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위협받는 국가유공자들의 삶, 국가무한책임은 어디로?



링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49&aid=0000132522&sid1=001


2007년 창설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은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부대다.


국유단은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는 목적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국가무한책임'을 완수하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은 국가가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백 번 옳은 말이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꽃다운 청춘을 불살라가며 희생한 모든 국가유공가자들은 그에 걸맞는 대우와 보상을 받아야만 한다. 여전히 이름 모를 산야에 묻힌 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일을 영구 지속사업으로 국가가 주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국가무한책임의 범주에는 지금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생존 국가유공자들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우리나라에는 '국가보훈처'라는 기구가 있어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모든 국가유공자들에게 그에 걸맞는 대우와 보상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제1연평해전에 참전해 우리 해군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댓가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잃은 한 참전용사가 편의점에서 콜라를 훔치다 적발됐다는 사연은 보훈처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한다.


물론 보훈처에서도 국가유공자를 보살피기 위해 연금을 지급하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살 곳이 없어 고시원을 전전하거나 당장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해 폐지를 줍는 등 생계에 위협을 받는 국가유공자들의 이야기가 매년 들려오고 있으니, 과연 이들을 위한 보훈처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인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국가유공자를 위한 제도가 형식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보훈처가 미처 살피지 못한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고위공직자 중 '적폐청산' 1호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전격 경질하고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해 국가보훈처의 위상을 '장관급'으로 격상하겠다는 등 보훈사업에 적극적인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이제 그 의지에 걸맞는 실천이 필요할 때다.


2017년 6월 24일


역사독서모임 독사신론(讀史新論)

(http://facebook.com/suhistory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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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꿈은 군대 꿈이라고 한다. 2년 가까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숨 막히는 위계질서 아래 억눌려있던 기억이 마냥 즐거웠던 추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렬했던 기억은 잔인하게도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끔씩 꿈의 형태로 다시 드러나곤 한다. 


전역한 지 꼭 1년이 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군대 꿈이라고 해서 전부 악몽은 아닌가보다. 가끔씩 꾸는 꿈 중에는 깨고 나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아련함을 품게 만드는 꿈도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가려진 봉우리, 아슬아슬한 절벽으로 이뤄진 길.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나. 생각만 해도 아련해지는 이 풍경은 군 시절 나의 추억이 깃든 한 산에 대한 이야기다.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경북 영천, 경기 포천, 강원 고성, 강릉...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내겐 강원도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이 그랬다.


설악산의 한 봉우리인 상봉은 해발 1,243m가 넘는 험준한 산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당시 이 봉우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던 탓에 이곳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던 이등병 당시, 나는 상봉을 작전구역으로 배정받았다. 워낙 높고 험한 산이었던 탓에 베테랑 발굴병들조차 쉬쉬하던 그 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리바리 이등병에게 첫 과제치곤 매우 버거운 과제였던 셈이다.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내가 메고 있던 무거운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가야만 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내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의 첫 만남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정상에 도착하니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이 펼쳐졌다. 성인 남성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구간들이 끊임없이 펼쳐진 이곳.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에 앞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말인가’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졌다. 아, 이런 곳에서도 전쟁이 있었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의 흔적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나는 놀라움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높은 산을 오르느라 죽상이던 발굴병력들 역시 탄성을 내질렀다. 책으로만 접하던 전쟁의 기억을 두 눈과 양 손의 살갗으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됐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된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생각하던 내게 그곳에서 드러난 유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워낙 작아 부위조차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조각유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상관은 저 멀리 동해바다에 떠있던 적의 군함들의 이곳 상봉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아군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산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유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험준한 산의 바위틈 사이에서 풍상을 맞아가며 6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유해들을 수습하고 입관한 뒤 태극기로 고이 덮어 봉송했다. 봉송병에 의해 운구되는 유해를 뒤에서 바라보는 그 잠깐 사이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도 힘든 이 험한 봉우리에서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청춘들...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던 그들을 생각하니 산이 너무 높다며 마냥 투정부렸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가족과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상봉의 넋으로 스러져간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역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때때로 상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그 험준한 봉우리를 마주할 때면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바위틈에 드러난 유해들을 지켜보며 지난 날을 돌이켜보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내게 주어진 청춘의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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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거리에서 ‘대한민국 영웅, 명예 찾기!’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1조 오프라인 미션 수행기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1조입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유달리 매섭듯, 가을을 시샘하는 늦더위의 기세도 만만치 않은데요, 이처럼 무더위로 인해 대지의 만물도 모두 녹아버리는 듯했던 지난 8월 20일, 신촌 연세로에 검은 조끼를 입은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저희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조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저희는 왜 이 더운 날씨에 신촌에 있었을까요? 바로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오프라인 홍보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날씨만큼이나 뜨거웠던 현장의 열기 속으로 다함께 들어가보시겠습니다!



젊은 청년층을 공략하라!


오프라인 홍보행사를 준비하면서 저희가 가장 먼저 고민했던 점은 ‘누구를 대상으로 홍보할 것인가’ 였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주로 참전용사가 속한 노인층을 대상으로 홍보가 이루어진 점을 주목했습니다. 동시에 시간이 갈수록 청년층의 역사의식은 흐릿해져가고 있다는 점에도 함께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역발상으로 청년층을 대상으로 홍보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 그리고 6·25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에 대해 미래 대한민국의 주역이 될 청년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저희는 젊음의 거리, 신촌에서 오프라인 홍보 행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원한 얼음커피 한 잔 하실래요?


