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국유단에서 선/후임 관계로 만난 동생과 29초짜리 단편 영화 하나를 찍었더랬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현충원을 주제로 한 '현충원 29초 영화제'란 공모전을 개최했는데, 바로 여기에 출품할 목적으로 찍었습니다.

영화를 촬영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한창 촬영을 해야 할 시기에 '장마'가 오는 바람에 다소 난항을 겪긴 했습니다. 그래도 비 그치면 바로 찍을 수 있도록, 온/오프라인으로 열심히 기획회의를 하고, 음원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 국가보훈처에 수시로 전화를 하는 등,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더랬습니다. 덕분에 장마가 끝나자마자 곧장 촬영에 돌입할 수 있었고, 마침내 오늘 아침 공식 홈페이지에 영화가 올라갔습니다.


영화 스토리는 저희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출신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돌아오지 못한 유해'에 촛점을 맞춰보았습니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싸우다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호국영령의 유해가 12만 5천여 위라고 하고, 그 전에 일제 강점 당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간 독립투사들의 유해 역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너무나 많죠. 이분들은 아예 통계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현충원에는 '위패봉안관'과 '무후선열제단'이 있는데, 바로 여기가 돌아오지 못한 분들을 위패로나마 모신 곳입니다. 지금도 이곳에만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들을 기다리며 유족들이 남기고 간 편지와 사진들이 눈시울을 붉히곤 합니다. 그래서 이 장소를 현장 답사한 뒤에, 바로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면 좋겠다 싶어서 주제 선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 모시는 것은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고,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은 국민 모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현충원에조차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그분들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며, 그분들을 잊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영화를 만들어보았습니다.

■ 영화 보러가기: http://www.29sfilm.com/1606970


[영화 정보]

제목: 현충원은 대한민국의 기다림이다

시놉시스

현충원은 단순히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안장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의 굵직한 사건 속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많은 이들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며, 누군가의 연인이고, 누군가의 자식이기도 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들을 위해, 또한 우리가 그분들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그들을 기다립니다. 

스탭 (STAFF)

감독: 유지호
촬영: 유지호, 박하은
기획: 김경준, 유지호
자료지원 및 검토: 김경준
배우: 함형민, 박하은, 유지호, 이현수, 설은환

솔직히 이번 영화 제작은, 감독을 맡은 친구가 다 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영상 편집 기술이 없어서, 이 친구가 밤새도록 열심히 만들었죠. 이 친구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왠지 제 스스로 무임승차하는 느낌이라 기획회의에서 나름 열심히 스토리를 짜내고, BGM 제공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등 신경을 좀 썼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의 빚이 남은 것 같아서, 남은 공모기간 동안 이렇게 홍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입니다.

이 영화제는 네티즌들의 추천과 덧글을 많이 받아야 수상에 유리하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희가 수상을 목적으로 영화를 만든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감독을 맡은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작은 상이라도 하나 타면 그 흘린 땀방울에 보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염치불고하고 여기저기 추천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추천을 하려면 가입을 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좋은 의미로 만든 영화이니만큼 적극적인 추천과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PS. 수상 여부를 떠나,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은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직접 편집까지 배우면서 함께 했더라면 더 의미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현충원의 의미를 널리 알리는 작업에 함께 동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보람찼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며 새로운 인연들과 만났던 것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다들 땡볕에 고생 많았는데, 모두 즐거운 경험으로 기억에 남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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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 내면서 사는 요즘입니다.


오늘은 서울 지역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질 정도로 심각한 더위 탓에, 집 안에 가만히 있기조차 고통스러운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푹푹 찌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제 보라매공원에 다녀왔습니다. 원래 무예 수련을 하러 자주 가는 곳이었지만, 어제는 다른 일 때문에 간 건데요, 바로 영화 촬영을 하러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웬 영화 촬영?'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저도 제가 영화를 촬영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영화 촬영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현충원 29초 영화제'란 공모전을 개최했는데, 부대 선임이기도 했던 동생이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저야 뭐 영상 편집 기술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관계로, 대부분 그 친구가 고생을 했죠. 저는 옆에서 멘트나 좀 봐주고, 소품 지원해주고, 촬영하러 갈 때 말동무나 해주는 정도였죠. 그래서 좋은 경험 삼아 했다고 생각합니다만, 혹여라도 상금을 받게 되면 나눠 먹기가 미안할 것 같아요.


