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17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2018년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돌이켜보면 17년도 하반기는 학교 다니랴 동시에 학생운동하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관두고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맘고생이 심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유독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제겐 군 시절 선·후임들이 그렇습니다. 2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힘들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던 사이니 오만 정이 다 들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지요.


이번에 어쩌다보니 그 친구들과 뜻이 맞아서 함께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전역병 캠핑'. 제겐 선임이 되는 친구 세 명(전역한 지금은 제게 동생들입니다만 ㅎㅎ)과 저, 그리고 후임 한 명까지 총 5명이 함께 다녀왔더랬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간 곳은 상암에 있는 난지캠핑장이었습니다. 우선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 월드컵경기장점에 들러 밤새 마실 술과 바베큐파티용 삼겹살, 안주 등을 잔뜩 사갔습니다.


저희가 빌린 텐트는 10인용 몽골텐트였습니다. 원래 함께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인원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공간은 넉넉해서 좋았으나... 이날 바람이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중앙에 장작 난로가 있긴 한데, 문제는 저희가 장작을 때워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보다 오히려 연기를 더 많이 들이마신 것 같습니다. 불도 자꾸 꺼지고... 캠핑장에서 장작을 파는데 한 단에 1만원이나 하는 통에 장작값이 너무 비싸서 양껏 때우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고생하면서 마시는 술이 달다고, 어찌어찌 간신히 불씨를 붙여놓고서 저녁부터 다같이 바베큐파티를 즐겼습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온갖 술을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더군요. 


특히 이날을 위해 집에서 아버지가 드시던 각종 술들(죽엽청주, 북대양, 스카치 위스키)에 마트에서 사간 벌떡주, 가시오가피주들을 챙겨갔는데 아주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술을 꿀떡꿀떡 잘 마시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하더군요.


멀리 부산에서 온 친구는 부산의 지역소주인 '시원' 두 병을 준비해왔고, 오늘 캠핑을 기획했던 친구는 사돈어른이 담근 복분자주를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홈플러스에서 산 공부가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호화잔치였습니다.



난로 앞에서 다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군 시절을 돌이켜보려니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니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모르겠더군요.


특히 이날 국유단 시절 썼던 모자도 챙겨오고 군 시절 사진과 영상을 편집해서 미니 빔으로 즉석 상영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특성상 워낙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이렇듯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상당히 많은 게 장점입니다. 거기에 우리 부대 전용 OST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까지 입혀놓으니 괜히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 왈칵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즉석에서 다른 전역자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우리끼리 점호와 약식제례(유해를 수습한 뒤에 지내는 제사)도 오랜만에 재현해보고 잠깐이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시다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들 숙취 탓에 비몽사몽... 당산역까지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헤어졌습니다. 다들 숙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통에 서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쉽습니다. 저도 집에 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네요.


아무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갔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여독이 많이 남는 캠핑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라고 지금보다 안 힘들었겠냐마는(그래도 군대인데!!!) 정말 지나가면 다 그리운 추억이 되나봅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시절을 함께 헤쳐나왔기에, 유독 군 시절 선후임들이 반갑고 친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국유단 전역자 모임을 상설화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까지 나왔는데요, 정말 실현됐으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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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꿈은 군대 꿈이라고 한다. 2년 가까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숨 막히는 위계질서 아래 억눌려있던 기억이 마냥 즐거웠던 추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렬했던 기억은 잔인하게도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끔씩 꿈의 형태로 다시 드러나곤 한다. 


전역한 지 꼭 1년이 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군대 꿈이라고 해서 전부 악몽은 아닌가보다. 가끔씩 꾸는 꿈 중에는 깨고 나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아련함을 품게 만드는 꿈도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가려진 봉우리, 아슬아슬한 절벽으로 이뤄진 길.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나. 생각만 해도 아련해지는 이 풍경은 군 시절 나의 추억이 깃든 한 산에 대한 이야기다.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경북 영천, 경기 포천, 강원 고성, 강릉...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내겐 강원도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이 그랬다.


설악산의 한 봉우리인 상봉은 해발 1,243m가 넘는 험준한 산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당시 이 봉우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던 탓에 이곳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던 이등병 당시, 나는 상봉을 작전구역으로 배정받았다. 워낙 높고 험한 산이었던 탓에 베테랑 발굴병들조차 쉬쉬하던 그 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리바리 이등병에게 첫 과제치곤 매우 버거운 과제였던 셈이다.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내가 메고 있던 무거운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가야만 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내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의 첫 만남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정상에 도착하니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이 펼쳐졌다. 성인 남성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구간들이 끊임없이 펼쳐진 이곳.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에 앞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말인가’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졌다. 아, 이런 곳에서도 전쟁이 있었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의 흔적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나는 놀라움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높은 산을 오르느라 죽상이던 발굴병력들 역시 탄성을 내질렀다. 책으로만 접하던 전쟁의 기억을 두 눈과 양 손의 살갗으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됐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된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생각하던 내게 그곳에서 드러난 유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워낙 작아 부위조차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조각유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상관은 저 멀리 동해바다에 떠있던 적의 군함들의 이곳 상봉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아군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산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유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험준한 산의 바위틈 사이에서 풍상을 맞아가며 6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유해들을 수습하고 입관한 뒤 태극기로 고이 덮어 봉송했다. 봉송병에 의해 운구되는 유해를 뒤에서 바라보는 그 잠깐 사이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도 힘든 이 험한 봉우리에서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청춘들...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던 그들을 생각하니 산이 너무 높다며 마냥 투정부렸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가족과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상봉의 넋으로 스러져간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역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때때로 상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그 험준한 봉우리를 마주할 때면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바위틈에 드러난 유해들을 지켜보며 지난 날을 돌이켜보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내게 주어진 청춘의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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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CGV용산에 가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왔습니다.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끌어낸 'X-ray 첩보작전'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정재, 이범수와 같은 국내 톱배우는 물론 헐리우드 톱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 역할을 맡아,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죠.



