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예비군 소집장을 받았습니다.


이날 공강인데 1교시보다 더 일찍... 오산까지 가야합니다.


허허... 군 시절엔 "달달이 예비군 훈련 받아도 좋으니 전역만 시켜줬으면" 하고 되도 않을 소원을 간절히 빌었는데, 막상 전역하고나니 "이놈의 나라가 대체 내게 해준 게 뭐야!" 불만에 입부터 댓발 나오는군요. 첫 예비군이라 긴장도 되고, 더운데 아침 일찍 오산까지 가서 하루 종일 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도 나고... 뭐 그렇습니다. 


아아... 정충보국을 부르짖으며 애국심에 불타오르던 나는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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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남자들에게 살면서 제일 무서운 꿈은 군대 꿈이라고 한다. 2년 가까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숨 막히는 위계질서 아래 억눌려있던 기억이 마냥 즐거웠던 추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렬했던 기억은 잔인하게도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끔씩 꿈의 형태로 다시 드러나곤 한다. 


전역한 지 꼭 1년이 되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군대 꿈이라고 해서 전부 악몽은 아닌가보다. 가끔씩 꾸는 꿈 중에는 깨고 나면 왠지 모를 애틋함과 아련함을 품게 만드는 꿈도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가려진 봉우리, 아슬아슬한 절벽으로 이뤄진 길.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나. 생각만 해도 아련해지는 이 풍경은 군 시절 나의 추억이 깃든 한 산에 대한 이야기다.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했던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경북 영천, 경기 포천, 강원 고성, 강릉...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내겐 강원도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이 그랬다.


설악산의 한 봉우리인 상봉은 해발 1,243m가 넘는 험준한 산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당시 이 봉우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던 탓에 이곳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던 이등병 당시, 나는 상봉을 작전구역으로 배정받았다. 워낙 높고 험한 산이었던 탓에 베테랑 발굴병들조차 쉬쉬하던 그 산에 오르게 된 것이다. 어리바리 이등병에게 첫 과제치곤 매우 버거운 과제였던 셈이다.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내가 메고 있던 무거운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가야만 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내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의 첫 만남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정상에 도착하니 동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천혜의 절경이 펼쳐졌다. 성인 남성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구간들이 끊임없이 펼쳐진 이곳.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에 앞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말인가’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졌다. 아, 이런 곳에서도 전쟁이 있었구나. 눈앞에 펼쳐지는 전쟁의 흔적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며 나는 놀라움과 숙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높은 산을 오르느라 죽상이던 발굴병력들 역시 탄성을 내질렀다. 책으로만 접하던 전쟁의 기억을 두 눈과 양 손의 살갗으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됐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된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생각하던 내게 그곳에서 드러난 유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워낙 작아 부위조차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의 조각유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상관은 저 멀리 동해바다에 떠있던 적의 군함들의 이곳 상봉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아군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산화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유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험준한 산의 바위틈 사이에서 풍상을 맞아가며 60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유해들을 수습하고 입관한 뒤 태극기로 고이 덮어 봉송했다. 봉송병에 의해 운구되는 유해를 뒤에서 바라보는 그 잠깐 사이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도 힘든 이 험한 봉우리에서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청춘들...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던 그들을 생각하니 산이 너무 높다며 마냥 투정부렸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가족과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상봉의 넋으로 스러져간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나의 지난 날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역한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때때로 상봉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어쩌다 꿈속에서 그 험준한 봉우리를 마주할 때면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바위틈에 드러난 유해들을 지켜보며 지난 날을 돌이켜보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내게 주어진 청춘의 시간을 얼마나 치열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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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블로그를 통해서도 소식을 공유한 바 있습니다만, 지난 6월부터 제가 직접 주도했던 소셜펀딩이 하나 있었습니다. 땡볕에서 고생하고 있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발굴병들에게 위문품을 후원하기 위한 펀딩이었습니다. 당시 펀딩 소식은 <오마이뉴스> 등에서도 6.25 특집 기사로 메인에 올라갔고, 저 역시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펀딩을 홍보하고 다녔지요.


그렇게 7월 31일부로 펀딩이 종료되었는데, 최종 모금액은 48만원이었습니다. 200만원을 목표액으로 힘차게 시작했는데, 달성률 24%에 불과해 아쉽던 차였습니다. 애시당초 모금액으로는 더위에 고생하는 발굴병들에게 아이스패드를 사서 지급하고, 차액으로 어렵게 살고 계시는 6.25 참전용사 분들을 후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최종 모금된 금액만으로는 한참 모자라겠더라고요. 부득이하게 집행 용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써야하나 고민이 컸습니다.



펀딩을 대리했던 <나도펀딩> 측에서는 "전액을 참전용사 후원에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제안해왔지만,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물론 그쪽이 더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펀딩의 취지는 '고생하는 발굴병을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알리고 펀딩을 진행해서 모금한 건데, 취지에서 다소 벗어난 용도로 집행을 한다면 네티즌들을 속이는 게 아닌가 하는 찝찝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돈은 오로지 발굴병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후임들을 위해 쓰고자 결정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41만원(세금 떼고 나니 이렇게 또 줄어들더군요)으로 50명이 넘는 발굴병들에게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죠. 국유단 출신 동기와 선임 그리고 아직 복무 중인 후임들에게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먹을 게 남는 거다'라고 외치더군요. 


군인들은 늘 굶주려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역시 군 생활 당시에는 늘 굶주려 있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세 끼 밥 꼬박꼬박 먹이는 곳이 군대지만, 이상하게 밥 먹고 돌아서면 금세 허기 지는 곳이 군대이기도 합니다. 개인정비시간(휴식)이면 대부분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걸그룹 아니면 먹방을 보는 모습이 자주 연출되곤 했죠. 사회에서야 언제든 사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지만, 출타의 자유가 없는 사병들에게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거니와 대다수 병사들이 출타를 앞두고서는 '나가서 먹을 음식' 리스트부터 작성하곤 했지요.


당장 이 돈이 돌아가야 할 후임 병사들도 그렇고, 제 개인의 경험에 빗대서도 그렇고 먹을 것으로 전달하는 게 낫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추석 특식'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40만원이라는 한도 내에서, 50여명이 넘는 인원들을 골고루 먹여야 하다보니, 메뉴 선택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결국 KFC에서 '타워박스' (7,300원)와 '고구마너겟'(2,000원)을 주문하기로 했습니다. 1인당 한 세트씩 돌아갈 수 있게 했으니, 저도 군 생활 중에 꿈꿔보지 못한 호화 만찬이나 다름 없었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추석 특식 수송 작전'


발굴병들이 추석 연휴를 쇠기 위해, 잠시 자대인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복귀한 어제를 D-day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부대에 연락해서 잔류인원 파악하고, 인원 수에 맞춰 KFC에 단체주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걸 혼자서 짊어지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양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겁니다. KFC 측에서도 "몇 박스는 될 거다. 절대 혼자 오시면 안된다"고 만류하더군요. 운전면허도 없고, 같이 들고 갈 만한 사람도 없는지라... 결국 군 생활 중 직속상관으로 모셨던 중대장님께 S.O.S를 요청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중대장님이 자가운전하는 차량에 동승하여 햄버거 세트를 수송해올 수 있었습니다. 중대장님은 "너 때문에 살다 살다 별 짓 다한다"고 투덜거리셨지만, "그래서 중대장님 것도 하나 샀지 말입니다"라고 하니, 금세 좋아하시더군요.