아무튼 어제는 마지막 씬을 촬영하는 날이었는데요, 군에 간 남자친구와 곰신 여자친구가 재회하는 씬이었습니다. 보라매공원 분수광장에서 분수를 배경으로 한 컷 찍고, 잔디광장을 배경으로도 한 컷 찍고... 날이 많이 덥다보니까 1시간 만에 급하게 촬영을 끝냈습니다. 사실 영화 러닝타임이 29초라서, 길게 찍을 필요도 없더라고요.


오늘 촬영 현장의 모습을 폰카로 담아봤습니다.



밤 늦게 완성된 영상을 봤는데, 제법 잘 만들었더군요. 영상 편집에 있어 아무런 도움을 못 준 게 내내 마음에 걸립니다만, 이 영화제 자체가 네티즌들의 추천을 많이 받아야 수상에 유리한 구조라서, 열심히 홍보하는 걸로 마음의 빚을 좀 덜어보려 합니다.


영상의 내용은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게재가 되면, 그때 공개하겠습니다. 


Coming Soon~!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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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SBS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나도펀딩'이라는 펀딩 사이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도 6.25 전쟁 발발 제66주기를 맞아, 뭔가 의미 있는 펀딩을 한 번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SBS와 공조하여 의미 있는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의 목적은 바로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이 쓸 물품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요즘 날씨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많이들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고생이 많을 이들은 바로 군인이란 직업을 가진 이들이겠지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불철주야 전/후방에서 고생하는 우리 국군 장병들... 이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요. 


특히나 제가 소속되어 있던 국유단 후임 발굴병들을 생각하면 참 안쓰럽습니다. 우리들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더위를 잠시나마 식히고 있는 그 시간에도, 우리 국유단 발굴병들은 여전히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이름 모를 산야를 오르고 또 오르고 있습니다. 


저도 발굴병으로서 군 복무를 하며, 두 번의 여름을 지내봤기에 그 열악한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더운 이 날씨에, 무거운 발굴장비와 물자를 짊어지고서 높은 산을 오르는 건 정말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유해가 식별되기라도 하면,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정밀발굴을 실시해야 합니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아래, 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유해를 노출하는 과정도 결코 녹록지는 않습니다. 달려드는 산벌레 떼는 말할 것도 없고요. 여름에 발굴할 때는, 지쳐서 말할 힘도 없더군요.


그래서 현장에서 고생하는 우리 후임 발굴병들을 위해, 작게나마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이번 펀딩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펀딩은 7월 31일까지 진행되며, 목표액은 200만원입니다. 모금된 금액은 더위에 고생하는 국유단 소속 발굴병들을 위한 물품(아이스패드 및 물수건 등) 후원 비용 및 발굴된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례비용으로 쓰일 것입니다.


뜻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소액이라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액마저도 부담스럽다면, 주위 지인들에게 알려주기만이라도 해주십시오. 애국은 꼭 총들고 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야만 애국은 아닙니다.


펀딩 프로젝트 링크: http://nadofunding.sbs.co.kr/project/51/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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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35008265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설악산 상봉/신선봉을 가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1)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연재!


​여러분! 저는 2014년 8월부터 2016년 4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에서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였는데요, 유해발굴병으로 복무하며 겪은 에피소드들을 바탕으로, 이번 6월부터는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라는 주제의 시리즈를 연재하려 합니다. 서포터즈 중 유일한 국유단 출신으로서, 앞으로 여러분께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을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를 가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좀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발굴지 중 하나라는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에서의 유해발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그때 그 당시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잊을 수 없는 그곳, 설악산 상봉/신선봉


유해발굴병들은 보직의 특성상,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6·25 전사자 유해발굴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러다보면 유난히 인상 깊은 지역이나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요, 제겐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이 그랬습니다.



