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영웅'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5.25 [기사] 113번째 호국영웅,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가족의 품

113번째 호국영웅,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가족의 품

- 故 양만승 경위 유해송환 행사 현장에 다녀오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오늘은 서포터즈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행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귀환 행사인데요, 처음에는 덤덤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했던 저도,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어느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니, 여러분도 어떤 행사인지 많이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겠습니다.


호국영웅 귀환행사가 열리다


지난 5월 18일, 경기도 수원의 어느 식당 앞 골목.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던 골목이 갑자기 외부인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웅의 유해가 유가족에게 인도되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호국영웅은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그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의 신분으로 적과 싸우다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는데요, 그의 생애를 잠시 알아보고 갈까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무궁화꽃 한 송이


故 양만승 경위는 1927년 4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양 경위가 24세 때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고, 적화통일의 위기에 처하자, 경찰 역시 ‘軍과 더불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신념 아래, 적극적으로 국토 보위에 나서게 되었는데요,


1950년 7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벌어진 ‘호남지역 전투’에 양 경위 역시 해남경찰서 소속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호남지역 전투는 전라북도 일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6사단에 맞서, 우리 국군 5사단과 7사단 그리고 경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벌인 방어 전투였습니다. 이때 해남경찰서 소속 1개 소대 병력들은 영광 삼학리 지역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방어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7월 23일, 치열한 접전 끝에 양 경위는 적군의 총탄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렇게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발굴되기까지 6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113번째 신원확인의 주인공


유가족 송환 행사는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은 행사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유가족인 외조카 김점덕 씨의 손을 맞잡으며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이에 김점덕 씨는 “감사합니다. 국방부에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어 김종성 감식과장에 의해 故 양만승 경위를 발굴하게 된 과정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습니다. 


1950년 7월 23일, 영광 삼학리에서 적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양 경위는 함께 전사한 동료 37명과 함께 집단으로 임시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7년의 어느 날. 영광 삼학리에서 전사한 경찰관들의 유해가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은 유해발굴감식단은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이 지역 일대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38위의 호국영령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독수리 문양 뱃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 뱃지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들이 소지하고 있던 뱃지라고 하는데요,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해남경찰서의 경찰사(史)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였고, 그 결과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현 발굴지점에서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것으로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전사한 경찰들의 유가족을 찾아 시료 채취를 한 뒤, DNA 대조로 38위 중 9위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29위의 호국영령은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용사’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이 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로 양 경위도 있었습니다.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다시 유가족을 수소문해 찾기 시작했고, 추가적으로 9위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 경위 역시 이 과정에서 유가족을 찾아 신원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요, 이로써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이루어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선진국의 척도


김종성 감식과장의 브리핑이 끝난 뒤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유가족 위로패’와 양 경위를 발굴할 당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를 담은 ‘호국의 얼’ 함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이학기 단장은 국방부 장관을 대신하여 유가족에게 ‘전사자 신원확인 통보서’를 전달함으로써 행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경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김태수 수원중부경찰서장은 “6·25 전쟁 당시 많은 경찰관들이 전사했는데, 경기도에서만 6,700여명이 전사했다. 아직 못 찾은 분들도 많은데, 나라를 지킨 호국영웅들에 대한 보답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행사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요, “아직 못 찾은 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유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분들을 찾아서 전사자 신원확인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찰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군을 대표하여 참석한 51사단 168연대장 박일권 대령 역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故 양만승 경위의 유해를 발굴해주어서 다행스럽다”며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국가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얼마나 잘 대우해주는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을 찾아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남매의 상봉


故 양만승 경위에게는 유일한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 결국 오빠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15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양 경위의 여동생은 임종 직전, 자식들에게 “나중에라도 꼭 너희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마침내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 외조카 김점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그녀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외삼촌을 찾아 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다”고 연신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양 경위의 매제인 김용길 씨 역시 “아내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반갑겠는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오빠였으니까...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무 아쉽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 이제는 하늘에서 남매가 상봉하여,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남매의 정(情)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았습니다.


15년 만에 받든 어머니의 유언


행사가 끝난 뒤, 또 다른 유가족인 김철현 씨(외조카)에게 오늘 행사를 지켜본 소회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며 “갑자기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가족 모두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또 그는 “외삼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께서 누누이 외삼촌에 대해 말씀하셨다”며 “어머니께서는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에게 꼭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회고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유가족 DNA 시료 채취, 그리던 가족을 찾는 길


이처럼 유해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것이 곧 국가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들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책무라고도 할 수 있으며, 6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유가족의 한(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발굴된 유해가 모두 신원을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번에 귀환한 故 양만승 경위 역시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되었는데요, 유해발굴감식단이 15년 동안 발굴한 국군 전사자는 총 9,100여위. 그중 단 1.2%의 유해만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신원확인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 유가족의 DNA를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유해발굴 뿐만 아니라, 전사자를 찾지 못한 유가족의 DNA 시료 채취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에, 유가족 DNA 시료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또 유가족 DNA 시료 채취라는 것에 대해 생소한 분들은 복잡하고 무서운 병원검사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가족 DNA 시료 채취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면봉으로 입 안의 타액(침)을 적시는 것만으로, DNA 시료가 충분히 확보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단 1분의 투자가 여전히 60년 동안 차디찬 땅 속에서, 혹은 ‘무명용사’라는 이름 아래 현충원에 잠들어있는 호국영웅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