행사 당일인 20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저희는 아직 거리가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행사 장소로 향했습니다. 거리에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부랴부랴 천막을 설치하고, 사진을 나열하는 등 부지런을 떨다보니 어느새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길을 오가는 시민들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오전 10시! 드디어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조의 오프라인 홍보 행사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날씨가 더운 점에 착안하여, 홍보 부스를 ‘간이 카페’ 형식으로 준비했습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잠시 다리쉼을 할 수 있도록 대형 천막 아래 의자들을 배치하고, 누구든 와서 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아울러 즉석에서 시원한 얼음커피를 제조하여 시민들에게 나눠드렸는데요, 시민들이 커피 한 잔 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련 사진들을 부스 주위로 전시했습니다.



(사진: 젊음의 거리 신촌에 설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 부스)


열정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내다


그런데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홍보 부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저조했기 때문입니다. 길거리 홍보행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저희들 역시 무관심한 시민들의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쭈뼛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 탓에 점점 미지근해지기 시작하는 커피를 보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각성한 저희 조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떠나 한 목소리가 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길 가는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시원한 얼음커피를 내밀며 홍보 부스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려 노력한 것입니다. 이런 저희의 열정에 시민들도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부스 앞에 멈추는 발걸음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희 부스를 찾은 첫 손님은 할머니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저희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내 사촌오빠가 6·25 전쟁 때 금화지구 전투에서 돌아가셔서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요.



(사진: 홍보 부스를 찾은 첫 손님은 전사자 유가족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지금까지 이런 사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설마 6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오빠를 찾을 수 있겠냐”며 회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꼭 찾아드릴 수 있다”고 약속드리며, 꼭 국유단으로 연락해주실 것을 신신당부했습니다. 이처럼 시작부터 특별한 손님을 맞이한 저희는 오프라인 홍보 행사의 효과를 새삼 느끼며 홍보에 더욱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사진전시회를 열다


시작은 커피 한 잔이었습니다. 단순히 목을 축이러 부스를 방문했던 시민들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전시된 사진들을 보고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져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국유단 예비역 병장 출신인 김경준 서포터즈의 이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발굴병 출신 서포터즈답게 전문 지식을 동원한 설명은 관람객들에게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페루 출신 한 외국인 관람객은 ‘설악산 상봉 유해발굴작전’ 사진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한국 관광지에 여러 번 가봤고, 설악산도 잘 알고 있다”며 “이 높은 산꼭대기에도 유해가 있느냐”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봉 유해발굴현장에서 직접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던 김경준 서포터즈는 “상봉 꼭대기 바위틈에서 조명등을 비춰가며 유해를 발굴했다”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설명으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사진: 유달리 사진전시회에 관심을 보였던 페루 관광객)




(사진: 발굴병 출신의 경력을 되살려 국유단을 홍보하는 김경준 서포터즈)


전시된 사진들은 유해의 발굴과정부터 입관, 약식제례를 마치고 감식 절차를 거쳐 유가족에게 인도되기까지의 전 과정 뿐 아니라, 중국군 유해 인도 행사와 한·미 공동감식까지 국유단의 사업을 설명할 수 있는 사진들을 순서대로 전시하였는데요, 사진들을 유심히 관람하던 한 중년의 여성 관람객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는 줄은 몰랐다”며 “군대 가 있는 아들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데, 하물며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60년 넘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분들을 기다리는 유가족들의 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할 수 있는 작은 사진전시회 개최 모습)


인기만점이었던 O.X 퀴즈


작은 사진전시회와 함께 저희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국유단 O.X 퀴즈’였습니다. 사전에 미리 엄선하여 준비한 5가지의 질문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즉석에서 퀴즈를 푸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특히 퀴즈의 정답을 모두 맞히는 시민들에게는 특별 주문제작한 ‘국유단 보틀’을 경품으로 지급했는데요, 모두들 보틀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퀴즈 풀이에 임하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국유단 O.X 퀴즈’)


자, 그럼 현장에서 출제했던 O.X 퀴즈 문제를 한 번 옮겨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함께 풀어보실까요?


[국유단 O.X퀴즈]


1. 전세계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실시하는 나라는 2개 뿐이다?

2. 유해발굴사업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된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3. 북한군의 유해와 중공군의 유해는 발굴하지 않는다?

4.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 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2% 미만이다?

5.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총 2개 팀으로 구성되어있다?


[정답]


1. O (대한민국, 미국)

2. X (2000년 김대중 정부 당시,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

3. X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하고 있음. 북한군 유해는 파주 적군묘지에 안장하고 있고, 중국군 유해는 2014년부터 중국 측에 송환하고 있음)

4. O (국군 유해 9,182위 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115위)

5. X (조사/발굴/감식/영현/대외협력/계획운영/본부중대 등 7개 부서로 구성)


여러분 정답을 얼마나 맞히셨나요? 많이 어려우셨나요? 


네, 현장의 시민들도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요. 실제로 문제를 2개 이상 맞히는 시민들이 별로 없었답니다. 그만큼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낮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언론매체와 예능을 통해 우리 사업을 홍보해왔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인식이 낮은 것을 보면서 저희가 하고 있는 홍보행사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더위를 잊고 홍보에 전념하는 저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 특별 주문제작하여 경품으로 지급한 국유단 보틀)


O.X 퀴즈의 정답을 맞히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 많자, 저희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틀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즉석에서 국유단 홍보 부스를 촬영해 개인 SNS에 업로드하는 시민들에게 보틀을 선착순 지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에 많은 시민들이 앞다투어 저희 홍보 행사 소식을 SNS에 올리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준비한 보틀도 금세 동나고 말았답니다.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던 외국인 관광객들


행사를 진행하는 내내 정말 많은 시민들이 저희 부스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셨는데요, 특히 신한은행 대학생 홍보대사 팀도 홍보활동을 하던 와중에 저희 부스에 방문하여 즉석에서 O.X 퀴즈를 풀고 사진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또 저희 부스 옆에서 홍보행사를 하던 식품의약품안전처 서포터즈들과 상호 교류 차원에서 서로의 부스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식약처 서포터즈들 역시 “이런 사업이 있는 줄은 몰랐다. 좋은 정보를 배우고 간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습니다. 