▲ 설악산 상봉 발굴현장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2014년 7월에 입대하여 아직은 어리바리한 이등병 시절이었던 그해 10월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속한 발굴4팀은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에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는데요, 이곳 설악산 상봉과 신선봉 일대는 1951년 5월 당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가 시작된 이후,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제6사단 및 제12사단에 맞서 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밀고 밀리는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였습니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기에, 이곳에서 산화한 호국영령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 군번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의 용사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끔찍한 악몽으로만 다가왔던 상봉과의 첫 만남


상봉에 오르기 위해, 등산로 초입이었던 옛 미시령 휴게소 터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자욱한 안개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등산로와,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지 20분이나 지났을까요?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다리의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저를 보며 혀를 차던 선임들은, 제가 메고 있던 발굴장비마저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저 역시 다시 이를 악물고 오르기 시작했는데요, 여느 산과는 달리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산이었기에, 바위틈을 손으로 비집으면서 간신히 올라야만 했습니다.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힘든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등병이었던 제게 해발 1,200m가 넘는 험준한 상봉과 신선봉의 첫 기억은 ‘끔찍한 악몽’이자 ‘가혹한 시련’이었습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던 현장


그렇게 온 몸으로 기다시피해서 간신히 도착한 정상. 하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도 잠시, 이내 제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곳에 유해가 있단 말이야?’




▲ 상봉에서 유해를 발굴하는 병력들의 모습


정상에 오른 제 눈앞에 펼쳐진 발굴현장의 모습은, 그동안 봐왔던 발굴현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온 사면이 바위로 뒤덮인 산에서 대체 어떻게 발굴을 진행하며, 이곳에 과연 유해가 있긴 한 것일까...


발굴기법 역시 생소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보통 유해발굴은 삽과 호미 등을 이용해,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사면을 깊게 파면서 퇴적층 내 유해의 매장 여부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굴토를 진행하는데요, 상봉은 이런 기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답니다.



▲ 스크린(발굴장비)을 이용해 조각유해를 찾는 필자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산에 오른 발굴병력들은 저마다 작은 손전등과 집게 하나씩만을 휴대한 채, 전 사면을 뒤덮고 있는 바위틈 사이사이로 손전등을 비춰가며, 긴 집게로 바위틈 사이의 유해를 찾는 식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에, 모두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식별된 첫 유해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위틈 사이로 시레이션(전투식량), 칫솔, 탄피 등 유품들이 쏟아지며, 차츰 전쟁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위틈 사이에서 첫 유해가 식별된 순간!


그 당시의 솔직한 감정은 ‘놀라움’과 ‘당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곳에 유해가 있었다니!” 함께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저처럼 의문을 갖고 있던 발굴병력들 역시 “정말 이 땅에 전쟁이 있긴 있었구나!”하며 탄성을 내지르기 시작했습니다.



▲ 상봉에서 식별된 조각유해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러나 식별된 유해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놀랐던 감정은 차츰 안타깝고 숙연한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발굴되는 유해들의 형태가 그 부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 발굴된 유해를 정성껏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보통 많은 사람들은 유해발굴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유해의 형태를 떠올리곤 합니다. 실제 발굴현장에서는 두개골 포함 잔존율이 60% 이상인 유해에 대해서는 ‘완전유해’라 부르고, 그 미만인 유해는 ‘부분유해’라고 명명합니다. 하지만 상봉에서 발굴된 유해는 부분유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게 ‘조각유해’라 불리웠는데요, 정말 심하게 훼손된 유해 중에는 성인 남성의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유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유해를 입관하고, 태극기로 관포하는 모습

출처: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4wdcamera/220400811521)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왜 유달리 조각난 유해들이 많이 식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의 양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설악산 상봉에 올라서면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는데요, 바로 적의 군함들이 동해바다에서 이곳 상봉에 주둔한 아군을 향해 무차별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많은 호국영령들이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산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의 형태를 보면서, 당시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 유난히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유난히 먹먹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설악산 발굴


당시 현장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제 심경은 복잡했습니다. 맨 몸으로 버티고 서 있기에도 힘든 이 험한 산에서,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스러져갔어야 할 젊은 넋들... 6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국의 ‘귀환’ 명령만을 기다리며 외로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안타까운 영혼들을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려왔기 때문입니다.



