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처음 읽었던 때 말이다. 꽤나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젠 책 속의 구절들도 가물가물하지만 소설을 읽던 당시의 감정만큼은 여전히 또렷하다.


답답함, 굴욕감, 분노. 차라리 이 모든 내용이 픽션이었으면 하는 헛된 바람을 품었을 정도로, 무기력하고 굴욕적인 우리네 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시작된 병자호란은 조선의 역사, 아니 5천 년 민족사를 통틀어 가장 굴욕적이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한때 '야만족'이라 깔보던 여진족들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조선 임금의 무릎을 꿇린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렇다 할 전투조차 치러보지 못한 채 너무도 빠르고 무기력하게 항복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비감에 젖게 만든다.


원작 소설의 충실한 반영


처음 영화 <남한산성> 제작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대중들은 기대보다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박희순 등 내로라하는 명품배우들을 총출동시켰다지만 적을 물리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나 극적인 반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패배와 굴종의 역사에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던 걸까. 지난 3일 개봉한 <남한산성>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매우 뜨거웠다. 개봉 직후 <킹스맨: 골든 서클>을 제치고 예매율 1위를 달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의 반응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비록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장면들은 없었지만 병자호란의 비극적인 역사를 스크린에 제대로 구현해냈다는 평들이 쏟아졌다. 특히 동명의 원작 소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평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영화 <남한산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얘기일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영화는 김훈 소설이 갖는 특유의 '비장미'와 '절제미'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구체성 없이 모호하면서도 은유적인 김훈만의 문장이 영화의 대사와 캐릭터의 성격으로 고스란히 구현된 것이다. 


최명길과 김상헌, 과연 누가 옳을까


영화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청나라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 최명길(이병헌 분)과 적극적인 항전을 부르짖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 분)의 대립 구도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줄기다.


최명길은 적진과 남한산성을 끊임없이 오가며 나라와 백성이 모두 '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찾은 답은 화친이다. 조선군의 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무모한 항전이 오히려 '말(言)의 길'을 끊어 더 큰 피를 부르게 될까 고민하고 두려워한다. 


반면 대의명분으로 무장한 김상헌은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하는 전형적인 선비다. 싸워보지도 않은 채 적에게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함부로 맡길 수 없다며 "차라리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라"고 부르짖는다.


영화는 최명길과 김상헌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논리적 정당성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고 있을 뿐이다. 


관객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나라와 백성부터 살리고 보는 것이 먼저 아니겠냐는 최명길의 주장도, 적에게 구걸하여 얻어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김상헌의 주장도 제각각 일리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동혁 감독 역시 인터뷰에서 "(남한산성은)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며 관객들 스스로 판단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위정자들의 책임 회피에 대한 통렬한 비판


다만 영화는 또 다른 대립 구도를 설정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바로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자들과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의 대립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방법은 달랐어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운 충신들이다. (사사건건 서로 반대만 할 것 같은 그 둘도 영화 속에서 때때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 둘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무겁게 여겼으며, 그 책임감에서 자신만의 신념이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각자가 목숨 걸고 화친과 항전을 부르짖은 것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반면 영의정 김류(송영창 분)를 비롯한 대다수 중신들은 상황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를 반복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데만 급급하다.


최고결정권자인 임금 인조(박해일 분) 역시 다르지 않다. 인조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신료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고 도망치려고만 한다. "나는 살고자 한다"는 그의 한 마디에 나라와 백성보다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라는 그의 무책임한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영화는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보다도 책임져야 할 위치에 선 자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더욱 강하게 비판한다. 그들의 '찌질함'을 더 노골적으로 비꼬기 위해, 영화는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대화 장면을 마치 만담처럼 우스꽝스럽고 과장되게 연출하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이 여의도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영화가 보내는 메시지가 뜨끔하게 다가오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정치적 현실이 겹쳐 보이는 탓이다. 여의도의 그 많은 정치인들 중에 자신의 가슴에 달린 '금배지'의 무게를 무겁게 여기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헌정 사상 초유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부결 사태 앞에서도 상황의 엄중함과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가 결정권을 가졌다"며 득의만만하던 한 야당 대표의 말만 봐도 병자호란 당시의 위정자들과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다. 사드·북핵 등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외교·안보적 현안 앞에서 미·중 강대국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백성들이 그랬듯 이제 우리들도 위정자들의 현명한 '선택'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선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지 않는다. 다만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으로부터 회피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책임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이다. 이제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묻는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길을 걸을 것인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길을 걸을 것인지 말이다.


