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을 배우기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드디어 나만의 해금을 장만했습니다. 사전에 해금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 상담을 요청했는데 "직접 가서 하나씩 만져보고 곡도 연주해보면서 자기한테 맞는 악기를 골라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시더군요. 선생님께서 미리 악기사에 연락해서 제게 맞는 악기들을 몇 대 준비해놓으라고 부탁도 해놓으셨습니다.


오늘 악기사에 갔더니, 사장님께서 아마추어용 해금을 여러 대 내놓고 '2대만 고르라'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 앉아서 일일이 조율 확인도 해보고, 스케일 확인도 하고 즉석에서 '오나라', '아리랑' 같은 곡들도 연주하면서 괜찮은 놈을 탐색해봤습니다. 솔직히 아직 초보라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꽤나 오랫동안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으려니, 사장님께서 한 말씀 하시더군요.


"촉이 오는 걸로 잡으세요. 그게 본인한테 맞는 악기인 겁니다"


그 촉이란 게 뭔지 모르겠지만, 켜봤을 때 느낌이 좋은 놈으로다가 두 대 골랐습니다. 사장님이 하나씩 직접 테스트를 해보더니 한 놈을 골라 제게 건네시더군요. 그리고 또 한 마디 하십니다.


"해금은 가르치는 선생님의 스타일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쪽 선생님한테 배우려면 이 악기가 낫겠네요"


악기면 다 같은 악기지, 촉이 온다는 것도 신기하고 지도하는 선생님 성격에 맞는 악기가 따로 있다는 것도 얼핏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저야 초보고, 이분은 국악 전문가이니 그러려니 했지요. 내심 신기했습니다. 누가 보면 해리포터가 요술지팡이 사러온 줄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금을 샀습니다. 프로용에 비하면 매우 저렴하지만, 아마추어용도 무려 55만원이나 하네요.


그동안은 대여 방식으로 중고 해금을 빌려 연습을 해왔습니다. 큰 맘 먹고 시작했지만, 언제까지 배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뜻 고가의 해금을 산다는 게 내키지 않았던 탓입니다. 기간이 만료될 때마다 연장을 해오다가 어느새 또 추가 연장을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더군요. 고민하다가 이젠 그냥 한 대 사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변이 없는 한, 꽤나 오래도록 배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매주 해금을 배우러 서울-부천을 왔다갔다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간도 투자해야 하고, 돈도 투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별 불만 없이 꾸준히 다닐 수 있었던 건, 그 과정을 즐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해금을 배우는 건 여전히 녹록치 않습니다. 반 년 이상 배웠지만 아직도 기본기를 완벽하게 숙달하지 못해 고생 중입니다. 몇 개월 전에 배운 '오나라'와 '아리랑'을 아직도 반복해서 연습하고 또 연습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함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단계를 밟아나가는 과정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연습해서 간신히 칭찬 받을 정도가 되면, 선생님은 여지없이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면 또 한숨이 나오죠. 다시 그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합니다. 어느 정도 연습해서 이제 좀 된다 싶으면 얼른 선생님께 가서 검사를 받고 싶습니다. 마치 칭찬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요. 


해금은 정직합니다. 연습을 안 하면 남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못 따라가 쩔쩔 매는 쪽팔림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노력을 해야합니다. 선생님 앞에서 검사를 받을 때, 적어도 내가 뒤처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안도합니다. 혹여 칭찬이라도 받게 되면 날아갈 듯 기쁘고요. 그런 맛에 해금을 배우러 다니는 것 같습니다.


진도 욕심을 버린 것도 해금을 즐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 듯 합니다. 스스로 둔재임을 인정한 탓에 오히려 기본기의 완벽한 숙달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지금 하고 있는 곡도 벅찬데, 선생님께서 새 곡을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마음 같아선 선생님께 기본기 교정만 집중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제 와서 음대 입시를 준비할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해금 공연으로 먹고 살 것도 아니고 그저 취미로 즐긴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니 배움이 그 자체로 즐겁습니다.