막사에 도착해 방송으로 후임병들 집합시키니, 애들이 슬금슬금 생활관으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뾰루퉁한 표정으로 들어오던 애들이 제 얼굴을 보고 1차 충격을 받더니, 뒤에 쌓인 햄버거 박스들을 보고 2차로 놀랍니다.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엽더군요. (처음에 뾰루퉁했던 건,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정신교육이라도 시키나 싶어 그랬답니다 ㅎㅎ)


행정계원들이 인원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햄버거 양이 모자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지만, 이제 곧 집에 갈 말년들이 "어차피 우린 나가서 먹으면 된다"고 양보하는 덕분에 다들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못내 미안하더군요.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애들에게 특식을 나눠주고, 일일이 찾아가서 이번 특식의 의미를 전달해줬습니다. "너희 발굴병들이 현장에서 고생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 네티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성금으로 산 거니까, 나한테 감사하지 말고 성금을 모아준 네티즌들에게 감사하면서 먹자"고 말이죠. 애들도 퍽이나 감동 받은 눈치였습니다. 체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햄버거를 입 안 가득 욱여넣는 녀석들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안쓰럽기도 하고 '역시 특식으로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사들의 고충은 전역자가 더 잘 아는 법


저희 부대 최고 어른이신 단장님(육군 대령)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시고, 저를 소환하셨습니다. 그래서 단장님과 만나 차 한 잔 하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냐"면서 격려해주시더군요. 사실 전역하고서도 서포터즈다 뭐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부대를 방문해서 일도 돕고, 후임들하고 놀아주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단장님께서도 "너 대체 언제 전역하려고 그러냐. 그러지 말고 아예 말뚝 박아라.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돈도 주고... 얼마나 좋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뚝을 권유하시더군요.


저도 제가 평소 품었던 생각을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전역하면 보통 자기가 복무했던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우리 부대에서 복무했던 전역자들도 전역하고나면 부대를 찾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부대만큼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라는 숭고한 보직을 수행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대에 자긍심을 갖고, 자주 부대를 찾아 고생하는 후임들을 격려하는 게 전역병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구자가 되어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싶었다. 그리고 군 생활을 해보니까 아무리 사병 복지를 늘린다고 해도, 간부와 사병이 느끼는 인식의 차이는 큰 것 같았다. 전역한 내가 그래도 병사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늘 배고파하는 후임들에게 특식으로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어제 그렇게 특식을 전달하고 오니 마음 한 구석이 많이 뿌듯합니다. 사실 이번 펀딩 초기에 "사병들의 복지가 중요하지만, 그걸 왜 펀딩으로 도우려 하느냐. 군 차원에서 해야 될 일 아니냐"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성과가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그 말에도 동의합니다. 저 역시 일부 비리군인들이 방산비리로 해먹은 돈만 풀어도, 사병 복지가 지금보단 훨씬 좋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펀딩은 어디까지나 "국민들도 너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부디 힘내!"라고 격려해주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일에 치이고, 간부들에게 치이고... 위로 받을 구석 하나 없는 사병들에게는 한 마디의 따뜻한 위안과 격려가 절실한 법입니다. 저 역시 군 생활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고요. 그런 순수한 마음까지 왜곡되고, 저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것에는 다소 서운한 마음도 들더라고요.


뭐 어찌되었건 몇몇 뜻 있는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주신 성금 덕분에, 50여 명의 발굴병들이 호화로운 추석 특식을 즐기며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이 친구들만 고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맘 편하게 귀성길에 올라 고향에서 가족 품에 안길 때, 여전히 전/후방 각지에서는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60만 국군 장병이 있습니다. 펀딩을 주도했던 한 사람으로써, 마지막 한 가지를 더 제안하고자 합니다. 잠시나마 국군 장병 여러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봤으면 합니다. 주위에 군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면 덕담 한 마디 건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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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거리에서 ‘대한민국 영웅, 명예 찾기!’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1조 오프라인 미션 수행기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1조입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유달리 매섭듯, 가을을 시샘하는 늦더위의 기세도 만만치 않은데요, 이처럼 무더위로 인해 대지의 만물도 모두 녹아버리는 듯했던 지난 8월 20일, 신촌 연세로에 검은 조끼를 입은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저희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조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저희는 왜 이 더운 날씨에 신촌에 있었을까요? 바로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오프라인 홍보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날씨만큼이나 뜨거웠던 현장의 열기 속으로 다함께 들어가보시겠습니다!



젊은 청년층을 공략하라!


오프라인 홍보행사를 준비하면서 저희가 가장 먼저 고민했던 점은 ‘누구를 대상으로 홍보할 것인가’ 였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주로 참전용사가 속한 노인층을 대상으로 홍보가 이루어진 점을 주목했습니다. 동시에 시간이 갈수록 청년층의 역사의식은 흐릿해져가고 있다는 점에도 함께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역발상으로 청년층을 대상으로 홍보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 그리고 6·25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에 대해 미래 대한민국의 주역이 될 청년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저희는 젊음의 거리, 신촌에서 오프라인 홍보 행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원한 얼음커피 한 잔 하실래요?


행사 당일인 20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저희는 아직 거리가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행사 장소로 향했습니다. 거리에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부랴부랴 천막을 설치하고, 사진을 나열하는 등 부지런을 떨다보니 어느새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길을 오가는 시민들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오전 10시! 드디어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조의 오프라인 홍보 행사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날씨가 더운 점에 착안하여, 홍보 부스를 ‘간이 카페’ 형식으로 준비했습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잠시 다리쉼을 할 수 있도록 대형 천막 아래 의자들을 배치하고, 누구든 와서 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아울러 즉석에서 시원한 얼음커피를 제조하여 시민들에게 나눠드렸는데요, 시민들이 커피 한 잔 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련 사진들을 부스 주위로 전시했습니다.



(사진: 젊음의 거리 신촌에 설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 부스)


열정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내다


그런데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홍보 부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저조했기 때문입니다. 길거리 홍보행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저희들 역시 무관심한 시민들의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쭈뼛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 탓에 점점 미지근해지기 시작하는 커피를 보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각성한 저희 조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떠나 한 목소리가 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길 가는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시원한 얼음커피를 내밀며 홍보 부스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려 노력한 것입니다. 이런 저희의 열정에 시민들도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부스 앞에 멈추는 발걸음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희 부스를 찾은 첫 손님은 할머니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저희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내 사촌오빠가 6·25 전쟁 때 금화지구 전투에서 돌아가셔서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요.



