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제 블로그를 자주 구독하는 분들이라면, 군 시절 전우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올라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저는 원체 대인관계가 넓지 않은 터라,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 친구들은 매우 한정적인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군 시절 만났던 전우들과는 이상하리만치 끈끈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서, 초중고대학 학창시절을 통틀어 만나는 친구들 한 명 없어도 이 친구들과는 굉장히 자주 만납니다.


그리고 이 친구들과 엊그제 또 뭉쳤습니다. 경주 여행 때 자신의 자취방을 내주었던 친구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보겠다며 주말에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평생 술벗인 JH와 이 친구 그리고 군 시절 제가 유독 아꼈던 후임 한 명이 뭉쳤습니다. 이 후임 친구는 전역한 뒤로 처음 만났습니다. 중간 중간에 계속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빼다가 이제서야 나타났네요. 처음엔 좀 서운했는데 이렇게라도 잊지 않고 나와주니 서운한 마음도 스르륵 녹습니다.



1차는 종각역 근처에 위치한 '백세주마을'이란 전통술집에서 시작했습니다. 국순당 직영 브랜드인 듯 합니다. 백세주가 기본 술이고 다양한 전통주가 있습니다. 


가격이 좀 세서 비싼 술은 먹지 못했습니다만, 분위기도 좋고 가볍게 한 잔 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1차에서 6만 원 정도가 나왔는데, 제가 맏형이기도 하고 취직해서 그나마 월급이 들어오는 입장이라 기분 좋게 한 턱 냈습니다.



2차는 '오사카 부루스'라는 이름의 이자카야로 갔습니다. 오늘따라 '사케'가 먹고 싶었거든요. 


분위기가 다소 시끄럽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3,900원부터 시작하는 저렴한 안주가 무척 흡족스러웠습니다. 사진에 나온 안주들은 '와사비 문어회', '칠리새우', '가라아게', '닭똥집튀김'입니다. 저렴한 만큼, 퀄리티 역시 별로였지만 이 가격에 저렇게 먹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요.



마지막 3차는 가볍게 생맥주로 달렸습니다.


호객하는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들어왔는데, 다트 던지기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면 서비스를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도전해봤습니다만... 술에 취하니 영...  냥 막 던지다가 끝났습니다. 


드라마 <주몽>을 보면 주몽이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도 활로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는데, 저는 아직 무공의 경지가 바닥을 기는 모양입니다.. 껄껄...


이날 술자리는 막차 시간 직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부어라 마셔라 놀았을텐데, 다들 저녁 늦게 만나는 바람에 오래 놀지 못한 게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겹도록 자주 보는 얼굴들인데, 매번 만날 때마다 반갑고 하는 얘기 또 하고 듣던 얘기 또 들어도 질리지 않고, 헤어질 때면 늘 아쉽고... 참 신기합니다. 저희도 이젠 만날 때마다 농담처럼 "먼저 죽으면 남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관이나 들어주자"면서 껄껄 웃곤 합니다. 이래서 남자들이 만나면 군대 얘기 한다고 하는 걸까요? 그만큼 동고동락을 함께 하며 뜨거운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청춘의 흔적을 마주하니 반가움을 느끼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꽃보다 국유단' 모임이 언제까지고 서로의 삶에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며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우정 이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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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7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2018년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돌이켜보면 17년도 하반기는 학교 다니랴 동시에 학생운동하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관두고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맘고생이 심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유독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제겐 군 시절 선·후임들이 그렇습니다. 2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힘들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던 사이니 오만 정이 다 들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지요.


이번에 어쩌다보니 그 친구들과 뜻이 맞아서 함께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전역병 캠핑'. 제겐 선임이 되는 친구 세 명(전역한 지금은 제게 동생들입니다만 ㅎㅎ)과 저, 그리고 후임 한 명까지 총 5명이 함께 다녀왔더랬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간 곳은 상암에 있는 난지캠핑장이었습니다. 우선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 월드컵경기장점에 들러 밤새 마실 술과 바베큐파티용 삼겹살, 안주 등을 잔뜩 사갔습니다.