(사진: 영화 <인천상륙작전> 공식 포스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개봉 당일부터 보려고 벼르던 영화였는데, 이런 저런 일로 관람을 미루다가 비로소 오늘에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영화를 본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의 평이 혹평에 가까울 정도라서, 보기도 전에 기대보다는 걱정이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작품이더군요. 요근래 본 영화 중에서 그래도 재밌게 본 영화였습니다. 2시간 좀 안 되는 러닝타임 동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봤어요. 딱히 반전이랄 게 없는 스토리 구조 탓에 약간 밋밋하게 느껴진 점 빼고는 군데군데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실화라는 점 때문에 더욱 인상 깊었던 영화입니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었습니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다양한 배우들의 활약도 흥미로웠는데요, 특히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리암 니슨의 연기는... 중간 중간 잠깐씩 등장하는 데도 강렬하더군요. 몇 마디 툭툭 내던지는데, 대사마다 주옥 같은 명언이었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 나는데, '늙고 젊은 것은 나이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이상(신념)을 버렸느냐 버리지 않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라는 뉘앙스의 대사가 정말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모두 맥아더가 실제로 했던 말들인 듯 합니다.



(사진: 영화 속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리암 니슨 - 출처: 네이버 영화)


맥아더와 소년병의 대화


영화를 보면서 몇 번 울컥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맥아더 장군과 한국 소년병의 대화 장면이었습니다. 전우들이 몰살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철수하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소년병에게, 맥아더 장군이 "왜 철수하지 않느냐"고 묻자, "상관의 철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합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라. 다 들어주겠다"고 하자 "적과 싸울 수 있게 총과 실탄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꽤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실화였기에 더욱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반공영화는 무조건 나쁜가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스토리의 완성도, 배우의 연기를 떠나서 이 영화의 성격이 '반공영화'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를 직접 본 사람으로서 이 영화가 어느 정도 반공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6.25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반공이라는 요소가 안 들어갈 수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6.25 전쟁 자체가 자유민주주의(반공)를 대변하는 대한민국(남한)+유엔군과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소련+중국과의 국제적 이념 대결이었는데 말이죠. 특히나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들의 활약에서 어떻게 반공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만약 반공을 부정한다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이들의 희생과 헌신마저 통째로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반공영화면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에 명시한 나라이며, 6.25 전쟁 당시 공산당의 침략에 의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던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공산주의(라고 쓰고 김씨 봉건왕조체제라고 읽는다)를 표방하는 북한은 호시탐탐 대남도발을 자행하며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사드 배치 문제도 결국 북한이라는 골칫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불거진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공'을 이야기하는 게 왜 나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놈의 공산주의가 반백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을 이토록 괴롭히고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반공영화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정부의 주도 하에 반공영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짓밟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강한 트라우마가 반공영화에 대한 반발심리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각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시각도 '분단'이 낳은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분단이 없었다면, 이런 영화를 두고 반공이니 아니니 하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할 까닭이 없었을테니까요. 여하간 반공영화는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의견에 대해서 존중은 하지만,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진: CGV용산에 전시된 실제 'X-ray 첩보작전' 이야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맥아더가 아니다


두 번째로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판도, 이 영화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인 듯 합니다. 맥아더에 대해 공부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공(功)만큼이나 과(過)도 큰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인천상륙작전으로 너무 부풀려진 인물이라고도 하고, 일각에서는 '오만방자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욕의 화신'이라고까지 악평을 하기도 합니다. 아예 인천상륙작전 자체가 너무 부풀려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하간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영화이기에 보기 불편하다는 논리입니다.


일단 제가 맥아더에 대해 잘 모르는 관계로, 맥아더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둘째 치고라도, 이 영화에서 맥아더를 '우상화' 혹은 '영웅화'하는 느낌은 결코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맥아더는 잠깐 등장할 뿐입니다.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무명용사의 헌신에 감사를


이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이들은 '대한민국 해군 첩보대'와 '켈로부대'입니다. 이 영화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멋지게 인천항에 상륙해 반격을 하는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대한민국 해군 첩보대'와 '켈로부대'였다 - 출처: 네이버 영화)


저는 그래서 이 영화를 더욱 높이 평가합니다. '인천상륙작전=맥아더'라는 공식을 깨고, 이름 없는 영웅들의 헌신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그런 감독의 의도가 분명함에도, 자꾸 이 영화에 대해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영화'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잠깐 등장하는 맥아더의 강렬한 이미지가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리암 니슨이 워낙 연기를 잘한 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의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정도 장면은 당연히 있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앞까지 밀렸던 우리 국군이 전세를 역전하는 기회가 된 역사적인 작전이었고, 그 의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맥아더의 행적이 어떻든 간에, 그 작전 하나만 놓고 보면 성공한 작전이었고, 그렇기에 그나마 대한민국이 이 정도 영토라도 보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무명의 용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무명의 호국영령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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