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무인과 거문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중국무림 3대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해서 꽤나 흥미를 끌었더랬습니다.


중국무술 중 하나인 '형의권(形意拳)' 문파의 3대 명사(상운상-한백언-한유)의 이야기를 3대인 한유의 구술로 정리한 책입니다.


참고로 한유의 구술을 책으로 정리한 사람은 중국의 영화감독인 서호봉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왜구의 무기>, <명궁 류백원>, <사부 - 영춘권 마스터> 등 마니아틱한 무술 영화를 연출한 감독입니다. 실제로 무술을 연마한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형의권에 대해 설명하자면, 중국 청나라 때 만들어진 무술로 내가 3대 문파(태극권, 형의권, 팔괘장)의 일종으로서 강맹하고 직선적인 공격을 특징으로 하는 무술로 유명합니다. 국내에는 건강체조로도 널리 알려진 태극권에 비해 그 인식이 미미합니다만 중국 내에서는 3대 명권(名拳) 중 하나라고 꼽힐 정도로 유명한 권법입니다. 


특히 형의문의 유명한 인물인 곽운심이란 분은 반보붕권(반보로 내딛으며 주먹을 지르는 기술)으로 중국무림을 평정함으로써 여기에서 '반보붕권 타편천하(半步崩拳 打遍天下: 반보의 붕권으로 천하를 때린다)'라는 말이 유래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상운상이란 분 역시 곽운심의 제자로, 형의문이 배출한 유명한 권법가입니다. 이분은 만화 <권법소년>에도 등장하지요. 머리와 몸이 둔해서 간단한 기술 하나조차도 습득하지 못하는 탓에 스승이 붕권 하나만 가르쳐줬더니 무려 3년 동안 그 기술 하나만 연습해서 날고 기는 사형제들을 다 꺾어버린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내려옵니다.


그 상운상 노사가 어떻게 제자들을 가르쳤고, 무림에서 대련 신청(소위 도장깨기)이 들어오면 어떻게 상대했는지 그 당시의 일화들을 증언의 형태로 구술하고 있어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은 일화 한 토막이 있어 소개합니다.


어느 날, 상운상 노사가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데, 웬 노인이 찾아와 대결을 청했다고 합니다. 상운상 노사와 노인이 손을 맞대자마자 둘 다 훌쩍 뛰어오르며 반대편으로 착지했는데 제자들은 그걸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스승을 상대로 필적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한 상운상 노사 역시 제자들에게 "모두 나가라"고 한 뒤에 문을 닫아걸었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제자 한백언이 몰래 창틈으로 엿보니 상운상 노사가 달마상에 향불을 피워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향을 올리고 뒤돌아서는 상운상 노사의 얼굴을 보고 기겁을 했다고 합니다. 평소 자신의 사부의 얼굴이 아닌 전혀 다른 얼굴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대련에 임한 상운상 노사는 가볍게 노인을 제압했습니다. 


나중에 한백언이 그 까닭을 여쭈면서 "신령의 도움이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상운상 노사가 답하기를 "정성이 지극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사람이 간절하면 이로움이 생긴다"고 에둘러 말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과장과 허풍이 심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웬만한 스승의 허물은 감추고 싶은 게 제자의 심리일텐데, 무림계에서는 대선배이자 고수로 명성을 떨친 상운상 노사조차도 무술만 하다보니 밥벌이를 제대로 못해서 아내에게 구박받는 장면이 묘사되는 걸 보면 나름 진솔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상운상 이후 제자 한백언이 문화대혁명 당시 고초를 겪었던 일, 홍위병들을 무술로 깜짝 놀라게 한 일 등이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청나라에서부터 중화민국을 거쳐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시절로 이어지는 근현대 중국의 사회상을 민중사적 관점으로엿볼 수 있는 것 같아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무슨 장풍 쏘고 날아다니는 무협 판타지를 기대하시는 분들에겐 환상이 깨질 수 있으니 비추합니다. 차라리 근현대 중국사에 관심 많은 분들이 오히려 더 흥미롭게 보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읽는 게 좀 고통스러울 수 있으니 그 점은 미리 밝혀둡니다. 이 책을 번역한 출판사가 번역을 어찌 이리도 엉망으로 해놨는지,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걸 떠나서 읽다가 짜증이 날 정도입니다. '난 참을성이 많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에게만 추천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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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링크: http://news.joins.com/article/21526990#none


