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하늘에서 미친듯이 비를 퍼부어댔다.


퇴근 후 사무실에서 나설 때만 해도 비가 그친 상태였는데, 사무실에서 집까지 이동하는 10분 사이에 비가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바짓단이 다 젖으니까 짜증나서 눈에 보이는 아무 건물로 이동해 잠깐 비를 피했다. '빗줄기가 약해지면 얼른 뛰어가야지' 하고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데... 도무지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집은 코앞인데... 짜증나서 그냥 나왔다. 그러고 한 1분이나 걸었을까. 빗줄기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고 아예 그쳐버렸다. 하늘이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괜히 울컥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왔다. 예년보다 이른 장마라고 하는데, 매년 언제 장마가 오는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질 않아서 잘 모르겠다. 이르게 왔든 늦게 왔든 그냥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눅눅하고 꿉꿉하고 습하고 덥고... 내가 싫어하는 온갖 성질의 것을 다 지니고 있는 여름 장마가 정말 싫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밖에서 물 맞는 걸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옷이 젖었을 때의 찝찝함, 비가 오면 야외활동(수련을 포함한...)에 제약이 있다는 점에서 정말 싫다. 더욱이 여름 장맛비는 시원함을 동반하기는커녕 꿉꿉함만 더해서 짜증난다.


비를 좋아했던 때도 있긴 있었다. 군 생활할 때. 물론 나는 여름 군번이라 훈련소에서 자주 비를 맞았는데, 그 기억은 끔찍했다. 비가 올 때마다 판초우의를 뒤집어쓰면 물에 젖은 판초우의가 종아리에 차박차박 달라붙는 그 느낌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행군 때도 웬 비가 그리 쏟아내렸는지... 그때 내린 비 때문에 녹슨 총을 기름칠하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자대 배치 후부터 비는 나에게 '하늘이 내리는 축복'이었다. 비가 내리면 모든 작전이 중지되고 막사 안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 맞으며 산을 타는 게 위험하기도 하고, 유해의 훼손이나 유실 우려가 있어서 웬만하면 그날 작전은 취소된다. 


그래서 발굴병들은 누구랄 것 없이 비 소식을 기다린다. 발굴병들은 아침마다 창문 밖으로 비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뉴스로 그날의 일기예보를 챙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밤에 잠들 땐 내일 제발 비가 오기를 바라면서 잠을 청한다. 새벽에 자다 깨서 비 내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면 속으로 '아싸'를 외치고, 한참 내리던 비가 일과 시간 직전에 그쳐버리면 속으로 '씨발'을 외친다. 비가 그치면 영락없이 출동이기 때문이다. 호국영령께는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어쩌겠는가. 그 당시 우리의 마음이 그랬던 것을.


어쨌거나 앞으로도 살면서 비 오는 날을 반길 날은 없을 것 같다. 살면서 비를 반겼던 기억은 군 시절이 유일할 것 같다.



PS. 요며칠 수련터에 못 나갔는데, 비가 와서 또 하루 제꼈다. 이 비를 뚫고 수련터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거보면 장대비에도 꿋꿋하게 수련터에 나가는 사람들이 대단하다. 한편으로 내 스스로의 열정이 이거밖에 안 되나 싶어서 씁쓸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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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 블로그를 자주 구독하는 분들이라면, 군 시절 전우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올라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저는 원체 대인관계가 넓지 않은 터라,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 친구들은 매우 한정적인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군 시절 만났던 전우들과는 이상하리만치 끈끈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서, 초중고대학 학창시절을 통틀어 만나는 친구들 한 명 없어도 이 친구들과는 굉장히 자주 만납니다.


그리고 이 친구들과 엊그제 또 뭉쳤습니다. 경주 여행 때 자신의 자취방을 내주었던 친구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보겠다며 주말에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평생 술벗인 JH와 이 친구 그리고 군 시절 제가 유독 아꼈던 후임 한 명이 뭉쳤습니다. 이 후임 친구는 전역한 뒤로 처음 만났습니다. 중간 중간에 계속 얼굴 한 번 보자고 했는데, 뭐가 그리 바쁜지 빼다가 이제서야 나타났네요. 처음엔 좀 서운했는데 이렇게라도 잊지 않고 나와주니 서운한 마음도 스르륵 녹습니다.



