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17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2018년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돌이켜보면 17년도 하반기는 학교 다니랴 동시에 학생운동하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관두고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맘고생이 심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유독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제겐 군 시절 선·후임들이 그렇습니다. 2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힘들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던 사이니 오만 정이 다 들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지요.


이번에 어쩌다보니 그 친구들과 뜻이 맞아서 함께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전역병 캠핑'. 제겐 선임이 되는 친구 세 명(전역한 지금은 제게 동생들입니다만 ㅎㅎ)과 저, 그리고 후임 한 명까지 총 5명이 함께 다녀왔더랬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간 곳은 상암에 있는 난지캠핑장이었습니다. 우선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 월드컵경기장점에 들러 밤새 마실 술과 바베큐파티용 삼겹살, 안주 등을 잔뜩 사갔습니다.


저희가 빌린 텐트는 10인용 몽골텐트였습니다. 원래 함께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인원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공간은 넉넉해서 좋았으나... 이날 바람이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중앙에 장작 난로가 있긴 한데, 문제는 저희가 장작을 때워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보다 오히려 연기를 더 많이 들이마신 것 같습니다. 불도 자꾸 꺼지고... 캠핑장에서 장작을 파는데 한 단에 1만원이나 하는 통에 장작값이 너무 비싸서 양껏 때우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고생하면서 마시는 술이 달다고, 어찌어찌 간신히 불씨를 붙여놓고서 저녁부터 다같이 바베큐파티를 즐겼습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온갖 술을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더군요. 


특히 이날을 위해 집에서 아버지가 드시던 각종 술들(죽엽청주, 북대양, 스카치 위스키)에 마트에서 사간 벌떡주, 가시오가피주들을 챙겨갔는데 아주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술을 꿀떡꿀떡 잘 마시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하더군요.


멀리 부산에서 온 친구는 부산의 지역소주인 '시원' 두 병을 준비해왔고, 오늘 캠핑을 기획했던 친구는 사돈어른이 담근 복분자주를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홈플러스에서 산 공부가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호화잔치였습니다.



난로 앞에서 다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군 시절을 돌이켜보려니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니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모르겠더군요.


특히 이날 국유단 시절 썼던 모자도 챙겨오고 군 시절 사진과 영상을 편집해서 미니 빔으로 즉석 상영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특성상 워낙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이렇듯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상당히 많은 게 장점입니다. 거기에 우리 부대 전용 OST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까지 입혀놓으니 괜히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 왈칵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즉석에서 다른 전역자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우리끼리 점호와 약식제례(유해를 수습한 뒤에 지내는 제사)도 오랜만에 재현해보고 잠깐이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시다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들 숙취 탓에 비몽사몽... 당산역까지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헤어졌습니다. 다들 숙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통에 서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쉽습니다. 저도 집에 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네요.


아무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갔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여독이 많이 남는 캠핑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라고 지금보다 안 힘들었겠냐마는(그래도 군대인데!!!) 정말 지나가면 다 그리운 추억이 되나봅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시절을 함께 헤쳐나왔기에, 유독 군 시절 선후임들이 반갑고 친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국유단 전역자 모임을 상설화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까지 나왔는데요, 정말 실현됐으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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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꿈은 군대 꿈이라고 한다. 2년 가까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숨 막히는 위계질서 아래 억눌려있던 기억이 마냥 즐거웠던 추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렬했던 기억은 잔인하게도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끔씩 꿈의 형태로 다시 드러나곤 한다. 


전역한 지 꼭 1년이 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군대 꿈이라고 해서 전부 악몽은 아닌가보다. 가끔씩 꾸는 꿈 중에는 깨고 나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아련함을 품게 만드는 꿈도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가려진 봉우리, 아슬아슬한 절벽으로 이뤄진 길.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나. 생각만 해도 아련해지는 이 풍경은 군 시절 나의 추억이 깃든 한 산에 대한 이야기다.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경북 영천, 경기 포천, 강원 고성, 강릉...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내겐 강원도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이 그랬다.


설악산의 한 봉우리인 상봉은 해발 1,243m가 넘는 험준한 산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당시 이 봉우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던 탓에 이곳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던 이등병 당시, 나는 상봉을 작전구역으로 배정받았다. 워낙 높고 험한 산이었던 탓에 베테랑 발굴병들조차 쉬쉬하던 그 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리바리 이등병에게 첫 과제치곤 매우 버거운 과제였던 셈이다.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내가 메고 있던 무거운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가야만 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내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의 첫 만남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정상에 도착하니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이 펼쳐졌다. 성인 남성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구간들이 끊임없이 펼쳐진 이곳.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에 앞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말인가’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졌다. 아, 이런 곳에서도 전쟁이 있었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의 흔적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나는 놀라움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높은 산을 오르느라 죽상이던 발굴병력들 역시 탄성을 내질렀다. 책으로만 접하던 전쟁의 기억을 두 눈과 양 손의 살갗으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됐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된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생각하던 내게 그곳에서 드러난 유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워낙 작아 부위조차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조각유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상관은 저 멀리 동해바다에 떠있던 적의 군함들의 이곳 상봉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아군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산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유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험준한 산의 바위틈 사이에서 풍상을 맞아가며 6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유해들을 수습하고 입관한 뒤 태극기로 고이 덮어 봉송했다. 봉송병에 의해 운구되는 유해를 뒤에서 바라보는 그 잠깐 사이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도 힘든 이 험한 봉우리에서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청춘들...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던 그들을 생각하니 산이 너무 높다며 마냥 투정부렸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가족과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상봉의 넋으로 스러져간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역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때때로 상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그 험준한 봉우리를 마주할 때면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바위틈에 드러난 유해들을 지켜보며 지난 날을 돌이켜보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내게 주어진 청춘의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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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발굴병 24시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3)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그동안 연재해왔던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도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그동안 다뤄왔던 주제들이 다소 무거운 주제들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여러분께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바로 ‘유해발굴병’의 24시간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와 함께 발굴병들의 일상으로 들어가보실 텐데요, 다들 준비되셨죠? 그럼 출발!