▲ 약식제례 및 유해봉송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곳에서 식별된 유해들은 사실상 신원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DNA 대조를 위해서는 유해에서 시료 채취를 해야만 하는데, 이처럼 작은 조각유해에서는 DNA 시료 채취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설악산에서 유해를 수습할 때의 기억은 가장 가슴 먹먹한 기억으로 제게 남아있습니다.


​잊지 말자, 그들을...


​2016년 4월 13일, 마침내 1년 9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면서 저는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현장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는 거친 숨을 내몰아쉬며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과, 현장에서 유해를 수습하던 기억, 조각유해들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리고 혹여나 우리의 불찰로 인해 미처 찾지 못해 여전히 그곳 어딘가에 잠들어있을지도 모르는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송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호국영령의 유해들이 여전히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분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조국의 품으로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 부디 잊지 말아주세요.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는 바로 ‘그들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아울러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호국영령들의 신원확인을 위해, 유가족 DNA 시료 채취에도 적극 동참하는 것. 이것이 호국영령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일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사진을 제공해주신 조선일보 박상훈 기자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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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가 제작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 영상입니다. 오늘 아침에 서 교수 페이스북 계정에 공개가 되었더군요.


나레이션은 걸그룹 '걸스데이'의 혜리가 맡았네요. 군 복무 시절, <진짜 사나이>를 보면서 정말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국유단이라는 인연으로 다시 이렇게 만나는군요. (실제로 인연이 없다는 게 한스럽지만...)


제가 한창 군 복무를 하던 2015년을 기점으로 우리 단에 대한 홍보가 열심히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MBC <진짜 사나이 2> 특집 프로그램부터, 각종 다큐멘터리, 언론 보도 등등... 지금 제가 활동하고 있는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도 그 산물이라고 할 수 있죠.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워낙 그 의미가 큰 국가적 보훈사업이기 때문에, 현충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만 반짝 홍보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됩니다. 의미도 의미거니와 시간이 흐를수록 남아있는 유가족들도 점점 줄어들고 그만큼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도 버거워지기 때문에 '시간싸움'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꾸준한 홍보 활동으로 유가족들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홍보 활동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국유단 출신이거나, 국유단에서 군 복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군 입대를 앞둔 이들에게는 한 번 하는 군 생활인데, 좀 더 보람차고 의미있는 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는 방편도 될 것이고, 이미 국유단에서 군 복무하고 있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의미 있는 군 생활을 하고 있구나"하면서 힘든 군 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저도 그랬고요.


여하간 전역하고 나서 우리 부대 이야기가 이렇게 화제가 될 때마다, 내가 수행한 임무의 가치가 남다르다는 생각에 가끔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국민적 관심도가 증가함에 따라, 국유단도 단 차원에서 좀 더 스스로 되돌아보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S. 영상에 저도 잠깐 나옵니다. 살짝 나와서 못 알아보실 수도 있겠네요.


PS 2. 현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공식 블로그에서 '영상 소감 이벤트'도 진행 중입니다. 한 번 참여해보세요~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29571686)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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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2부] 28명의 호국영웅 메신저, 마침내 첫 걸음을 내딛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1부에서는 발대식에 앞서 우리 서포터즈들이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견학했던 시간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오늘 2부에서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공식적인 첫 걸음을 내딛는 발대식 현장을 생중계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발대식이 열리는 생생한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내딛은 첫 걸음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현충원 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으로 복귀한 서포터즈들은 곧바로 국유단 본청 앞에 모여 발대식 준비를 마쳤습니다. 발대식은 이학기 단장(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요, 먼저 서포터즈로서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선서식’이 있었습니다. 선서 대표로 예비역 중사 출신의 신대식 씨(27,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성우과)가 활약해주었는데요, 성우과 재학생인만큼 멋진 목소리로 28인 서포터즈의 결의를 알렸습니다.


