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의 진리>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온갖 성질(덥고 눅눅하고 굽꿉하고 찝찝하고 끈적끈적하고... 여름 하면 생각 나는 모든 느낌들)이 모인 여름 장마가 시작됐다.


한겨울 추위에도 꿋꿋하게 밖에 나가 수련을 하면서도 여름만 되면 맥을 못 춘다.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체질 탓이다. 더우면 덥다는 핑계로 비가 오면 비가 온다는 핑계로 요며칠 간은 수련을 좀 게을리 했다.


어제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우 탓에, 도저히 엄두가 안나 야외수련은 포기했다. 대신 집에서 가볍게 수련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밖에 비가 온다고 해서 수련을 못 한다는 건 핑계다. 마음만 먹으면 '황소 한 마리 누운 자리'에서도 수련할 수 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끔 연습하면 된다. 사실 실내에서 수련하면 굳이 옷 갈아입고 나갈 필요도 없고, 오히려 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막상 실내에서 하라고 하면 귀찮아서 안 하게 된다. 어차피 집에 있으니 앉아 있고 싶고 눕고 싶다. 수련을 시작해도 몇 번 깔짝거리다가 살짝 땀이 날 즈음에 마무리한다.


아무리 귀찮고 힘들어도 일단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일단 밖에 나온 이상 '기왕 나온 거 좀 제대로 하고 들어가자'는 생각이 든다.


일단 시작하면 기세가 오르기 때문에 땀을 비오듯이 쏟아가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련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니 일단 집밖으로 나서는 게 중요하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


이거슨 만고의 진리다. 사람이 한 번 편한 것을 추구하게 되면 끝 없이 만족 못하는 법이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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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하늘에서 미친듯이 비를 퍼부어댔다.


퇴근 후 사무실에서 나설 때만 해도 비가 그친 상태였는데, 사무실에서 집까지 이동하는 10분 사이에 비가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바짓단이 다 젖으니까 짜증나서 눈에 보이는 아무 건물로 이동해 잠깐 비를 피했다. '빗줄기가 약해지면 얼른 뛰어가야지' 하고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데... 도무지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집은 코앞인데... 짜증나서 그냥 나왔다. 그러고 한 1분이나 걸었을까. 빗줄기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고 아예 그쳐버렸다. 하늘이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괜히 울컥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왔다. 예년보다 이른 장마라고 하는데, 매년 언제 장마가 오는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질 않아서 잘 모르겠다. 이르게 왔든 늦게 왔든 그냥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눅눅하고 꿉꿉하고 습하고 덥고... 내가 싫어하는 온갖 성질의 것을 다 지니고 있는 여름 장마가 정말 싫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밖에서 물 맞는 걸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옷이 젖었을 때의 찝찝함, 비가 오면 야외활동(수련을 포함한...)에 제약이 있다는 점에서 정말 싫다. 더욱이 여름 장맛비는 시원함을 동반하기는커녕 꿉꿉함만 더해서 짜증난다.


비를 좋아했던 때도 있긴 있었다. 군 생활할 때. 물론 나는 여름 군번이라 훈련소에서 자주 비를 맞았는데, 그 기억은 끔찍했다. 비가 올 때마다 판초우의를 뒤집어쓰면 물에 젖은 판초우의가 종아리에 차박차박 달라붙는 그 느낌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행군 때도 웬 비가 그리 쏟아내렸는지... 그때 내린 비 때문에 녹슨 총을 기름칠하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자대 배치 후부터 비는 나에게 '하늘이 내리는 축복'이었다. 비가 내리면 모든 작전이 중지되고 막사 안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 맞으며 산을 타는 게 위험하기도 하고, 유해의 훼손이나 유실 우려가 있어서 웬만하면 그날 작전은 취소된다. 


그래서 발굴병들은 누구랄 것 없이 비 소식을 기다린다. 발굴병들은 아침마다 창문 밖으로 비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뉴스로 그날의 일기예보를 챙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밤에 잠들 땐 내일 제발 비가 오기를 바라면서 잠을 청한다. 새벽에 자다 깨서 비 내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면 속으로 '아싸'를 외치고, 한참 내리던 비가 일과 시간 직전에 그쳐버리면 속으로 '씨발'을 외친다. 비가 그치면 영락없이 출동이기 때문이다. 호국영령께는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어쩌겠는가. 그 당시 우리의 마음이 그랬던 것을.


어쨌거나 앞으로도 살면서 비 오는 날을 반길 날은 없을 것 같다. 살면서 비를 반겼던 기억은 군 시절이 유일할 것 같다.



PS. 요며칠 수련터에 못 나갔는데, 비가 와서 또 하루 제꼈다. 이 비를 뚫고 수련터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거보면 장대비에도 꿋꿋하게 수련터에 나가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한편으로 내 스스로의 열정이 이거밖에 안 되나 싶어서 씁쓸함을 느낀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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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일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내일부터 다시 비가 온다고 하는데,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오늘 하루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오고, 하늘의 색깔도 알록달록한 것이 참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하루였다.


내일부터 장마가 다시 시작되면, 당분간 실외수련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저녁 먹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개인수련을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홍가권을 연마해보았다. 공자복호권부터 호학쌍형권까지... 딱 한 번씩만 했는데도 벌써 힘이 든다. 역시 홍가권은 강권 중의 강권. 몸을 단련하는 데에 이만한 권법도 없는 것 같다. 굳이 실전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냥 몸풀이나 웨이트 트레이닝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하루에 한 번씩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오랜만에 하는데도 동작이 거의 다 기억나는 것이 신기했다. 하긴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배운 권법인데, 이걸 잊어버리면 들인 공과 돈이 아깝지.


수련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또 언제였던가.


그 하늘을 보는 순간 더 이상 수련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겼다. 때마침 드라마 <미생>의 메인 테마곡인 한희정의 '내일'을 듣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에 가장 와닿는 음악이기도 해서, 어울리지도 않게 감상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결국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 살아있는 내 자신에 감사하자.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소중히 여기자. 매사 최선을 다하자.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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