기상! 출동 준비! (AM 5:30~06:30)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어느 군부대 막사의 복도. 기상나팔이 울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생활관이 보이네요. 바로 발굴병 생활관입니다.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걸까요? 아직 덜 깬 눈으로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는 윤 이병에게 물어봤습니다.


“작전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섭니다. 부대에서 발굴지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조기 기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06시 30분 기상이 원칙이지만, 숙영부대에서 발굴지점까지 이동시간만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조기 기상은 부득이하다고 합니다. 기상과 동시에 기계와 같이 빠른 동작으로 세면과 환복을 하고, 이른 아침식사를 한 뒤 다시 출동준비를 하는 모습이 매우 정신없어 보이는군요. 분대장 김 병장이 살짝 귀띔을 합니다.


“발굴병들은 사실 아침이 제일 바쁩니다. 혹시라도 빠진 게 없나 재차 점검하고, 아침식사도 다른 병력들보다 일찍 하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아직 밥이 준비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취사장에 앉아 하릴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발굴병들이 출동준비로 정신없는 사이, 발굴팀장님께서 출근하셨네요. 팀장님은 간밤에 병사들이 잘 잤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혹시라도 몸이 좀 안 좋은 병사가 있으면 생활관에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의무대로 보내 진료를 받게 한다는군요. 다행히 오늘은 모두 건강한 모습입니다.


팀장님의 인솔 하에 차량을 타고 발굴지까지 이동한 발굴병들. 차에서 내리자마자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한 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분대장부터 이등병 막내까지 공평하게 나눠서 진다지만, 등에 멘 장비들이 상당히 무거워보이는데요. 힘들지 않나요? 


(사진: 발굴병들의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들. 발굴병들은 매일 같이 이 짐들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이등병 때는 맨 몸으로 산에 오르는 것도 죽을 맛이었지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보니 이젠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체력 좋아보이는 염 일병의 답변이 믿음직스럽군요.


오전 유해발굴작전 (AM 09:00 ~ PM 12:00)


드디어 작전 개시! 보통 유해발굴작전은 100명 단위의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데요, 이들을 ‘기초발굴병’이라고 합니다. 발굴하려는 지점에 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굴토를 하며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초발굴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전문발굴병인 국유단 발굴병들은 기초발굴병력의 뒤에서 기초병력들이 제대로 발굴을 하고 있는지, 혹시 유해를 놓치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하며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한답니다.


그런데 그때! 


“팀장님, 유해 나왔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순간 발굴팀장님과 발굴병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려갑니다. 유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식별되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뜯어보며 토의한 결과 인골(人骨)로 판정되었습니다. 


유해로 판정이 나자, 발굴병들은 각자 임무를 분담해 일사천리로 수습에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유해가 식별된 지점 주위로 나무 말뚝을 박고, 노란색 테이프로 사방을 두릅니다. 이 ‘접근금지’ 라인 안으로는 국유단 발굴병 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현장 훼손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이 공간을 전문용어로 ‘트렌치’라고도 합니다. 발굴병 역시 트렌치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여 유해 훼손에 대비한다는군요.



(사진: 유해수습을 하는 국유단 발굴병들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수습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이 매우 진지합니다. 전문발굴병의 숙련된 손길에 6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호국영령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분은 대체 왜 이곳에, 어떤 사연으로 잠들게 되신 걸까요. 드러나는 유해를 보며 발굴병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꿀맛 같은 잠깐의 휴식 (PM 12:00 ~ 13:00)


“오전 발굴작전 종료! 밥 먹고 하자!”


