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독립운동가 후손 분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이분들은 한결 같이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살기 좋아졌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임시정부에서 비서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후손은 손목에 '이니시계'를 차고 다녔고, 만주 국민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진성 선생의 후손은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드디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만 들어도 '문재인 대통령이 참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방부에서도 광복군을 뿌리로 하는 국군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극우세력들은 이조차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다.


당장 국방부에서 만든 이 영상만 봐도 그렇다. 광복군을 우리의 뿌리로 가르치는 영상을 두고서 '주적을 북한이 아닌 일본으로 교묘하게 바뀌치기함으로써 적화통일로 이끄려는 문재인 정권의 술수'라는 기가 막힌 발언도 눈에 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더 이상 안 나오게 하겠다는, 그리고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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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 블로그를 자주 구독하는 분들이라면, 군 시절 전우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올라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저는 원체 대인관계가 넓지 않은 터라,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 친구들은 매우 한정적인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군 시절 만났던 전우들과는 이상하리만치 끈끈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서, 초중고대학 학창시절을 통틀어 만나는 친구들 한 명 없어도 이 친구들과는 굉장히 자주 만납니다.


그리고 이 친구들과 엊그제 또 뭉쳤습니다. 경주 여행 때 자신의 자취방을 내주었던 친구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보겠다며 주말에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평생 술벗인 JH와 이 친구 그리고 군 시절 제가 유독 아꼈던 후임 한 명이 뭉쳤습니다. 이 후임 친구는 전역한 뒤로 처음 만났습니다. 중간 중간에 계속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빼다가 이제서야 나타났네요. 처음엔 좀 서운했는데 이렇게라도 잊지 않고 나와주니 서운한 마음도 스르륵 녹습니다.



1차는 종각역 근처에 위치한 '백세주마을'이란 전통술집에서 시작했습니다. 국순당 직영 브랜드인 듯 합니다. 백세주가 기본 술이고 다양한 전통주가 있습니다. 


가격이 좀 세서 비싼 술은 먹지 못했습니다만, 분위기도 좋고 가볍게 한 잔 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1차에서 6만 원 정도가 나왔는데, 제가 맏형이기도 하고 취직해서 그나마 월급이 들어오는 입장이라 기분 좋게 한 턱 냈습니다.



2차는 '오사카 부루스'라는 이름의 이자카야로 갔습니다. 오늘따라 '사케'가 먹고 싶었거든요. 


분위기가 다소 시끄럽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3,900원부터 시작하는 저렴한 안주가 무척 흡족스러웠습니다. 사진에 나온 안주들은 '와사비 문어회', '칠리새우', '가라아게', '닭똥집튀김'입니다. 저렴한 만큼, 퀄리티 역시 별로였지만 이 가격에 저렇게 먹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요.



마지막 3차는 가볍게 생맥주로 달렸습니다.


호객하는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들어왔는데, 다트 던지기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면 서비스를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도전해봤습니다만... 술에 취하니 영...  냥 막 던지다가 끝났습니다. 


드라마 <주몽>을 보면 주몽이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도 활로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는데, 저는 아직 무공의 경지가 바닥을 기는 모양입니다.. 껄껄...


이날 술자리는 막차 시간 직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부어라 마셔라 놀았을텐데, 다들 저녁 늦게 만나는 바람에 오래 놀지 못한 게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겹도록 자주 보는 얼굴들인데, 매번 만날 때마다 반갑고 하는 얘기 또 하고 듣던 얘기 또 들어도 질리지 않고, 헤어질 때면 늘 아쉽고... 참 신기합니다. 저희도 이젠 만날 때마다 농담처럼 "먼저 죽으면 남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관이나 들어주자"면서 껄껄 웃곤 합니다. 이래서 남자들이 만나면 군대 얘기 한다고 하는 걸까요? 그만큼 동고동락을 함께 하며 뜨거운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청춘의 흔적을 마주하니 반가움을 느끼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꽃보다 국유단' 모임이 언제까지고 서로의 삶에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며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우정 이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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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7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2018년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돌이켜보면 17년도 하반기는 학교 다니랴 동시에 학생운동하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관두고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맘고생이 심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유독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제겐 군 시절 선·후임들이 그렇습니다. 2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힘들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던 사이니 오만 정이 다 들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지요.