(사진: 홍보 부스를 찾은 첫 손님은 전사자 유가족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지금까지 이런 사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설마 6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오빠를 찾을 수 있겠냐”며 회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꼭 찾아드릴 수 있다”고 약속드리며, 꼭 국유단으로 연락해주실 것을 신신당부했습니다. 이처럼 시작부터 특별한 손님을 맞이한 저희는 오프라인 홍보 행사의 효과를 새삼 느끼며 홍보에 더욱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사진전시회를 열다


시작은 커피 한 잔이었습니다. 단순히 목을 축이러 부스를 방문했던 시민들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전시된 사진들을 보고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져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국유단 예비역 병장 출신인 김경준 서포터즈의 이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발굴병 출신 서포터즈답게 전문 지식을 동원한 설명은 관람객들에게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페루 출신 한 외국인 관람객은 ‘설악산 상봉 유해발굴작전’ 사진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한국 관광지에 여러 번 가봤고, 설악산도 잘 알고 있다”며 “이 높은 산꼭대기에도 유해가 있느냐”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봉 유해발굴현장에서 직접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던 김경준 서포터즈는 “상봉 꼭대기 바위틈에서 조명등을 비춰가며 유해를 발굴했다”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설명으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사진: 유달리 사진전시회에 관심을 보였던 페루 관광객)




(사진: 발굴병 출신의 경력을 되살려 국유단을 홍보하는 김경준 서포터즈)


전시된 사진들은 유해의 발굴과정부터 입관, 약식제례를 마치고 감식 절차를 거쳐 유가족에게 인도되기까지의 전 과정 뿐 아니라, 중국군 유해 인도 행사와 한·미 공동감식까지 국유단의 사업을 설명할 수 있는 사진들을 순서대로 전시하였는데요, 사진들을 유심히 관람하던 한 중년의 여성 관람객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는 줄은 몰랐다”며 “군대 가 있는 아들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데, 하물며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60년 넘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분들을 기다리는 유가족들의 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할 수 있는 작은 사진전시회 개최 모습)


인기만점이었던 O.X 퀴즈


작은 사진전시회와 함께 저희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국유단 O.X 퀴즈’였습니다. 사전에 미리 엄선하여 준비한 5가지의 질문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즉석에서 퀴즈를 푸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특히 퀴즈의 정답을 모두 맞히는 시민들에게는 특별 주문제작한 ‘국유단 보틀’을 경품으로 지급했는데요, 모두들 보틀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퀴즈 풀이에 임하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국유단 O.X 퀴즈’)


자, 그럼 현장에서 출제했던 O.X 퀴즈 문제를 한 번 옮겨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함께 풀어보실까요?


[국유단 O.X퀴즈]


1. 전세계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실시하는 나라는 2개 뿐이다?

2. 유해발굴사업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된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3. 북한군의 유해와 중공군의 유해는 발굴하지 않는다?

4.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 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2% 미만이다?

5.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총 2개 팀으로 구성되어있다?


[정답]


1. O (대한민국, 미국)

2. X (2000년 김대중 정부 당시,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

3. X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하고 있음. 북한군 유해는 파주 적군묘지에 안장하고 있고, 중국군 유해는 2014년부터 중국 측에 송환하고 있음)

4. O (국군 유해 9,182위 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115위)

5. X (조사/발굴/감식/영현/대외협력/계획운영/본부중대 등 7개 부서로 구성)


여러분 정답을 얼마나 맞히셨나요? 많이 어려우셨나요? 


네, 현장의 시민들도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요. 실제로 문제를 2개 이상 맞히는 시민들이 별로 없었답니다. 그만큼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낮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언론매체와 예능을 통해 우리 사업을 홍보해왔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인식이 낮은 것을 보면서 저희가 하고 있는 홍보행사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더위를 잊고 홍보에 전념하는 저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 특별 주문제작하여 경품으로 지급한 국유단 보틀)


O.X 퀴즈의 정답을 맞히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 많자, 저희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틀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즉석에서 국유단 홍보 부스를 촬영해 개인 SNS에 업로드하는 시민들에게 보틀을 선착순 지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에 많은 시민들이 앞다투어 저희 홍보 행사 소식을 SNS에 올리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준비한 보틀도 금세 동나고 말았답니다.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던 외국인 관광객들


행사를 진행하는 내내 정말 많은 시민들이 저희 부스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셨는데요, 특히 신한은행 대학생 홍보대사 팀도 홍보활동을 하던 와중에 저희 부스에 방문하여 즉석에서 O.X 퀴즈를 풀고 사진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또 저희 부스 옆에서 홍보행사를 하던 식품의약품안전처 서포터즈들과 상호 교류 차원에서 서로의 부스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식약처 서포터즈들 역시 “이런 사업이 있는 줄은 몰랐다. 좋은 정보를 배우고 간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습니다. 



(사진: 신한은행 대학생 홍보대사들과 함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내 시민들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페루 관광객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홍보 부스로 모여드는 바람에 저희 조원들은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부족한 어학능력을 느끼면서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습니다.


이때 구세주처럼 신선정 서포터즈가 등장했습니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외국인 관광객들과의 대화를 주도하며 사업의 의미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선정 서포터즈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6·25 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자, 6·25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사진: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열심히 통역하며 국유단을 홍보하는 신선정 서포터즈)


이에 발을 맞추듯 하지영 서포터즈와 이다솜 서포터즈 역시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으며, 국유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열정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현장에 바람이 불어 현수막이 찢어지고, 사진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등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가 수시로 벌어져 계속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두 서포터즈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답니다. 이렇듯 저희 조원들은 언제부터인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손발을 착착 맞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준비과정부터 행사까지 많은 것을 배웠던 시간


지금까지 젊음의 거리 신촌에서의 국유단 홍보행사 현장을 보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셨나요?이번 행사를 마치는 저희들의 소회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사실 이번 오프라인 행사를 준비하면서, 장장 수개월에 걸친 아이디어 회의가 있었습니다.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열정 많은 대학생들답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각자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으로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알려야한다’는 큰 뜻에는 다들 공감했고, 이에 따라 서로의 입장을 한 발짝씩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점점 하나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프라인 미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조원들 간의 양보와 배려, 단합과 소통이라는 덕목을 배울 수 있었기에, 저희에게도 뜻 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홍보부스를 찾아 진지하게 설명을 경청해주신 많은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홍보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행사의 의의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포터즈들의 소감 한 마디


그럼 행사를 진행하며 느꼈던 서포터즈들의 소감 한 마디씩을 들어보실까요?


김경준 서포터즈: “군 복무 당시 수행했던 임무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알리는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사진 속 현장에 내가 있었음을 설명하자, 많은 시민들이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느껴서 뿌듯했다”


하지영 서포터즈: “준비 당시에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유해발굴 사업을 칭찬해 주시던 분, 말없이 전시된 사진을 계속 보시던 분, 한국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열심히 설명을 들어주시던 외국인 등등 많은 시민들을 만나며 걱정이 기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시민들의 관심을 통해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다솜 서포터즈: “오프라인 미션이 처음이어서 긴장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잘 마무리되어서 뿌듯하다. 아쉬웠던 것은 이런 행사가 처음이라 초반에 다소 헤맸던 점이다. 렌트한 테이블과 천막의 크기가 맞지 않아서 급하게 부스 구조를 바꾸기도 했고 당일 아침에 물품을 구매하는 등 돌발 상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르신, 외국인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 한 편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을 보면서 ‘영문 리플렛’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선정 서포터즈: “6·25 전쟁에 참전한 참전국의 외국인들이 우리의 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해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을 받았다. 한편으로 젊은 층들의 관심과 참여도는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반기에는 상반기의 미흡한 점을 바탕으로 좀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홍보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비석)


행사는 끝났지만, 이번 신촌 오프라인 행사는 시작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그들을 조국의 픔으로 모시는 그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 여러분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은 기간까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의 활약도 꾸준히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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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발굴병 24시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3)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그동안 연재해왔던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도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그동안 다뤄왔던 주제들이 다소 무거운 주제들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여러분께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바로 ‘유해발굴병’의 24시간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와 함께 발굴병들의 일상으로 들어가보실 텐데요, 다들 준비되셨죠? 그럼 출발!