벌써 점심시간이군요. 유해 수습에 전념하던 발굴병들도 그제야 허리를 펴며 한숨을 돌리네요. 임무를 수행하느라 지친 병사들이 그늘 진 곳에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달콤한 휴식 시간입니다. 병사들은 전투식량으로 허기를 달래며 즐거운 휴식을 만끽합니다. 매일 같이 먹는 전투식량이 물리지는 않을까요?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사진: 발굴병들의 주식인 ‘전투식량’)


“당연히 물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 주먹밥을 만들어오기도 합니다.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는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전우들과 함께 나눠먹는 밥은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특히 산에서 먹으니 운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병사들 중에는 돗자리에 누워 쪽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네요. 국유단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Y씨는 “점심 먹고 한창 나른할 때, 산바람 맞으며 잠깐 누워 자던 그 잠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유해발굴작전 개시 (PM 13:00 ~ 17:00)


잠깐의 달콤한 휴식도 끝나고, 오후 작전이 개시됩니다. 오후 작전은 오전에 비해 좀 더 바쁘게 돌아갑니다. 오전에 식별한 유해를 오늘 안에 수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해발굴작전의 원칙 중 하나는 바로 ‘당일 수습’이라고 합니다. 유해를 현장에 방치하고 내려올 경우, 까마귀와 같은 산짐승들이 유해를 물어가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인지 발굴병들의 손길 역시 오전보다 더욱 분주해보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국영령의 모습이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60여 년 전 당시 모습 그대로 당신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노출이 완료된 유해의 형태는, 전사 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착잡한 표정으로 노출된 유해를 바라보던 박 일병이 입을 열었습니다.


“보통 유해라고 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것처럼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많이들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영화와 다릅니다.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수류탄에 온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여기 누워계신 이분 역시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참혹한 양상으로 전사하신 게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사진: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노출된 유해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사진: 태극기로 관포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유해의 노출을 마무리한 발굴병들은 유해의 노출 양상을 직접 그림과 사진 등으로 기록하고, 정성을 다해 입관 절차에 들어갑니다. 이제 또 한 분의 호국영령께서 60여 년 만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작전 종료 및 막사 복귀 (PM 17:00 ~ 18:00)


금일 작전 종료. 하산 준비를 마친 병력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수습한 호국영령을 보내드릴 시간입니다. 태극기로 정성스레 싸여있는 관 앞으로 제기상이 놓이고, 발굴부대를 대표하여 대대장님이 직접 제주를 올립니다. 


‘부대 차렷! 호국영령님께 대하여 경례! 일동 묵념!’


발굴팀장님의 구호에 맞춰, 병력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거수경례와 묵념을 올립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60년 동안 오매불망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호국영령이시여. 이제 편히 쉬소서.



(사진: 약식제례를 지내는 모습)


유해봉송을 마친 발굴병들도 하산길에 오릅니다.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을 모셨다는 생각에 뿌듯함과 홀가분한 감정을 가지고 내려가는 발굴병들의 발걸음이 가벼워보입니다. 함께 내려가던 김 일병이 이런 말을 덧붙이네요.


“만약 오늘 안에 수습을 하지 못했다면, 조명장비까지 이용해서 야간 발굴을 했을 겁니다. 예전에는 밤늦게 하산한 적도 있었습니다.”


작전 종료 후에도 이어지는 임무수행 (PM 18:00 ~ 22:00)


막사로 복귀한 발굴병들의 표정을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하네요. 하지만 발굴병들의 일과는 막사 복귀 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복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 수습한 유해에 대한 기록을 전산화하는 것. 현장에서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받아 적은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키아티스(KIATIS: 6.25 전사자 종합정보체계)라는 국유단 고유의 전산망에 업로드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오늘 작전 수행 간 사용한 발굴 장비의 정비와, 내일 작전을 위한 출동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아니, 그럼 대체 언제 쉬나요?


“유해가 많이 나올 경우에는 그만큼 업무량이 많아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군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기기 때문에 지금은 예전보다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빠듯하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각자 체력 단련이나 독서 등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이젠 발굴병 생활에 도가 텄다는 한 상병의 답변에 여유가 넘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있는 사람 (PM 22:00)


막사 내 모든 불이 꺼집니다. 이제 발굴병들도 취침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침상에 등을 붙이자마자 다들 금세 곯아떨어지는군요. 오늘 하루도 참 고단했나봅니다. 그런데 분대장 김 병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군요. 혹여 후임들이 잠에서 깰까봐, 이불 속에 들어가 라이트펜을 켜고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분대장 수첩이라는 겁니다. 매일 매일 작성하는 건데, 우리 발굴 팀의 일기와도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 임무수행 간 있었던 실수나, 분대장으로서 좀 더 매끄럽게 지휘하지 못했던 점, 고민이 있거나 아픈 병사들이 있는지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아무래도 호국영령을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니, 이런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일은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작전에 임해야겠노라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진: 분대장은 매일 병사들의 애로사항과 임무수행의 결과를 기록한다)


발굴병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여러분, 지금까지 발굴병들과 하루 일과를 함께 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에 놀라셨나요? 실제로 발굴병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사명감이나 자부심 없이는 하기 힘든 임무라는 생각까지 드는데요,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S씨에게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이등병 때는 산 타는 것도 힘들었고, 임무수행 간 잦은 실수 탓에 선임들에게 혼나면서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매일 밤 침상에 누우면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지더군요. 호국영령을 모시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정도 고생도 감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나약하게만 느껴졌던 겁니다. 매일 매일이 반성의 연속이었죠. 전역한 지금은 오히려 발굴병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사진: 정교한 손길로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이처럼 오늘도 호국영령을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이 있기에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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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SBS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나도펀딩'이라는 펀딩 사이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도 6.25 전쟁 발발 제66주기를 맞아, 뭔가 의미 있는 펀딩을 한 번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SBS와 공조하여 의미 있는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의 목적은 바로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이 쓸 물품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요즘 날씨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많이들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고생이 많을 이들은 바로 군인이란 직업을 가진 이들이겠지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불철주야 전/후방에서 고생하는 우리 국군 장병들... 이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요. 