(사진: 발대식을 통해 첫 걸음을 내디딘 국유단 제1기 대학생 서포터즈)


선서 낭독이 끝난 다음에는 ‘서포터즈 조끼 및 국유단 뱃지’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을 비롯한 발굴과, 감식과, 대외협력과, 계획운영과 등 국유단의 조직을 대표하는 과장급 간부들이 직접 서포터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끼를 입혀주고, 국유단 뱃지를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사진: 국유단 조끼와 뱃지를 수여받는 서포터즈들)


이날 서포터즈들이 입은 조끼는 실제 발굴현장에서 발굴병들이 착용하는 국유단의 상징적인 유니폼이고, 단 뱃지 역시 국유단 소속 장병들에게만 지급되는 뱃지라고 합니다. 서포터즈들이 이를 수여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다 같은 국유단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이로써 국유단 서포터즈 1기가 마침내 첫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훈훈했던 간담회 현장


발대식을 마친 서포터즈들은 2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이학기 단장과의 간담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은 간담회에 앞서, 짧게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포터즈가 된 28명 모두 독특한 이력과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유일하게 국유단에서 발굴병으로 전역한 저를 비롯해, 예비역 육군 중사, 학군단(ROTC) 소속 장교후보생, 발굴병 지원 희망자 등 그 면면이 다채로웠습니다. 특히 28명 중 여성이 15명이고 남성이 13명으로 여성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각기 개성 있는 서포터즈들의 면면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이학기 단장은 “이 자리에는 예비역 육군 병장이나 중사도 있고, 또 앞으로 장교가 되어 군을 이끌어 갈 분들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해서 다양한 꿈을 펼칠 대학생들이 다 모인 것 같다”며 국유단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원해준 서포터즈들에게 감사의 말을 표했습니다.


(사진: 발대식 플래카드)


이어 이학기 단장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의를 설명하였는데요, “전 세계에 자국의 전쟁을 수행하다 산화한 전사자들을 발굴하는 부대가 단 두 곳밖에 없는데, 하나가 미국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다”라며 “전 세계 각국의 고위 인사들이 우리 단을 방문할 때마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존재를 알고 큰 감동을 받는데, 그때마다 뿌듯하다”고 밝혔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ormnd/17218590035


또한 현재 유해발굴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요, “국유단 소속 발굴 팀이 총 8개 팀이 있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을 8개 지역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며 “지금이야 그래도 덜 힘들지만, 6~7월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발굴병들이 매일 산에 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웬만한 사명감과 책임감 없이는 임무 수행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서포터즈들은 평소 궁금했던 사항들에 대해 가감 없이 질문을 던졌는데요, 특히 한 서포터즈가 “단장님이 목에 걸고 계신 군번줄(인식표)이 인상 깊다. 항상 인식표를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좌중에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이에 이학기 단장은 “물론이다. 육사를 졸업한 이후 지금껏 퇴근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인식표를 풀어본 적이 없다”고 밝히며, “마침 인식표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러분께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 점이 있다”고 하여 좌중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진: MBC <진짜 사나이 2 – 유해발굴감식단> 편에서 인식표를 발굴하는 장면)

출처: MBC <진짜 사나이 2>


이학기 단장은 “유해가 나왔을 때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함께 나온 유품이다. 그리고 유품 중에서도 유해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식표가 확실한 증거인데, 이 인식표를 발굴하기가 정말 힘들다”며 “인식표가 없다면 유가족 DNA 시료라도 있어야 발굴한 유해의 DNA를 대조하여 유가족을 찾을 텐데, 남아계신 유가족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아 유해발굴사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운 감정을 토로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널리 알려져야 유가족 DNA 시료 채취가 활성화되고, 그래야 많은 분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서포터즈 활동에 임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간담회가 끝났습니다.