이번에 어쩌다보니 그 친구들과 뜻이 맞아서 함께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전역병 캠핑'. 제겐 선임이 되는 친구 세 명(전역한 지금은 제게 동생들입니다만 ㅎㅎ)과 저, 그리고 후임 한 명까지 총 5명이 함께 다녀왔더랬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간 곳은 상암에 있는 난지캠핑장이었습니다. 우선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 월드컵경기장점에 들러 밤새 마실 술과 바베큐파티용 삼겹살, 안주 등을 잔뜩 사갔습니다.


저희가 빌린 텐트는 10인용 몽골텐트였습니다. 원래 함께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인원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공간은 넉넉해서 좋았으나... 이날 바람이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중앙에 장작 난로가 있긴 한데, 문제는 저희가 장작을 때워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보다 오히려 연기를 더 많이 들이마신 것 같습니다. 불도 자꾸 꺼지고... 캠핑장에서 장작을 파는데 한 단에 1만원이나 하는 통에 장작값이 너무 비싸서 양껏 때우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고생하면서 마시는 술이 달다고, 어찌어찌 간신히 불씨를 붙여놓고서 저녁부터 다같이 바베큐파티를 즐겼습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온갖 술을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더군요. 


특히 이날을 위해 집에서 아버지가 드시던 각종 술들(죽엽청주, 북대양, 스카치 위스키)에 마트에서 사간 벌떡주, 가시오가피주들을 챙겨갔는데 아주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술을 꿀떡꿀떡 잘 마시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하더군요.


멀리 부산에서 온 친구는 부산의 지역소주인 '시원' 두 병을 준비해왔고, 오늘 캠핑을 기획했던 친구는 사돈어른이 담근 복분자주를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홈플러스에서 산 공부가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호화잔치였습니다.



난로 앞에서 다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군 시절을 돌이켜보려니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니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모르겠더군요.


특히 이날 국유단 시절 썼던 모자도 챙겨오고 군 시절 사진과 영상을 편집해서 미니 빔으로 즉석 상영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특성상 워낙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이렇듯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상당히 많은 게 장점입니다. 거기에 우리 부대 전용 OST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까지 입혀놓으니 괜히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 왈칵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즉석에서 다른 전역자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우리끼리 점호와 약식제례(유해를 수습한 뒤에 지내는 제사)도 오랜만에 재현해보고 잠깐이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시다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들 숙취 탓에 비몽사몽... 당산역까지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헤어졌습니다. 다들 숙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통에 서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쉽습니다. 저도 집에 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네요.


아무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갔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여독이 많이 남는 캠핑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라고 지금보다 안 힘들었겠냐마는(그래도 군대인데!!!) 정말 지나가면 다 그리운 추억이 되나봅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시절을 함께 헤쳐나왔기에, 유독 군 시절 선후임들이 반갑고 친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국유단 전역자 모임을 상설화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까지 나왔는데요, 정말 실현됐으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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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위협받는 국가유공자들의 삶, 국가무한책임은 어디로?



링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49&aid=0000132522&sid1=001


2007년 창설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은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부대다.


국유단은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는 목적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국가무한책임'을 완수하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은 국가가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백 번 옳은 말이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꽃다운 청춘을 불살라가며 희생한 모든 국가유공가자들은 그에 걸맞는 대우와 보상을 받아야만 한다. 여전히 이름 모를 산야에 묻힌 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일을 영구 지속사업으로 국가가 주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국가무한책임의 범주에는 지금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생존 국가유공자들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우리나라에는 '국가보훈처'라는 기구가 있어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모든 국가유공자들에게 그에 걸맞는 대우와 보상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제1연평해전에 참전해 우리 해군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댓가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잃은 한 참전용사가 편의점에서 콜라를 훔치다 적발됐다는 사연은 보훈처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한다.


물론 보훈처에서도 국가유공자를 보살피기 위해 연금을 지급하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살 곳이 없어 고시원을 전전하거나 당장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해 폐지를 줍는 등 생계에 위협을 받는 국가유공자들의 이야기가 매년 들려오고 있으니, 과연 이들을 위한 보훈처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인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국가유공자를 위한 제도가 형식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보훈처가 미처 살피지 못한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고위공직자 중 '적폐청산' 1호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전격 경질하고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해 국가보훈처의 위상을 '장관급'으로 격상하겠다는 등 보훈사업에 적극적인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이제 그 의지에 걸맞는 실천이 필요할 때다.