특히나 제가 소속되어 있던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을 생각하면 참 안쓰럽습니다. 우리들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더위를 잠시나마 식히고 있는 그 시간에도, 우리 국유단 발굴병들은 여전히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이름 모를 산야를 오르고 또 오르고 있습니다. 


저도 발굴병으로서 군 복무를 하며, 두 번의 여름을 지내봤기에 그 열악한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더운 이 날씨에, 무거운 발굴장비와 물자를 짊어지고서 높은 산을 오르는 건 정말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유해가 식별되기라도 하면,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정밀발굴을 실시해야 합니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아래, 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유해를 노출하는 과정도 결코 녹록지는 않습니다. 달려드는 산벌레 떼는 말할 것도 없고요. 여름에 발굴할 때는, 지쳐서 말할 힘도 없더군요.


그래서 현장에서 고생하는 우리 후임 발굴병들을 위해, 작게나마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이번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은 7월 31일까지 진행되며, 목표액은 200만원입니다. 모금된 금액은 더위에 고생하는 국유단 소속 발굴병들을 위한 물품(아이스패드 및 물수건 등) 후원 비용 및 발굴된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례비용으로 쓰일 것입니다.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소액이라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액마저도 부담스럽다면, 주위 지인들에게 알려주기만이라도 해주십시오. 애국은 꼭 총들고 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야만 애국은 아닙니다.


펀딩 프로젝트 링크: http://nadofunding.sbs.co.kr/project/51/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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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가 제작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 영상입니다. 오늘 아침에 서 교수 페이스북 계정에 공개가 되었더군요.


나레이션은 걸그룹 '걸스데이'의 혜리가 맡았네요. 군 복무 시절, <진짜 사나이>를 보면서 정말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국유단이라는 인연으로 다시 이렇게 만나는군요. (실제로 인연이 없다는 게 한스럽지만...)


제가 한창 군 복무를 하던 2015년을 기점으로 우리 단에 대한 홍보가 열심히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MBC <진짜 사나이 2> 특집 프로그램부터, 각종 다큐멘터리, 언론 보도 등등... 지금 제가 활동하고 있는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도 그 산물이라고 할 수 있죠.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워낙 그 의미가 큰 국가적 보훈사업이기 때문에, 현충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만 반짝 홍보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됩니다. 의미도 의미거니와 시간이 흐를수록 남아있는 유가족들도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도 버거워지기 때문에 '시간싸움'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꾸준한 홍보 활동으로 유가족들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홍보 활동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국유단 출신이거나, 국유단에서 군 복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군 입대를 앞둔 이들에게는 한 번 하는 군 생활인데, 좀 더 보람차고 의미있는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는 방편도 될 것이고, 이미 국유단에서 군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의미 있는 군 생활을 하고 있구나"하면서 힘든 군 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랬고요.


여하간 전역하고 나서 우리 부대 이야기가 이렇게 화제가 될 때마다, 내가 수행한 임무의 가치가 남다르다는 생각에 가끔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국민적 관심도가 증가함에 따라, 국유단도 단 차원에서 좀 더 스스로 되돌아보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S. 영상에 저도 잠깐 나옵니다. 살짝 나와서 못 알아보실 수도 있겠네요.


PS 2. 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공식 블로그에서 '영상 소감 이벤트'도 진행 중입니다. 한 번 참여해보세요~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29571686)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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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2부] 28명의 호국영웅 메신저, 마침내 첫 걸음을 내딛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1부에서는 발대식에 앞서 우리 서포터즈들이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견학했던 시간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오늘 2부에서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공식적인 첫 걸음을 내딛는 발대식 현장을 생중계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발대식이 열리는 생생한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내딛은 첫 걸음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현충원 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으로 복귀한 서포터즈들은 곧바로 국유단 본청 앞에 모여 발대식 준비를 마쳤습니다. 발대식은 이학기 단장(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요, 먼저 서포터즈로서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선서식’이 있었습니다. 선서 대표로 예비역 중사 출신의 신대식 씨(27,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성우과)가 활약해주었는데요, 성우과 재학생인만큼 멋진 목소리로 28인 서포터즈의 결의를 알렸습니다.