기상! 출동 준비! (AM 5:30~06:30)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어느 군부대 막사의 복도. 기상나팔이 울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생활관이 보이네요. 바로 발굴병 생활관입니다.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걸까요? 아직 덜 깬 눈으로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는 윤 이병에게 물어봤습니다.


“작전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섭니다. 부대에서 발굴지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조기 기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06시 30분 기상이 원칙이지만, 숙영부대에서 발굴지점까지 이동시간만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조기 기상은 부득이하다고 합니다. 기상과 동시에 기계와 같이 빠른 동작으로 세면과 환복을 하고, 이른 아침식사를 한 뒤 다시 출동준비를 하는 모습이 매우 정신없어 보이는군요. 분대장 김 병장이 살짝 귀띔을 합니다.


“발굴병들은 사실 아침이 제일 바쁩니다. 혹시라도 빠진 게 없나 재차 점검하고, 아침식사도 다른 병력들보다 일찍 하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아직 밥이 준비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취사장에 앉아 하릴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발굴병들이 출동준비로 정신없는 사이, 발굴팀장님께서 출근하셨네요. 팀장님은 간밤에 병사들이 잘 잤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혹시라도 몸이 좀 안 좋은 병사가 있으면 생활관에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의무대로 보내 진료를 받게 한다는군요. 다행히 오늘은 모두 건강한 모습입니다.


팀장님의 인솔 하에 차량을 타고 발굴지까지 이동한 발굴병들. 차에서 내리자마자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한 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분대장부터 이등병 막내까지 공평하게 나눠서 진다지만, 등에 멘 장비들이 상당히 무거워보이는데요. 힘들지 않나요? 


(사진: 발굴병들의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들. 발굴병들은 매일 같이 이 짐들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이등병 때는 맨 몸으로 산에 오르는 것도 죽을 맛이었지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보니 이젠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체력 좋아보이는 염 일병의 답변이 믿음직스럽군요.


오전 유해발굴작전 (AM 09:00 ~ PM 12:00)


드디어 작전 개시! 보통 유해발굴작전은 100명 단위의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데요, 이들을 ‘기초발굴병’이라고 합니다. 발굴하려는 지점에 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굴토를 하며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초발굴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전문발굴병인 국유단 발굴병들은 기초발굴병력의 뒤에서 기초병력들이 제대로 발굴을 하고 있는지, 혹시 유해를 놓치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하며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한답니다.


그런데 그때! 


“팀장님, 유해 나왔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순간 발굴팀장님과 발굴병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려갑니다. 유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식별되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뜯어보며 토의한 결과 인골(人骨)로 판정되었습니다. 


유해로 판정이 나자, 발굴병들은 각자 임무를 분담해 일사천리로 수습에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유해가 식별된 지점 주위로 나무 말뚝을 박고, 노란색 테이프로 사방을 두릅니다. 이 ‘접근금지’ 라인 안으로는 국유단 발굴병 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현장 훼손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이 공간을 전문용어로 ‘트렌치’라고도 합니다. 발굴병 역시 트렌치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여 유해 훼손에 대비한다는군요.



(사진: 유해수습을 하는 국유단 발굴병들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수습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이 매우 진지합니다. 전문발굴병의 숙련된 손길에 6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호국영령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분은 대체 왜 이곳에, 어떤 사연으로 잠들게 되신 걸까요. 드러나는 유해를 보며 발굴병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꿀맛 같은 잠깐의 휴식 (PM 12:00 ~ 13:00)


“오전 발굴작전 종료! 밥 먹고 하자!”


벌써 점심시간이군요. 유해 수습에 전념하던 발굴병들도 그제야 허리를 펴며 한숨을 돌리네요. 임무를 수행하느라 지친 병사들이 그늘 진 곳에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달콤한 휴식 시간입니다. 병사들은 전투식량으로 허기를 달래며 즐거운 휴식을 만끽합니다. 매일 같이 먹는 전투식량이 물리지는 않을까요?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사진: 발굴병들의 주식인 ‘전투식량’)


“당연히 물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 주먹밥을 만들어오기도 합니다.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는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전우들과 함께 나눠먹는 밥은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특히 산에서 먹으니 운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병사들 중에는 돗자리에 누워 쪽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네요. 국유단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Y씨는 “점심 먹고 한창 나른할 때, 산바람 맞으며 잠깐 누워 자던 그 잠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유해발굴작전 개시 (PM 13:00 ~ 17:00)


잠깐의 달콤한 휴식도 끝나고, 오후 작전이 개시됩니다. 오후 작전은 오전에 비해 좀 더 바쁘게 돌아갑니다. 오전에 식별한 유해를 오늘 안에 수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해발굴작전의 원칙 중 하나는 바로 ‘당일 수습’이라고 합니다. 유해를 현장에 방치하고 내려올 경우, 까마귀와 같은 산짐승들이 유해를 물어가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인지 발굴병들의 손길 역시 오전보다 더욱 분주해보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국영령의 모습이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60여 년 전 당시 모습 그대로 당신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노출이 완료된 유해의 형태는, 전사 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착잡한 표정으로 노출된 유해를 바라보던 박 일병이 입을 열었습니다.


“보통 유해라고 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것처럼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많이들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영화와 다릅니다.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수류탄에 온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여기 누워계신 이분 역시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참혹한 양상으로 전사하신 게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사진: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노출된 유해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사진: 태극기로 관포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유해의 노출을 마무리한 발굴병들은 유해의 노출 양상을 직접 그림과 사진 등으로 기록하고, 정성을 다해 입관 절차에 들어갑니다. 이제 또 한 분의 호국영령께서 60여 년 만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작전 종료 및 막사 복귀 (PM 17:00 ~ 18:00)


금일 작전 종료. 하산 준비를 마친 병력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수습한 호국영령을 보내드릴 시간입니다. 태극기로 정성스레 싸여있는 관 앞으로 제기상이 놓이고, 발굴부대를 대표하여 대대장님이 직접 제주를 올립니다. 


‘부대 차렷! 호국영령님께 대하여 경례! 일동 묵념!’


발굴팀장님의 구호에 맞춰, 병력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거수경례와 묵념을 올립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60년 동안 오매불망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호국영령이시여. 이제 편히 쉬소서.



(사진: 약식제례를 지내는 모습)


유해봉송을 마친 발굴병들도 하산길에 오릅니다.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을 모셨다는 생각에 뿌듯함과 홀가분한 감정을 가지고 내려가는 발굴병들의 발걸음이 가벼워보입니다. 함께 내려가던 김 일병이 이런 말을 덧붙이네요.


“만약 오늘 안에 수습을 하지 못했다면, 조명장비까지 이용해서 야간 발굴을 했을 겁니다. 예전에는 밤늦게 하산한 적도 있었습니다.”


작전 종료 후에도 이어지는 임무수행 (PM 18:00 ~ 22:00)


막사로 복귀한 발굴병들의 표정을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하네요. 하지만 발굴병들의 일과는 막사 복귀 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복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 수습한 유해에 대한 기록을 전산화하는 것. 현장에서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받아 적은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키아티스(KIATIS: 6.25 전사자 종합정보체계)라는 국유단 고유의 전산망에 업로드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오늘 작전 수행 간 사용한 발굴 장비의 정비와, 내일 작전을 위한 출동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아니, 그럼 대체 언제 쉬나요?


