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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4.15 [책]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 - <이회영 평전>

도서명: 이회영 평전

저자: 김삼웅

출판사: 책보세

출판년도: 2011년


우당 이회영(1867-1932)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내가 처음 우당 이회영을 알게 된 것은, 작년에 경술국치 100년 특집으로 방영했던 KBS 대하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솔직히 고3때나 재수 시절에나 한국근현대사를 수능 과목으로 선택해서 공부했었고, 특히 한국근대사를 중점적으로 공부한다고 하던 터에 우당 선생의 존함을 몰랐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회영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고, 드라마를 보고 난 뒤엔 그 여운에서 쉽게 벗어나오질 못했다.

 

우당 이회영.

 

그는 생각보다 매우 크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말이 있다.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 쉽게 번역하자면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대기업 간부들이 요양 시설을 찾아 봉사 활동을 하고, 연말마다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성금을 기부하는 등의 행위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들의 그런 행동들은 대부분 '눈 가리고 아웅'격으로 형식적인 행동에 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는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00년 전, 바로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우당 이회영이다.

그는 명재상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6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과 노비가 가득했고 사람들은 그를 삼한갑족(三韓甲族: 우리나라에서 대대로 문벌이 높고 부유한 집안)이라 불렀다. 한양 땅에서 우당 집안 소유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그 재산의 규모가 얼마였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조선 유교 사회의 폐단이었던 성리학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양명학을 수용한 그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노비를 해방한 뒤, 그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당시 풍속으로는 금기시되던 재혼을 한 것이다. 또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 회복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그는 6형제 모두를 설득하여 온 집안 식구의 가산을 팔아치우고 일가족 60여명(노비 포함)이 함께 간도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삼한갑족의 후예로 일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던 그의 집안이 한꺼번에 해외 망명을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엄청난 이슈였고 일제조차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우당 형제가 가산을 팔아치워 마련한 돈은 4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마저도 당시 우당이 급하게 팔아치우는 바람에 제 값을 받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최고 1조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우당은 이 어마어마한 금액을 모두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데 쏟아부었다. 그가 세운 신흥강습소는 후일 독립군 장교 양성의 요람 '신흥무관학교'가 되어 무장독립투쟁의 불꽃을 피우게 되니, 우당 이회영이야말로 한국 무장독립투쟁 역사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처럼 대단한 가문의 후예였던 우당 이회영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말그대로 몰락하고 만다. 형제들은 모두 쫄쫄 굶기에 이르렀고, 뿔뿔이 흩어져 생사여부를 알기도 어려웠다. 역시나 엄청난 거부였던 둘째 형 이석영은 심지어 굶어 죽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당은 오히려 없는 돈을 쏟아부어 동지들 끼니를 챙겨주었으니 우당 이회영과 그의 6형제는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당 이회영은 일찌감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심취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 노선, 무장투쟁노선 등으로 갈리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선에 따른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경계한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며 선각자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감투를 싫어했고, 항상 뒤에서 모든 실무를 맡아하면서도 공을 남에게 돌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중국 대륙에서 밀정을 처단하고, 일본 고위 공직자를 처단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에도 앞장섰다.

 

그는 1932년 본격적인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위해 대련으로 건너갔다가, 밀고에 의해 대련항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회영을 신고한 밀정이 바로 둘째 형 이석영의 아들 이규서였으니, 참으로 그는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같은 아비에 개같은 아들)라고 할 수 있겠다. 무장독립투쟁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리려던 우당 이회영. 그의 나이 66세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나온 이회영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나, 생각보다 문체가 잘 읽히지 않으며 맞춤법 오류가 많이 보이고 어색한 문맥이 많아 완벽하다고 보기엔 다소 힘들다. 그러나 우당 이회영의 그 위대한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적합하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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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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