(사진: 발대식을 통해 첫 걸음을 내디딘 국유단 제1기 대학생 서포터즈)


선서 낭독이 끝난 다음에는 ‘서포터즈 조끼 및 국유단 뱃지’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을 비롯한 발굴과, 감식과, 대외협력과, 계획운영과 등 국유단의 조직을 대표하는 과장급 간부들이 직접 서포터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끼를 입혀주고, 국유단 뱃지를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사진: 국유단 조끼와 뱃지를 수여받는 서포터즈들)


이날 서포터즈들이 입은 조끼는 실제 발굴현장에서 발굴병들이 착용하는 국유단의 상징적인 유니폼이고, 단 뱃지 역시 국유단 소속 장병들에게만 지급되는 뱃지라고 합니다. 서포터즈들이 이를 수여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다 같은 국유단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이로써 국유단 서포터즈 1기가 마침내 첫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훈훈했던 간담회 현장


발대식을 마친 서포터즈들은 2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이학기 단장과의 간담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은 간담회에 앞서, 짧게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포터즈가 된 28명 모두 독특한 이력과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유일하게 국유단에서 발굴병으로 전역한 저를 비롯해, 예비역 육군 중사, 학군단(ROTC) 소속 장교후보생, 발굴병 지원 희망자 등 그 면면이 다채로웠습니다. 특히 28명 중 여성이 15명이고 남성이 13명으로 여성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각기 개성 있는 서포터즈들의 면면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이학기 단장은 “이 자리에는 예비역 육군 병장이나 중사도 있고, 또 앞으로 장교가 되어 군을 이끌어 갈 분들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해서 다양한 꿈을 펼칠 대학생들이 다 모인 것 같다”며 국유단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원해준 서포터즈들에게 감사의 말을 표했습니다.


(사진: 발대식 플래카드)


이어 이학기 단장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의를 설명하였는데요, “전 세계에 자국의 전쟁을 수행하다 산화한 전사자들을 발굴하는 부대가 단 두 곳밖에 없는데, 하나가 미국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다”라며 “전 세계 각국의 고위 인사들이 우리 단을 방문할 때마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존재를 알고 큰 감동을 받는데, 그때마다 뿌듯하다”고 밝혔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ormnd/17218590035


또한 현재 유해발굴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요, “국유단 소속 발굴 팀이 총 8개 팀이 있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을 8개 지역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며 “지금이야 그래도 덜 힘들지만, 6~7월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발굴병들이 매일 산에 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웬만한 사명감과 책임감 없이는 임무 수행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서포터즈들은 평소 궁금했던 사항들에 대해 가감 없이 질문을 던졌는데요, 특히 한 서포터즈가 “단장님이 목에 걸고 계신 군번줄(인식표)이 인상 깊다. 항상 인식표를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좌중에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이에 이학기 단장은 “물론이다. 육사를 졸업한 이후 지금껏 퇴근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인식표를 풀어본 적이 없다”고 밝히며, “마침 인식표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러분께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 점이 있다”고 하여 좌중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진: MBC <진짜 사나이 2 – 유해발굴감식단> 편에서 인식표를 발굴하는 장면)

출처: MBC <진짜 사나이 2>


이학기 단장은 “유해가 나왔을 때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함께 나온 유품이다. 그리고 유품 중에서도 유해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식표가 확실한 증거인데, 이 인식표를 발굴하기가 정말 힘들다”며 “인식표가 없다면 유가족 DNA 시료라도 있어야 발굴한 유해의 DNA를 대조하여 유가족을 찾을 텐데, 남아계신 유가족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아 유해발굴사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운 감정을 토로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널리 알려져야 유가족 DNA 시료 채취가 활성화되고, 그래야 많은 분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서포터즈 활동에 임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간담회가 끝났습니다.


대학생 서포터즈, 어떤 활동을 하나요


이어 앞으로 서포터즈들이 수행해야 할 활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요, 국유단 서포터즈들은 앞으로 국유단과 국민 사이의 다리가 되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쉽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방편으로 매월 1건 이상의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해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게재하게 됩니다. 또한 28명을 지역별로 7개 조로 나누어 연간 2회 이상의 오프라인 팀별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전국 각지를 다니며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사진: 간담회 및 오리엔테이션이 열린 2층 회의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자원들이라는 것을 방증하듯, 오리엔테이션 내내 쉴 새 없는 질문이 쏟아져, 2층 회의실은 금세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습니다. 이에 이원웅 소령(공보장교·육군 소령)은 “여러분이 처음이라 누구보다 열의를 가지고 임하려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오히려 처음에 너무 열정을 불태우면 나중에 지칠 수 있다. 열심히 활동하되 임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항상 초심을 잃지 말아 달라”고 특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에는, 서포터즈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상견례’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 만나 어색할 법도 했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마냥 서로 명함도 교환하고, 조별로 단체사진도 촬영하는 등 금세 친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던 서포터즈들의 이야기


그럼 과연 이번에 출범한 서포터즈들은 어떤 지원동기를 가지고 서포터즈에 지원하였고, 또 어떤 각오로 활동에 임하게 될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앞서 선서 대표로도 활약해주었던 신대식 씨는 예비역 중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요, 실제로 군 복무 중에 국유단의 홍보 포스터를 보고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 시에 군인은 총을 들고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지만, 군 복무 당시에는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총을 들 일이 없었다”며 “그래서인지 전역하고서라도 나라를 위해 더 봉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태극기를 바라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 동기를 밝혔습니다.