2017년 6월 24일


역사독서모임 독사신론(讀史新論)

(http://facebook.com/suhistory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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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흥미로운 소식입니다.


조선시대 권법에 관한 논문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군사> 101호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수원 무예24기시범단의 최형국 박사님께서 쓰신 논문입니다. 



(사진 출처: muye24ki.com)


그렇게 긴 분량의 논문도 아니고, 문화사적 관점에서 쓴 논문이라 읽기 어렵지 않습니다. 무예를 수련하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조선시대 군사들은 맨손무예를 어떻게 익혔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동작의 고증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보고 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남아있는 사료들을 통해 학술적으로는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합니다. 조선군이 병영에서 어떻게 권법을 익혔고, 권법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면 논문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만, 아래 논문 PDF 파일을 따로 첨부해뒀습니다. 편하게 다운받아서 읽어보시면 됩니다.



조선후기 권법의 군사무예 정착에 대한 문화사적 고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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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CGV용산에 가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왔습니다.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끌어낸 'X-ray 첩보작전'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정재, 이범수와 같은 국내 톱배우는 물론 헐리우드 톱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 역할을 맡아,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죠.



(사진: 영화 <인천상륙작전> 공식 포스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개봉 당일부터 보려고 벼르던 영화였는데, 이런 저런 일로 관람을 미루다가 비로소 오늘에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영화를 본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의 평이 혹평에 가까울 정도라서, 보기도 전에 기대보다는 걱정이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작품이더군요. 요근래 본 영화 중에서 그래도 재밌게 본 영화였습니다. 2시간 좀 안 되는 러닝타임 동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봤어요. 딱히 반전이랄 게 없는 스토리 구조 탓에 약간 밋밋하게 느껴진 점 빼고는 군데군데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실화라는 점 때문에 더욱 인상 깊었던 영화입니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었습니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다양한 배우들의 활약도 흥미로웠는데요, 특히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리암 니슨의 연기는... 중간 중간 잠깐씩 등장하는 데도 강렬하더군요. 몇 마디 툭툭 내던지는데, 대사마다 주옥 같은 명언이었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 나는데, '늙고 젊은 것은 나이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이상(신념)을 버렸느냐 버리지 않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라는 뉘앙스의 대사가 정말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모두 맥아더가 실제로 했던 말들인 듯 합니다.



(사진: 영화 속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리암 니슨 - 출처: 네이버 영화)


맥아더와 소년병의 대화


영화를 보면서 몇 번 울컥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맥아더 장군과 한국 소년병의 대화 장면이었습니다. 전우들이 몰살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철수하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소년병에게, 맥아더 장군이 "왜 철수하지 않느냐"고 묻자, "상관의 철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합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라. 다 들어주겠다"고 하자 "적과 싸울 수 있게 총과 실탄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꽤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실화였기에 더욱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반공영화는 무조건 나쁜가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스토리의 완성도, 배우의 연기를 떠나서 이 영화의 성격이 '반공영화'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를 직접 본 사람으로서 이 영화가 어느 정도 반공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6.25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반공이라는 요소가 안 들어갈 수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6.25 전쟁 자체가 자유민주주의(반공)를 대변하는 대한민국(남한)+유엔군과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소련+중국과의 국제적 이념 대결이었는데 말이죠. 특히나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들의 활약에서 어떻게 반공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만약 반공을 부정한다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이들의 희생과 헌신마저 통째로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반공영화면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에 명시한 나라이며, 6.25 전쟁 당시 공산당의 침략에 의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던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공산주의(라고 쓰고 김씨 봉건왕조체제라고 읽는다)를 표방하는 북한은 호시탐탐 대남도발을 자행하며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사드 배치 문제도 결국 북한이라는 골칫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불거진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공'을 이야기하는 게 왜 나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놈의 공산주의가 반백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을 이토록 괴롭히고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반공영화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정부의 주도 하에 반공영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짓밟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강한 트라우마가 반공영화에 대한 반발심리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각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시각도 '분단'이 낳은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분단이 없었다면, 이런 영화를 두고 반공이니 아니니 하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할 까닭이 없었을테니까요. 여하간 반공영화는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의견에 대해서 존중은 하지만,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진: CGV용산에 전시된 실제 'X-ray 첩보작전' 이야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맥아더가 아니다


두 번째로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판도, 이 영화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인 듯 합니다. 맥아더에 대해 공부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공(功)만큼이나 과(過)도 큰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인천상륙작전으로 너무 부풀려진 인물이라고도 하고, 일각에서는 '오만방자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욕의 화신'이라고까지 악평을 하기도 합니다. 아예 인천상륙작전 자체가 너무 부풀려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하간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영화이기에 보기 불편하다는 논리입니다.