(사진: 신한은행 대학생 홍보대사들과 함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내 시민들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페루 관광객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홍보 부스로 모여드는 바람에 저희 조원들은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부족한 어학능력을 느끼면서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습니다.


이때 구세주처럼 신선정 서포터즈가 등장했습니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외국인 관광객들과의 대화를 주도하며 사업의 의미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선정 서포터즈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6·25 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자, 6·25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사진: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열심히 통역하며 국유단을 홍보하는 신선정 서포터즈)


이에 발을 맞추듯 하지영 서포터즈와 이다솜 서포터즈 역시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으며, 국유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열정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현장에 바람이 불어 현수막이 찢어지고, 사진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등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가 수시로 벌어져 계속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두 서포터즈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답니다. 이렇듯 저희 조원들은 언제부터인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손발을 착착 맞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준비과정부터 행사까지 많은 것을 배웠던 시간


지금까지 젊음의 거리 신촌에서의 국유단 홍보행사 현장을 보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셨나요?이번 행사를 마치는 저희들의 소회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사실 이번 오프라인 행사를 준비하면서, 장장 수개월에 걸친 아이디어 회의가 있었습니다.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열정 많은 대학생들답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각자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으로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알려야한다’는 큰 뜻에는 다들 공감했고, 이에 따라 서로의 입장을 한 발짝씩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점점 하나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프라인 미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조원들 간의 양보와 배려, 단합과 소통이라는 덕목을 배울 수 있었기에, 저희에게도 뜻 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홍보부스를 찾아 진지하게 설명을 경청해주신 많은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홍보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행사의 의의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포터즈들의 소감 한 마디


그럼 행사를 진행하며 느꼈던 서포터즈들의 소감 한 마디씩을 들어보실까요?


김경준 서포터즈: “군 복무 당시 수행했던 임무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알리는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사진 속 현장에 내가 있었음을 설명하자, 많은 시민들이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느껴서 뿌듯했다”


하지영 서포터즈: “준비 당시에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유해발굴 사업을 칭찬해 주시던 분, 말없이 전시된 사진을 계속 보시던 분, 한국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열심히 설명을 들어주시던 외국인 등등 많은 시민들을 만나며 걱정이 기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시민들의 관심을 통해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다솜 서포터즈: “오프라인 미션이 처음이어서 긴장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잘 마무리되어서 뿌듯하다. 아쉬웠던 것은 이런 행사가 처음이라 초반에 다소 헤맸던 점이다. 렌트한 테이블과 천막의 크기가 맞지 않아서 급하게 부스 구조를 바꾸기도 했고 당일 아침에 물품을 구매하는 등 돌발 상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르신, 외국인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 한 편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을 보면서 ‘영문 리플렛’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선정 서포터즈: “6·25 전쟁에 참전한 참전국의 외국인들이 우리의 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해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을 받았다. 한편으로 젊은 층들의 관심과 참여도는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반기에는 상반기의 미흡한 점을 바탕으로 좀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홍보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비석)


행사는 끝났지만, 이번 신촌 오프라인 행사는 시작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그들을 조국의 픔으로 모시는 그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 여러분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은 기간까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의 활약도 꾸준히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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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발굴병 24시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3)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그동안 연재해왔던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도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그동안 다뤄왔던 주제들이 다소 무거운 주제들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여러분께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바로 ‘유해발굴병’의 24시간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와 함께 발굴병들의 일상으로 들어가보실 텐데요, 다들 준비되셨죠? 그럼 출발!



기상! 출동 준비! (AM 5:30~06:30)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어느 군부대 막사의 복도. 기상나팔이 울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생활관이 보이네요. 바로 발굴병 생활관입니다.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걸까요? 아직 덜 깬 눈으로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는 윤 이병에게 물어봤습니다.


“작전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섭니다. 부대에서 발굴지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조기 기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06시 30분 기상이 원칙이지만, 숙영부대에서 발굴지점까지 이동시간만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조기 기상은 부득이하다고 합니다. 기상과 동시에 기계와 같이 빠른 동작으로 세면과 환복을 하고, 이른 아침식사를 한 뒤 다시 출동준비를 하는 모습이 매우 정신없어 보이는군요. 분대장 김 병장이 살짝 귀띔을 합니다.


“발굴병들은 사실 아침이 제일 바쁩니다. 혹시라도 빠진 게 없나 재차 점검하고, 아침식사도 다른 병력들보다 일찍 하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아직 밥이 준비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취사장에 앉아 하릴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발굴병들이 출동준비로 정신없는 사이, 발굴팀장님께서 출근하셨네요. 팀장님은 간밤에 병사들이 잘 잤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혹시라도 몸이 좀 안 좋은 병사가 있으면 생활관에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의무대로 보내 진료를 받게 한다는군요. 다행히 오늘은 모두 건강한 모습입니다.


팀장님의 인솔 하에 차량을 타고 발굴지까지 이동한 발굴병들. 차에서 내리자마자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한 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분대장부터 이등병 막내까지 공평하게 나눠서 진다지만, 등에 멘 장비들이 상당히 무거워보이는데요. 힘들지 않나요? 