저희가 빌린 텐트는 10인용 몽골텐트였습니다. 원래 함께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인원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공간은 넉넉해서 좋았으나... 이날 바람이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중앙에 장작 난로가 있긴 한데, 문제는 저희가 장작을 때워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보다 오히려 연기를 더 많이 들이마신 것 같습니다. 불도 자꾸 꺼지고... 캠핑장에서 장작을 파는데 한 단에 1만원이나 하는 통에 장작값이 너무 비싸서 양껏 때우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고생하면서 마시는 술이 달다고, 어찌어찌 간신히 불씨를 붙여놓고서 저녁부터 다같이 바베큐파티를 즐겼습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온갖 술을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더군요. 


특히 이날을 위해 집에서 아버지가 드시던 각종 술들(죽엽청주, 북대양, 스카치 위스키)에 마트에서 사간 벌떡주, 가시오가피주들을 챙겨갔는데 아주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술을 꿀떡꿀떡 잘 마시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하더군요.


멀리 부산에서 온 친구는 부산의 지역소주인 '시원' 두 병을 준비해왔고, 오늘 캠핑을 기획했던 친구는 사돈어른이 담근 복분자주를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홈플러스에서 산 공부가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호화잔치였습니다.



난로 앞에서 다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군 시절을 돌이켜보려니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니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모르겠더군요.


특히 이날 국유단 시절 썼던 모자도 챙겨오고 군 시절 사진과 영상을 편집해서 미니 빔으로 즉석 상영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특성상 워낙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이렇듯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상당히 많은 게 장점입니다. 거기에 우리 부대 전용 OST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까지 입혀놓으니 괜히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 왈칵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즉석에서 다른 전역자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우리끼리 점호와 약식제례(유해를 수습한 뒤에 지내는 제사)도 오랜만에 재현해보고 잠깐이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시다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들 숙취 탓에 비몽사몽... 당산역까지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헤어졌습니다. 다들 숙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통에 서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쉽습니다. 저도 집에 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네요.


아무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갔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여독이 많이 남는 캠핑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라고 지금보다 안 힘들었겠냐마는(그래도 군대인데!!!) 정말 지나가면 다 그리운 추억이 되나봅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시절을 함께 헤쳐나왔기에, 유독 군 시절 선후임들이 반갑고 친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국유단 전역자 모임을 상설화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까지 나왔는데요, 정말 실현됐으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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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꿈은 군대 꿈이라고 한다. 2년 가까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숨 막히는 위계질서 아래 억눌려있던 기억이 마냥 즐거웠던 추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렬했던 기억은 잔인하게도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끔씩 꿈의 형태로 다시 드러나곤 한다. 


전역한 지 꼭 1년이 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군대 꿈이라고 해서 전부 악몽은 아닌가보다. 가끔씩 꾸는 꿈 중에는 깨고 나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아련함을 품게 만드는 꿈도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가려진 봉우리, 아슬아슬한 절벽으로 이뤄진 길.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나. 생각만 해도 아련해지는 이 풍경은 군 시절 나의 추억이 깃든 한 산에 대한 이야기다.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경북 영천, 경기 포천, 강원 고성, 강릉...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내겐 강원도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이 그랬다.