일단 제가 맥아더에 대해 잘 모르는 관계로, 맥아더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둘째 치고라도, 이 영화에서 맥아더를 '우상화' 혹은 '영웅화'하는 느낌은 결코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맥아더는 잠깐 등장할 뿐입니다.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무명용사의 헌신에 감사를


이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이들은 '대한민국 해군 첩보대'와 '켈로부대'입니다. 이 영화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멋지게 인천항에 상륙해 반격을 하는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대한민국 해군 첩보대'와 '켈로부대'였다 - 출처: 네이버 영화)


저는 그래서 이 영화를 더욱 높이 평가합니다. '인천상륙작전=맥아더'라는 공식을 깨고, 이름 없는 영웅들의 헌신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그런 감독의 의도가 분명함에도, 자꾸 이 영화에 대해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영화'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잠깐 등장하는 맥아더의 강렬한 이미지가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리암 니슨이 워낙 연기를 잘한 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의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정도 장면은 당연히 있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앞까지 밀렸던 우리 국군이 전세를 역전하는 기회가 된 역사적인 작전이었고, 그 의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맥아더의 행적이 어떻든 간에, 그 작전 하나만 놓고 보면 성공한 작전이었고, 그렇기에 그나마 대한민국이 이 정도 영토라도 보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무명의 용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무명의 호국영령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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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국유단에서 선/후임 관계로 만난 동생과 29초짜리 단편 영화 하나를 찍었더랬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현충원을 주제로 한 '현충원 29초 영화제'란 공모전을 개최했는데, 바로 여기에 출품할 목적으로 찍었습니다.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한창 촬영을 해야 할 시기에 '장마'가 오는 바람에 다소 난항을 겪긴 했습니다. 그래도 비 그치면 바로 찍을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으로 열심히 기획회의를 하고, 음원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 국가보훈처에 수시로 전화를 하는 등,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더랬습니다. 덕분에 장마가 끝나자마자 곧장 촬영에 돌입할 수 있었고, 마침내 오늘 아침 공식 홈페이지에 영화가 올라갔습니다.


영화 스토리는 저희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출신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돌아오지 못한 유해'에 촛점을 맞춰보았습니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싸우다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호국영령의 유해가 12만 5천여 위라고 하고, 그 전에 일제 강점 당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간 독립투사들의 유해 역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너무나 많죠. 이분들은 아예 통계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현충원에는 '위패봉안관'과 '무후선열제단'이 있는데, 바로 여기가 돌아오지 못한 분들을 위패로나마 모신 곳입니다. 지금도 이곳에만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들을 기다리며 유족들이 남기고 간 편지와 사진들이 눈시울을 붉히곤 합니다. 그래서 이 장소를 현장 답사한 뒤에, 바로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면 좋겠다 싶어서 주제 선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 모시는 것은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고,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은 국민 모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현충원에조차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그분들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그분들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영화를 만들어보았습니다.

■ 영화 보러가기: http://www.29sfilm.com/1606970


[영화 정보]

제목: 현충원은 대한민국의 기다림이다

시놉시스

현충원은 단순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안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의 굵직한 사건 속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많은 이들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며, 누군가의 연인이고, 누군가의 자식이기도 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들을 위해, 또한 우리가 그분들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그들을 기다립니다. 

스탭 (STAFF)

감독: 유지호
촬영: 유지호, 박하은
기획: 김경준, 유지호
자료지원 및 검토: 김경준
배우: 함형민, 박하은, 유지호, 이현수, 설은환

솔직히 이번 영화 제작은, 감독을 맡은 친구가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영상 편집 기술이 없어서, 이 친구가 밤새도록 열심히 만들었죠. 이 친구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왠지 제 스스로 무임승차하는 느낌이라 기획회의에서 나름 열심히 스토리를 짜내고, BGM 제공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등 신경을 좀 썼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의 빚이 남은 것 같아서, 남은 공모기간 동안 이렇게 홍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입니다.