(사진: 발굴병들의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들. 발굴병들은 매일 같이 이 짐들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이등병 때는 맨 몸으로 산에 오르는 것도 죽을 맛이었지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보니 이젠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체력 좋아보이는 염 일병의 답변이 믿음직스럽군요.


오전 유해발굴작전 (AM 09:00 ~ PM 12:00)


드디어 작전 개시! 보통 유해발굴작전은 100명 단위의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데요, 이들을 ‘기초발굴병’이라고 합니다. 발굴하려는 지점에 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굴토를 하며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초발굴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전문발굴병인 국유단 발굴병들은 기초발굴병력의 뒤에서 기초병력들이 제대로 발굴을 하고 있는지, 혹시 유해를 놓치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하며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한답니다.


그런데 그때! 


“팀장님, 유해 나왔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순간 발굴팀장님과 발굴병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려갑니다. 유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식별되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뜯어보며 토의한 결과 인골(人骨)로 판정되었습니다. 


유해로 판정이 나자, 발굴병들은 각자 임무를 분담해 일사천리로 수습에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유해가 식별된 지점 주위로 나무 말뚝을 박고, 노란색 테이프로 사방을 두릅니다. 이 ‘접근금지’ 라인 안으로는 국유단 발굴병 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현장 훼손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이 공간을 전문용어로 ‘트렌치’라고도 합니다. 발굴병 역시 트렌치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여 유해 훼손에 대비한다는군요.



(사진: 유해수습을 하는 국유단 발굴병들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수습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이 매우 진지합니다. 전문발굴병의 숙련된 손길에 6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호국영령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분은 대체 왜 이곳에, 어떤 사연으로 잠들게 되신 걸까요. 드러나는 유해를 보며 발굴병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꿀맛 같은 잠깐의 휴식 (PM 12:00 ~ 13:00)


“오전 발굴작전 종료! 밥 먹고 하자!”


벌써 점심시간이군요. 유해 수습에 전념하던 발굴병들도 그제야 허리를 펴며 한숨을 돌리네요. 임무를 수행하느라 지친 병사들이 그늘 진 곳에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달콤한 휴식 시간입니다. 병사들은 전투식량으로 허기를 달래며 즐거운 휴식을 만끽합니다. 매일 같이 먹는 전투식량이 물리지는 않을까요?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사진: 발굴병들의 주식인 ‘전투식량’)


“당연히 물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 주먹밥을 만들어오기도 합니다.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는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전우들과 함께 나눠먹는 밥은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특히 산에서 먹으니 운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병사들 중에는 돗자리에 누워 쪽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네요. 국유단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Y씨는 “점심 먹고 한창 나른할 때, 산바람 맞으며 잠깐 누워 자던 그 잠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유해발굴작전 개시 (PM 13:00 ~ 17:00)


잠깐의 달콤한 휴식도 끝나고, 오후 작전이 개시됩니다. 오후 작전은 오전에 비해 좀 더 바쁘게 돌아갑니다. 오전에 식별한 유해를 오늘 안에 수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해발굴작전의 원칙 중 하나는 바로 ‘당일 수습’이라고 합니다. 유해를 현장에 방치하고 내려올 경우, 까마귀와 같은 산짐승들이 유해를 물어가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인지 발굴병들의 손길 역시 오전보다 더욱 분주해보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국영령의 모습이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60여 년 전 당시 모습 그대로 당신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노출이 완료된 유해의 형태는, 전사 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착잡한 표정으로 노출된 유해를 바라보던 박 일병이 입을 열었습니다.


“보통 유해라고 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것처럼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많이들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영화와 다릅니다.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수류탄에 온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여기 누워계신 이분 역시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참혹한 양상으로 전사하신 게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사진: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노출된 유해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사진: 태극기로 관포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유해의 노출을 마무리한 발굴병들은 유해의 노출 양상을 직접 그림과 사진 등으로 기록하고, 정성을 다해 입관 절차에 들어갑니다. 이제 또 한 분의 호국영령께서 60여 년 만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작전 종료 및 막사 복귀 (PM 17:00 ~ 18:00)


금일 작전 종료. 하산 준비를 마친 병력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수습한 호국영령을 보내드릴 시간입니다. 태극기로 정성스레 싸여있는 관 앞으로 제기상이 놓이고, 발굴부대를 대표하여 대대장님이 직접 제주를 올립니다. 


‘부대 차렷! 호국영령님께 대하여 경례! 일동 묵념!’


발굴팀장님의 구호에 맞춰, 병력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거수경례와 묵념을 올립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60년 동안 오매불망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호국영령이시여. 이제 편히 쉬소서.



(사진: 약식제례를 지내는 모습)


유해봉송을 마친 발굴병들도 하산길에 오릅니다.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을 모셨다는 생각에 뿌듯함과 홀가분한 감정을 가지고 내려가는 발굴병들의 발걸음이 가벼워보입니다. 함께 내려가던 김 일병이 이런 말을 덧붙이네요.


“만약 오늘 안에 수습을 하지 못했다면, 조명장비까지 이용해서 야간 발굴을 했을 겁니다. 예전에는 밤늦게 하산한 적도 있었습니다.”


작전 종료 후에도 이어지는 임무수행 (PM 18:00 ~ 22:00)


막사로 복귀한 발굴병들의 표정을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하네요. 하지만 발굴병들의 일과는 막사 복귀 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복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 수습한 유해에 대한 기록을 전산화하는 것. 현장에서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받아 적은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키아티스(KIATIS: 6.25 전사자 종합정보체계)라는 국유단 고유의 전산망에 업로드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오늘 작전 수행 간 사용한 발굴 장비의 정비와, 내일 작전을 위한 출동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아니, 그럼 대체 언제 쉬나요?