대학생 서포터즈, 어떤 활동을 하나요


이어 앞으로 서포터즈들이 수행해야 할 활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요, 국유단 서포터즈들은 앞으로 국유단과 국민 사이의 다리가 되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쉽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방편으로 매월 1건 이상의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해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게재하게 됩니다. 또한 28명을 지역별로 7개 조로 나누어 연간 2회 이상의 오프라인 팀별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전국 각지를 다니며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사진: 간담회 및 오리엔테이션이 열린 2층 회의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자원들이라는 것을 방증하듯, 오리엔테이션 내내 쉴 새 없는 질문이 쏟아져, 2층 회의실은 금세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습니다. 이에 이원웅 소령(공보장교·육군 소령)은 “여러분이 처음이라 누구보다 열의를 가지고 임하려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오히려 처음에 너무 열정을 불태우면 나중에 지칠 수 있다. 열심히 활동하되 임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항상 초심을 잃지 말아 달라”고 특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에는, 서포터즈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상견례’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 만나 어색할 법도 했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마냥 서로 명함도 교환하고, 조별로 단체사진도 촬영하는 등 금세 친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던 서포터즈들의 이야기


그럼 과연 이번에 출범한 서포터즈들은 어떤 지원동기를 가지고 서포터즈에 지원하였고, 또 어떤 각오로 활동에 임하게 될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앞서 선서 대표로도 활약해주었던 신대식 씨는 예비역 중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요, 실제로 군 복무 중에 국유단의 홍보 포스터를 보고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 시에 군인은 총을 들고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지만, 군 복무 당시에는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총을 들 일이 없었다”며 “그래서인지 전역하고서라도 나라를 위해 더 봉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태극기를 바라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 동기를 밝혔습니다.


(사진: 공보장교와 함께 찍은 1조 단체사진)


신드보라 씨(23, 창원대 국제관계학과)는 서포터즈를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진짜 사나이> 유해발굴감식단 편을 보고 알게 되었다”며 “주변에 국유단을 널리 알려, 국유단이 한 분의 유해라도 더 찾을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 특히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할 것이다”라는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허도휘 씨(23, 동국대 정보통신공학과)는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난 날이 되면, SNS에 관련 글을 올리거나 프로필 사진을 관련 사진으로 바꾸는 등 주위에 알리기 위해 작은 노력들을 해왔다”며 “국유단 서포터즈를 통해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해준 호국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서포터즈를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동기를 밝혔습니다.


앞으로의 활동 포부를 묻는 질문에는 “단 한 명의 유가족이라도 더 DNA 시료 채취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하겠다”며 “현재 여러 지역축제나 학교축제들이 열리는 계절이기 때문에, 젊은 층을 겨냥한 학교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을 계획 중이다”라고 하여 벌써부터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나타냈습니다.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


이처럼 뜨거운 애국심과 열정을 갖고 출범한 서포터즈들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도 남다른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부여받아, 지난 1년 9개월 동안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전역한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라는 긴 수식어는 제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사진: 16년 전반기 발굴작전 출동을 앞두고 후임들과 촬영한 단체사진)


그래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누구보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와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는 발굴병 출신으로서, 네티즌 여러분께 실제 발굴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나 유해발굴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들을 재밌고 생생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8개월 동안, 저를 비롯한 28인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들의 활동을 열심히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 2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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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1부] 서포터즈,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가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5월 13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본청 앞에서 열린 발대식을 통해, 드디어 28명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하였는데요, 오늘은 그날의 뜨거웠던 현장 분위기를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저와 함께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발굴지로 가는 길

 