이 영화제는 네티즌들의 추천과 덧글을 많이 받아야 수상에 유리하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희가 수상을 목적으로 영화를 만든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감독을 맡은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작은 상이라도 하나 타면 그 흘린 땀방울에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염치불고하고 여기저기 추천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추천을 하려면 가입을 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좋은 의미로 만든 영화이니만큼 적극적인 추천과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PS. 수상 여부를 떠나,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은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직접 편집까지 배우면서 함께 했더라면 더 의미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현충원의 의미를 널리 알리는 작업에 함께 동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보람찼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며 새로운 인연들과 만났던 것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다들 땡볕에 고생 많았는데, 모두 즐거운 경험으로 기억에 남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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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가 제작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 영상입니다. 오늘 아침에 서 교수 페이스북 계정에 공개가 되었더군요.


나레이션은 걸그룹 '걸스데이'의 혜리가 맡았네요. 군 복무 시절, <진짜 사나이>를 보면서 정말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국유단이라는 인연으로 다시 이렇게 만나는군요. (실제로 인연이 없다는 게 한스럽지만...)


제가 한창 군 복무를 하던 2015년을 기점으로 우리 단에 대한 홍보가 열심히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MBC <진짜 사나이 2> 특집 프로그램부터, 각종 다큐멘터리, 언론 보도 등등... 지금 제가 활동하고 있는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도 그 산물이라고 할 수 있죠.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워낙 그 의미가 큰 국가적 보훈사업이기 때문에, 현충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만 반짝 홍보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됩니다. 의미도 의미거니와 시간이 흐를수록 남아있는 유가족들도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도 버거워지기 때문에 '시간싸움'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꾸준한 홍보 활동으로 유가족들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홍보 활동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국유단 출신이거나, 국유단에서 군 복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군 입대를 앞둔 이들에게는 한 번 하는 군 생활인데, 좀 더 보람차고 의미있는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는 방편도 될 것이고, 이미 국유단에서 군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의미 있는 군 생활을 하고 있구나"하면서 힘든 군 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랬고요.


여하간 전역하고 나서 우리 부대 이야기가 이렇게 화제가 될 때마다, 내가 수행한 임무의 가치가 남다르다는 생각에 가끔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국민적 관심도가 증가함에 따라, 국유단도 단 차원에서 좀 더 스스로 되돌아보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S. 영상에 저도 잠깐 나옵니다. 살짝 나와서 못 알아보실 수도 있겠네요.


PS 2. 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공식 블로그에서 '영상 소감 이벤트'도 진행 중입니다. 한 번 참여해보세요~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29571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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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2부] 28명의 호국영웅 메신저, 마침내 첫 걸음을 내딛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1부에서는 발대식에 앞서 우리 서포터즈들이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견학했던 시간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오늘 2부에서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공식적인 첫 걸음을 내딛는 발대식 현장을 생중계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발대식이 열리는 생생한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내딛은 첫 걸음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현충원 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으로 복귀한 서포터즈들은 곧바로 국유단 본청 앞에 모여 발대식 준비를 마쳤습니다. 발대식은 이학기 단장(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요, 먼저 서포터즈로서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선서식’이 있었습니다. 선서 대표로 예비역 중사 출신의 신대식 씨(27,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성우과)가 활약해주었는데요, 성우과 재학생인만큼 멋진 목소리로 28인 서포터즈의 결의를 알렸습니다.


(사진: 발대식을 통해 첫 걸음을 내디딘 국유단 제1기 대학생 서포터즈)


선서 낭독이 끝난 다음에는 ‘서포터즈 조끼 및 국유단 뱃지’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을 비롯한 발굴과, 감식과, 대외협력과, 계획운영과 등 국유단의 조직을 대표하는 과장급 간부들이 직접 서포터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끼를 입혀주고, 국유단 뱃지를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사진: 국유단 조끼와 뱃지를 수여받는 서포터즈들)


이날 서포터즈들이 입은 조끼는 실제 발굴현장에서 발굴병들이 착용하는 국유단의 상징적인 유니폼이고, 단 뱃지 역시 국유단 소속 장병들에게만 지급되는 뱃지라고 합니다. 서포터즈들이 이를 수여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다 같은 국유단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이로써 국유단 서포터즈 1기가 마침내 첫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훈훈했던 간담회 현장