1차는 종각역 근처에 위치한 '백세주마을'이란 전통술집에서 시작했습니다. 국순당 직영 브랜드인 듯 합니다. 백세주가 기본 술이고 다양한 전통주가 있습니다. 


가격이 좀 세서 비싼 술은 먹지 못했습니다만, 분위기도 좋고 가볍게 한 잔 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1차에서 6만 원 정도가 나왔는데, 제가 맏형이기도 하고 취직해서 그나마 월급이 들어오는 입장이라 기분 좋게 한 턱 냈습니다.



2차는 '오사카 부루스'라는 이름의 이자카야로 갔습니다. 오늘따라 '사케'가 먹고 싶었거든요. 


분위기가 다소 시끄럽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3,900원부터 시작하는 저렴한 안주가 무척 흡족스러웠습니다. 사진에 나온 안주들은 '와사비 문어회', '칠리새우', '가라아게', '닭똥집튀김'입니다. 저렴한 만큼, 퀄리티 역시 별로였지만 이 가격에 저렇게 먹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요.



마지막 3차는 가볍게 생맥주로 달렸습니다.


호객하는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들어왔는데, 다트 던지기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면 서비스를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도전해봤습니다만... 술에 취하니 영...  냥 막 던지다가 끝났습니다. 


드라마 <주몽>을 보면 주몽이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도 활로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는데, 저는 아직 무공의 경지가 바닥을 기는 모양입니다.. 껄껄...


이날 술자리는 막차 시간 직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부어라 마셔라 놀았을텐데, 다들 저녁 늦게 만나는 바람에 오래 놀지 못한 게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겹도록 자주 보는 얼굴들인데, 매번 만날 때마다 반갑고 하는 얘기 또 하고 듣던 얘기 또 들어도 질리지 않고, 헤어질 때면 늘 아쉽고... 참 신기합니다. 저희도 이젠 만날 때마다 농담처럼 "먼저 죽으면 남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관이나 들어주자"면서 껄껄 웃곤 합니다. 이래서 남자들이 만나면 군대 얘기 한다고 하는 걸까요? 그만큼 동고동락을 함께 하며 뜨거운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청춘의 흔적을 마주하니 반가움을 느끼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꽃보다 국유단' 모임이 언제까지고 서로의 삶에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며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우정 이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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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7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2018년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 돌이켜보면 17년도 하반기는 학교 다니랴 동시에 학생운동하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바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관두고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서 맘고생이 심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유독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제겐 군 시절 선·후임들이 그렇습니다. 2년 가까운 세월을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힘들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웃던 사이니 오만 정이 다 들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지요.


이번에 어쩌다보니 그 친구들과 뜻이 맞아서 함께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전역병 캠핑'. 제겐 선임이 되는 친구 세 명(전역한 지금은 제게 동생들입니다만 ㅎㅎ)과 저, 그리고 후임 한 명까지 총 5명이 함께 다녀왔더랬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간 곳은 상암에 있는 난지캠핑장이었습니다. 우선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 월드컵경기장점에 들러 밤새 마실 술과 바베큐파티용 삼겹살, 안주 등을 잔뜩 사갔습니다.


저희가 빌린 텐트는 10인용 몽골텐트였습니다. 원래 함께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인원들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공간은 넉넉해서 좋았으나... 이날 바람이 정말 장난 아니더군요. 


중앙에 장작 난로가 있긴 한데, 문제는 저희가 장작을 때워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불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불보다 오히려 연기를 더 많이 들이마신 것 같습니다. 불도 자꾸 꺼지고... 캠핑장에서 장작을 파는데 한 단에 1만원이나 하는 통에 장작값이 너무 비싸서 양껏 때우지도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고생하면서 마시는 술이 달다고, 어찌어찌 간신히 불씨를 붙여놓고서 저녁부터 다같이 바베큐파티를 즐겼습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온갖 술을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더군요. 


특히 이날을 위해 집에서 아버지가 드시던 각종 술들(죽엽청주, 북대양, 스카치 위스키)에 마트에서 사간 벌떡주, 가시오가피주들을 챙겨갔는데 아주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술을 꿀떡꿀떡 잘 마시는 걸 보니 괜히 흐뭇하더군요.