(사진: 공보장교와 함께 찍은 1조 단체사진)


신드보라 씨(23, 창원대 국제관계학과)는 서포터즈를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진짜 사나이> 유해발굴감식단 편을 보고 알게 되었다”며 “주변에 국유단을 널리 알려, 국유단이 한 분의 유해라도 더 찾을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 특히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할 것이다”라는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허도휘 씨(23, 동국대 정보통신공학과)는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난 날이 되면, SNS에 관련 글을 올리거나 프로필 사진을 관련 사진으로 바꾸는 등 주위에 알리기 위해 작은 노력들을 해왔다”며 “국유단 서포터즈를 통해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해준 호국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서포터즈를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동기를 밝혔습니다.


앞으로의 활동 포부를 묻는 질문에는 “단 한 명의 유가족이라도 더 DNA 시료 채취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하겠다”며 “현재 여러 지역축제나 학교축제들이 열리는 계절이기 때문에, 젊은 층을 겨냥한 학교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을 계획 중이다”라고 하여 벌써부터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나타냈습니다.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


이처럼 뜨거운 애국심과 열정을 갖고 출범한 서포터즈들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도 남다른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부여받아, 지난 1년 9개월 동안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전역한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라는 긴 수식어는 제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사진: 16년 전반기 발굴작전 출동을 앞두고 후임들과 촬영한 단체사진)


그래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누구보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와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는 발굴병 출신으로서, 네티즌 여러분께 실제 발굴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나 유해발굴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들을 재밌고 생생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8개월 동안, 저를 비롯한 28인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들의 활동을 열심히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 2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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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1부] 서포터즈,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가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5월 13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본청 앞에서 열린 발대식을 통해, 드디어 28명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하였는데요, 오늘은 그날의 뜨거웠던 현장 분위기를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저와 함께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발굴지로 가는 길

 

아직은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오던 5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아침부터 젊은 대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바로 치열한 심사를 뚫고 최종 선발된 1기 국유단 서포터즈들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발대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출범을 알릴 서포터즈들은 발대식에 앞서,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충원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도착한 곳은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가리산. 바로 오늘 우리가 올라가야 할 발굴현장으로 이어지는 능선이었습니다. 이곳 가리산 일대는 6·25 전쟁 당시 매우 치열했던 '벙커고지 전투'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벙커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가 있었던 1951년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미 제2사단 38연대가 홍천 북방의 벙커고지(778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12군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입니다. 당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던 미 제2사단은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하루에 제한되어 있던 탄약소모량까지 넘겨, 하루 만에 3만 발의 엄청난 포탄을 쏟아붓는 등, 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끝내 홍천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였으며, 아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사 출처: http://www.korea-dmz.com/home/page/sub02/03/0054600547309805.asp)


 

하차지점에서부터 실제 유해발굴이 이루어지는 현장까지는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요,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무수히 반복되는 등산로는 금세 서포터즈들의 등을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들었습니다. 발굴병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산 타는 게 일상이었던 저조차도 오랜만에 타는 산이었던지라 힘들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중간 중간에 걸려있던 현수막의 문구들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오르는 이 길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어 힘들다는 생각을 잊게 했습니다.



숙연했던 발굴현장 견학

 

마침내 도착한 무명 755고지 발굴현장. 서포터즈들은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곧바로 6·25 전사자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는 현장을 직접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출입금지' 라인이 둘러쳐진 트렌치(유해를 노출하기 위해 유해 주위로 넓게 판 굴) 안에는 이미 한 분의 유해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는데요, 서포터즈들은 먼저 헌화와 거수경례, 묵념으로 고인에 대한 예를 표한 뒤에, 이 지역의 발굴을 책임지는 안순찬 발굴팀장(육군 원사·발굴 1팀장)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순찬 팀장은 지표 위에 드러난 유해와 함께 나온 유품들에 대해 설명하며, 전문발굴병들이 어떻게 유해를 식별하고, 수습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종 선발된 서포터즈들이었던만큼, 누구보다 관심도 많고 질문들도 날카로웠는데요, 이날 서포터즈들이 던진 질문과 이에 대한 발굴팀장의 답을 정리해봤습니다.



Q. 아군인지 적군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A. 유해가 발견되었을 때, 함께 나온 유품이 신원확인의 결정적 단서가 된다. 현장에서 나온 유품을 통해 전문발굴병이 1차 피아판단을 하지만, 더 정확한 감식을 위해 중앙감식소로 모셔서 최종 판단을 하게 된다.

 

Q. 유해발굴을 하는 지역은 어떻게 선정되는가?


A. 기본적으로 '전사(戰史)'를 공부함으로써, 전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있었던 지역들을 분류해 선정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발굴작전을 하기 전, 선행 탐사를 통해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들을 식별하고 발굴에 들어가게 된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다해 수행하는 유해발굴작전

 