발대식을 마친 서포터즈들은 2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이학기 단장과의 간담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은 간담회에 앞서, 짧게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포터즈가 된 28명 모두 독특한 이력과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유일하게 국유단에서 발굴병으로 전역한 저를 비롯해, 예비역 육군 중사, 학군단(ROTC) 소속 장교후보생, 발굴병 지원 희망자 등 그 면면이 다채로웠습니다. 특히 28명 중 여성이 15명이고 남성이 13명으로 여성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각기 개성 있는 서포터즈들의 면면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이학기 단장은 “이 자리에는 예비역 육군 병장이나 중사도 있고, 또 앞으로 장교가 되어 군을 이끌어 갈 분들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해서 다양한 꿈을 펼칠 대학생들이 다 모인 것 같다”며 국유단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원해준 서포터즈들에게 감사의 말을 표했습니다.


(사진: 발대식 플래카드)


이어 이학기 단장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의를 설명하였는데요, “전 세계에 자국의 전쟁을 수행하다 산화한 전사자들을 발굴하는 부대가 단 두 곳밖에 없는데, 하나가 미국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다”라며 “전 세계 각국의 고위 인사들이 우리 단을 방문할 때마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존재를 알고 큰 감동을 받는데, 그때마다 뿌듯하다”고 밝혔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ormnd/17218590035


또한 현재 유해발굴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요, “국유단 소속 발굴 팀이 총 8개 팀이 있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을 8개 지역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며 “지금이야 그래도 덜 힘들지만, 6~7월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발굴병들이 매일 산에 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웬만한 사명감과 책임감 없이는 임무 수행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서포터즈들은 평소 궁금했던 사항들에 대해 가감 없이 질문을 던졌는데요, 특히 한 서포터즈가 “단장님이 목에 걸고 계신 군번줄(인식표)이 인상 깊다. 항상 인식표를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좌중에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이에 이학기 단장은 “물론이다. 육사를 졸업한 이후 지금껏 퇴근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인식표를 풀어본 적이 없다”고 밝히며, “마침 인식표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러분께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 점이 있다”고 하여 좌중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진: MBC <진짜 사나이 2 – 유해발굴감식단> 편에서 인식표를 발굴하는 장면)

출처: MBC <진짜 사나이 2>


이학기 단장은 “유해가 나왔을 때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함께 나온 유품이다. 그리고 유품 중에서도 유해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식표가 확실한 증거인데, 이 인식표를 발굴하기가 정말 힘들다”며 “인식표가 없다면 유가족 DNA 시료라도 있어야 발굴한 유해의 DNA를 대조하여 유가족을 찾을 텐데, 남아계신 유가족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아 유해발굴사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운 감정을 토로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널리 알려져야 유가족 DNA 시료 채취가 활성화되고, 그래야 많은 분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서포터즈 활동에 임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간담회가 끝났습니다.


대학생 서포터즈, 어떤 활동을 하나요


이어 앞으로 서포터즈들이 수행해야 할 활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요, 국유단 서포터즈들은 앞으로 국유단과 국민 사이의 다리가 되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쉽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방편으로 매월 1건 이상의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해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게재하게 됩니다. 또한 28명을 지역별로 7개 조로 나누어 연간 2회 이상의 오프라인 팀별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전국 각지를 다니며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사진: 간담회 및 오리엔테이션이 열린 2층 회의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자원들이라는 것을 방증하듯, 오리엔테이션 내내 쉴 새 없는 질문이 쏟아져, 2층 회의실은 금세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습니다. 이에 이원웅 소령(공보장교·육군 소령)은 “여러분이 처음이라 누구보다 열의를 가지고 임하려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오히려 처음에 너무 열정을 불태우면 나중에 지칠 수 있다. 열심히 활동하되 임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항상 초심을 잃지 말아 달라”고 특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에는, 서포터즈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상견례’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 만나 어색할 법도 했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마냥 서로 명함도 교환하고, 조별로 단체사진도 촬영하는 등 금세 친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던 서포터즈들의 이야기


그럼 과연 이번에 출범한 서포터즈들은 어떤 지원동기를 가지고 서포터즈에 지원하였고, 또 어떤 각오로 활동에 임하게 될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앞서 선서 대표로도 활약해주었던 신대식 씨는 예비역 중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요, 실제로 군 복무 중에 국유단의 홍보 포스터를 보고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 시에 군인은 총을 들고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지만, 군 복무 당시에는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총을 들 일이 없었다”며 “그래서인지 전역하고서라도 나라를 위해 더 봉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태극기를 바라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 동기를 밝혔습니다.