“유해가 많이 나올 경우에는 그만큼 업무량이 많아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군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기기 때문에 지금은 예전보다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빠듯하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각자 체력 단련이나 독서 등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이젠 발굴병 생활에 도가 텄다는 한 상병의 답변에 여유가 넘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있는 사람 (PM 22:00)


막사 내 모든 불이 꺼집니다. 이제 발굴병들도 취침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침상에 등을 붙이자마자 다들 금세 곯아떨어지는군요. 오늘 하루도 참 고단했나봅니다. 그런데 분대장 김 병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군요. 혹여 후임들이 잠에서 깰까봐, 이불 속에 들어가 라이트펜을 켜고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분대장 수첩이라는 겁니다. 매일 매일 작성하는 건데, 우리 발굴 팀의 일기와도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 임무수행 간 있었던 실수나, 분대장으로서 좀 더 매끄럽게 지휘하지 못했던 점, 고민이 있거나 아픈 병사들이 있는지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아무래도 호국영령을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니, 이런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일은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작전에 임해야겠노라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진: 분대장은 매일 병사들의 애로사항과 임무수행의 결과를 기록한다)


발굴병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여러분, 지금까지 발굴병들과 하루 일과를 함께 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에 놀라셨나요? 실제로 발굴병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사명감이나 자부심 없이는 하기 힘든 임무라는 생각까지 드는데요,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S씨에게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이등병 때는 산 타는 것도 힘들었고, 임무수행 간 잦은 실수 탓에 선임들에게 혼나면서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매일 밤 침상에 누우면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지더군요. 호국영령을 모시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정도 고생도 감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나약하게만 느껴졌던 겁니다. 매일 매일이 반성의 연속이었죠. 전역한 지금은 오히려 발굴병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사진: 정교한 손길로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이처럼 오늘도 호국영령을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이 있기에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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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마지막 안식처로의 인도자들, 영현병을 만나다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2)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짧았던 장마도 지나고, 7월 초복(初伏)이 지나 이제는 완연한 여름 날씨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폭염에 몸도 마음도 지치기 쉬운데요, 이럴 때일수록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건강관리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릴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국유단에 소속된 조금 특별한 병사들의 특별한 임무수행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년 365일 현충원에 상주하면서, 그들만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다


착, 착, 착... 한 눈에 봐도 경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발을 맞추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엄숙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데요, 지켜보는 이들도 절로 숙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정체는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영현소대’ 병사들이었습니다. 영현소대 병사들은 호국영령의 유골함을 높이 받은 채, 그들이 마지막 안식을 취할 충혼당(납골당)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영현병들의 경건하고 엄숙한 인도에 따라, 호국영령들 역시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지난 3월에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에서 중국군 유해를 인도하는 영현병들)


​오늘은 바로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들, 국유단 영현병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영현소대와 영현병


​국유단 본부중대에는 발굴병들이 소속된 ‘발굴소대’, 감식병들이 소속된 ‘감식소대’와 더불어 영현소대라는 독립소대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소대에 소속된 병사들이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요, 이들을 일컬어 ‘영현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현(英顯)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표현’으로서, 호국영령을 의미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영현병은 대체 어떤 보직이며, 이들이 소속된 영현소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먼저 그 유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현소대의 탄생과 역사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현병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부산에서 ‘묘지등록중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영현소대는 1952년 9월 ‘81영현중대’로 부대 명칭을 개정한 뒤, 1986년 10월 5군수지원사령부, 53군지단을 거쳐 2006년 8월 국방부 근무지원단 의장대대에 예속되었습니다.


하지만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반영구적 국가사업으로 활성화되고, 그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면서, 국유단 휘하 소대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그 편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2009년 6월에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던 ‘영현 및 의장중대’가 해체됨에 따라, 국유단 영현소대가 영현행사를 담당하는 전군 유일의 특수소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2010년에는 병참병과의 특기로 사무처리를 의미하던 영현등록병(2112)에서 행사지원의 영현행사병(1111)으로 직책 명칭 및 특기가 변경되면서, 영현병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로써 국유단 영현소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유일의 영현 전담 특수소대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쯤 되면 영현병들이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만하죠?



(사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영현소대)


영현병들은 어떤 임무를 수행할까


그렇다면 영현병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될까요?


영현병들은 6·25 전사자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한 국가유공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충원에서는 매일 두 차례씩 국가유공자의 안장식이 거행되는데요, 영현병들은 바로 이 행사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안장행사는 평일/주말 구분 없이 매일 열리기 때문에, 영현병들 역시 주말의 달콤한 개인정비(휴식) 시간을 반납하고 행사 지원을 나가는 게 일상이라고 합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행사 지원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자신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숭고한 가치를 알기에 자부심 역시 남다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년 연말마다 국무총리 주관으로 열리는 ‘6·25 전사자 합동봉안식’ 및 사단/군단 단위의 영결식·합동봉안식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북한에서 미군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인도받거나, 국유단이 발굴한 미군 유해를 미국 정부에 인도하는 행사가 개최될 때면, 우리 영현병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진: 2015년 12월에 열린 ‘6·25 전사자 합동봉안식’에서 영현병들이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사진: 지난 4월 28일 열린 ‘한·미 전사자 유해 상호 봉환행사’에서 미군으로부터 인도받은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특히 2014년부터는 중국 정부와의 협약으로 ‘중국군 유해 인도 행사’가 매년 한 차례씩 개최되면서, 국유단에서 발굴한 중공군 유해를 중국 정부에 인도하는 행사에서 영현병들의 임무수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진: 지난 3월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에서 우리 영현병이 중국군 의장대 병사에게 유해를 인도하고 있다)