설악산의 한 봉우리인 상봉은 해발 1,243m가 넘는 험준한 산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당시 이 봉우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던 탓에 이곳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던 이등병 당시, 나는 상봉을 작전구역으로 배정받았다. 워낙 높고 험한 산이었던 탓에 베테랑 발굴병들조차 쉬쉬하던 그 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리바리 이등병에게 첫 과제치곤 매우 버거운 과제였던 셈이다.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내가 메고 있던 무거운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가야만 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내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의 첫 만남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정상에 도착하니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이 펼쳐졌다. 성인 남성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구간들이 끊임없이 펼쳐진 이곳.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에 앞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말인가’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졌다. 아, 이런 곳에서도 전쟁이 있었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의 흔적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나는 놀라움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높은 산을 오르느라 죽상이던 발굴병력들 역시 탄성을 내질렀다. 책으로만 접하던 전쟁의 기억을 두 눈과 양 손의 살갗으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됐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된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생각하던 내게 그곳에서 드러난 유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워낙 작아 부위조차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조각유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상관은 저 멀리 동해바다에 떠있던 적의 군함들의 이곳 상봉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아군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산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유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험준한 산의 바위틈 사이에서 풍상을 맞아가며 6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유해들을 수습하고 입관한 뒤 태극기로 고이 덮어 봉송했다. 봉송병에 의해 운구되는 유해를 뒤에서 바라보는 그 잠깐 사이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도 힘든 이 험한 봉우리에서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청춘들...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던 그들을 생각하니 산이 너무 높다며 마냥 투정부렸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가족과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상봉의 넋으로 스러져간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역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때때로 상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그 험준한 봉우리를 마주할 때면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바위틈에 드러난 유해들을 지켜보며 지난 날을 돌이켜보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내게 주어진 청춘의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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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후임들을 보러 현충원 부대로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군 생활 하던 당시만 해도 '전역하고 후임들 면회하는 날이 올까' 싶었는데, 정말 왔군요. 전역하던 날만큼이나 싱숭생숭한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대학생 서포터즈다 뭐다해서 전역하고도 부대를 내 집 안방처럼 들락날락하긴 했습니다만, 정작 저와 군 생활을 함께 했던 후임들은 발굴작전을 나가 부대를 가도 만날 수 없었더랬습니다. 그래서 텅 빈 생활관만을 바라보다가, 공허한 발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후임들이 엊그제 전반기 작전을 마치고 모두 자대로 복귀했다고 해서 부랴부랴 면회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부대로 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고 마음도 많이 설렜습니다.


오랜만에 애들 얼굴 보니 정말 반갑더군요. 꽤 오랜 시간 서로의 얼굴을 못 보긴 했지만, 다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얼굴 표정이 어두운 애들도 없고... 전반기 작전 출동 당시 애들 보내놓고서도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됐는데, 안심이 됩니다. 무엇보다 군대는 건강이 최고인데, 어디 다친 데 없이 다들 건강해보여서 그게 제일 다행스러웠습니다.


어제는 특별히 커피를 좀 챙겨갔습니다. 전역하고 커피 공부를 하면서, 후임들에게 직접 내린 커피 한 잔씩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아무리 잘해주려고 노력했어도 제 폭정(?)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분대장을 내려놓을 때도, 말년에 애들 보내기 전에도 그동안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럼에도 늘 미안한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커피 한 잔으로 퉁치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담아 커피 한 잔씩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가뜩이나 팍팍한 군 생활, 전역한 선임이 타주는 커피 한 잔으로 다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그래서 커피 추출 도구들을 가방에 담아갔습니다. 원두 역시 면회 전 날, 남성역 근처 '달의 둥지'라는 유명한 커피집에서 품질 좋은 원두를 공수해왔습니다. 아침 일찍 미리 갈아둔 원두를 가지고, 후임들 보는 앞에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한 잔씩 대접했습니다. 대용량으로 추출하는 건 처음이라 대충 눈대중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챙겨갔는데, 생각보다 추출되는 양이 적더라고요. 넉넉하게 돌리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도 다들 '맛있다'며 잘 마셔주어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커피 한 잔씩 마시면서, 군 생활 힘들다는 후임들 하소연도 받아주고, 예전에 함께 군 생활하던 추억도 공유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습니다. 그러고있자니 문득 제 자신이 다시 '병장 김경준'으로 돌아간 느낌이더군요. 병사로 다시 군 생활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문득 그 시절이 그립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말년에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고, 애들이랑 노가리나 까면서 놀던 재미가 있었는데... 그 시절로 돌아가 딱 일주일만 더 말년 병장으로 군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헤어지기 전에 본청 앞에서 다같이 기념사진도 찍고, 돌아가는데 모두 손 흔들어 배웅해주는 것을 보면서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전역하던 날에는, 후임들 모두 작전 출동하고 없던 터라 제대로 된 배웅 한 번 받지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배웅을 받으니, 전역하던 날보다 더 뿌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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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랜만에 국유단 전역자들을 만났다.