오늘 하루 종일 SNS를 뜨겁게 달구는 뉴스기사입니다.


중앙일보와 같은 메이저 언론에서 보도하면서 

페이스북에서도 네티즌들 사이에서 계속 회자되고 있더군요. 

중국전통무술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은 

스스로를 '뇌공태극권'의 창시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상대는 MMA 선수입니다.


결과는... 


영상과도 같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SNS에서 이 영상을 두고 "중국무술의 실체", "중국무술은 다 뻥이다" 

뭐 이런 말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중국무술을 제대로 수련한 사람이 나와서 실력을 증명해보이면 좋을텐데 

늘 어설픈 무술가가 나와서 설치다가 

오히려 망신만 당하는 경우가 흔한 것 같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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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omn.kr/mwjz


<오마이뉴스>에서 '내 안의 덕후'라는 공모전을 개최했더군요. 말 그대로 자신만의 특별한 취미생활에 대한 글을 공모하는 행사였습니다.


무술이라는 아이템은 어떻게 보면 마이너한 취미라서, 이 좋은 아이템 썩히기 아깝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글을 써봤습니다. 이미 비슷한 주제로 작년에도 글을 썼지만,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다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 글을 썼습니다. 역시나 좋은 아이템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 메인 기사로 배치됐고,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사이트에도 전송되어 검색하면 제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무술계에서 제 무력은 어디 명함을 내밀 정도도 전혀 못되기에,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물전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고 소속 문파의 명성에 먹칠만하는 우려도 있을 수 있고요. 그래도 제 삶을 돌아본다는 생각으로 담담하게 써봤습니다. 그리고 표현에 최대한 신중을 기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무림고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무덕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상금 20만원이 걸린 공모전인데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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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 3 - 최후의 대결>로 <엽문>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듯 했던 엽위신-견자단이 <엽문 4>로 복귀합니다. 솔직히 <엽문>을 소재로 3편이나 우려먹었으면 뽑아먹을만큼 뽑아먹었다고 생각하는데, 후속작이 나온다고 하니 조금 걱정도 됩니다. 물론 스토리가 산으로 가더라도 견자단의 액션연기 하나만큼은 일품이니 기대가 됩니다. 저야 뭐 제가 좋아하는 견자단의 엽문을 또 한 번 스크린에서 만날 생각에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다만 제가 좋아했던 시리즈인만큼 제발 '박수 칠 때 떠났어야지' 라는 말이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엽문 4>로 견자단의 오리지날 <엽문> 시리즈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포스터를 보니 무술감독은 '원화평'입니다. 1, 2편에서 홍금보가 무술감독을 맡았던 것과 달리 3편에서 원화평이 무술감독을 맡으면서 액션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요. 영춘권의 화려한 수기가 많이 죽었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이번 4편에서는 어떤 식으로 액션을 풀어낼지 궁금합니다.