멀리 부산에서 온 친구는 부산의 지역소주인 '시원' 두 병을 준비해왔고, 오늘 캠핑을 기획했던 친구는 사돈어른이 담근 복분자주를 가져왔습니다. 거기에 홈플러스에서 산 공부가주까지 곁들이니 그야말로 호화잔치였습니다.



난로 앞에서 다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지나간 군 시절을 돌이켜보려니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니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모르겠더군요.


특히 이날 국유단 시절 썼던 모자도 챙겨오고 군 시절 사진과 영상을 편집해서 미니 빔으로 즉석 상영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특성상 워낙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이렇듯 추억할 수 있는 거리가 상당히 많은 게 장점입니다. 거기에 우리 부대 전용 OST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까지 입혀놓으니 괜히 지나간 시절이 그리워 왈칵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즉석에서 다른 전역자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우리끼리 점호와 약식제례(유해를 수습한 뒤에 지내는 제사)도 오랜만에 재현해보고 잠깐이나마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시다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들 숙취 탓에 비몽사몽... 당산역까지 가서 설렁탕 한 그릇씩 먹고 헤어졌습니다. 다들 숙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통에 서로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쉽습니다. 저도 집에 오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네요.


아무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일상의 스트레스를 잊고 그리운 시절로 돌아갔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독 여독이 많이 남는 캠핑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라고 지금보다 안 힘들었겠냐마는(그래도 군대인데!!!) 정말 지나가면 다 그리운 추억이 되나봅니다. 그리고 그 힘든 시절을 함께 헤쳐나왔기에, 유독 군 시절 선후임들이 반갑고 친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예 정식으로 국유단 전역자 모임을 상설화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까지 나왔는데요, 정말 실현됐으면 좋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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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예비군 소집장을 받았습니다.


이날 공강인데 1교시보다 더 일찍... 오산까지 가야합니다.


허허... 군 시절엔 "달달이 예비군 훈련 받아도 좋으니 전역만 시켜줬으면" 하고 되도 않을 소원을 간절히 빌었는데, 막상 전역하고나니 "이놈의 나라가 대체 내게 해준 게 뭐야!" 불만에 입부터 댓발 나오는군요. 첫 예비군이라 긴장도 되고, 더운데 아침 일찍 오산까지 가서 하루 종일 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도 나고... 뭐 그렇습니다. 


아아... 정충보국을 부르짖으며 애국심에 불타오르던 나는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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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에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꿈은 군대 꿈이라고 한다. 2년 가까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숨 막히는 위계질서 아래 억눌려있던 기억이 마냥 즐거웠던 추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렬했던 기억은 잔인하게도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끔씩 꿈의 형태로 다시 드러나곤 한다. 


전역한 지 꼭 1년이 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군대 꿈이라고 해서 전부 악몽은 아닌가보다. 가끔씩 꾸는 꿈 중에는 깨고 나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아련함을 품게 만드는 꿈도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가려진 봉우리, 아슬아슬한 절벽으로 이뤄진 길.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나. 생각만 해도 아련해지는 이 풍경은 군 시절 나의 추억이 깃든 한 산에 대한 이야기다.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경북 영천, 경기 포천, 강원 고성, 강릉...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내겐 강원도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이 그랬다.