생각해보면 무예랑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네요. 예전엔 초식 하나라도 더 빨리 배우고 싶었습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안 가르쳐주시면 크게 실망스러워 하기도 했었죠. 지금은 그런 마음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래서 형의권을 수련하면서도 지루함을 별로 못 느끼고 있습니다. 질보 한 걸음을 내딛더라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완벽하게 숙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올바른 길로만 걷자는 게 제 신조가 됐습니다. 스스로 둔재임을 인정하니까 마음도 저절로 비워지더라고요.


여하간 올해 전역하기 전에 이런 저런 버킷리스트를 적어봤는데, 해금 배우기는 바로 그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버킷리스트를 스스로 실천했고,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낍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형의권 배우기'라는 새로운 버킷리스트도 실천했네요. 둘 다 꾸준히 배워서 내년 이맘때쯤 스스로에게 또 한 번 대견함을 느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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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크리스마스였죠. 저같은 솔로들은 이런 날 '방콕'하며 <나홀로집에> 시리즈나 정주행하는 게 맞겠지만, 연휴라고 집에만 있기 뭐해서 일부러 밖에 나섰습니다. 다행히 제 눈을 괴롭히는 연인들의 달달함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원래 일요일이라 그런지 특별히 연휴 분위기도 안 나고, 눈도 안 와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그닥 안 나더군요. 날도 많이 풀려서 야외수련하기 아주 딱 좋은 날씨였습니다.


그래서 보라매공원에 가서 무예 수련을 했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보라매공원 대신 중앙대에 수련터를 만들어 운동하고 있는 터라 보라매공원은 또 오랜만에 가는 셈입니다. 확실히 그 사이에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지 수련터 풍경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창으로 찌르고 베던 수풀들은 어느덧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있었습니다. 제 키보다 높았던 게 시들고 나니 배꼽 아래까지 내려와 있더군요.


아직 배운 게 많지 않아 열심히 참장과 질보 수련만 하다 왔습니다. 사부님이나 사형들이나 "처음엔 지루함과 싸우는 게 가장 큰 수련"이라고 강조하곤 하시는데, 부족한 게 많기 때문에 지루할 겨를 없이 수련에 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목검도 챙겨나가서 검술 기본기와 본국검으로 땀도 좀 빼줬습니다. 어디 가서 장기자랑용으로는 이만한 게 없는 터라, 가끔씩은 투로를 잊지 않는 선에서 연습을 해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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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월도 들고 바깥 나들이  (2) 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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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흥미로운 소식입니다.


조선시대 권법에 관한 논문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군사> 101호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수원 무예24기시범단의 최형국 박사님께서 쓰신 논문입니다. 



(사진 출처: muye24ki.com)


그렇게 긴 분량의 논문도 아니고, 문화사적 관점에서 쓴 논문이라 읽기 어렵지 않습니다. 무예를 수련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조선시대 군사들은 맨손무예를 어떻게 익혔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동작의 고증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보고 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남아있는 사료들을 통해 학술적으로는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합니다. 조선군이 병영에서 어떻게 권법을 익혔고, 권법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면 논문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만, 아래 논문 PDF 파일을 따로 첨부해뒀습니다. 편하게 다운받아서 읽어보시면 됩니다.



조선후기 권법의 군사무예 정착에 대한 문화사적 고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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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권 수련을 시작하면서 근처 싸고 괜찮은 맛집을 찾아봤습니다. 수련시간대가 애매해서 아무래도 자주 저녁을 밖에서 해결해야 할 듯해서요. 일단 저렴한 가격에 맛과 양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곳으로는 관청 구내식당만한 곳이 없죠. 마침 수련터에서 10분 거리에 마포구청이 있더군요. 당연히 구내식당도 있었고, 일반인들에게도 개방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주민들에게 인기만점인 곳이더라고요. 저렴한 가격에 맛이 괜찮다보니 구청 직원들보다도 일반인들의 발길이 더 잦다고... 오죽하면 식당 측에서 시간 문제로 공무원 우선 배식하다보니 그에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있을 정돕니다. (개인적으론 그게 맞다고 봅니다. 직원들은 점심시간을 쪼개서 나온 건데 주민들 때문에 기다리다가 밥을 못 먹거나 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먹어야 한다면... 이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


