의 살갗으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됐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된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생각하던 내게 그곳에서 드러난 유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워낙 작아 부위조차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조각유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상관은 저 멀리 동해바다에 떠있던 적의 군함들의 이곳 상봉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아군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산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유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험준한 산의 바위틈 사이에서 풍상을 맞아가며 6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유해들을 수습하고 입관한 뒤 태극기로 고이 덮어 봉송했다. 봉송병에 의해 운구되는 유해를 뒤에서 바라보는 그 잠깐 사이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도 힘든 이 험한 봉우리에서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청춘들...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던 그들을 생각하니 산이 너무 높다며 마냥 투정부렸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가족과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상봉의 넋으로 스러져간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역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때때로 상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그 험준한 봉우리를 마주할 때면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바위틈에 드러난 유해들을 지켜보며 지난 날을 돌이켜보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내게 주어진 청춘의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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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링크: http://omn.kr/m1ap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 및 서평은 링크를 참조)


이번에 출간된 <동경삼재>를 읽었다. 동경삼재(東京三才)는 일본 동경(도쿄)으로 유학 간 조선인 유학생들 중 세 명의 인재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바로 당대 문필가로 이름을 날렸던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를 뜻한다.


3.1운동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독립을 부르짖었던 최남선과 이광수는 1920년대 이후 친일의 길을 걸었고, 1940년대에는 동포 청년들에게 전선으로 나가 천황을 위해 죽을 것을 독려했다. 지조를 지킨 이는 홍명희 한 사람 뿐이었다.


해방 후 홍명희는 월북하고, 최남선과 이광수는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왔다. 기회를 놓칠세라 그 둘은 스스로의 반민족행위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제 몸을 팔아서 아버지의 고난을 면케 하려는 심청의 심경밖에 있을 것이 없었다. 다른 친일파는 어떠한지 몰라도 내가 하려는 친일은 돈이나 권세나 명예가 생기는 노릇은 아니었다. (…중략…) 민족을 위해서 산다고 자처하던 나로서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 이광수, <나의 고백>


"내가 친일파인가 아닌가는 나의 저서가 굉장히 잘 팔리는 것으로 보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 최남선


해방 후 이들이 내뱉은 정교한 변명을 보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들이 한때마나 민족지도자랍시고 독립만세운동을 독려하고 청년들에게 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했단 말이던가. 뻔뻔하기까지 한 저들의 행태를 보며 오늘날 양심을 잃고 표류하는 지식인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가 오늘날 지식인들의 변절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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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영화 <덕혜옹주>를 보고, 용산까지 간 김에 근처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습니다. 때마침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유료 입장이지만 지인으로부터 초대권을 받아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 원나라 경원항(현재의 절강성 영파)을 출발해 일본의 하카타로 가던 무역선이 제주도 인근에서 풍랑을 맞아 표류하던 끝에, 신안 앞 바다에 수장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75년 8월. 전남 신안에서 어업을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청자 화병이 걸려 올라오면서, 본격적으로 정부 차원의 수중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요, 이를 통해 그 무역선의 존재가 650여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신안 앞 바다에서 발굴했다하여 '신안선' 혹은 '신안해저선'이라고 명명되었다고 하네요.


 

당시 정부는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년 동안 무려 10차에 걸친 발굴 조사 끝에 2만 4천여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수중문화재를 발굴했다고 합니다. 14세기 당시 중국과 고려, 일본을 거쳐갔던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무역선이었기 때문에 신안선의 발굴은 당대 동아시아 교류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하카타로 가는 이 배 안에는 주로 향로, 찻잔, 화병과 같은 값비싼 감상품들이 주로 실려있었다고 해요. 이를 통해 당대 일본 상류층이 어떤 취미를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복고풍이 유행하던 중국의 영향을 받아 방고동기(仿古銅器: 중국 고대 하, 은, 주 삼대(代)의 청동기를 본따 만든 도자기 및 금속기)를 수집했고, 고급 무사와 같은 상류층 사이에서는 화병에 꽃을 꽂아 감상하고, 향로에 향을 피우고, 차(茶)를 마시는 등의 호화스러운 취미생활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취미생활 자체가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처럼 받아들여졌다는군요.



특별전시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고, 대부분 비슷한 모양의 도자기와 금속기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그래도 흥미롭게 봤습니다. 특히 신안선에서 발견된 동전은 무려 28톤 규모라는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2전시실에 가면 도자기들을 대형 진열장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점이 이색적이었습니다. 마치 박물관이 아니라 창고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전시품들 중에는 저렇게 쓰러져있는 도자기도 있던데...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쓰러졌는데 바로 세우기는 번거로웠던 걸까요.