강남역 근처 횟집에서 소주로 1차를 달리고, 2차로는 맥주창고에서 가서 해외맥주로 달렸다. 그리고 시간이 늦어 먼저 갈 사람들은 가고, 남은 사람들끼리 다시 3차로 육회를 곁들여 소주 한 잔.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끊길 때까지 마셨다.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군 복무 시절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지칠 줄을 몰랐다. 군 생활 하며 함께 고생했던 얘기들, 그때 당시 서운했던 것들... 지금이야 전역했으니 맘 편하게 털어놓을 수가 있었다. 나 역시 막내일 때 서운했던 일들에 대해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막내일 당시의 내가 훗날 전역하고 선임들과 만나 "그때 정말 힘들었다"고 소주 한 잔 하며 털어놓을 날이 올 거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제 모인 멤버들은 딱 내가 전입왔을 당시, 즉 내가 막내일 때의 발굴4팀 인원들이다. 군 복무 당시 우리 팀을 이끌던 간부님을 필두로, 내 위로 줄줄이 다 모인 것. 물론 몇 명이 더 있어야 완전체지만, 이들은 대부분 지방에 살거나 해서 연락이 잘 안 되고, 모이면 항상 서울권에 거주하는 이들이 모인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상황이다. 군 복무 당시에는 내가 여기서 제일 막내였는데, 전역한 지금은 내가 제일 맏형이다. 지금이야 선임들이 다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 등, 윗사람 대접을 받는데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우습다. 군 생활 할 때는 하늘 같던 선임이었고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던 이들이었는데... 이들 역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했던 게 버릇이었고. 전역하자마자 이렇게 상황이 역전되다니. 나이보다 계급이 우선이다보니 빚어지는 일이긴 한데, 재밌는 일이다.


아무튼 이들과는 두어 번 더 만난 적이 있긴 하다. 내가 전역하는 당일날도 한 번 만났고, 어제 만난 간부님 장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단체로 빈소를 찾았고. 또 이번에는 선임 한 명이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기에, 그걸 빌미로 또 한 번 만나 술잔을 기울인 것이다. 사실 처음에 이들과 만난다고 했을 때는, 다소 망설여졌던 것이 사실. 어쨌거나 그들은 내 기억 속에 항상 어려운 선임들이었기 때문이다. 후임 입장에서는 선임에 대해 항상 좋은 기억만 존재하지는 않는 법. 그래서 뭔가 그들을 다시 만난다는 게 껄끄럽기도 하고, 그들 역시 나를 대함에 있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전역한 후로는 내가 윗사람이니) 하지만 막상 몇 번 만나보니 그런 생각은 기우였고, 지금은 다들 좋은 형-동생 관계로 전환되어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생각해보면 전역자라는 그룹에 내가 포함되어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만약 정말 내가 군 생활을 막장으로 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후임이었다면 이 자리에 불러주기나 했을까. 그저 그룹에 끼지도 못하고, 그들의 술자리 안주가 되어 두고두고 씹혔겠지. 지금도 몇 명은 그런 신세다. 


아무튼 10월이면 내 맞후임도 전역을 하게 되고, 걔를 필두로 줄줄이 전역을 하게 된다면, 지금 내가 막내인 그룹처럼 전역자 모임이 활성화될까? 모임이 만들어지면 애들이 나를 불러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내가 아무리 애들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다지만, 어쨌거나 후임들 입장에서는 선임이었던 내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을 수 있으니. 걔네들 역시 나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만남의 성사 자체가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내가 군 생활을 그렇게 막장으로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애들이 전역자 모임에서 나를 소외시킨다면... 참 서운할 것 같다.



