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블로그에 무술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옛날엔 무술을 수련할 때 온라인상에서 이러쿵 저러쿵 썰을 풀며 사람들과 노닥거리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지더군요. 


수련일기야 매일 쓰고 있지만 그것도 저희 사부님과 사형제들만 볼 수 있게끔 비밀글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분들은 아마 제가 무술 수련을 아예 중단한 게 아닌가 의구심을 갖고 계신 분들도 계시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수련은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수련한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재밌게 수련하고 있습니다. 옛날엔 개인수련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요새는 춥건 덥건 간에 아주 피곤하거나 바쁘지 않은 이상은 매일 적어도 30분 이상은 수련을 하고 있으니까요. 특히 얼마 전부터는 동작에 탄력이 붙어서 하루 일과 중 수련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 됐을 정도입니다.


요즘 들어서는 '내가 왜 무술을 수련하고 있는가', '무술 수련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합니다.


사실 학생운동을 시작한 뒤로,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 힘든 시간들을 보내왔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힘든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요. 여러 번 좌절하고 자괴감 탓에 우울증도 오고 그랬습니다. 문제는 무술 수련으로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스트레스가 수련에 방해가 되고 있었습니다. 


또 무술을 수련하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과 담력이 생겨서 매사 일처리를 할 때 대범하게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큰일 앞에서 겁 먹고 나약해져서 한 없이 초라해지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소심해져서 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수련의 끈은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꾸역꾸역 수련터에 나갔지만, 이미 정신은 반쯤 나가버린 터라 도저히 수련에 집중이 안되더군요. 다행히 별 일은 없었지만, 사실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낙법이니 발력이니 계속 주고받아야 하는데, 정신 안 차리고 있다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건성건성으로 임하는 건 열심히 상대해주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요.


다행히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힘든 시간도 다 지나가고 요새는 안정된 기분으로 수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때 일들을 통해, 아직도 제 자신의 수련이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흔히 무술을 수련하면 사람의 기질이 바뀐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들과 손을 맞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 소통의 과정에서 친화력(소위 붙임성이라고 하는...)도 생길 수밖에 없죠. 또 실력이 상승할 때마다 자신감이 붙으니 모든 일을 대함에 있어 여유가 생기고 대범해진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담력까지 생기죠.


그러나 심적으로 조금 힘든 일이 생겼다고 해서, 쉽게 좌절하고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빠지는 제 자신을 보면서 그리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좀 더 강경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맞서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여전히 변하려면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형들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는데 사형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수련할 때만큼은 수련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수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충고를 해주십니다. 이미 꿍푸가 어느 정도 쌓인 사형들은 힘든 일이 있어도 수련을 극복의 수단으로 삼는다고 하니, 그 멘탈이 무척 부럽기까지 하더군요.


얘기가 조금 길어졌습니다만, 요새는 그래서 무술을 수련하며 얻고자 하는 가치 중 첫 번째로 '기질 변화'를 꼽습니다. 소심하고 나약한 기질을 대범하고 호방한 기질로 바꿔나가는 게 목적입니다. 사부님이나 사형들이 수련을 통해 충분히 이뤄낼 수 있는 변화라고 누누이 강조하시고, 저도 그 말씀을 믿기에 수련의 끈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제게도 다가올 변화라고 믿습니다.


호신도 당연히 얻어야 할 가치 중 하나죠. 다만 호신이란 것도 결국 성격부터 바뀌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상대방에게 맞설 수 있는 담력(용기)이 없다면 정작 실전에선 손발이 굳고 머리가 하얗게 변해서 아무 것도 못할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무술 수련을 통해 기질의 긍정적인 변화를 얻고 싶은 첫 번째 가치로 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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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어느덧 2017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2018년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돌이켜보면 17년도 하반기는 학교 다니랴 동시에 학생운동하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관두고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맘고생이 심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유독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제겐 군 시절 선·후임들이 그렇습니다. 2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힘들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던 사이니 오만 정이 다 들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지요.


이번에 어쩌다보니 그 친구들과 뜻이 맞아서 함께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전역병 캠핑'. 제겐 선임이 되는 친구 세 명(전역한 지금은 제게 동생들입니다만 ㅎㅎ)과 저, 그리고 후임 한 명까지 총 5명이 함께 다녀왔더랬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간 곳은 상암에 있는 난지캠핑장이었습니다. 우선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 월드컵경기장점에 들러 밤새 마실 술과 바베큐파티용 삼겹살, 안주 등을 잔뜩 사갔습니다.