저 역시 전역하기 전에 이 행사를 참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요, 중국군 의장대 병사들 앞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보무도 당당했던 우리 대한민국 영현병들의 늠름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행사를 지켜보는 내내 영현병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생각에, 새삼 영현병들이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주특기 훈련


수행하는 보직 자체가 특수한 임무이기 때문에, 영현병들이 받는 주특기 훈련 역시 독특할 수밖에 없는데요, 영현병들은 훈련소 혹은 신교대에서 5주 간의 신병훈련을 수료한 뒤, 바로 국유단으로 전입을 와 선임들로부터 직접 ‘주특기교육’을 받게 됩니다. 선임들 역시 그동안 수많은 행사를 치르며 축적되어 온 노하우를 신병에게 전수하며, 영현병으로서의 몸가짐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받는 훈련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훈련으로는 ‘발걸음’ 훈련을 들 수 있습니다.


영현병들은 일반적인 걸음보다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중간에 공중에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지면을 내딛는 방식의 걸음걸이를 계속 반복 연습하는데요, 앞 사람과의 거리는 4보로 유지해야하며, 행진을 마치고 도열할 때에는 오른발의 무릎이 지면과 90도를 이루도록 올려준 자세를 2초 간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군 복무를 하며 가까이서 지켜본 영현병들은 쉬는 시간, 일하는 시간 구분 없이 수시로 소관을 들고 발걸음을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역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은 참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진: 영현병들이 발을 맞추는 것은 고인에 대해 최고의 예를 다하기 위함이다)


이런 규칙의 명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1955년 국군묘소가 설립되고 의장행사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미국 의장병들의 행진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하는데요, 유래가 어찌되었든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에 최고의 예를 다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해 영현소대를 이끄는 영현소대장 함성제 상사는 “국유단에 영현소대가 창설된 이래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영현소대만의 고유한 규범과 의전 절차를 확립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영현병들이 받는 훈련으로는 ‘영정과 영현 인수하기’, ‘우천 시 우산 인수와 우산 펴기’, ‘유가족에게 영현 인도’ 등 다양한 의전 훈련이 존재합니다. 영현이 모셔진 유골함을 감싸는 봉송천(소창) 매듭법도 익혀야 하며, 복장 역시 언제나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림질 등을 통해 수시로 정비한다고 합니다.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만큼, 복장과 몸가짐에 있어서 한 치의 실수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 영현병들의 임무 수행은 사전에 철저한 훈련을 반복-숙달한 뒤에 이루어진다)


이처럼 영현병들의 임무 수행은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내려놓았다간 큰 실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영현병들의 임무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열리는 행사지만 한 번 행사를 할 때마다 사전에 철저한 연습을 통해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영현병들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


그렇다면 영현병들이 임무수행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영현병들은 하나같이 “행사가 끝난 뒤, 유가족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를 가장 보람 있는 순간으로 꼽았습니다.


실제로 영현병들이 행사를 집전하는 동안, 유가족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를 지켜보게 되는데요, 최고의 예(禮)를 다해 자신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를 모시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사가 끝난 뒤에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는 유가족들도 있다고 하는데요, 영현병들은 바로 그 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보직을 맡았으면 이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영현병으로 선발되어 온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고도 고백했습니다.


묵묵히 임무수행하는 그들에게 응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국유단에는 발굴, 감식병 외에도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영현병들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정성 어린 인도가 없었다면, 호국영령들 역시 편안한 안식을 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진: 지난 3월에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를 마치고 촬영한 단체사진)


영현병들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의 숭고한 가치를 알기에, 한 마디 불평 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임무 수행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영현병들이 앞으로도 자신의 임무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임무 수행에 임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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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얼마 전, SBS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나도펀딩'이라는 펀딩 사이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도 6.25 전쟁 발발 제66주기를 맞아, 뭔가 의미 있는 펀딩을 한 번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SBS와 공조하여 의미 있는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의 목적은 바로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이 쓸 물품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요즘 날씨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많이들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고생이 많을 이들은 바로 군인이란 직업을 가진 이들이겠지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불철주야 전/후방에서 고생하는 우리 국군 장병들... 이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요. 


특히나 제가 소속되어 있던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을 생각하면 참 안쓰럽습니다. 우리들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더위를 잠시나마 식히고 있는 그 시간에도, 우리 국유단 발굴병들은 여전히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이름 모를 산야를 오르고 또 오르고 있습니다. 


저도 발굴병으로서 군 복무를 하며, 두 번의 여름을 지내봤기에 그 열악한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더운 이 날씨에, 무거운 발굴장비와 물자를 짊어지고서 높은 산을 오르는 건 정말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유해가 식별되기라도 하면,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정밀발굴을 실시해야 합니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아래, 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유해를 노출하는 과정도 결코 녹록지는 않습니다. 달려드는 산벌레 떼는 말할 것도 없고요. 여름에 발굴할 때는, 지쳐서 말할 힘도 없더군요.


그래서 현장에서 고생하는 우리 후임 발굴병들을 위해, 작게나마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이번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은 7월 31일까지 진행되며, 목표액은 200만원입니다. 모금된 금액은 더위에 고생하는 국유단 소속 발굴병들을 위한 물품(아이스패드 및 물수건 등) 후원 비용 및 발굴된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례비용으로 쓰일 것입니다.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소액이라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액마저도 부담스럽다면, 주위 지인들에게 알려주기만이라도 해주십시오. 애국은 꼭 총들고 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야만 애국은 아닙니다.


펀딩 프로젝트 링크: http://nadofunding.sbs.co.kr/project/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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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35008265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설악산 상봉/신선봉을 가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1)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연재!