여하간 어제 그래서 한 번 가봤습니다. 역시나 사람이 바글바글하더군요. 원래는 두 가지 요리 중에 선택해서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어제는 한식 하나만 제공하더군요. 아마 점심에만 그렇게 하고, 저녁은 일원화해서 제공하나 봅니다. 가격은 부천시청 구내식당과 동일하게 3,800원이었습니다. 메뉴는 짜장밥이었고요. 뷔페식이라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떠먹을 수 있었습니다.



맛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생각보다 아쉬웠습니다. 부천시청 구내식당과 여러모로 비교가 되더군요. 부천시청 구내식당은 공간이 매우 넓고 사람이 한적한 편이라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길 수가 있는데, 여긴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아주 바글바글합니다. 그리고 직원들보다 일반인들이 더 많은 것 같더군요. 심지어 엄마들이 애기들 데리고 무진장 많이 옵니다. 공무원 우선 배식이라는 제한을 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반찬의 가짓수도 부천시청보다 적었고, 메인반찬의 경우는 자기가 떠먹지도 못하고 직원이 주는 것만 받아먹어야 합니다. 더 달라고 해서 받아먹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찬 리필이 상당히 눈치보이는 건 사실이죠. 부천시청처럼 처음에 자기가 받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뭐 전문식당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구내식당이니까 그러려니 이해를 합니다. 부천시청과 달리 주민들의 수요가 많다는 점도 공급에 영향을 끼쳤겠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오나 봅니다. '컵 반출금지'라는 카드도 붙어있습니다. 누군가 컵을 가져가긴 했다는 건데.. 참 구질구질하네요. 그깟 컵 얼마나 한다고... 아무튼 근처에서 저녁 해결할 일이 있거든, 여기가 저렴하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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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중대장님의 허락을 받아, 부대 안으로 목검(木劍)을 반입하여 검 기본기 수련에 매진해오고 있다. 


1년 6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휴가 나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칼을 잡을 수 없는 처지였기에, 그동안은 오로지 맨손무예 권법 수련만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입대 전에 배웠던 검술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제대 후에 완전 쌩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그동안 수련해왔던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검 수련에 대한 갈망은 심해졌다. (물론 덕분에 권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고 기본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는 되었지만...


여하간 검 수련을 너무 하고 싶어, 이젠 아무 것도 무서울 게 없는 병장의 파워로, 중대장님께 '목검 반입'을 요청했고, 중대장님도 '절대 후임에게 장난치거나 때리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 반입을 허락해주셔서, 이제 부대 안에서 검 수련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목검 반입이 승인되니 너무 기뻤고, 매일 매일 전투체육(체력단련) 시간만 기다려졌다.


그래서 매일 전투체육 시간만 되면 목검을 들고 막사 옥상에 올라가 신나게 휘둘러댔고, 확실히 손에 무언가를 잡고 휘두르는 맛(?)이 있어, 권법 수련을 할 때보다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수련하지 못했던 기본기(들어베기, 갈겨베기, 허리베기, 걸쳐베기)부터 해서, 각종 검법들(본국검, 제독검, 쌍수도, 왜검)을 열심히 땀 흘리며 수련했다.