“유해가 많이 나올 경우에는 그만큼 업무량이 많아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군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기기 때문에 지금은 예전보다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빠듯하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각자 체력 단련이나 독서 등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이젠 발굴병 생활에 도가 텄다는 한 상병의 답변에 여유가 넘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있는 사람 (PM 22:00)


막사 내 모든 불이 꺼집니다. 이제 발굴병들도 취침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침상에 등을 붙이자마자 다들 금세 곯아떨어지는군요. 오늘 하루도 참 고단했나봅니다. 그런데 분대장 김 병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군요. 혹여 후임들이 잠에서 깰까봐, 이불 속에 들어가 라이트펜을 켜고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분대장 수첩이라는 겁니다. 매일 매일 작성하는 건데, 우리 발굴 팀의 일기와도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 임무수행 간 있었던 실수나, 분대장으로서 좀 더 매끄럽게 지휘하지 못했던 점, 고민이 있거나 아픈 병사들이 있는지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아무래도 호국영령을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니, 이런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일은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작전에 임해야겠노라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진: 분대장은 매일 병사들의 애로사항과 임무수행의 결과를 기록한다)


발굴병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여러분, 지금까지 발굴병들과 하루 일과를 함께 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에 놀라셨나요? 실제로 발굴병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사명감이나 자부심 없이는 하기 힘든 임무라는 생각까지 드는데요,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S씨에게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이등병 때는 산 타는 것도 힘들었고, 임무수행 간 잦은 실수 탓에 선임들에게 혼나면서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매일 밤 침상에 누우면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지더군요. 호국영령을 모시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정도 고생도 감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나약하게만 느껴졌던 겁니다. 매일 매일이 반성의 연속이었죠. 전역한 지금은 오히려 발굴병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사진: 정교한 손길로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이처럼 오늘도 호국영령을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이 있기에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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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후임들을 보러 현충원 부대로 면회를 다녀왔습니다.


군 생활 하던 당시만 해도 '전역하고 후임들 면회하는 날이 올까' 싶었는데, 정말 왔군요. 전역하던 날만큼이나 싱숭생숭한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대학생 서포터즈다 뭐다해서 전역하고도 부대를 내 집 안방처럼 들락날락하긴 했습니다만, 정작 저와 군 생활을 함께 했던 후임들은 발굴작전을 나가 부대를 가도 만날 수 없었더랬습니다. 그래서 텅 빈 생활관만을 바라보다가, 공허한 발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후임들이 엊그제 전반기 작전을 마치고 모두 자대로 복귀했다고 해서 부랴부랴 면회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부대로 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고 마음도 많이 설렜습니다.


오랜만에 애들 얼굴 보니 정말 반갑더군요. 꽤 오랜 시간 서로의 얼굴을 못 보긴 했지만, 다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얼굴 표정이 어두운 애들도 없고... 전반기 작전 출동 당시 애들 보내놓고서도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됐는데, 안심이 됩니다. 무엇보다 군대는 건강이 최고인데, 어디 다친 데 없이 다들 건강해보여서 그게 제일 다행스러웠습니다.


어제는 특별히 커피를 좀 챙겨갔습니다. 전역하고 커피 공부를 하면서, 후임들에게 직접 내린 커피 한 잔씩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상, 아무리 잘해주려고 노력했어도 제 폭정(?)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분대장을 내려놓을 때도, 말년에 애들 보내기 전에도 그동안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럼에도 늘 미안한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커피 한 잔으로 퉁치자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담아 커피 한 잔씩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가뜩이나 팍팍한 군 생활, 전역한 선임이 타주는 커피 한 잔으로 다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그래서 커피 추출 도구들을 가방에 담아갔습니다. 원두 역시 면회 전 날, 남성역 근처 '달의 둥지'라는 유명한 커피집에서 품질 좋은 원두를 공수해왔습니다. 아침 일찍 미리 갈아둔 원두를 가지고, 후임들 보는 앞에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한 잔씩 대접했습니다. 대용량으로 추출하는 건 처음이라 대충 눈대중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챙겨갔는데, 생각보다 추출되는 양이 적더라고요. 넉넉하게 돌리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도 다들 '맛있다'며 잘 마셔주어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커피 한 잔씩 마시면서, 군 생활 힘들다는 후임들 하소연도 받아주고, 예전에 함께 군 생활하던 추억도 공유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습니다. 그러고있자니 문득 제 자신이 다시 '병장 김경준'으로 돌아간 느낌이더군요. 병사로 다시 군 생활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문득 그 시절이 그립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말년에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고, 애들이랑 노가리나 까면서 놀던 재미가 있었는데... 그 시절로 돌아가 딱 일주일만 더 말년 병장으로 군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헤어지기 전에 본청 앞에서 다같이 기념사진도 찍고, 돌아가는데 모두 손 흔들어 배웅해주는 것을 보면서 콧날이 시큰했습니다. 전역하던 날에는, 후임들 모두 작전 출동하고 없던 터라 제대로 된 배웅 한 번 받지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배웅을 받으니, 전역하던 날보다 더 뿌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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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CGV용산에 가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왔습니다.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끌어낸 'X-ray 첩보작전'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정재, 이범수와 같은 국내 톱배우는 물론 헐리우드 톱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 역할을 맡아,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죠.



(사진: 영화 <인천상륙작전> 공식 포스터 - 출처: 네이버 영화)


사실 개봉 당일부터 보려고 벼르던 영화였는데, 이런 저런 일로 관람을 미루다가 비로소 오늘에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영화를 본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의 평이 혹평에 가까울 정도라서, 보기도 전에 기대보다는 걱정이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작품이더군요. 요근래 본 영화 중에서 그래도 재밌게 본 영화였습니다. 2시간 좀 안 되는 러닝타임 동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봤어요. 딱히 반전이랄 게 없는 스토리 구조 탓에 약간 밋밋하게 느껴진 점 빼고는 군데군데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실화라는 점 때문에 더욱 인상 깊었던 영화입니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었습니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다양한 배우들의 활약도 흥미로웠는데요, 특히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리암 니슨의 연기는... 중간 중간 잠깐씩 등장하는 데도 강렬하더군요. 몇 마디 툭툭 내던지는데, 대사마다 주옥 같은 명언이었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 나는데, '늙고 젊은 것은 나이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이상(신념)을 버렸느냐 버리지 않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라는 뉘앙스의 대사가 정말 가슴 깊이 와닿았습니다. 모두 맥아더가 실제로 했던 말들인 듯 합니다.