설악산의 한 봉우리인 상봉은 해발 1,243m가 넘는 험준한 산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당시 이 봉우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던 탓에 이곳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던 이등병 당시, 나는 상봉을 작전구역으로 배정받았다. 워낙 높고 험한 산이었던 탓에 베테랑 발굴병들조차 쉬쉬하던 그 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리바리 이등병에게 첫 과제치곤 매우 버거운 과제였던 셈이다.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내가 메고 있던 무거운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가야만 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내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의 첫 만남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정상에 도착하니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이 펼쳐졌다. 성인 남성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구간들이 끊임없이 펼쳐진 이곳.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에 앞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말인가’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졌다. 아, 이런 곳에서도 전쟁이 있었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의 흔적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나는 놀라움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높은 산을 오르느라 죽상이던 발굴병력들 역시 탄성을 내질렀다. 책으로만 접하던 전쟁의 기억을 두 눈과 양 손의 살갗으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됐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된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생각하던 내게 그곳에서 드러난 유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워낙 작아 부위조차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조각유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상관은 저 멀리 동해바다에 떠있던 적의 군함들의 이곳 상봉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아군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산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유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험준한 산의 바위틈 사이에서 풍상을 맞아가며 6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유해들을 수습하고 입관한 뒤 태극기로 고이 덮어 봉송했다. 봉송병에 의해 운구되는 유해를 뒤에서 바라보는 그 잠깐 사이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도 힘든 이 험한 봉우리에서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청춘들...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던 그들을 생각하니 산이 너무 높다며 마냥 투정부렸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가족과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상봉의 넋으로 스러져간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역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때때로 상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그 험준한 봉우리를 마주할 때면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바위틈에 드러난 유해들을 지켜보며 지난 날을 돌이켜보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내게 주어진 청춘의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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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미생>을 다시 보고 있다. 처음부터 '정주행'을 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간간이 주요 장면만 돌려보는 정도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는데 드라마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같은 장면을 보고, 같은 대사를 들어도 그때 그때 다가오는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미생>은 고졸 출신 비정규직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담아낸 드라마다. 윤태호 작가가 그린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절절히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수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제목 미생은 바둑용어로 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있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어려운 바둑용어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삶이란 뜻이다. 그 반대의 뜻으로는 완성된 삶을 의미하는 완생이 있다. 즉, 미생이란 이제 막 사회생활에 첫 발을 내디뎌 어리숙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처지를 빗댄 표현인 셈이다. 


나는 군대에서 이 드라마를 처음 봤다. 당시 나의 계급은 일병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일병은 '일만 하는 병사'라는 우스개소리가 있을만큼 한창 바쁠 짬이다. 더욱이 그 당시의 나는 의지할 후임조차 없는 막내였다. 군 생활의 낙이랄 게 없는 그때, 선임들 틈바구니에 끼어 곁눈질로 보던 <미생>은 유일한 낙이었다. 애석하게도 항상 드라마가 끝나기 10분 전에 청소시간이 시작됐다. 매번 결정적인 10분을 놓치는 게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첫 휴가 계획을 짜면서 '<미생> 정주행'을 목록에 넣어놨을까.


아무튼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했던 까닭은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고졸 출신 낙하산으로 매번 실수 연발에, 선임들에게 깨져가면서 점점 직장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주인공의 처지는 당시 군대에 있던 내 처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잠시나마 드라마 속 그를 통해 나의 처지를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병장이 되면 저절로 완생이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막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병장이 되고 보니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후임들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여전히 미숙했고 팀의 리더로서 우리 팀을 최고의 팀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욕심만 앞섰을 뿐,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계급이 오를수록 늘 새로운 고민과 과제가 던져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전역증을 받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등병이었을 때나 병장이었을 때나 나는 늘 미생이었음을.


전역하고 돌아온 사회는 여전히 내가 미생임을 더욱 절감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동안 이뤄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과제들만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토익을 비롯한 어학·자격증 등 취직을 위해 쌓아야 할 스펙은 끝도 없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열심히 스펙을 쌓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면 나는 완생이 되는 걸까? 아니다. 결혼도 해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도 꾸려야한다. 그리고 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직장에 살아남아야만 한다. 결국 나는 언제까지나 미생일 뿐이다.


사실 완생이란 내 삶이 다하는 그 순간에서야 마주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이뤄지지 못할 허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딱히 절망스럽지는 않다. 산을 정복한 뒤에 느끼는 정복감은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산에 오른 뒤에는 내려올 일밖에 없다. 그러나 미생들에겐 올라야만 하는 산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아직 오르지 못한 산을 찾아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 그러니 완생을 꿈꾸며 나아가되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눅들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드라마 <미생>이다. 결정적인 한마디로 주인공을 늘 응원해주던 직장상사 오과장은 말한다. "결국 우리 모두 미생일 뿐. 그렇게 완생을 향해 나아가는 거지" 