[일러두기]


* 해당 글은 <오마이스타> 기사로도 보도됐습니다

* 첨부한 스틸컷의 저작권은 영화 <남한산성> 배급사인 CJ 엔터테인먼트에 있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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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개봉한 영화 <밀정>을 보고 왔습니다. 개봉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봤더랬죠. 사실 이 영화는 제작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손꼽아 기다려왔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제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역사를 소재로 한 팩션영화(그중에서도 특히 독립운동에 관한 영화)에 대한 개봉 소식이 들려오면 늘 달려가서 보곤 합니다.



의열단을 소재로 한 팩션영화


영화 <밀정>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1920년대에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활약했던 항일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1923년에 있었던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과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 다수와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한 사건입니다. 후자는 이번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사건인데, 의열단이 중국에서 직접 제조한 폭탄을 식민지 조선의 수도인 경성으로 반입해 동시다발적 폭탄테러를 벌이려던 계획이었습니다. 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 조선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지 통치기관들이었고, 암살 대상은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조선총독부 수뇌들이었지요. 


하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는 바람에 작전은 미수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 작전에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소속 경부인 황옥이 의열단의 폭탄 반입을 남몰래 도왔다고 하는데요, 재판 당시에는 자신이 의열단과 무관함을 주장하여 지금까지도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영화도 그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고요. 이렇게 때로는 역사가 밝혀주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사진: 영화 <밀정> 스틸컷 - 출처: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암살>보다 더 재밌게 본 영화


개인적으로 작년에 개봉했던 비슷한 주제의 영화 <암살>보다 더 재밌게 봤습니다. <밀정>에서 일본 경찰 이정출 역을 맡은 송강호와 역시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을 맡은 엄태구의 심리전을 보는 맛이 쏠쏠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의열단원들을 밖으로 빼내려는 이정출과 그런 이정출의 틈을 파고들며 의열단원들을 찾아내려는 하시모토의 대결은 손에 땀을 쥘 정도로 긴박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의열단 vs 일본 경찰'의 구도라기보다는 '밀정 vs 일본 경찰'의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거기에 수시로 벌어지는 총격전 역시 스릴 넘쳤습니다. 의열단원들은 실제로 명사수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제법 자주 묘사됩니다. 단총 한 자루를 가지고서 다수의 일본 경찰을 가지고 노는 장면 말이지요.


잔혹하다고 외면해서는 안될 우리의 역사


그리고 영화가 꽤나 잔혹하다는 평이 있습니다. 저 역시 보는 내내 눈을 질끈 감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고문 장면 등이 상당히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인데요, 회피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눈을 부릅 뜨고 지켜봤습니다. 마치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직시하고, 그 치욕과 분노를 가슴에 새기기라도 하듯이 말이죠. 실제로 잔혹하다며 평점을 낮게 주는 관객들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저게 진짜 우리 선조들이 겪어온 역사라고. 오히려 저기서 묘사된 장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라고. 저들의 희생과 고통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의열단장 정채산 역으로 특별출연한 이병헌. 이병헌의 연기력만큼은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약산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역할인데, 의열단 리더의 고뇌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으로 분한 조승우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처럼, 이번 영화의 가장 큰 공신 중 한 명은 역시 이병헌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모두 이병헌의 입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꼭 영화를 통해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사진: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맡은 의열단장의 모티브가 된 '약산 김원봉')


영화가 가진 저력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밀정>을 보고 나오는 내내 영화가 가진 저력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년 영화 <암살>을 보고 나오는 길에, 관객들 입에서 '김구', '김원봉'이라는 이름이 회자되는 것을 보며 새삼 고무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영화가 가진 힘에 대해 깨닫는 시간이었는데, 이번 영화를 보고 난 소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학이란 결국 대중과 소통해야 그 본연의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역사학자들이 세미나 현장에서 새로운 논문 발표하고, 초야에 묻혀 연구를 위한 연구에나 매진할지언정, 그게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면 결국 '죽은 학문'에 불과할 뿐이죠. 저 역시 우리의 잊혀져 가는 역사를 어떻게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을까에 늘 촛점을 맞추고 고민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면, 대중에 미치는 파급력만큼은 논문과 비견될 일이 아니죠. 



(사진: 해방 후 촬영된 실제 의열단원들의 모습)


그런 점에서 이번에 개봉한 영화 <밀정>이 점점 흐릿해져만 가는 역사의 기억을 대중들에게 다시 또렷하게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를 고대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어주신 김지운 감독님과 좋은 연기 해주신 배우 분들께도 특별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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