(사진: 영화 속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리암 니슨 - 출처: 네이버 영화)


맥아더와 소년병의 대화


영화를 보면서 몇 번 울컥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맥아더 장군과 한국 소년병의 대화 장면이었습니다. 전우들이 몰살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철수하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소년병에게, 맥아더 장군이 "왜 철수하지 않느냐"고 묻자, "상관의 철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답을 합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라. 다 들어주겠다"고 하자 "적과 싸울 수 있게 총과 실탄을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꽤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실화였기에 더욱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반공영화는 무조건 나쁜가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스토리의 완성도, 배우의 연기를 떠나서 이 영화의 성격이 '반공영화'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를 직접 본 사람으로서 이 영화가 어느 정도 반공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6.25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반공이라는 요소가 안 들어갈 수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6.25 전쟁 자체가 자유민주주의(반공)를 대변하는 대한민국(남한)+유엔군과 공산주의를 대변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소련+중국과의 국제적 이념 대결이었는데 말이죠. 특히나 이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무명용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들의 활약에서 어떻게 반공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만약 반공을 부정한다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이들의 희생과 헌신마저 통째로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반공영화면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헌법에 명시한 나라이며, 6.25 전쟁 당시 공산당의 침략에 의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던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공산주의(라고 쓰고 김씨 봉건왕조체제라고 읽는다)를 표방하는 북한은 호시탐탐 대남도발을 자행하며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사드 배치 문제도 결국 북한이라는 골칫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불거진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공'을 이야기하는 게 왜 나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놈의 공산주의가 반백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을 이토록 괴롭히고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반공영화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정부의 주도 하에 반공영화가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짓밟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강한 트라우마가 반공영화에 대한 반발심리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각도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시각도 '분단'이 낳은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분단이 없었다면, 이런 영화를 두고 반공이니 아니니 하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할 까닭이 없었을테니까요. 여하간 반공영화는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의견에 대해서 존중은 하지만,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진: CGV용산에 전시된 실제 'X-ray 첩보작전' 이야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맥아더가 아니다


두 번째로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판도, 이 영화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인 듯 합니다. 맥아더에 대해 공부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공(功)만큼이나 과(過)도 큰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인천상륙작전으로 너무 부풀려진 인물이라고도 하고, 일각에서는 '오만방자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욕의 화신'이라고까지 악평을 하기도 합니다. 아예 인천상륙작전 자체가 너무 부풀려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하간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영화이기에 보기 불편하다는 논리입니다.


일단 제가 맥아더에 대해 잘 모르는 관계로, 맥아더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둘째 치고라도, 이 영화에서 맥아더를 '우상화' 혹은 '영웅화'하는 느낌은 결코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맥아더는 잠깐 등장할 뿐입니다.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름 없는 무명용사의 헌신에 감사를


이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이들은 '대한민국 해군 첩보대'와 '켈로부대'입니다. 이 영화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멋지게 인천항에 상륙해 반격을 하는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대한민국 해군 첩보대'와 '켈로부대'였다 - 출처: 네이버 영화)


저는 그래서 이 영화를 더욱 높이 평가합니다. '인천상륙작전=맥아더'라는 공식을 깨고, 이름 없는 영웅들의 헌신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그런 감독의 의도가 분명함에도, 자꾸 이 영화에 대해 '맥아더를 영웅시하는 영화'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잠깐 등장하는 맥아더의 강렬한 이미지가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리암 니슨이 워낙 연기를 잘한 탓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의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정도 장면은 당연히 있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앞까지 밀렸던 우리 국군이 전세를 역전하는 기회가 된 역사적인 작전이었고, 그 의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맥아더의 행적이 어떻든 간에, 그 작전 하나만 놓고 보면 성공한 작전이었고, 그렇기에 그나마 대한민국이 이 정도 영토라도 보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한 무명의 용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지켜주신 무명의 호국영령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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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안식처로의 인도자들, 영현병을 만나다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2)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짧았던 장마도 지나고, 7월 초복(初伏)이 지나 이제는 완연한 여름 날씨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폭염에 몸도 마음도 지치기 쉬운데요, 이럴 때일수록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건강관리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릴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국유단에 소속된 조금 특별한 병사들의 특별한 임무수행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년 365일 현충원에 상주하면서, 그들만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다


착, 착, 착... 한 눈에 봐도 경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발을 맞추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엄숙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데요, 지켜보는 이들도 절로 숙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정체는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영현소대’ 병사들이었습니다. 영현소대 병사들은 호국영령의 유골함을 높이 받은 채, 그들이 마지막 안식을 취할 충혼당(납골당)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영현병들의 경건하고 엄숙한 인도에 따라, 호국영령들 역시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지난 3월에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에서 중국군 유해를 인도하는 영현병들)


​오늘은 바로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들, 국유단 영현병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영현소대와 영현병


​국유단 본부중대에는 발굴병들이 소속된 ‘발굴소대’, 감식병들이 소속된 ‘감식소대’와 더불어 영현소대라는 독립소대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소대에 소속된 병사들이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요, 이들을 일컬어 ‘영현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현(英顯)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표현’으로서, 호국영령을 의미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영현병은 대체 어떤 보직이며, 이들이 소속된 영현소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먼저 그 유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현소대의 탄생과 역사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현병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부산에서 ‘묘지등록중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영현소대는 1952년 9월 ‘81영현중대’로 부대 명칭을 개정한 뒤, 1986년 10월 5군수지원사령부, 53군지단을 거쳐 2006년 8월 국방부 근무지원단 의장대대에 예속되었습니다.


하지만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반영구적 국가사업으로 활성화되고, 그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면서, 국유단 휘하 소대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그 편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2009년 6월에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던 ‘영현 및 의장중대’가 해체됨에 따라, 국유단 영현소대가 영현행사를 담당하는 전군 유일의 특수소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2010년에는 병참병과의 특기로 사무처리를 의미하던 영현등록병(2112)에서 행사지원의 영현행사병(1111)으로 직책 명칭 및 특기가 변경되면서, 영현병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로써 국유단 영현소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유일의 영현 전담 특수소대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쯤 되면 영현병들이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만하죠?



(사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영현소대)


영현병들은 어떤 임무를 수행할까


그렇다면 영현병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될까요?


영현병들은 6·25 전사자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한 국가유공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충원에서는 매일 두 차례씩 국가유공자의 안장식이 거행되는데요, 영현병들은 바로 이 행사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안장행사는 평일/주말 구분 없이 매일 열리기 때문에, 영현병들 역시 주말의 달콤한 개인정비(휴식) 시간을 반납하고 행사 지원을 나가는 게 일상이라고 합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행사 지원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자신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숭고한 가치를 알기에 자부심 역시 남다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년 연말마다 국무총리 주관으로 열리는 ‘6·25 전사자 합동봉안식’ 및 사단/군단 단위의 영결식·합동봉안식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북한에서 미군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인도받거나, 국유단이 발굴한 미군 유해를 미국 정부에 인도하는 행사가 개최될 때면, 우리 영현병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진: 2015년 12월에 열린 ‘6·25 전사자 합동봉안식’에서 영현병들이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사진: 지난 4월 28일 열린 ‘한·미 전사자 유해 상호 봉환행사’에서 미군으로부터 인도받은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특히 2014년부터는 중국 정부와의 협약으로 ‘중국군 유해 인도 행사’가 매년 한 차례씩 개최되면서, 국유단에서 발굴한 중공군 유해를 중국 정부에 인도하는 행사에서 영현병들의 임무수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진: 지난 3월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에서 우리 영현병이 중국군 의장대 병사에게 유해를 인도하고 있다)


저 역시 전역하기 전에 이 행사를 참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요, 중국군 의장대 병사들 앞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보무도 당당했던 우리 대한민국 영현병들의 늠름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행사를 지켜보는 내내 영현병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생각에, 새삼 영현병들이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주특기 훈련


수행하는 보직 자체가 특수한 임무이기 때문에, 영현병들이 받는 주특기 훈련 역시 독특할 수밖에 없는데요, 영현병들은 훈련소 혹은 신교대에서 5주 간의 신병훈련을 수료한 뒤, 바로 국유단으로 전입을 와 선임들로부터 직접 ‘주특기교육’을 받게 됩니다. 선임들 역시 그동안 수많은 행사를 치르며 축적되어 온 노하우를 신병에게 전수하며, 영현병으로서의 몸가짐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받는 훈련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훈련으로는 ‘발걸음’ 훈련을 들 수 있습니다.