모임이 끝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흑석역 근처 '할매순대국'에 들러 뼈 해장국을 한 그릇했다. 


사실 여기도 내 군 생활의 추억이 어느 정도 깃든 곳이다. 현충원에서 복무했던 나는, 휴가나 외박/외출을 나올 때마다 동기 혹은 선/후임들과 아침을 같이 먹고서 각자 갈 길을 가곤 했다. 흑석역 '할매순대국'이 현충원 근처에서 아침식사하기에 제일 무난한 곳이어서, 대부분 여기서 해장국 한 그릇을 함께 먹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전역자들을 만나 추억에 젖은 겸, 집에 오는 길에 이곳에 들러, 혼자 앉아 해장국 한 그릇 했다. 전역한 지 겨우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의 군 생활은 늘 아쉽고 그리운 추억이다. 추억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그리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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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국유단에서 선/후임 관계로 만난 동생과 29초짜리 단편 영화 하나를 찍었더랬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현충원을 주제로 한 '현충원 29초 영화제'란 공모전을 개최했는데, 바로 여기에 출품할 목적으로 찍었습니다.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한창 촬영을 해야 할 시기에 '장마'가 오는 바람에 다소 난항을 겪긴 했습니다. 그래도 비 그치면 바로 찍을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으로 열심히 기획회의를 하고, 음원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 국가보훈처에 수시로 전화를 하는 등,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더랬습니다. 덕분에 장마가 끝나자마자 곧장 촬영에 돌입할 수 있었고, 마침내 오늘 아침 공식 홈페이지에 영화가 올라갔습니다.


영화 스토리는 저희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출신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돌아오지 못한 유해'에 촛점을 맞춰보았습니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싸우다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호국영령의 유해가 12만 5천여 위라고 하고, 그 전에 일제 강점 당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간 독립투사들의 유해 역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너무나 많죠. 이분들은 아예 통계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현충원에는 '위패봉안관'과 '무후선열제단'이 있는데, 바로 여기가 돌아오지 못한 분들을 위패로나마 모신 곳입니다. 지금도 이곳에만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들을 기다리며 유족들이 남기고 간 편지와 사진들이 눈시울을 붉히곤 합니다. 그래서 이 장소를 현장 답사한 뒤에, 바로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면 좋겠다 싶어서 주제 선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 모시는 것은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고,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은 국민 모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현충원에조차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그분들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그분들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영화를 만들어보았습니다.

■ 영화 보러가기: http://www.29sfilm.com/1606970


[영화 정보]

제목: 현충원은 대한민국의 기다림이다

시놉시스

현충원은 단순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안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의 굵직한 사건 속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많은 이들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며, 누군가의 연인이고, 누군가의 자식이기도 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들을 위해, 또한 우리가 그분들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그들을 기다립니다. 

스탭 (STAFF)

감독: 유지호
촬영: 유지호, 박하은
기획: 김경준, 유지호
자료지원 및 검토: 김경준
배우: 함형민, 박하은, 유지호, 이현수, 설은환

솔직히 이번 영화 제작은, 감독을 맡은 친구가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영상 편집 기술이 없어서, 이 친구가 밤새도록 열심히 만들었죠. 이 친구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왠지 제 스스로 무임승차하는 느낌이라 기획회의에서 나름 열심히 스토리를 짜내고, BGM 제공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등 신경을 좀 썼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의 빚이 남은 것 같아서, 남은 공모기간 동안 이렇게 홍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입니다.