​여러분! 저는 2014년 8월부터 2016년 4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에서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였는데요,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며 겪은 에피소드들을 바탕으로, 이번 6월부터는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라는 주제의 시리즈를 연재하려 합니다. 서포터즈 중 유일한 국유단 출신으로서, 앞으로 여러분께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를 가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좀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중 하나라는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에서의 유해발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그때 그 당시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잊을 수 없는 그곳, 설악산 상봉/신선봉


유해발굴병들은 보직의 특성상,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 유해발굴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러다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요, 제겐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이 그랬습니다.



▲ 설악산 상봉 발굴현장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2014년 7월에 입대하여 아직은 어리바리한 이등병 시절이었던 그해 10월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속한 발굴4팀은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에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는데요, 이곳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는 1951년 5월 당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제6사단 및 제12사단에 맞서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밀고 밀리는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였습니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기에, 이곳에서 산화한 호국영령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끔찍한 악몽으로만 다가왔던 상봉과의 첫 만남


상봉에 오르기 위해,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이나 지났을까요?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저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제가 메고 있던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저 역시 다시 이를 악물고 오르기 시작했는데요,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야만 했습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제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 신선봉의 첫 기억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현장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도착한 정상. 하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도 잠시, 이내 제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곳에 유해가 있단 말이야?’




▲ 상봉에서 유해를 발굴하는 병력들의 모습


정상에 오른 제 눈앞에 펼쳐진 발굴현장의 모습은, 그동안 봐왔던 발굴현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온 사면이 바위로 뒤덮인 산에서 대체 어떻게 발굴을 진행하며, 이곳에 과연 유해가 있긴 한 것일까...


발굴기법 역시 생소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보통 유해발굴은 삽과 호미 등을 이용해,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사면을 깊게 파면서 퇴적층 내 유해의 매장 여부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굴토를 진행하는데요, 상봉은 이런 기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답니다.



▲ 스크린(발굴장비)을 이용해 조각유해를 찾는 필자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에, 모두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식별된 첫 유해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지며, 차츰 전쟁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된 순간!


그 당시의 솔직한 감정은 ‘놀라움’과 ‘당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곳에 유해가 있었다니!”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저처럼 의문을 갖고 있던 발굴병력들 역시 “정말 이 땅에 전쟁이 있긴 있었구나!”하며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습니다.



▲ 상봉에서 식별된 조각유해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러나 식별된 유해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놀랐던 감정은 차츰 안타깝고 숙연한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발굴되는 유해들의 형태가 그 부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 발굴된 유해를 정성껏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보통 많은 사람들은 유해발굴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유해의 형태를 떠올리곤 합니다. 실제 발굴현장에서는 두개골 포함 잔존율이 60% 이상인 유해에 대해서는 ‘완전유해’라 부르고, 그 미만인 유해는 ‘부분유해’라고 명명합니다. 하지만 상봉에서 발굴된 유해는 부분유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게 ‘조각유해’라 불리웠는데요, 정말 심하게 훼손된 유해 중에는 성인 남성의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유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유해를 입관하고, 태극기로 관포하는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왜 유달리 조각난 유해들이 많이 식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양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설악산 상봉에 올라서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는데요, 바로 적의 군함들이 동해바다에서 이곳 상봉에 주둔한 아군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많은 호국영령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산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의 형태를 보면서, 당시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 유난히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유난히 먹먹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설악산 발굴


당시 현장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제 심경은 복잡했습니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에도 힘든 이 험한 산에서,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넋들... 6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국의 ‘귀환’ 명령만을 기다리며 외로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안타까운 영혼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려왔기 때문입니다.



▲ 약식제례 및 유해봉송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은 사실상 신원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DNA 대조를 위해서는 유해에서 시료 채취를 해야만 하는데, 이처럼 작은 조각유해에서는 DNA 시료 채취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설악산에서 유해를 수습할 때의 기억은 가장 가슴 먹먹한 기억으로 제게 남아있습니다.


​잊지 말자, 그들을...


​2016년 4월 13일, 마침내 1년 9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면서 저는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현장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는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과,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하던 기억, 조각유해들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리고 혹여나 우리의 불찰로 인해 미처 찾지 못해 여전히 그곳 어딘가에 잠들어있을지도 모르는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호국영령의 유해들이 여전히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조국의 품으로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바로 ‘그들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아울러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호국영령들의 신원확인을 위해, 유가족 DNA 시료 채취에도 적극 동참하는 것. 이것이 호국영령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사진을 제공해주신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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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번째 호국영웅,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가족의 품

- 故 양만승 경위 유해송환 행사 현장에 다녀오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오늘은 서포터즈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행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귀환 행사인데요, 처음에는 덤덤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했던 저도,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어느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니, 여러분도 어떤 행사인지 많이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겠습니다.


호국영웅 귀환행사가 열리다


지난 5월 18일, 경기도 수원의 어느 식당 앞 골목.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던 골목이 갑자기 외부인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웅의 유해가 유가족에게 인도되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호국영웅은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그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의 신분으로 적과 싸우다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는데요, 그의 생애를 잠시 알아보고 갈까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무궁화꽃 한 송이


故 양만승 경위는 1927년 4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양 경위가 24세 때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고, 적화통일의 위기에 처하자, 경찰 역시 ‘軍과 더불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신념 아래, 적극적으로 국토 보위에 나서게 되었는데요,


1950년 7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벌어진 ‘호남지역 전투’에 양 경위 역시 해남경찰서 소속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호남지역 전투는 전라북도 일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6사단에 맞서, 우리 국군 5사단과 7사단 그리고 경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벌인 방어 전투였습니다. 이때 해남경찰서 소속 1개 소대 병력들은 영광 삼학리 지역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방어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7월 23일, 치열한 접전 끝에 양 경위는 적군의 총탄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렇게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발굴되기까지 6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113번째 신원확인의 주인공


유가족 송환 행사는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은 행사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유가족인 외조카 김점덕 씨의 손을 맞잡으며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이에 김점덕 씨는 “감사합니다. 국방부에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어 김종성 감식과장에 의해 故 양만승 경위를 발굴하게 된 과정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습니다. 