(사진: 공보장교와 함께 찍은 1조 단체사진)


신드보라 씨(23, 창원대 국제관계학과)는 서포터즈를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진짜 사나이> 유해발굴감식단 편을 보고 알게 되었다”며 “주변에 국유단을 널리 알려, 국유단이 한 분의 유해라도 더 찾을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 특히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할 것이다”라는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허도휘 씨(23, 동국대 정보통신공학과)는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난 날이 되면, SNS에 관련 글을 올리거나 프로필 사진을 관련 사진으로 바꾸는 등 주위에 알리기 위해 작은 노력들을 해왔다”며 “국유단 서포터즈를 통해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해준 호국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서포터즈를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동기를 밝혔습니다.


앞으로의 활동 포부를 묻는 질문에는 “단 한 명의 유가족이라도 더 DNA 시료 채취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하겠다”며 “현재 여러 지역축제나 학교축제들이 열리는 계절이기 때문에, 젊은 층을 겨냥한 학교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을 계획 중이다”라고 하여 벌써부터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나타냈습니다.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


이처럼 뜨거운 애국심과 열정을 갖고 출범한 서포터즈들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도 남다른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부여받아, 지난 1년 9개월 동안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전역한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라는 긴 수식어는 제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사진: 16년 전반기 발굴작전 출동을 앞두고 후임들과 촬영한 단체사진)


그래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누구보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와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는 발굴병 출신으로서, 네티즌 여러분께 실제 발굴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나 유해발굴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들을 재밌고 생생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8개월 동안, 저를 비롯한 28인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들의 활동을 열심히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 2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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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1부] 서포터즈,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가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5월 13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본청 앞에서 열린 발대식을 통해, 드디어 28명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하였는데요, 오늘은 그날의 뜨거웠던 현장 분위기를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저와 함께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발굴지로 가는 길

 

아직은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오던 5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아침부터 젊은 대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바로 치열한 심사를 뚫고 최종 선발된 1기 국유단 서포터즈들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발대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출범을 알릴 서포터즈들은 발대식에 앞서,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충원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도착한 곳은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가리산. 바로 오늘 우리가 올라가야 할 발굴현장으로 이어지는 능선이었습니다. 이곳 가리산 일대는 6·25 전쟁 당시 매우 치열했던 '벙커고지 전투'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벙커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가 있었던 1951년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미 제2사단 38연대가 홍천 북방의 벙커고지(778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12군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입니다. 당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던 미 제2사단은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하루에 제한되어 있던 탄약소모량까지 넘겨, 하루 만에 3만 발의 엄청난 포탄을 쏟아붓는 등, 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끝내 홍천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였으며, 아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사 출처: http://www.korea-dmz.com/home/page/sub02/03/0054600547309805.asp)


 

하차지점에서부터 실제 유해발굴이 이루어지는 현장까지는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요,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무수히 반복되는 등산로는 금세 서포터즈들의 등을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들었습니다. 발굴병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산 타는 게 일상이었던 저조차도 오랜만에 타는 산이었던지라 힘들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중간 중간에 걸려있던 현수막의 문구들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오르는 이 길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어 힘들다는 생각을 잊게 했습니다.



숙연했던 발굴현장 견학

 

마침내 도착한 무명 755고지 발굴현장. 서포터즈들은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곧바로 6·25 전사자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는 현장을 직접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출입금지' 라인이 둘러쳐진 트렌치(유해를 노출하기 위해 유해 주위로 넓게 판 굴) 안에는 이미 한 분의 유해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는데요, 서포터즈들은 먼저 헌화와 거수경례, 묵념으로 고인에 대한 예를 표한 뒤에, 이 지역의 발굴을 책임지는 안순찬 발굴팀장(육군 원사·발굴 1팀장)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순찬 팀장은 지표 위에 드러난 유해와 함께 나온 유품들에 대해 설명하며, 전문발굴병들이 어떻게 유해를 식별하고, 수습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종 선발된 서포터즈들이었던만큼, 누구보다 관심도 많고 질문들도 날카로웠는데요, 이날 서포터즈들이 던진 질문과 이에 대한 발굴팀장의 답을 정리해봤습니다.