저희가 빌린 텐트는 10인용 몽골텐트였습니다. 원래 함께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인원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공간은 넉넉해서 좋았으나... 이날 바람이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중앙에 장작 난로가 있긴 한데, 문제는 저희가 장작을 때워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보다 오히려 연기를 더 많이 들이마신 것 같습니다. 불도 자꾸 꺼지고... 캠핑장에서 장작을 파는데 한 단에 1만원이나 하는 통에 장작값이 너무 비싸서 양껏 때우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고생하면서 마시는 술이 달다고, 어찌어찌 간신히 불씨를 붙여놓고서 저녁부터 다같이 바베큐파티를 즐겼습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온갖 술을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더군요. 


특히 이날을 위해 집에서 아버지가 드시던 각종 술들(죽엽청주, 북대양, 스카치 위스키)에 마트에서 사간 벌떡주, 가시오가피주들을 챙겨갔는데 아주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술을 꿀떡꿀떡 잘 마시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하더군요.


멀리 부산에서 온 친구는 부산의 지역소주인 '시원' 두 병을 준비해왔고, 오늘 캠핑을 기획했던 친구는 사돈어른이 담근 복분자주를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홈플러스에서 산 공부가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호화잔치였습니다.



난로 앞에서 다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군 시절을 돌이켜보려니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니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모르겠더군요.


특히 이날 국유단 시절 썼던 모자도 챙겨오고 군 시절 사진과 영상을 편집해서 미니 빔으로 즉석 상영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특성상 워낙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이렇듯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상당히 많은 게 장점입니다. 거기에 우리 부대 전용 OST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까지 입혀놓으니 괜히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 왈칵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즉석에서 다른 전역자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우리끼리 점호와 약식제례(유해를 수습한 뒤에 지내는 제사)도 오랜만에 재현해보고 잠깐이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시다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들 숙취 탓에 비몽사몽... 당산역까지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헤어졌습니다. 다들 숙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통에 서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쉽습니다. 저도 집에 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네요.


아무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갔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여독이 많이 남는 캠핑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라고 지금보다 안 힘들었겠냐마는(그래도 군대인데!!!) 정말 지나가면 다 그리운 추억이 되나봅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시절을 함께 헤쳐나왔기에, 유독 군 시절 선후임들이 반갑고 친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국유단 전역자 모임을 상설화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까지 나왔는데요, 정말 실현됐으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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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벌써 5년 전 일이다. 경북 안동으로 2박 3일 간 고적답사를 갔을 때였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안동에는 도산서원·병산서원 등이 남아있어 유림의 넋이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잠시나마 복잡했던 일상을 잊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발자취에 흠뻑 취해있을 무렵,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덧 조용한 시골마을에 자리 잡은 한 고택 앞에 멈춰섰다. 유려한 기와지붕을 얹은 서원들에 비해 볼품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에서 오랜 세월의 풍상이 느껴졌다.


김재봉의 생가인 '학암고택' 전경(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위치) ⓒ 김경준


안동의 한 고택에서 만난 죄인의 초상화


고택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사랑채에 걸려있는 웬 사내의 흑백 초상화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머리를 삭발한 채 수의를 입고 있어 영락없는 죄인의 형색이었다. 그럼에도 죄인답지 않게 표정에는 온화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어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풍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 고택의 주인이었던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이었다.



학암고택에 걸려있는 김재봉의 초상화와 안내문 ⓒ 김경준


김재봉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산파 역할을 맡아 국내에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의 초대 책임비서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김재봉이란 이름은 내게 너무도 낯선 이름이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다면서도 그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내내 민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찌 내 학문이 얕은 탓만 있겠는가. 그의 이름을 꽁꽁 감춘 채 역사의 뒤편에 밀어낸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현실 탓도 있을 게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내가 배운 독립운동사란 우익 민족주의 계열로 편향된 '반쪽짜리 역사'였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내가 본 교과서에서는 나름대로 좌·우 균형을 맞춘답시고 좌익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었지만, 그 비중은 절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김재봉이니 권오설이니 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애시당초 접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별'들에 대한 장편 서사


최근 출간된 <조선공산당 평전>을 펼치자마자 유독 반가웠던 까닭도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김재봉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이 책은 김재봉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흔히 평전이라고 하면 역사 속 인물 한 사람의 일생에 초점을 맞춰 고찰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책은 특정 인물이 아닌 '조선공산당'이라는 정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 최백순은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으며, 노동자,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이기에 사람이 아닌 '조선공산당'에 '평전'이란 말을 붙였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조선공산당 평전> 표지 ⓒ 서해문집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책에는 김재봉을 비롯해 이동휘, 권오설, 조봉암, 박헌영, 김사국, 김약수, 김알렉산드라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모두 한반도와 러시아,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있고,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이름도 있다.