* 이 글은 2017학년도 1학기 수원대학교 교양과목 '문예창작의 이론과 실제' 수업 중 작성한 글을 과제용으로 다듬어본 것입니다. 무단 불펌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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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권을 수련하기 시작하면서 무예24기 수련을 안하다보니 요새 관심이 부쩍 줄어들었네요. 오랜만에 유튜브 서핑하다가 새로운 영상이 하나 올라왔길래 공유합니다. 대충 훑어보니 뻔한 내용인 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무예24기에 대해 모르는 이들에겐 어떤 무술인지 잘 설명해주는 영상인 듯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무예24기는 무술적 가치보다는 문화콘텐츠적 가치로 승부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는 이만한 상품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태권도에 비해 다양한 병장기가 등장하니 훨씬 화려하고 역사성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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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16년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군요. 제겐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제게 있어 올 한 해는 '전역의 해'였습니다. 4월에 전역을 하면서 마침내 1년 9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신분이 전환됐으니까요. 비로소 다시 태어난 해라고나 할까요. 전역하고 나서는 군 생활 중 정리했던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뛰어왔던 것 같습니다. 


직접 커피 한 잔 내려마시고 싶어서 커피 공부를 시작했고, 남자라면 악기 하나쯤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해금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열정대학과 이태원대학 등 대안대학에서 무예24기를 가르치면서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자유학기제 강사로 채용되어 중학생들에게도 무예24기를 지도했는데, 여기서는 제 자신의 부족함을 많이 깨닫는 계기가 됐지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은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짭짤한 원고료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밑천이 되어주었고, 꾸준한 활동으로 상도 탔으니까요. 그리고 올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는 마침내 형의권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올 한 해는 대충 이 정도로 언급하기로 하고 2017년 신년 목표를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1. 형의권의 꾸준한 수련


형의권을 배우기 시작한 지 열흘 정도 됐습니다.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배움에도 때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예24기를 수련하다가 한계에 봉착해서 여기에 왔으니, 오히려 더 전념할 수 있겠죠. 만약 큰 고민 없이 시작했다면, 그만큼 쉽게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을 겁니다. 오랜 방황과 고민 끝에 어렵게 시작한 권술이니만큼, 평생 공부라고 생각하고 수련을 하려고 합니다. 사부님이나 사형들 말씀으로는 1년 동안은 체(體)를 만들어야해서, 그 과정이 대단히 지루하다고 합니다. 그 지루함을 못 이기고 떠나는 이들이 굉장히 많다고. 그래서 저는 새해 목표 중 하나를 형의권의 꾸준한 수련으로 잡았습니다. 지루함과 싸워 이기고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수련해서 몸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변이 없는 한, 형의권을 중도에 관둘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2. 무사히 졸업하기


드디어 내년에 복학을 합니다. 오랜 시간 학교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사실 복학이 좀 두렵습니다. 내년엔 17학번이 들어오는데, 제 학번이 11학번입니다. 완전 화석인 셈이죠. 아저씨 냄새 풀풀 풍기면서 학교 생활하려니 걱정도 되고, 그동안 굳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나 할까 걱정됩니다. 다행히 1학기 등록금은 장학금을 타뒀기에 맘 편하게 다닐 수 있겠습니다만, 2학기 장학금을 탈 수 있을지도 우려스럽고요. 사실 지금 상황에서 토익 점수와 졸업논문만 있으면 조기 졸업이 가능한데, 그에 대한 대비도 전혀 없는 상태라 좀 아쉽군요. 이건 한 번 알아볼 생각입니다. 반짝 해서라도 저 조건 충족이 가능하면 조기 졸업도 노려볼 만 하니까요. 하루 빨리 학교를 뜨는 게 제 소원입니다.


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꾸준히 활동하기


올해 군 전역 후 가장 의미 있었던 활동이었습니다. 용돈벌이나 할 셈으로 시작한 시민기자 활동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의미 있었습니다. 일단 부수입이 매우 짭짤했습니다. 지금까지 기사쓰기로 벌어들인 원고료만 200만원이 넘었습니다. 그 돈으로 술도 사 먹고 책도 사 읽고 무술도 배우는 등 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돈을 떠나 제 글쓰기를 가다듬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고요. 글 쓰는 지적노동이 군 생활하며 삽질하는 육체노동 못지 않게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도 글 한 편 탈고해서 메인에도 올라가보고, 제 글을 통해 누리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점이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덕분에 '이 달의 게릴라' 상도 타보고, '2월 22일상'이라는 상도 수상해서 내년 2월에 시상식이 열릴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 서평단에 합류하면서 매주 2권씩 신간 서적을 무료로 받아볼 수 있는 혜택도 입었습니다. 덕분에 요새는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요새 제 활동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하면 학교생활이 바빠서 지금처럼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데요, 열심히는 못해도 꾸준히 활동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4. 운전면허 따기


부끄럽게도(?) 26살 먹도록 운전면허를 못 땄습니다. 따야할 필요성은 강하게 느끼는데, 차일피일 미루게 되는군요. 가급적 복학 전에 운전면허를 따려고 목표를 세워봤습니다. 전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운전면허는 꼭 따고 싶습니다.