한편 <엽문> 시리즈와는 별개로 '스핀오프'(외전) 격의 <장천지>도 개봉 예정입니다. <엽문 3>에서 견자단과 최후의 대결을 펼쳤던 영춘권사 장천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입니다. 솔직히 이 작품까지는 정말 오버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황비홍도 그렇고 엽문도 그렇고... 중국인들은 하나 대박치면 정말 쪽쪽 빨아먹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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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입문 이후로 5년 가까이 애정을 갖고 수련해왔던 무예24기를 잠시 관두기로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태극권, 홍가권, 영춘권 등 다양한 무술을 수련해왔음에도, 제일 오랜 시간 그리고 제일 열심히 수련했던 무예가 바로 무예24기였습니다. 군 복무 중에도 짬짬이 수련을 해왔고, 휴가 중에도 반드시 수련터에 나가 사부님께 교정을 받았을 정도니까요. 물론 그 애정은 지금도 식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옮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저 칼과 창을 휘두르는 맛이 좋아서 무예24기를 해오긴 했지만, 제 마음 속에는 여전히 맨손무예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시대에 칼이나 창을 들고 다니며 호신을 하기는 힘드니까요. <무예도보통지>의 권법 수련을 열심히 해보기도 했지만, 애시당초 <무예도보통지> 자체가 맨손무예의 비중이 낮은 데다가 완벽한 복원이 이뤄지지 않아 제가 원하는 수준의 수련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수 개월 전에 "타 문파의 권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포스팅을 한 바 있었죠. 다만 그 시기와 권종을 정하지 못해 계속 견학이나 다니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더 미루다간 영영 기회를 놓치겠다는 생각에, 이제 정말 새로운 문파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며칠 전에 갑작스럽게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사부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처음엔 농담처럼 얘기를 꺼냈고, 저 역시도 이번 달까지는 좀 더 고민해볼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있는 마당에 무예24기 수련이라고 제대로 될 리가 없더군요. 결국 더 미룰 것 없이 당장 다음 주부터 새로운 도장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성장을 위해서는 떠나는 게 맞는 것 같다"면서 기꺼이 떠나는 것을 허락해주셨지만, 그래도 시원섭섭해하는 눈치셨습니다. 저도 그게 참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든 제 개인의 성장과 무술적 욕망의 해소를 위해서라도 떠나는 것에 대해 후회는 없습니다.


무예24기 수련을 병행할까도 고민해봤지만, 오히려 사부님께서 "무리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리시더군요. 오히려 제게 "제대로 된 정종 문파에 가서 성공하면 그걸로 된 거다"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어제 일요일 정규수련을 마지막으로 무예24기 수련을 중단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사부님께서 진검을 빌려주시며 "대나무베기나 실컷 하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덕분에 대나무 여럿 쪼개고 왔습니다. 조촐한 송별회(?) 겸 부대찌개로 다같이 점심 먹고 헤어지는데 참 미안한 마음도 들고, 아쉬운 마음도 듭니다. 뭐 집도 가깝고 어차피 무술 외적으로도 자주 만날 일이 많지만, 오랜 시간 몸 담았던 문파를 떠난다고 하니 마음이 공허하네요. 그래도 가끔씩 송년회 등 경조사는 참여하면서 인연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어찌됐건 내일이면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납니다. 어떤 무술을 배우게 될 지는 이미 결정했지만, 아직까지 밝히기가 좀 그렇습니다. 입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써 제자가 된 것마냥 떠들고 다니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정식으로 입문하고 수련을 시작하면 수련일기를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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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 그냥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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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수련시간에 촬영한 영상. 사부님께서 곤방 교전의 일부 장면을 지도하는 중.


곤방(棍棒)은 '봉'을 의미하며 교전(交戰)의 형태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어 있다. 교전이란 갑(甲)과 을(乙)로 나뉘어 공격/방어를 주고받는 것이다. 봉술이지만 봉 끝에 창날이 달려있다고 상정하고 공방을 주고 받는 것이 특징. 모든 장병기를 익히기 전에 기초를 다지는 용도로 아주 좋다. 


일반적으로 중국무술에서는 홀로 수련할 수 있는 독련 투로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예도보통지>에는 처음부터 상대방과 주고 받는 형태로만 수록되어 있다.


왜 그런지는 알 수는 없다.