1950년 7월 23일, 영광 삼학리에서 적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양 경위는 함께 전사한 동료 37명과 함께 집단으로 임시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7년의 어느 날. 영광 삼학리에서 전사한 경찰관들의 유해가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은 유해발굴감식단은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이 지역 일대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38위의 호국영령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독수리 문양 뱃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 뱃지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들이 소지하고 있던 뱃지라고 하는데요,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해남경찰서의 경찰사(史)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였고, 그 결과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현 발굴지점에서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것으로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전사한 경찰들의 유가족을 찾아 시료 채취를 한 뒤, DNA 대조로 38위 중 9위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29위의 호국영령은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용사’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이 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로 양 경위도 있었습니다.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다시 유가족을 수소문해 찾기 시작했고, 추가적으로 9위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 경위 역시 이 과정에서 유가족을 찾아 신원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요, 이로써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이루어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선진국의 척도


김종성 감식과장의 브리핑이 끝난 뒤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유가족 위로패’와 양 경위를 발굴할 당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를 담은 ‘호국의 얼’ 함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이학기 단장은 국방부 장관을 대신하여 유가족에게 ‘전사자 신원확인 통보서’를 전달함으로써 행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경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김태수 수원중부경찰서장은 “6·25 전쟁 당시 많은 경찰관들이 전사했는데, 경기도에서만 6,700여명이 전사했다. 아직 못 찾은 분들도 많은데, 나라를 지킨 호국영웅들에 대한 보답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행사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요, “아직 못 찾은 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유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분들을 찾아서 전사자 신원확인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찰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군을 대표하여 참석한 51사단 168연대장 박일권 대령 역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故 양만승 경위의 유해를 발굴해주어서 다행스럽다”며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국가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얼마나 잘 대우해주는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을 찾아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남매의 상봉


故 양만승 경위에게는 유일한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 결국 오빠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15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양 경위의 여동생은 임종 직전, 자식들에게 “나중에라도 꼭 너희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마침내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 외조카 김점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그녀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외삼촌을 찾아 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다”고 연신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양 경위의 매제인 김용길 씨 역시 “아내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반갑겠는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오빠였으니까...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무 아쉽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 이제는 하늘에서 남매가 상봉하여,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남매의 정(情)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았습니다.


15년 만에 받든 어머니의 유언


행사가 끝난 뒤, 또 다른 유가족인 김철현 씨(외조카)에게 오늘 행사를 지켜본 소회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며 “갑자기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가족 모두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또 그는 “외삼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께서 누누이 외삼촌에 대해 말씀하셨다”며 “어머니께서는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에게 꼭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회고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유가족 DNA 시료 채취, 그리던 가족을 찾는 길


이처럼 유해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것이 곧 국가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들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책무라고도 할 수 있으며, 6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유가족의 한(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발굴된 유해가 모두 신원을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번에 귀환한 故 양만승 경위 역시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되었는데요, 유해발굴감식단이 15년 동안 발굴한 국군 전사자는 총 9,100여위. 그중 단 1.2%의 유해만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신원확인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 유가족의 DNA를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유해발굴 뿐만 아니라, 전사자를 찾지 못한 유가족의 DNA 시료 채취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에, 유가족 DNA 시료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또 유가족 DNA 시료 채취라는 것에 대해 생소한 분들은 복잡하고 무서운 병원검사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가족 DNA 시료 채취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면봉으로 입 안의 타액(침)을 적시는 것만으로, DNA 시료가 충분히 확보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단 1분의 투자가 여전히 60년 동안 차디찬 땅 속에서, 혹은 ‘무명용사’라는 이름 아래 현충원에 잠들어있는 호국영웅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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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한 후, 처음으로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글!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첫 번째 글이, 내가 쓴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특성상, 내가 보낸 원본 글이 100% 다 실리지 못하고, 반토막 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잘 써서 다 올리고 싶었지만, 용량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담당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블로그 포스팅이란 것 자체가 너무 길면 또 지루해질 수도 있어서... 포인트만 담아 글을 짧게 쓰는 것도 중요한 글쓰기 요령인데, 나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볼까나.


PS. 개인 블로그이니만큼 나중에 원본 글도 따로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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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최종 합격자 발표가 떴다.


결과는... 최종 합격!


솔직히 지원자 중 유일한 전역자 출신인데다가, 얼마 전까지 한솥밥 먹던 식구들이었는데 안 뽑아줬으면 정말... 서운할 뻔 했다. 뭐 어쨌거나 붙었으니까... ㅋㅋㅋ


어제 면접 때도 강조했지만, 나의 유일하다시피 한 강점은 '국유단 출신'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국유단 출신이라고 해서 내가 특별한 존재라거나, 남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1년 9개월 가까이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면서, 유해발굴에 대해 빠삭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점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그래도 국유단 출신인데 비국유단 출신보다 더 잘해야지,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부담감이랄까?


아무튼 전역자 출신으로서 전역 후에도 부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몸소 보이고 싶다. 그래야만 앞으로 2기, 3기가 계속 배출될 때에도 또 다른 전역자들이 열심히 지원할테니까...


PS. 다음 주 금요일 발대식 때 발굴현장 체험 간다는데... 우리 팀 발굴지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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