5. 책 많이 읽기


아무리 바빠도 책은 지금보다 더 많이 읽고 싶습니다. 독서만큼 유익하고 재밌는 취미가 없거든요. 전공 서적이나 취업을 위한 수험서에만 매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군 생활하면서 86권의 책을 읽었고, 전역 후에는 <오마이뉴스> 서평단 활동을 위해 책을 꾸준히 읽어오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읽고 싶은 책은 나날이 쌓여만 가고 있으니까요.


6. 해금 꾸준히 배우기


생각해보니 해금을 배우기 시작한 지도 반 년이 넘었습니다. 해금 배우기는 말년 병장 시절 정리했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버킷리스트를 실천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대견함을 느낍니다. 이것 역시 형의권처럼 이변이 없는 한, 꾸준히 배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해금을 대여해서 쓰고 있었는데, 조만간 아예 제 해금을 장만할 생각입니다. 언제까지 배워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스승이 따로 필요 없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계속 배우고 싶습니다.


7. 중국어 배우기


중국어를 참 좋아합니다. 영어는 아무리 배워도 머리에 안 들어오는데, 어릴 적부터 중국무술이나 중국요리 등 중국문화를 좋아했다보니까 중국어도 친숙하게 다가오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나 대학 교양수업 때면 제일 열심히 들었고, 성적도 항상 우수했습니다. 문제는 꾸준히 배웠어야 했는데, 단기로 끝내서 말짱 도루묵이 됐다는 거. 내년부터는 중국어를 한 번 배워볼까 생각 중입니다. 제 소원이 그 좋아하는 중국무협영화를 자막 없이 보는 겁니다. 아울러 앞으로 중국 갈 일이 많을 텐데, 현지에서 통역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도 목표고요. 그러려면 역시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배워야겠죠.


8. 진로 정하기


이것도 중요한데 여전히 막막한 부분입니다. 내년만 학교를 다니면 졸업인데, 아직까지도 진로를 정하지 못했네요. 입대하기 전만 해도 당연히 졸업하고 대학원 가서 역사 공부를 계속 할 생각이었는데, 군 생활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스스로 공부 체질이라는 생각도 안 드는군요.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봤습니다만, 시민기자 활동을 하다보니 그것 역시 딱히 제 체질은 아닌 듯 합니다. 여러모로 가장 많이 고민되는 부분입니다. 올해 안에는 생각을 정리해서, 취업을 준비해야겠죠.


대략 이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겠네요. 너무 무리하게 목표를 세우면 오히려 질려버릴 듯 합니다. 사실 이미 저 정도만으로도 굉장히 거창한 듯 하네요. 그리고 정리해놓고보니 죄다 돈을 많이 벌어야 가능한 일인 듯 합니다. 배움도 결국 돈이 있어야 가능하니까요. 일단 최대한 지출을 아끼고,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글을 쓰면서 부수입을 늘리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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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맞맞후임이 휴가를 나왔길래 어제 강남역에서 만나 술 한 잔 했습니다.


그 친구 신병으로 받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분대장 떼고 이제 '말년'이라고 합니다. 제가 말년이었던 것도 엊그제 같은데 그 친구도 말년이라고 하니 참 시간이 빠릅니다. 군대 안에서만 시간이 그렇게 느리게 가나봐요. 나오니까 이렇게 총알처럼 빠르게 흐르는데...


여하간 강남역에 좀 미리 도착해서 구경하는데, 연신 감탄이 나오더군요. 처음 온 건 아니었지만, 새삼 감탄했습니다. 그동안 노량진, 반포, 홍대 여기저기 다 가봤지만 강남역도 만만찮게 번화하더라고요. '방탈출카페'라는 신기한 업소도 보이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어갔더니 수입음반을 1천원에 팔기도 하고... 술집, 맛집 뭐 없는 게 없더군요. 괜히 제가 '서울촌놈'이 아닌 것 같습니다. 


