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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1.28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왔습니다. 2

지난 월요일, 외할아버지께서 향년 83세로 돌아가셨습니다. 3년 전부터 앓고 계시던 지병인 폐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신검안서에는 사인이 '신부전'으로 나오더군요. 오늘로 딱 일주일째가 됐네요. 시간 참 빨리 흐릅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함께 호흡하고 계셨던 분이,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11월 21일 월요일 오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한가하게 컴퓨터를 하던 중, 부고를 접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할아버지 돌아가셨대"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뒷통수를 망치로 맞은 것 같더군요. 차분하게 주어진 일을 다 마무리하고 장례식장이 있는 춘천에 천천히 합류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뭘 해도 집중이 잘 안되고 마음이 내내 불편하더군요. 결국 일정을 다 취소하고 저녁 늦게 아버지 차를 타고 춘천 빈소로 향했습니다. 빈소가 마련된 호반장례식장에 도착해 할아버지의 영정을 보는 순간 그제서야 눈물이 터지더군요. 비로소 할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게 실감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튿날, 할아버지 입관식을 치렀습니다. 솔직히 입관을 보기 위해서 결근까지 하고 일찌감치 춘천에 왔지만, 입관식을 앞두고서는 입관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습니다. 생전의 건강한 모습을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렇지만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니 꼭 보라는 주위의 충고에 따라 용기를 내서 영안실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미 염을 끝내고 수의를 입은 모습으로 누워계시더군요. 얼굴에 흰 한지가 덮여있는 것을 보니 울컥했습니다. 사실 저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지켜봤는데,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이 오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차갑게 굳어버린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더 가슴이 아프더군요.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다시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간절히 빌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더군요. 입관을 마치고 할아버지를 다시 차가운 냉장고에 두고 나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빈소에서 할아버지댁까지 거리가 멀지 않은 관계로, 잠은 집에서 잤습니다. 집에 들어가니 할아버지께서 마지막까지 누워계시던 방이 있었습니다. 당일날 아침까지도 멀쩡하셨다고 하는데, 뜬금없이 집에 있던 가족들을 다 나가라고 내보내고 혼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마 본인의 마지막을 직감하시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남은 가족들은 유언도 못 듣고,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고 한스러워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잠자듯이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체취가 배어있는 방에 들어가서 침상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할아버지의 체취를 맡았던 것 같네요.


3일차인 수요일에 발인부터 화장, 납골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화장터야말로 정말 따라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입관보다 지켜보는 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제가 유일한 손자인지라 영정과 위패까지 들고 모든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생각보다 눈물은 별로 안 나더군요. 정말 담담했습니다. 다만 역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2시간 가까운 화장 끝에 한 줌 뼛조각들로 나오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인생무상을 느꼈습니다. 뼛조각을 분쇄해 고운 뼛가루로 만든 뒤에 납골함에 담는 과정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더군요. 나중에 납골함에 담은 뼛가루를 코앞에서 봤습니다. 그 풍채 좋던 우리 할아버지가 한 줌 가루가 되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더라고요. 납골당에 안치하고, 마지막 제사까지 지낸 뒤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에는 솔직히 담담한 편이었는데, 돌아온 날 밤에 갑자기 울컥해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제 곁을 떠났다는 게 와닿기 시작했나 봅니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애틋합니다. 외삼촌들이 결혼을 못해 친손주가 없는 탓에, 제가 유일한 외손자로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방학만 되면 늘 춘천 외가댁에서 머물다 오곤 했습니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목욕탕에 가서 강제로 때를 밀리며 울었던 기억, 추운 겨울에 할아버지와 소양강변을 따라 운동을 다니던 기억,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사준다면서 손 잡고 데려갔던 달팽이집까지... 장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전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려있는 그 길들을 보면서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이제는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습니다. 성인이 되고서부터는 외가댁으로 가는 발길이 뜸해졌거든요. 제가 하도 안 가니 할아버지께서 먼저 전화를 하셔서 "왜 안 오냐"고 독촉하기도 했습니다. 방학 때마다 한 차례씩 들르긴 했어도, 거의 형식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어쩌다 놀러가도 춘천에 사는 지인들을 만나 술 마시고 오기 바빴습니다. 할아버지를 본 기억도 올해 여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아는 형들을 만나 술이나 마시고, 집에서는 잠만 자다 왔습니다. "하루 더 자고 가라"고 했던 할아버지의 말을 뿌리치지만 않았어도... 그때 하루만 더 자면서 할아버지와 좀만 더 얘기를 나눴어도... 이토록 후회스럽지는 않았을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너무나 후회막급일 따름입니다.


저희 외할아버지... 생전에 참 풍채도 당당하고 멋진 분이셨습니다. 키도 저보다 훨씬 컸고, 덩치도 산만 하셔서 젊은 저도 완력으로 못 당해내는 분이셨습니다. 워낙 강골이셔서 추운 겨울에도 야외운동을 꾸준히 하셨고요. 결과적으로 찬 바람을 오랫동안 쐰 것이 병의 원인이 되긴 했지만... 할아버지보다는 외할머니와 더 살가웠지만,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크나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할배', '할배'라고 부르면서 할아버지 특유의 말투를 따라하며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아직도 제 귓가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선한데...


이제 저도 성인이 되고 계속해서 나이를 먹다보니, 점점 더 많은 이별을 맞이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다른 친척들까지... 계속해서 주위 사람들과의 이별을 하게 될텐데요,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건 사실상 제겐 첫 이별이나 다름 없었기에 더 충격이 큰 것 같습니다. 어차피 태어나면 죽음도 있는 법이라지만... 남는 사람에겐 너무나 큰 고통과 슬픔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할아버지는 제 기억과 마음 속에 살아숨쉰다고 믿고 싶습니다. 


할배! 보고싶어! 나중에 꼭 보러 갈게! 좀만 기다려줘!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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