영현병들은 일반적인 걸음보다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중간에 공중에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지면을 내딛는 방식의 걸음걸이를 계속 반복 연습하는데요, 앞 사람과의 거리는 4보로 유지해야하며, 행진을 마치고 도열할 때에는 오른발의 무릎이 지면과 90도를 이루도록 올려준 자세를 2초 간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군 복무를 하며 가까이서 지켜본 영현병들은 쉬는 시간, 일하는 시간 구분 없이 수시로 소관을 들고 발걸음을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역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은 참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진: 영현병들이 발을 맞추는 것은 고인에 대해 최고의 예를 다하기 위함이다)


이런 규칙의 명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1955년 국군묘소가 설립되고 의장행사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미국 의장병들의 행진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하는데요, 유래가 어찌되었든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에 최고의 예를 다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해 영현소대를 이끄는 영현소대장 함성제 상사는 “국유단에 영현소대가 창설된 이래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영현소대만의 고유한 규범과 의전 절차를 확립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영현병들이 받는 훈련으로는 ‘영정과 영현 인수하기’, ‘우천 시 우산 인수와 우산 펴기’, ‘유가족에게 영현 인도’ 등 다양한 의전 훈련이 존재합니다. 영현이 모셔진 유골함을 감싸는 봉송천(소창) 매듭법도 익혀야 하며, 복장 역시 언제나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림질 등을 통해 수시로 정비한다고 합니다.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만큼, 복장과 몸가짐에 있어서 한 치의 실수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 영현병들의 임무 수행은 사전에 철저한 훈련을 반복-숙달한 뒤에 이루어진다)


이처럼 영현병들의 임무 수행은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내려놓았다간 큰 실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영현병들의 임무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열리는 행사지만 한 번 행사를 할 때마다 사전에 철저한 연습을 통해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영현병들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


그렇다면 영현병들이 임무수행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영현병들은 하나같이 “행사가 끝난 뒤, 유가족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를 가장 보람 있는 순간으로 꼽았습니다.


실제로 영현병들이 행사를 집전하는 동안, 유가족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를 지켜보게 되는데요, 최고의 예(禮)를 다해 자신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를 모시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사가 끝난 뒤에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는 유가족들도 있다고 하는데요, 영현병들은 바로 그 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보직을 맡았으면 이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영현병으로 선발되어 온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고도 고백했습니다.


묵묵히 임무수행하는 그들에게 응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국유단에는 발굴, 감식병 외에도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영현병들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정성 어린 인도가 없었다면, 호국영령들 역시 편안한 안식을 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진: 지난 3월에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를 마치고 촬영한 단체사진)


영현병들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의 숭고한 가치를 알기에, 한 마디 불평 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임무 수행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영현병들이 앞으로도 자신의 임무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임무 수행에 임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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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오랜만에 현충원엘 다녀왔더랬습니다. 제가 복무했던 부대에 들러 간부님들께 안부 인사도 드리고, 부대에 잔류하고 있는 후임들하고 얘기도 하고... 뭐 전역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서포터즈다 뭐다해서 자주 들렀더니 이젠 그닥 반가워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어제는, 군 복무 당시 직속상관으로 모셨던 前 중대장님을 만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최전방인 경기도 연천에서 수색중대장으로 복무하고 계시는데, 얼마 전 소령 진급이 확정나면서 단으로 진급 인사차 오셨다고 하는군요. 안그래도 몇 달 전부터 따로 만날 약속을 잡고 있었는데, 중대장님이 먼저 서울 내려오는 김에 한 번 보자고 하셔서, 현충원에서 만나게 된 겁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롤모델이나 멘토가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CEO 혹은 정치인처럼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인사들을 롤모델로 삼죠. 저같은 경우는 현실 속에 그런 롤모델이 없다고 판단해서, 일찌감치 역사 속 위인들을 제 롤모델로 삼아왔더랬습니다. 


그런데 그런 롤모델들의 경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인물인지라,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제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 인생의 큰 줄기(삶의 가치관)를 형성하는 데는 그들의 영향이 컸지만, 소소한 문제에 부딪쳤을 때는 답을 얻기가 힘들었죠. 이미 죽은 이들은 말이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 제가 현실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롤모델로 삼을 만한 분을 만났습니다. 바로 어제 만난 옛 중대장님입니다. 저는 이분에게 개인적으로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군 생활이 마냥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제가 일병 4호봉 때였던가요. 후임에게 폭언 및 욕설로 영창을 다녀온(그것도 만창 15일) 선임 한 명이 저희 팀(분대)으로 배속되는 바람에 제 맞선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그래도 일병이 꺾이도록 후임이 들어오지 않아, 계속되는 막내 생활에 스트레스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선임이 늘어난 겁니다. 더욱이 사고 치고 온 선임이라니... 그때의 절망적인 심정이란... 오죽하면 제가 담당 간부한테 "후임들에게 욕하고 때리는 선임을 선임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라고까지 하면서 항명했으니까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군대란 까라면 까야하는 곳이죠. 사고치고 온 직후라, 본인 스스로도 조심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긴 했지만, 본성이 어딜 가겠습니까. 처음엔 좀 자제하더니, 가끔씩 욱하는 기질이 드러나더군요. 뭐 때리지 않았으니 그나마 개과천선했다고 봐야할까요? 그래도 욕설은 정말 많이 했죠. 특히 제 후임이 들어오면서부터 많이 심해졌습니다. 제 후임한테 뭐라고 할 때마다, 중간에 낀 제가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원래 맞후임 잘못은 맞선임이 욕 먹는게 군대 구조라...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죠. 더욱이 성추행과 같은 짓궂은 행동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제 맞후임은 나중에 저한테만 고백했는데, 이걸 상당히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밤에 남몰래 침낭 속에 들어가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하는군요. 그때 정말 선임으로서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여하간 이 당시 이야기를 글로 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중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죠. 어쨌거나 중간 과정 다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바로 옛 중대장님께서 이 선임의 부조리 행위를 적발해서 처벌해주셨던 겁니다. 최초 고발자였던 저조차도 '이걸 찌른다고 과연 해결이 될까'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지만, 중대장님은 "넌 임마, 나중에 장관도 하고 대통령도 하고 싶다는 놈이 이런 걸로 겁을 먹어?"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격려해주시더군요.


사실 군대에서 이런 사건/사고가 터지는 건, 간부들에게 그닥 반가운 소식이 아닙니다. 진급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그래서 군대에서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감추고 쉬쉬한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중대장님은 '부조리는 발본색원해야 한다'면서 일찌감치 병영 부조리 혁파에 앞장 서오신 분이었습니다. 저 맞선임을 최초로 영창 보낸 분도 바로 중대장님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쉬쉬하고 내부적으로 징계위원회 열어서 영창 보내고 끝냈을 법도 한데, 중대장님은 오히려 판을 키워서 국방부 조사본부까지 연락했더랬습니다. 덕분에 헌병 수사관들이 출동해서 저희들도 '마라톤 조사' 받고, 그 맞선임도 끝내 야전으로 전출을 가버렸죠. (후일담이지만 중대장님이 판을 키운 덕분에, 그 맞선임은 전역 후 민간 재판으로 넘어갔습니다. 빨간 줄 그어지게 생겼다며 저희에게 제발 합의해달라고 사정했을 정도로, 사안이 커졌더랬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주도한 게 바로 중대장님이었습니다.