확실히 서울이 살기 좋긴 합니다. 얼마 전에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 춘천에 갔었는데, 배가 아파 죽겠는데 약국이 없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내 나가서도 약국 찾는다고 꽤나 헤맸지요. 나름 '시'라고 하는 춘천도 그 모양인데, 거기보다 더 벽지는 말할 것도 없죠. 시골살이의 즐거움이 있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도시에서 나고 자라 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고문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가끔 전원생활을 꿈꾸지만, 그건 그저 이상으로나 놔두려고요. 누가 뭐래도 저는 제가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들이 도처에 널린 서울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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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블로그를 통해서도 소식을 공유한 바 있습니다만, 지난 6월부터 제가 직접 주도했던 소셜펀딩이 하나 있었습니다. 땡볕에서 고생하고 있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발굴병들에게 위문품을 후원하기 위한 펀딩이었습니다. 당시 펀딩 소식은 <오마이뉴스> 등에서도 6.25 특집 기사로 메인에 올라갔고, 저 역시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펀딩을 홍보하고 다녔지요.


그렇게 7월 31일부로 펀딩이 종료되었는데, 최종 모금액은 48만원이었습니다. 200만원을 목표액으로 힘차게 시작했는데, 달성률 24%에 불과해 아쉽던 차였습니다. 애시당초 모금액으로는 더위에 고생하는 발굴병들에게 아이스패드를 사서 지급하고, 차액으로 어렵게 살고 계시는 6.25 참전용사 분들을 후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최종 모금된 금액만으로는 한참 모자라겠더라고요. 부득이하게 집행 용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써야하나 고민이 컸습니다.



펀딩을 대리했던 <나도펀딩> 측에서는 "전액을 참전용사 후원에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제안해왔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물론 그쪽이 더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펀딩의 취지는 '고생하는 발굴병을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알리고 펀딩을 진행해서 모금한 건데, 취지에서 다소 벗어난 용도로 집행을 한다면 네티즌들을 속이는 게 아닌가 하는 찝찝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돈은 오로지 발굴병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후임들을 위해 쓰고자 결정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41만원(세금 떼고 나니 이렇게 또 줄어들더군요)으로 50명이 넘는 발굴병들에게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죠. 국유단 출신 동기와 선임 그리고 아직 복무 중인 후임들에게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먹을 게 남는 거다'라고 외치더군요. 


군인들은 늘 굶주려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역시 군 생활 당시에는 늘 굶주려 있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세 끼 밥 꼬박꼬박 먹이는 곳이 군대지만, 이상하게 밥 먹고 돌아서면 금세 허기 지는 곳이 군대이기도 합니다. 개인정비시간(휴식)이면 대부분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걸그룹 아니면 먹방을 보는 모습이 자주 연출되곤 했죠. 사회에서야 언제든 사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지만, 출타의 자유가 없는 사병들에게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거니와 대다수 병사들이 출타를 앞두고서는 '나가서 먹을 음식' 리스트부터 작성하곤 했지요.


당장 이 돈이 돌아가야 할 후임 병사들도 그렇고, 제 개인의 경험에 빗대서도 그렇고 먹을 것으로 전달하는 게 낫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추석 특식'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40만원이라는 한도 내에서, 50여명이 넘는 인원들을 골고루 먹여야 하다보니, 메뉴 선택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KFC에서 '타워박스' (7,300원)와 '고구마너겟'(2,000원)을 주문하기로 했습니다. 1인당 한 세트씩 돌아갈 수 있게 했으니, 저도 군 생활 중에 꿈꿔보지 못한 호화 만찬이나 다름 없었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추석 특식 수송 작전'


발굴병들이 추석 연휴를 쇠기 위해, 잠시 자대인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복귀한 어제를 D-day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부대에 연락해서 잔류인원 파악하고, 인원 수에 맞춰 KFC에 단체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걸 혼자서 짊어지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양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겁니다. KFC 측에서도 "몇 박스는 될 거다. 절대 혼자 오시면 안된다"고 만류하더군요. 운전면허도 없고, 같이 들고 갈 만한 사람도 없는지라... 결국 군 생활 중 직속상관으로 모셨던 중대장님께 S.O.S를 요청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중대장님이 자가운전하는 차량에 동승하여 햄버거 세트를 수송해올 수 있었습니다. 중대장님은 "너 때문에 살다 살다 별 짓 다한다"고 투덜거리셨지만, "그래서 중대장님 것도 하나 샀지 말입니다"라고 하니, 금세 좋아하시더군요.