내일 모레 전장에 나가야 할 군사들의 무예라는 특성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당장 써먹을 수 있도록 상대방과 대련의 형태로 연습하면서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나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수련문의]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uye24ki/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seoulmuye24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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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방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니가 좋아하는 영춘권 나온다!"하고 부르시더군요. 뭔가 싶어 달려가봤더니, <혀 끝으로 만나는 중국 - 명절의 맛>이라는 중국요리에 관한 다큐멘터리더군요. 


이 시리즈 꽤나 유명하죠. 어제는 MBC에서 명절 특선으로 방영했는데, 공중파 뿐만 아니라 케이블에서도 종종 방송하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편이 아니라 시리즈물이거든요. 볼 때마다 감각적인 영상미에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는데, 어제 방송 분은 영춘권이 나온다고 해서 아예 영상을 따로 구해다가 처음부터 봤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영춘권은 굉장히 잠깐 나옵니다. 주제가 주제인만큼 무술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지는 않고 있고요, 다만 거위구이 요리를 영춘권 수련에 빗대서 함께 묘사하는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명의 영춘권사가 서로의 팔을 섞으며 치사오 하는 장면과 요리사가 능숙하게 거위를 손질하는 장면을 교차 편집하면서, 내레이션으로 무술수련과 요리의 공통점을 구결처럼 읊어대는데 영상미의 퀄리티가 대단했습니다.



한 편으로 부러운 것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명절만 되면 인근 무술가 가족 및 제자들을 대거 초청해서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그 자리에서 서로 투로도 보여주고 함께 손도 섞어보는 등 아주 재밌는 시간을 보내더군요. 중국영화나 무협지에 등장하는 문파 교류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좁아터진 무술판인데, 권종을 떠나 이렇게 명절 같은 때에 서로 모여 교류도 하고, 정(情)도 쌓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튼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땅덩어리가 넓다보니,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요리들이 등장하는데, 그 다양한 요리의 향연에 입이 벌어지더라고요. 솔직히 우리나라 네티즌들을 보면, 중국에서 무슨 이상한 사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대륙의 클라스' 어쩌고 하면서, 심심찮게 중국을 비하하곤 하는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땅이 넓다보니 기괴한 사건, 사고도 많은 곳이지만 그만큼 수준 높은 문화와 각 분야별 쟁쟁한 고수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무술, 요리와 같은 단적인 부분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아... 중국은 정말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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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대단원의 막을 내린 UHD 다큐 <천하무림기행>  (0) 201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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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후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홍금보의 보디가드>를 보았다. 원제는 아적특공야야(我的特工爷爷)인데, 직역하자면 '나의 특수할아버지'가 되겠다. 의역하자면 '특수요원 할아버지' 정도랄까?



개인적으로 요근래 인상 깊게 본 영화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해서 스토리도 단순하고, 액션도 '홍금보치고는' 그렇게 대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영화 속 홍금보 자체가 '치매 걸린 노인' 설정이라, 일부러 화려한 액션을 자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퇴직한 중앙경호국 요원(VIP를 경호하는 경호원, 우리로 치면 대통령 경호원)인 홍금보는 치매에 걸려 홀로 사는 노인이다. 함께 할 가족도 없고, 무뚝뚝하기만 한 그가 이웃집에 사는 여자아이의 적극적인 애정공세(?)에 점점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빚에 시달리던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유덕화)가 중국 조폭으로부터 위험한 제안을 받게 된다. 러시아 갱단의 보물을 훔쳐오면 빚을 탕감해주겠다는 것. 이에 러시아 갱단의 보물을 훔친 유덕화는, 변심하여 보물을 들고 잠적하게 되고 결국 그는 중국과 러시아 두 조폭 집단의 표적이 된다. 아버지의 잠적으로 여자아이가 위험에 빠지게 되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홍금보가 뛰어든다는 내용이다.