개인적은 은혜도 은혜였지만, 이렇듯 중대장님은 병영부조리 혁파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마음의 편지'(예전으로 치면 소원수리) 제도를 활성화시킨 분도 이분이었는데, 부임 직후에 마편함을 화장실 칸마다 추가 개설해서 수시로 확인하시더군요. 덕분에 병사들도 끊임없이 마음의 편지를 썼고, 중대장님은 하나 하나 다 읽어보시고 최대한 저희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들어주려 노력하셨습니다. 심지어 중대장님에 대한 비판도 나왔는데, 그 편지 내용까지 공개적으로 읽으면서 "미안하다"며 전 병력이 보는 앞에서 쿨하게 사과까지 하셨죠.


이런 분이었으니, 어찌 존경심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개인적인 롤모델로 삼았던 것이고, 이분의 모습에 반해서 잠시 접어두었던 장교의 꿈을 다시 한 번 품어보기도 했었더랬습니다. 이분 같은 군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말뚝을 고민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사회가 낫다"며 주위에서 뜯어말리는 통에 결국 예비역 병장으로 전역하고 말았습니다. 말뚝 박을 용기가 없기도 했고요.


전역한 지 3개월째... 저는 지금 군문 안에서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실컷 누리는 중입니다. 군대에서 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았기에, 지금도 하루 하루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죠. 전역 전에 작성했던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서, 해금이며 커피며, 무예며 이것 저것 새로 배우기 시작하고... 글도 쓰고 사람도 만나면서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중국어 학원도 등록할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이 공허할 때가 많습니다. 사회란 곳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 사회가 좋긴 좋지만, 가끔은 서울 도심의 꽉 막힌 도로와 사람들로 붐벼 숨쉴 틈조차 없는 지옥철에 몸과 마음이 지치곤 합니다. 전역 후 백수 신세라 늘 비어있는 통장 잔고도 한숨을 불러일으키고 있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나중에 뭐 해서 먹고 살아야하나 막막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자꾸 '군대'가 생각납니다. 일종의 도피성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어릴 적부터 직업군인이 꿈이기도 했고, 전역 직전까지 말뚝을 고민했던 터라 평생 직업으로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제 오랜만에 중대장님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여전히 군복만 보면 설레고, 내가 입고 있어야 할 옷은 군복인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까, 중대장님 역시 "너는 장교를 하는 게 맞다"면서 "남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아직 젊으니까 한 번 도전해봐"라고 조언해주시더군요.


제 군 생활 중 롤모델이었던 중대장님으로부터 적극적인 권유를 받으니, 마음이 다시 흔들립니다. 남자에게 가장 큰 악몽은 '재입대하는 꿈'이라고들 하는데, 이러다가 저는 정말 꿈이 아닌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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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어제 오랜만에 국유단 전역자들을 만났다.


강남역 근처 횟집에서 소주로 1차를 달리고, 2차로는 맥주창고에서 가서 해외맥주로 달렸다. 그리고 시간이 늦어 먼저 갈 사람들은 가고, 남은 사람들끼리 다시 3차로 육회를 곁들여 소주 한 잔.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끊길 때까지 마셨다. 다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군 복무 시절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지칠 줄을 몰랐다. 군 생활 하며 함께 고생했던 얘기들, 그때 당시 서운했던 것들... 지금이야 전역했으니 맘 편하게 털어놓을 수가 있었다. 나 역시 막내일 때 서운했던 일들에 대해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막내일 당시의 내가 훗날 전역하고 선임들과 만나 "그때 정말 힘들었다"고 소주 한 잔 하며 털어놓을 날이 올 거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제 모인 멤버들은 딱 내가 전입왔을 당시, 즉 내가 막내일 때의 발굴4팀 인원들이다. 군 복무 당시 우리 팀을 이끌던 간부님을 필두로, 내 위로 줄줄이 다 모인 것. 물론 몇 명이 더 있어야 완전체지만, 이들은 대부분 지방에 살거나 해서 연락이 잘 안 되고, 모이면 항상 서울권에 거주하는 이들이 모인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상황이다. 군 복무 당시에는 내가 여기서 제일 막내였는데, 전역한 지금은 내가 제일 맏형이다. 지금이야 선임들이 다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 등, 윗사람 대접을 받는데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우습다. 군 생활 할 때는 하늘 같던 선임이었고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던 이들이었는데... 이들 역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했던 게 버릇이었고. 전역하자마자 이렇게 상황이 역전되다니. 나이보다 계급이 우선이다보니 빚어지는 일이긴 한데, 재밌는 일이다.


아무튼 이들과는 두어 번 더 만난 적이 있긴 하다. 내가 전역하는 당일날도 한 번 만났고, 어제 만난 간부님 장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단체로 빈소를 찾았고. 또 이번에는 선임 한 명이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기에, 그걸 빌미로 또 한 번 만나 술잔을 기울인 것이다. 사실 처음에 이들과 만난다고 했을 때는, 다소 망설여졌던 것이 사실. 어쨌거나 그들은 내 기억 속에 항상 어려운 선임들이었기 때문이다. 후임 입장에서는 선임에 대해 항상 좋은 기억만 존재하지는 않는 법. 그래서 뭔가 그들을 다시 만난다는 게 껄끄럽기도 하고, 그들 역시 나를 대함에 있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전역한 후로는 내가 윗사람이니) 하지만 막상 몇 번 만나보니 그런 생각은 기우였고, 지금은 다들 좋은 형-동생 관계로 전환되어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생각해보면 전역자라는 그룹에 내가 포함되어 함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만약 정말 내가 군 생활을 막장으로 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후임이었다면 이 자리에 불러주기나 했을까. 그저 그룹에 끼지도 못하고, 그들의 술자리 안주가 되어 두고두고 씹혔겠지. 지금도 몇 명은 그런 신세다. 


아무튼 10월이면 내 맞후임도 전역을 하게 되고, 걔를 필두로 줄줄이 전역을 하게 된다면, 지금 내가 막내인 그룹처럼 전역자 모임이 활성화될까? 모임이 만들어지면 애들이 나를 불러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내가 아무리 애들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다지만, 어쨌거나 후임들 입장에서는 선임이었던 내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을 수 있으니. 걔네들 역시 나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만남의 성사 자체가 쉽지 않을 것 같긴 하다. 내가 군 생활을 그렇게 막장으로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애들이 전역자 모임에서 나를 소외시킨다면... 참 서운할 것 같다.



모임이 끝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흑석역 근처 '할매순대국'에 들러 뼈 해장국을 한 그릇했다. 


사실 여기도 내 군 생활의 추억이 어느 정도 깃든 곳이다. 현충원에서 복무했던 나는, 휴가나 외박/외출을 나올 때마다 동기 혹은 선/후임들과 아침을 같이 먹고서 각자 갈 길을 가곤 했다. 흑석역 '할매순대국'이 현충원 근처에서 아침식사하기에 제일 무난한 곳이어서, 대부분 여기서 해장국 한 그릇을 함께 먹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전역자들을 만나 추억에 젖은 겸, 집에 오는 길에 이곳에 들러, 혼자 앉아 해장국 한 그릇 했다. 전역한 지 겨우 3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의 군 생활은 늘 아쉽고 그리운 추억이다. 추억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그리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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