막사에 도착해 방송으로 후임병들 집합시키니, 애들이 슬금슬금 생활관으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뾰루퉁한 표정으로 들어오던 애들이 제 얼굴을 보고 1차 충격을 받더니, 뒤에 쌓인 햄버거 박스들을 보고 2차로 놀랍니다.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엽더군요. (처음에 뾰루퉁했던 건,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정신교육이라도 시키나 싶어 그랬답니다 ㅎㅎ)


행정계원들이 인원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햄버거 양이 모자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지만, 이제 곧 집에 갈 말년들이 "어차피 우린 나가서 먹으면 된다"고 양보하는 덕분에 다들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못내 미안하더군요.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애들에게 특식을 나눠주고, 일일이 찾아가서 이번 특식의 의미를 전달해줬습니다. "너희 발굴병들이 현장에서 고생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 네티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성금으로 산 거니까, 나한테 감사하지 말고 성금을 모아준 네티즌들에게 감사하면서 먹자"고 말이죠. 애들도 퍽이나 감동 받은 눈치였습니다. 체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햄버거를 입 안 가득 욱여넣는 녀석들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안쓰럽기도 하고 '역시 특식으로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사들의 고충은 전역자가 더 잘 아는 법


저희 부대 최고 어른이신 단장님(육군 대령)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시고, 저를 소환하셨습니다. 그래서 단장님과 만나 차 한 잔 하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냐"면서 격려해주시더군요. 사실 전역하고서도 서포터즈다 뭐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부대를 방문해서 일도 돕고, 후임들하고 놀아주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단장님께서도 "너 대체 언제 전역하려고 그러냐. 그러지 말고 아예 말뚝 박아라.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돈도 주고... 얼마나 좋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뚝을 권유하시더군요.


저도 제가 평소 품었던 생각을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전역하면 보통 자기가 복무했던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우리 부대에서 복무했던 전역자들도 전역하고나면 부대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부대만큼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라는 숭고한 보직을 수행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대에 자긍심을 갖고, 자주 부대를 찾아 고생하는 후임들을 격려하는 게 전역병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구자가 되어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싶었다. 그리고 군 생활을 해보니까 아무리 사병 복지를 늘린다고 해도, 간부와 사병이 느끼는 인식의 차이는 큰 것 같았다. 전역한 내가 그래도 병사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늘 배고파하는 후임들에게 특식으로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어제 그렇게 특식을 전달하고 오니 마음 한 구석이 많이 뿌듯합니다. 사실 이번 펀딩 초기에 "사병들의 복지가 중요하지만, 그걸 왜 펀딩으로 도우려 하느냐. 군 차원에서 해야 될 일 아니냐"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성과가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그 말에도 동의합니다. 저 역시 일부 비리군인들이 방산비리로 해먹은 돈만 풀어도, 사병 복지가 지금보단 훨씬 좋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펀딩은 어디까지나 "국민들도 너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부디 힘내!"라고 격려해주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일에 치이고, 간부들에게 치이고... 위로 받을 구석 하나 없는 사병들에게는 한 마디의 따뜻한 위안과 격려가 절실한 법입니다. 저 역시 군 생활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고요. 그런 순수한 마음까지 왜곡되고, 저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것에는 다소 서운한 마음도 들더라고요.


뭐 어찌되었건 몇몇 뜻 있는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주신 성금 덕분에, 50여 명의 발굴병들이 호화로운 추석 특식을 즐기며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이 친구들만 고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맘 편하게 귀성길에 올라 고향에서 가족 품에 안길 때, 여전히 전/후방 각지에서는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60만 국군 장병이 있습니다. 펀딩을 주도했던 한 사람으로써, 마지막 한 가지를 더 제안하고자 합니다. 잠시나마 국군 장병 여러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봤으면 합니다. 주위에 군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면 덕담 한 마디 건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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