Q. 아군인지 적군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A. 유해가 발견되었을 때, 함께 나온 유품이 신원확인의 결정적 단서가 된다. 현장에서 나온 유품을 통해 전문발굴병이 1차 피아판단을 하지만, 더 정확한 감식을 위해 중앙감식소로 모셔서 최종 판단을 하게 된다.

 

Q. 유해발굴을 하는 지역은 어떻게 선정되는가?


A. 기본적으로 '전사(戰史)'를 공부함으로써, 전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있었던 지역들을 분류해 선정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발굴작전을 하기 전, 선행 탐사를 통해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들을 식별하고 발굴에 들어가게 된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다해 수행하는 유해발굴작전

 

이날 현장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수습했던 송재홍 상병(발굴1팀 분대장)은 "현장에서 유해가 나오면, 전적으로 우리들이 맡아서 수습하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수습에 임할 수밖에 없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상태에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수습하려 노력한다"며 현장에서 유해발굴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남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 역시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해의 DNA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을 착용하고서 조심스레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에, 매우 큰 감명을 받은 듯 했습니다. 단 한 분의 유해라도, 이렇듯 항상 정성을 다해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참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이어 안순찬 팀장은 유해를 발굴할 때 쓰이는 장비들과 현장에서 나온 유품들을 소개했는데요, 실제 유해 탐사 시에 사용되는 '금속탐지기'의 운용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신기함에 눈에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하지만 신기함도 장시, 서포터즈들은 다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전투화 밑창, 탄피, 탄창, 유리병, 대검 등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품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60여년 전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신필순 발굴과장(육군 중령)은 현장에서 나온 수류탄을 보여주며, "이 수류탄은 안전핀도 그대로 있는 상태라, 지금도 폭발 위험이 있다. 이처럼 발굴병들은 항상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지만,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오늘도 산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禮를 다해 모셔지는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

 

이어 서포터즈들은 유해의 입관 과정을 지켜보았는데요, 입관 과정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수습한 유해들을 한지에 조심스레 약첩(한지로 유해를 감싸는 것)한 뒤 예단(고인의 마지막길에 보내는 예물)과 함께 입관하고, 다시 관 뚜껑에 '6·25戰死者之柩(6·25전사자지구)'라고 쓰여진 명정(관에 덮는 천)을 덮은 뒤, 마지막에 태극기로 관포함으로써 입관 의식을 마치게 됩니다.



유해가 모셔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서포터즈들은 현장에서 발굴되는 한 분 한 분의 유해가 최선의 예를 다해 모셔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입관을 하는 발굴병들의 손길을 지켜보며, 서포터즈들 역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경건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입관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자, 발굴부대인 11사단 장병들과, 국유단 전문발굴병 및 서포터즈 등 현장에 위치한 모든 인원이 태극기 앞에 도열했습니다. 바로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내드리기 위한 '약식제례'와 '유해봉송' 절차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인원들은 고인께 잔을 올린 뒤, 거수경례와 묵념으로 예를 표했습니다. 이어 유해를 봉송하면서 모든 의식이 마무리되었는데요, 이때 유해가 모셔진 관을 들고 봉송하는 역할은, 유해를 최초 발견한 발굴부대 병사가 맡아 수행하게 됩니다. 유해가 지나가는 길에서, 현장에 있던 인원들은 2열로 도열한 뒤, 다시 한 번 거수경례로 유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던 하산길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산을 내려가는 서포터즈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무거운 듯 했는데요, 교과서로만 접하던 전쟁의 흔적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역사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계시는 호국영령이 13만여 위나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서포터즈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역할이 막중함을 깨닫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유해발굴현장 견학을 통해 다시 한 번 활동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은 서포터즈들! 이제 공식적인 발대식을 통해 진정한 서포터즈로 거듭나는 일만 남았는데요, 호국영웅 메신저들의 힘찬 출발을 알리는 현장 소식을 2부에서 생생하게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2부에서 계속 -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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