(사진: 중국 조폭들을 단신으로 때려눕히는 홍금보 - 출처: 네이버 영화)


일단 영화 막바지에 등장하는 액션씬을 보면서 약간 어이 없는 웃음이 나왔다. 영화를 보면 홍금보가 단신으로 중국 조폭들의 소굴로 쳐들어가 혼자서 조폭들을 다 때려눕힌다. 그런데 그 순간 러시아 갱단이 쳐들어온다. 홍금보는 다시 러시아 갱들을 단신으로 제압한다. 아무리 홍금보가 전직 중앙경호국 요원 출신이라고 해도, 영화 속에서는 운신조차 자유롭지 못한 치매노인일 뿐인데, 혼자서 중국/러시아 조폭들을 때려눕힌다는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설정을 감안해서인지, 조폭들과 힘겹게 싸운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액션이 펼쳐지는 내내 홍금보가 아주 힘들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숨도 거칠게 내쉬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묘사된다. 그런데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구르카칼'을 들이미는 근육질의 러시아 조폭들을 다 때려죽인다. 이런 묘사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달까. 영화는 현실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개연성은 존재해야 한다. 아주 판타지를 표방하지 않는 이상, 이 영화의 액션씬은 약간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본다.



(사진: 홍금보는 중국 조폭에 이어 러시아 갱들도 단신으로 제압한다 -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 상당히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비현실적인 액션에 공감하기 어려웠다는 앞의 평가와 모순되는 말이긴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액션씬을 통해서라도 홍금보가 건재하다고 애써 위안을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홍콩무협영화 좀 봤다 하는 사람들이라면, 홍콩무협영화에서 홍금보가 차지하는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것이다. 그는 존재 자체로 이미 홍콩영화의 산 증인이자, 역사다. 그리고 이제는 전설의 경지를 넘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도 사실이다. 


사실 6년 전, <엽문 2 - 종사전기>에 홍가권의 고수로 출연하여, 견자단과 용호상박을 이룰 때만해도 그가 많이 건재하다고 느꼈는데, 이번 영화에 나온 그의 모습은 많이 노쇠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영화 설정 탓에 분장을 일부러 그렇게 한 것도 있겠지만, 실제로 홍금보의 나이가 벌써 65세다. 한국 기준으로는 이미 노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런 홍금보를 보면서, 한때 펄펄 날았던 홍금보가 이제는 이렇게 노쇠해졌구나 싶어서, 가슴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액션씬 자체는 공감하기 어려웠으면서도, 내 마음 속에서는 '홍금보 죽지마라... 죽지마라.. 다 이겨라'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늙고 비대한 몸으로 힘겹게 중국/러시아 조폭들을 쓰러트리는 모습에서, 애처롭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그의 절박한 몸부림에서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겹쳐들리는 듯 했다.


얼마 전, 공개된 성룡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영화 촬영 탓에 분장을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흰 머리도 훨씬 많이 늘어나고, 다크서클이며 주름이 가득해 정말 힘 없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연걸 역시 갑상선암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낸 바 있었다. 


그런 걸 보면, 평생 늙지 않고 펄펄 날아다니며 악당들을 물리칠 것만 같은 영웅들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그러나 그들이 늙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신세가 될지언정, 내 기억 속의 그들은 언제까지나 펄펄 날아다니며 악당들을 물리치는 히어로다. 과욕일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 이상은 더 그들의 화려한 액션을 스크린을 통해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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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야심한 밤을 틈타 중국무협영화 한 편을 감상했습니다. 한 달 전쯤에 국내 개봉도 했던 영화 <활 : 명궁 류백원>이라는 영화입니다. 원제는 '전사류백원(箭士柳白猿)'입니다.