그동안 수련을 하고 싶어도 못 해왔기에, 수련에 대한 욕구 불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입대 전보다도 더 열심히 수련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매일 매일 혼자서 수련하다보니 자연스레 '의문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부님으로부터 정기적인 교정을 받지 못하고, 매일 독련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의문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매일 매일 새로운 의문점들이 켜켜이 쌓여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게 너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당장 수련에 대한 욕구에 불타오르고 있는데, 이 의문점들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죽 답답하겠는가. 괜히 그릇된 자세로 수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의문점들은 휴가를 이용해 사부님께 여쭤볼 요량으로, 매일 매일 텍스트로 정리하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현재 그 의문점들은 24개까지 늘어났다)


편으로, 뭔가 대달한 깨달음을 얻은 마냥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는 기현상도 일어났다. 평소와 다름 없이 허공에 칼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베기의 느낌이 달라진 것이다. 순간 뭔가 득도라도 한 느낌마저 들어 묘한 전율까지 일었다. 그래서 그날은 삘(?)이 붙어 계속 베기를 했다. 진짜 손바닥에 피물집이 잡히는 줄도 모르고 신나서 계속 휘둘러대다가 나중에서야 손을 들여다보니 피물집이 잡혀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던 것도 이때였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느낌을 사부님한테 보여드리고, 과연 제대로 하는 게 맞는 것인지 교정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길이 맞다면 몰라도, 틀린 길이라면 내 자세가 완전히 엉망으로 뒤틀려버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문도 들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에만 집착해서 이미 뭐라도 된 마냥 설레고 흥분한 상태였다. '어서 이걸 사부님께 보여드려서 사부님을 깜짝 놀래켜드려야겠다', '사부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다' 하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동안 나는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한 것이다. 그게 잘못된 길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때마침 평소 무술에 대해 좋은 격언을 자주 올려주시는 <한국형의권연구회> 형의권사님의 블로그에서 새로 올라온 글을 하나 읽다가, 그 글이 내게 해당되는 글이라 그러한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고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긴 했다. (해당 글 링크: http://blog.naver.com/k_rabbit/220618298924)


그리고 마침내 지난 휴가 때 설레는 마음으로 전수관을 찾아가 사부님 앞에서 베기를 했는데, 이게 웬걸... 오히려 칼 수련을 전혀 안 하다가 오래간만에 칼을 잡고 베기를 했던 한 달 전보다 자세가 더 이상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오, 그래도 죽지는 않았네"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엔 사부님이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라며 아예 수련을 중단시켰다.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감도 오질 않아 답답했다. 사부님께 그간의 경과를 설명드리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교정 받지 않고 혼자 판단하게 되면 그게 결국 사도(邪道: 그릇된 길)로 빠지는 것"이라며 주의를 주셨다. 나로서는 '설마...'했던 일이 진짜가 된 것이었다.


결국 사부님은 빠르게 베는 것도 중단시키고,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베면서 '베려하지 말고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하셨다. 당분간은 절대 칼을 빠르게 휘두르지 말라고 해서, 체념하고 지금은 계속 천천히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동시에 오른 어깨가 계속 뚜둑거리는 것도, 이걸 통해 교정하고 있는데 쉽지는 않다. 예전에는 그냥 어깨가 덜 풀려서 그런 거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막 휘둘렀는데, 잘못하면 어깨가 고장이 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다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교정을 하는 중이다.


아무튼 지난 번 휴가 때의 교정을 통해 또 한 번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뭔가 혼자서 득도한 마음으로 설레여 하다가 그게 잘못된 길이란 걸 깨닫게 되니 날개가 꺾인 새마냥 기운도 빠지고, 심지어 우울한 마음까지 들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한다. 무려 1년 6개월이란 시간을 칼을 놓고 살았다. 그런데 단 2주란 시간 동안 혼자서 열심히 휘둘렀다고 무슨 고수의 경지에 오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또한 무예란 사부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이라면 평생 교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어차피 평생 무예 수련할 건데, 이런 일로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스스로 누누이 다짐해오지 않았던가.


이제 다시 휴가를 나왔고, 며칠 뒤에 전수관에 가서 사부님께 교정을 받으려고 하는데 얼마나 진전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딱히 한 것도 없어서 진전이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저 지금 하고 있는 것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이번 일을 통해 '조급한 마음을 버리자', '일희일비하지 말자'라는 교훈을 되새겼다. 군 생활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한창 어리바리해서 힘들었던 이등병 때, "조급해하지 말라"던 간부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군 생활이든, 무예든, 인생이든... 결국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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