이 영화제는 네티즌들의 추천과 덧글을 많이 받아야 수상에 유리하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희가 수상을 목적으로 영화를 만든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감독을 맡은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작은 상이라도 하나 타면 그 흘린 땀방울에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염치불고하고 여기저기 추천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추천을 하려면 가입을 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좋은 의미로 만든 영화이니만큼 적극적인 추천과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PS. 수상 여부를 떠나,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은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직접 편집까지 배우면서 함께 했더라면 더 의미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현충원의 의미를 널리 알리는 작업에 함께 동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보람찼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며 새로운 인연들과 만났던 것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다들 땡볕에 고생 많았는데, 모두 즐거운 경험으로 기억에 남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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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 내면서 사는 요즘입니다.


오늘은 서울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질 정도로 심각한 더위 탓에, 집 안에 가만히 있기조차 고통스러운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푹푹 찌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제 보라매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원래 무예 수련을 하러 자주 가는 곳이었지만, 어제는 다른 일 때문에 간 건데요, 바로 영화 촬영을 하러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웬 영화 촬영?'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저도 제가 영화를 촬영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영화 촬영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현충원 29초 영화제'란 공모전을 개최했는데, 부대 선임이기도 했던 동생이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저야 뭐 영상 편집 기술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관계로, 대부분 그 친구가 고생을 했죠. 저는 옆에서 멘트나 좀 봐주고, 소품 지원해주고, 촬영하러 갈 때 말동무나 해주는 정도였죠. 그래서 좋은 경험 삼아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혹여라도 상금을 받게 되면 나눠 먹기가 미안할 것 같아요.


아무튼 어제는 마지막 씬을 촬영하는 날이었는데요, 군에 간 남자친구와 곰신 여자친구가 재회하는 씬이었습니다. 보라매공원 분수광장에서 분수를 배경으로 한 컷 찍고, 잔디광장을 배경으로도 한 컷 찍고... 날이 많이 덥다보니까 1시간 만에 급하게 촬영을 끝냈습니다. 사실 영화 러닝타임이 29초라서, 길게 찍을 필요도 없더라고요.


오늘 촬영 현장의 모습을 폰카로 담아봤습니다.



밤 늦게 완성된 영상을 봤는데, 제법 잘 만들었더군요. 영상 편집에 있어 아무런 도움을 못 준 게 내내 마음에 걸립니다만, 이 영화제 자체가 네티즌들의 추천을 많이 받아야 수상에 유리한 구조라서, 열심히 홍보하는 걸로 마음의 빚을 좀 덜어보려 합니다.


영상의 내용은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게재가 되면, 그때 공개하겠습니다. 


Coming Soon~!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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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번째 호국영웅,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가족의 품

- 故 양만승 경위 유해송환 행사 현장에 다녀오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오늘은 서포터즈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행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귀환 행사인데요, 처음에는 덤덤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했던 저도,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어느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니, 여러분도 어떤 행사인지 많이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겠습니다.


호국영웅 귀환행사가 열리다


지난 5월 18일, 경기도 수원의 어느 식당 앞 골목.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던 골목이 갑자기 외부인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웅의 유해가 유가족에게 인도되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호국영웅은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그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의 신분으로 적과 싸우다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는데요, 그의 생애를 잠시 알아보고 갈까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무궁화꽃 한 송이


故 양만승 경위는 1927년 4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양 경위가 24세 때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고, 적화통일의 위기에 처하자, 경찰 역시 ‘軍과 더불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신념 아래, 적극적으로 국토 보위에 나서게 되었는데요,


1950년 7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벌어진 ‘호남지역 전투’에 양 경위 역시 해남경찰서 소속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호남지역 전투는 전라북도 일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6사단에 맞서, 우리 국군 5사단과 7사단 그리고 경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벌인 방어 전투였습니다. 이때 해남경찰서 소속 1개 소대 병력들은 영광 삼학리 지역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방어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7월 23일, 치열한 접전 끝에 양 경위는 적군의 총탄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렇게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발굴되기까지 6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113번째 신원확인의 주인공


유가족 송환 행사는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은 행사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유가족인 외조카 김점덕 씨의 손을 맞잡으며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이에 김점덕 씨는 “감사합니다. 국방부에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어 김종성 감식과장에 의해 故 양만승 경위를 발굴하게 된 과정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습니다. 