이날 현장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수습했던 송재홍 상병(발굴1팀 분대장)은 "현장에서 유해가 나오면, 전적으로 우리들이 맡아서 수습하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수습에 임할 수밖에 없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상태에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수습하려 노력한다"며 현장에서 유해발굴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남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 역시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해의 DNA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을 착용하고서 조심스레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에, 매우 큰 감명을 받은 듯 했습니다. 단 한 분의 유해라도, 이렇듯 항상 정성을 다해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참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이어 안순찬 팀장은 유해를 발굴할 때 쓰이는 장비들과 현장에서 나온 유품들을 소개했는데요, 실제 유해 탐사 시에 사용되는 '금속탐지기'의 운용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신기함에 눈에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하지만 신기함도 장시, 서포터즈들은 다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전투화 밑창, 탄피, 탄창, 유리병, 대검 등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품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60여년 전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신필순 발굴과장(육군 중령)은 현장에서 나온 수류탄을 보여주며, "이 수류탄은 안전핀도 그대로 있는 상태라, 지금도 폭발 위험이 있다. 이처럼 발굴병들은 항상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지만,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오늘도 산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禮를 다해 모셔지는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

 

이어 서포터즈들은 유해의 입관 과정을 지켜보았는데요, 입관 과정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수습한 유해들을 한지에 조심스레 약첩(한지로 유해를 감싸는 것)한 뒤 예단(고인의 마지막길에 보내는 예물)과 함께 입관하고, 다시 관 뚜껑에 '6·25戰死者之柩(6·25전사자지구)'라고 쓰여진 명정(관에 덮는 천)을 덮은 뒤, 마지막에 태극기로 관포함으로써 입관 의식을 마치게 됩니다.



유해가 모셔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서포터즈들은 현장에서 발굴되는 한 분 한 분의 유해가 최선의 예를 다해 모셔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입관을 하는 발굴병들의 손길을 지켜보며, 서포터즈들 역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경건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입관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자, 발굴부대인 11사단 장병들과, 국유단 전문발굴병 및 서포터즈 등 현장에 위치한 모든 인원이 태극기 앞에 도열했습니다. 바로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내드리기 위한 '약식제례'와 '유해봉송' 절차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인원들은 고인께 잔을 올린 뒤, 거수경례와 묵념으로 예를 표했습니다. 이어 유해를 봉송하면서 모든 의식이 마무리되었는데요, 이때 유해가 모셔진 관을 들고 봉송하는 역할은, 유해를 최초 발견한 발굴부대 병사가 맡아 수행하게 됩니다. 유해가 지나가는 길에서, 현장에 있던 인원들은 2열로 도열한 뒤, 다시 한 번 거수경례로 유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던 하산길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산을 내려가는 서포터즈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무거운 듯 했는데요, 교과서로만 접하던 전쟁의 흔적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역사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계시는 호국영령이 13만여 위나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서포터즈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역할이 막중함을 깨닫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유해발굴현장 견학을 통해 다시 한 번 활동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은 서포터즈들! 이제 공식적인 발대식을 통해 진정한 서포터즈로 거듭나는 일만 남았는데요, 호국영웅 메신저들의 힘찬 출발을 알리는 현장 소식을 2부에서 생생하게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2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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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번째 호국영웅,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가족의 품

- 故 양만승 경위 유해송환 행사 현장에 다녀오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오늘은 서포터즈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행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귀환 행사인데요, 처음에는 덤덤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했던 저도,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어느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니, 여러분도 어떤 행사인지 많이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겠습니다.


호국영웅 귀환행사가 열리다


지난 5월 18일, 경기도 수원의 어느 식당 앞 골목.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던 골목이 갑자기 외부인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웅의 유해가 유가족에게 인도되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호국영웅은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그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의 신분으로 적과 싸우다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는데요, 그의 생애를 잠시 알아보고 갈까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무궁화꽃 한 송이


故 양만승 경위는 1927년 4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양 경위가 24세 때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고, 적화통일의 위기에 처하자, 경찰 역시 ‘軍과 더불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신념 아래, 적극적으로 국토 보위에 나서게 되었는데요,


1950년 7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벌어진 ‘호남지역 전투’에 양 경위 역시 해남경찰서 소속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호남지역 전투는 전라북도 일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6사단에 맞서, 우리 국군 5사단과 7사단 그리고 경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벌인 방어 전투였습니다. 이때 해남경찰서 소속 1개 소대 병력들은 영광 삼학리 지역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방어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7월 23일, 치열한 접전 끝에 양 경위는 적군의 총탄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렇게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발굴되기까지 6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113번째 신원확인의 주인공


유가족 송환 행사는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은 행사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유가족인 외조카 김점덕 씨의 손을 맞잡으며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이에 김점덕 씨는 “감사합니다. 국방부에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어 김종성 감식과장에 의해 故 양만승 경위를 발굴하게 된 과정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습니다. 