동전하고 금속기도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들이 600여년 동안 바닷 속에서 잘 보존되어온 것도 신기한 것 같아요. 당시 공예품들의 수준이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그리고 후추와 같은 향신료나 열매씨도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신석기시대 탄화된 쌀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후추와 같은 향신료가 바닷 속에서 발굴되었다는 건 처음 들어봤어요. 이렇게까지 잘 보존되어온 게 참 미스터리한 일이죠.



개인적으로 전시품들보다는 신안선에 타고 있었을 사람들의 생사가 참 궁금하더군요. 물론 거의 다 수장되었겠지만,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들이 전시품의 화려함에만 주목할 게 아니라, 신안선에 타고 있었을 이들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 중에는 신안선에서 발굴된 문화재들로 당시 신안선에 타고 있었을 사람들의 선상생활을 재구성한 코너도 있었습니다. 배고플 때는 밥을 해먹고, 심심할 때는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면서 무료함을 달랬을 그들의 손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전시품들이었습니다. 개중에는 얼른 고향 땅으로 돌아가 그리운 가족의 품에 안기고 싶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값비싼 무역품을 팔아 큰 이윤을 남길 생각에 부풀어있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신안선에 탔건, 그 사람들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차가운 바닷 속에 잠들어야만 했던 그들의 최후가 안타까운 건 매한가지입니다. 



이번 전시를 주관하는 박물관 측도 신안선에 타고 있었을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전시개요와 에필로그를 꾸며놓았더군요. 참으로 명문장입니다. 누가 이 문구를 기획하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박물관 전시개요와 에필로그 문구를 보고서 감동을 받은 건 처음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전시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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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24기란 정조의 명을 받은 실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무예의 달인 백동수가 1790년에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의 24가지 무예를 말합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전래의 무예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우수한 무예를 적극 수용하여 '24기(技)'로 정리한 무예교범서로서 부국강병의 실학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완료한 정조는, 이 책을 당시 중앙 오군영(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 어영청)에 보급하여, 군영마다 제각각이던 군사들의 기예를 통일하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이 확립된 탓에, 무예를 지도하는 별도의 무관(武館)이 존재하지 않았고, 아버지나 장인어른 등 무관직을 지낸 어른들로부터 무예를 전수받는 문화였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무벌가문이 형성되었고, 가문마다 전해져오는 기법들도 제각각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역시 장인어른이 무예 스승이었다죠. 그래서 옛 기록을 살펴봐도, 군영마다 무예의 명칭부터 제각각입니다. 동작들도 제각각이었겠죠.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정조는 무예의 명칭을 통일하는 동시에, 실제 동작들도 통일하기 위해 「무예도보통지」를 적극적으로 보급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정조 본인의 호위를 위해 창설했던 특수부대 '장용영(壯勇營)'에도 「무예도보통지」를 보급하였지요. 무예24기로 단련된 장용영 군사들은, 당대 최고의 호위무사들이었을 겁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대통령 경호원' 격이랄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조상들은 무예를 보존해야 할 하나의 전통문화로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더해 갑작스러운 개화의 물결로 인해 급진적으로 군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무예24기는 역사의 물결 속에 사라져버리고 말았죠.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암흑기(일제강점기와 6.25 등)가 워낙 길었던 탓에, 전통무예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못했죠.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경당, 십팔기를 비롯한 여러 전통무예연구단체들이 복원을 시도했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복원 스타일에 따라 유파를 형성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가 소속된 무예24기 한양류의 경우는 경당-무예24기보존회의 계보를 이은 단체로, 보존회의 해석과는 달리 자체 해석으로 복원한 기법들도 상당합니다. 복원무술이다보니 열린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긴 합니다. 타 유파의 기법 중에 차용할 만한 것들은 적극적으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짜깁기'라는 비판도 있지만, 복원무술이 안고가야 할 한계라고 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가지 않는 이상 '100% 원형복원'은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이런 노력을 하다보면 '무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날이 올 거라 봅니다.


이 홍보 영상 속에 등장하는 무예24기 시범단원들은 현재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시범단' 소속으로, 매일 같이 수원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무예24기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주 화~일요일 오전 11시에 신풍루 앞에서 무료공연을 하고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구경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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