(사진: <활 : 명궁 류백원> 국내 공식 포스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 감독이랑 출연진을 보니, 대충 어떤 스타일의 영화일지 보기도 전에 이미 감이 오더군요. 서호봉 감독이 맡은 영화인데, 이 감독은 예전부터 상업영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영화들을 만들어왔죠. 이 감독이 만든 대표적인 영화가 무사 : 4대 문파와의 혈투> (원제: 왜구의 무기), <사부 : 영춘권 마스터> (원제: 사부)인데, 이 영화들을 보신 분이라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일단 이 감독이 만든 영화들을 볼 때는, 스토리를 이해하려는 생각은 접고 보는 게 편합니다. 그리고 웬만큼 예술영화나 철학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 아니고서는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싶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러닝타임 내내 지루하다 못해 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아, 물론 저는 예술영화나 철학영화 같은 거 체질적으로 못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만, 희한하게도 서호봉 감독 영화는 그럭저럭 흥미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스토리보다는 영화 속 액션에 집중해서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잠시 고민도 해봤지만, 오히려 머리만 아파지더군요. 뭔가 감독도 생각이 있으니까 이렇게 영화를 만든 것일텐데... 머리가 아파서 그런 건 넘겨버리고 영화 속 액션에 집중했습니다. 



일단 기본적인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무뢰배에 의해 누이가 강간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보고도, 지켜주지 못했던 한 사내가 그 충격으로 출가해서 '류백원'이라는 새 이름을 얻은 뒤, 활의 고수에게 궁술을 배워 무림으로 들어오며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뒤에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스토리도 복잡하게 얽혀서 이어집니다만, 역시 이해하면서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참,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 속으시면 안됩니다. 제목이 '활'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영화 <최종병기 활>처럼 주인공이 활을 들고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활약을 펼치는 영화가 아닙니다. 물론 주인공의 주무기가 활이고, 결국 핵심 키워드가 활인 것은 맞습니다만, <최종병기 활>과 같은 화려한 활 액션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는 활에 담긴 심오한 철학과 궁술에 담긴 원리를 권술로 풀어나가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고 보면 안됩니다. 하지만 활을 진지하게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선 활 뿐만 아니라 창술, 권술 등 다양한 스타일의 액션이 등장합니다. 특히 권술의 경우는 역시 서호봉 감독답게, 밋밋하지만 현실에 가까운 스타일로 표현됩니다. 상대방과 화려하게 초식을 주고받으며 비현실적인 대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근접전'을 한다면서 서로 의자에 앉아 손을 맞대고 영춘권의 치사오하듯이 대련을 하는 장면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창술 역시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창의 기본기술을 몇 합 주고받다가 싱겁게 끝납니다. 물론 대단히 현실적인 액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액션영화는 '빠르고 화려한 액션'이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무술감독들도 점점 화려하고 아크로바틱한 동작들로 액션을 연출하고 있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특수효과까지 도입되어 굉장히 자극적인 액션이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극에 길들여진 요즘 관객들에게 확실히 이런 액션은 밋밋하다 못해 허접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히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해석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네요. 네이버 영화 리뷰들을 찬찬히 살펴보니까, '기존의 화려하고 말도 안되는 중국무협영화를 비웃기 위해 만든 영화다', '블랙코미디 영화다', '완전히 허접한 액션영화다' 등등...


하지만 개인적으로 무예를 수련하는 입장에서는 동작 하나 하나 흥미롭게 봤습니다. 특히 이 영화에 등장한 배우 우승혜(2015년 작고)는 실제 무림의 고수로 명망이 높았던 분입니다. 검술에도 조예가 깊어, 소실된 당나라 시대 검법 '쌍수검법'을 복원했을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죠. 그런 분의 몸짓을 영화로나마 접할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여하간 무예를 수련하는 분들이라면 꼭 한 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하고, 실제 무술인이기도 한 배우들의 몸짓도 눈여겨 볼 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는 내내 계속 영화 속 우승혜 노사의 몸놀림이 아른거리네요. 덕분에 몸도 근질거립니다. 마침 날이 밝으면 무예24기 정규수련이 있는데, 오랜만에 장병기(특히 기창)를 휘두르면서 근질거리는 몸을 풀어봐야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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