1950년 7월 23일, 영광 삼학리에서 적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양 경위는 함께 전사한 동료 37명과 함께 집단으로 임시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7년의 어느 날. 영광 삼학리에서 전사한 경찰관들의 유해가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은 유해발굴감식단은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이 지역 일대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38위의 호국영령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독수리 문양 뱃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 뱃지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들이 소지하고 있던 뱃지라고 하는데요,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해남경찰서의 경찰사(史)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였고, 그 결과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현 발굴지점에서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것으로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전사한 경찰들의 유가족을 찾아 시료 채취를 한 뒤, DNA 대조로 38위 중 9위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29위의 호국영령은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용사’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이 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로 양 경위도 있었습니다.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다시 유가족을 수소문해 찾기 시작했고, 추가적으로 9위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 경위 역시 이 과정에서 유가족을 찾아 신원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요, 이로써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이루어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선진국의 척도


김종성 감식과장의 브리핑이 끝난 뒤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유가족 위로패’와 양 경위를 발굴할 당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를 담은 ‘호국의 얼’ 함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이학기 단장은 국방부 장관을 대신하여 유가족에게 ‘전사자 신원확인 통보서’를 전달함으로써 행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경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김태수 수원중부경찰서장은 “6·25 전쟁 당시 많은 경찰관들이 전사했는데, 경기도에서만 6,700여명이 전사했다. 아직 못 찾은 분들도 많은데, 나라를 지킨 호국영웅들에 대한 보답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행사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요, “아직 못 찾은 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유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분들을 찾아서 전사자 신원확인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찰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군을 대표하여 참석한 51사단 168연대장 박일권 대령 역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故 양만승 경위의 유해를 발굴해주어서 다행스럽다”며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국가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얼마나 잘 대우해주는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을 찾아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남매의 상봉


故 양만승 경위에게는 유일한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 결국 오빠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15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양 경위의 여동생은 임종 직전, 자식들에게 “나중에라도 꼭 너희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마침내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 외조카 김점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그녀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외삼촌을 찾아 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다”고 연신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양 경위의 매제인 김용길 씨 역시 “아내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반갑겠는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오빠였으니까...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무 아쉽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 이제는 하늘에서 남매가 상봉하여,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남매의 정(情)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았습니다.


15년 만에 받든 어머니의 유언


행사가 끝난 뒤, 또 다른 유가족인 김철현 씨(외조카)에게 오늘 행사를 지켜본 소회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며 “갑자기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가족 모두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또 그는 “외삼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께서 누누이 외삼촌에 대해 말씀하셨다”며 “어머니께서는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에게 꼭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회고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유가족 DNA 시료 채취, 그리던 가족을 찾는 길


이처럼 유해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것이 곧 국가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들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책무라고도 할 수 있으며, 6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유가족의 한(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발굴된 유해가 모두 신원을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번에 귀환한 故 양만승 경위 역시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되었는데요, 유해발굴감식단이 15년 동안 발굴한 국군 전사자는 총 9,100여위. 그중 단 1.2%의 유해만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신원확인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 유가족의 DNA를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유해발굴 뿐만 아니라, 전사자를 찾지 못한 유가족의 DNA 시료 채취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에, 유가족 DNA 시료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또 유가족 DNA 시료 채취라는 것에 대해 생소한 분들은 복잡하고 무서운 병원검사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가족 DNA 시료 채취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면봉으로 입 안의 타액(침)을 적시는 것만으로, DNA 시료가 충분히 확보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단 1분의 투자가 여전히 60년 동안 차디찬 땅 속에서, 혹은 ‘무명용사’라는 이름 아래 현충원에 잠들어있는 호국영웅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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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18173026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한 후, 처음으로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글!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첫 번째 글이, 내가 쓴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특성상, 내가 보낸 원본 글이 100% 다 실리지 못하고, 반토막 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잘 써서 다 올리고 싶었지만, 용량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담당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블로그 포스팅이란 것 자체가 너무 길면 또 지루해질 수도 있어서... 포인트만 담아 글을 짧게 쓰는 것도 중요한 글쓰기 요령인데, 나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볼까나.


PS. 개인 블로그이니만큼 나중에 원본 글도 따로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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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차 서류심사 결과가 나왔다.

나도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들어가 있다. 다음 주 면접이라고 하는데... 그럼 나는 전역한 지 2주 만에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겠군아... ㅋ


이 소식을 다른 전역자들에게 말했더니,


"ㅋㅋ 형은 진짜 전역 안 한 것 같아. 전역하고 이렇게 군대랑 못 떨어지는 사람 첨 봄"


이라고 카톡 답장이 돌아왔다.


하기사 전역한 지 이틀 만에, 발굴복 입고 관악산 등산을 하질 않나, 전역하고 9일 만에 간부들을 다시 만나지를 않나... 또 집도 자대가 있던 현충원 바로 옆 동네라, 군대와의 인연은 끈질긴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뭐 흔히들 전역하고 나면 내가 복무했던 부대 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나는 진심으로 군 시절이 그립기 때문이다.


아무튼 전역한 지 2주 밖에 안 된 국유단 출신인데다가, 간부들하고도 친하기 때문에, 다른 대외활동과는 달리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지원하긴 했다. 그래도 합격자 명단을 보니 경쟁률이 꽤 높은 것 같다. 다른 지원자들보다 '국유단 출신'이라는 게 가장 큰 메리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오히려 이 메리트를 잘 살려서, 남들보다 면접을 더 잘보려 노력해야겠다.


PS. 사실 부대랑 집이 가까워 놀러가려면 매일 놀러갈 수도 있지만, 딱히 명분이 없어 갈 생각은 못 했다. 다행히 면접이라는 명분이 생겼으니, 다음 주에는 오래간만에 간부님들께 인사도 드리고 후임들 얼굴도 보고 와야겠당. 면접보단 애들 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네~ 잇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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