저자는 이 한 권의 평전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그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하는 까닭을 강조한다.


"(조선공산당은) 참으로 오랫동안 금기시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라면 좌우를 떠나 누구나 조선공산당이 항일독립운동의 큰 흐름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인정이 결코 대중의 상식이 되어선 안 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3·1운동의 야심 찬 반복시도였던(하지만 기획자가 조선공산당이었던) 6·10 만세운동은 이름 정도만 알려지는 게 바람직했고, 해방 직전까지 국내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이들이 공산주의자임은 더더욱 널리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p.4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를 찾아


책의 시간적 배경은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제의 침략과 수탈을 피해 러시아 땅에 모인 한인들은 춥고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하나의 군락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자치조직을 만들고 신문을 발행하며 자연스럽게 러시아 사회의 일원으로 흡수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봉건왕조가 무너지자 러시아 한인사회 구성원들 역시 자연스레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접하게 된다. 혁명으로 봉건왕조를 몰아내고 세워진 볼셰비키 정권의 사회주의 이론은 새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분투하고 있던 조선의 망명정객들에게도 솔깃한 이론이었다. 자연스레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그렇게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의 길은 쉽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좌·우익의 극심한 대결이 이어졌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한인사회당 출신 이동휘도 있었다. 대통령(이승만)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열이 장악한 임시정부에서 그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갈등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김립 암살 사건'이다. 당시 코민테른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동휘의 측근인 김립이 모스크바로 건너가 이를 수령해오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을 빚게 된 사건이다.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백범 김구는 이를 '임시정부 공금 횡령' 사건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 대낮의 골목길에서 김립을 암살했다. 그러나 저자는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를 토대로 자금의 소유권자가 한인사회당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공금 횡령범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김립은 여전히 신원되지 못한 채 우리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실정이다.


비단 좌·우익의 갈등만 존재했던 게 아니었다. 같은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도 이념과 방법의 차이로 인해 격렬한 대립과 분열이 반복됐다. 당시 코민테른은 한 나라에 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1국 1당'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서로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사회주의 정당 및 단체들의 대립이 나날이 격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감시 피해 요릿집에서 만들어진 조선공산당


이들의 갈등을 지켜보다보면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념과 방법이 달랐을 뿐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에서만큼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갈등은 독립을 쟁취하고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그들의 투쟁은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당으로 결실을 맺는다.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아서원. 평범한 점심 약속을 가장한 이날의 모임은 바로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자리였다. 최재형이 첫발을 내딛었던 극동의 낯선 땅 지신허,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그 먼 길을 돌아 독립과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경성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국요릿집이었다."- p.257


김재봉 등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요릿집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후, 서둘러 코민테른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코민테른 간부회는 '9월 결정서'를 의결함으로써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다. 1918년 한인사회당 결성 이후 모두가 꿈꿔온 사회주의자들의 목표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조선공산당은 와해와 재결성을 반복하면서 부침을 겪지만,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는 투쟁의 길을 걸었다.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중국요릿집 '아서원' ⓒ 동아일보


금기의 역사는 현재진행형… 우리가 먼저 불러줘야


저자는 이들의 역사를 '남과 북이 모두 외면한 금기의 역사'라고 말한다. 해방 후 남과 북의 이념 대결 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존재는 뿌리채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해온 남한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 역시 최고권력자인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존재가 모두 지워졌다. 김재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만든 박헌영이 대표적이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미제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숙청당했다.


시간이 흘러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재봉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공적을 인정받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사회주의 전력으로 인해 발목이 묶여 있는 상황이다. 그들의 서훈 문제를 둘러싸고 지금도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역사는 여전히 금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알려지지 않은 별'들은 우리가 손을 내밀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먼저 그들의 이름을 알고 불러줄 때, 그들도 비로소 금기의 영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교과서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비중 있게 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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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