1950년 7월 23일, 영광 삼학리에서 적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양 경위는 함께 전사한 동료 37명과 함께 집단으로 임시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7년의 어느 날. 영광 삼학리에서 전사한 경찰관들의 유해가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은 유해발굴감식단은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이 지역 일대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38위의 호국영령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독수리 문양 뱃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 뱃지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들이 소지하고 있던 뱃지라고 하는데요,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해남경찰서의 경찰사(史)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였고, 그 결과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현 발굴지점에서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것으로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전사한 경찰들의 유가족을 찾아 시료 채취를 한 뒤, DNA 대조로 38위 중 9위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29위의 호국영령은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용사’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이 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로 양 경위도 있었습니다.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다시 유가족을 수소문해 찾기 시작했고, 추가적으로 9위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 경위 역시 이 과정에서 유가족을 찾아 신원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요, 이로써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이루어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선진국의 척도


김종성 감식과장의 브리핑이 끝난 뒤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유가족 위로패’와 양 경위를 발굴할 당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를 담은 ‘호국의 얼’ 함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이학기 단장은 국방부 장관을 대신하여 유가족에게 ‘전사자 신원확인 통보서’를 전달함으로써 행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경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김태수 수원중부경찰서장은 “6·25 전쟁 당시 많은 경찰관들이 전사했는데, 경기도에서만 6,700여명이 전사했다. 아직 못 찾은 분들도 많은데, 나라를 지킨 호국영웅들에 대한 보답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행사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요, “아직 못 찾은 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유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분들을 찾아서 전사자 신원확인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찰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군을 대표하여 참석한 51사단 168연대장 박일권 대령 역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故 양만승 경위의 유해를 발굴해주어서 다행스럽다”며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국가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얼마나 잘 대우해주는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을 찾아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남매의 상봉


故 양만승 경위에게는 유일한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 결국 오빠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15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양 경위의 여동생은 임종 직전, 자식들에게 “나중에라도 꼭 너희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마침내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 외조카 김점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그녀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외삼촌을 찾아 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다”고 연신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양 경위의 매제인 김용길 씨 역시 “아내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반갑겠는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오빠였으니까...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무 아쉽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 이제는 하늘에서 남매가 상봉하여,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남매의 정(情)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았습니다.


15년 만에 받든 어머니의 유언


행사가 끝난 뒤, 또 다른 유가족인 김철현 씨(외조카)에게 오늘 행사를 지켜본 소회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며 “갑자기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가족 모두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또 그는 “외삼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께서 누누이 외삼촌에 대해 말씀하셨다”며 “어머니께서는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에게 꼭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회고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유가족 DNA 시료 채취, 그리던 가족을 찾는 길


이처럼 유해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것이 곧 국가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들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책무라고도 할 수 있으며, 6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유가족의 한(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발굴된 유해가 모두 신원을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번에 귀환한 故 양만승 경위 역시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되었는데요, 유해발굴감식단이 15년 동안 발굴한 국군 전사자는 총 9,100여위. 그중 단 1.2%의 유해만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신원확인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 유가족의 DNA를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유해발굴 뿐만 아니라, 전사자를 찾지 못한 유가족의 DNA 시료 채취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에, 유가족 DNA 시료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또 유가족 DNA 시료 채취라는 것에 대해 생소한 분들은 복잡하고 무서운 병원검사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가족 DNA 시료 채취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면봉으로 입 안의 타액(침)을 적시는 것만으로, DNA 시료가 충분히 확보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단 1분의 투자가 여전히 60년 동안 차디찬 땅 속에서, 혹은 ‘무명용사’라는 이름 아래 현충원에 잠들어있는 호국영웅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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