아직은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오던 5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아침부터 젊은 대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바로 치열한 심사를 뚫고 최종 선발된 1기 국유단 서포터즈들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발대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출범을 알릴 서포터즈들은 발대식에 앞서,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충원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도착한 곳은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가리산. 바로 오늘 우리가 올라가야 할 발굴현장으로 이어지는 능선이었습니다. 이곳 가리산 일대는 6·25 전쟁 당시 매우 치열했던 '벙커고지 전투'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벙커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가 있었던 1951년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미 제2사단 38연대가 홍천 북방의 벙커고지(778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12군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입니다. 당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던 미 제2사단은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하루에 제한되어 있던 탄약소모량까지 넘겨, 하루 만에 3만 발의 엄청난 포탄을 쏟아붓는 등, 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끝내 홍천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였으며, 아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사 출처: http://www.korea-dmz.com/home/page/sub02/03/0054600547309805.asp)


 

하차지점에서부터 실제 유해발굴이 이루어지는 현장까지는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요,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무수히 반복되는 등산로는 금세 서포터즈들의 등을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들었습니다. 발굴병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산 타는 게 일상이었던 저조차도 오랜만에 타는 산이었던지라 힘들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중간 중간에 걸려있던 현수막의 문구들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오르는 이 길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어 힘들다는 생각을 잊게 했습니다.



숙연했던 발굴현장 견학

 

마침내 도착한 무명 755고지 발굴현장. 서포터즈들은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곧바로 6·25 전사자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는 현장을 직접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출입금지' 라인이 둘러쳐진 트렌치(유해를 노출하기 위해 유해 주위로 넓게 판 굴) 안에는 이미 한 분의 유해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는데요, 서포터즈들은 먼저 헌화와 거수경례, 묵념으로 고인에 대한 예를 표한 뒤에, 이 지역의 발굴을 책임지는 안순찬 발굴팀장(육군 원사·발굴 1팀장)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순찬 팀장은 지표 위에 드러난 유해와 함께 나온 유품들에 대해 설명하며, 전문발굴병들이 어떻게 유해를 식별하고, 수습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종 선발된 서포터즈들이었던만큼, 누구보다 관심도 많고 질문들도 날카로웠는데요, 이날 서포터즈들이 던진 질문과 이에 대한 발굴팀장의 답을 정리해봤습니다.



Q. 아군인지 적군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A. 유해가 발견되었을 때, 함께 나온 유품이 신원확인의 결정적 단서가 된다. 현장에서 나온 유품을 통해 전문발굴병이 1차 피아판단을 하지만, 더 정확한 감식을 위해 중앙감식소로 모셔서 최종 판단을 하게 된다.

 

Q. 유해발굴을 하는 지역은 어떻게 선정되는가?


A. 기본적으로 '전사(戰史)'를 공부함으로써, 전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있었던 지역들을 분류해 선정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발굴작전을 하기 전, 선행 탐사를 통해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들을 식별하고 발굴에 들어가게 된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다해 수행하는 유해발굴작전

 

이날 현장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수습했던 송재홍 상병(발굴1팀 분대장)은 "현장에서 유해가 나오면, 전적으로 우리들이 맡아서 수습하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수습에 임할 수밖에 없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상태에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수습하려 노력한다"며 현장에서 유해발굴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남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 역시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해의 DNA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을 착용하고서 조심스레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에, 매우 큰 감명을 받은 듯 했습니다. 단 한 분의 유해라도, 이렇듯 항상 정성을 다해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참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이어 안순찬 팀장은 유해를 발굴할 때 쓰이는 장비들과 현장에서 나온 유품들을 소개했는데요, 실제 유해 탐사 시에 사용되는 '금속탐지기'의 운용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신기함에 눈에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하지만 신기함도 장시, 서포터즈들은 다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전투화 밑창, 탄피, 탄창, 유리병, 대검 등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품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60여년 전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신필순 발굴과장(육군 중령)은 현장에서 나온 수류탄을 보여주며, "이 수류탄은 안전핀도 그대로 있는 상태라, 지금도 폭발 위험이 있다. 이처럼 발굴병들은 항상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지만,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오늘도 산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禮를 다해 모셔지는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

 

이어 서포터즈들은 유해의 입관 과정을 지켜보았는데요, 입관 과정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수습한 유해들을 한지에 조심스레 약첩(한지로 유해를 감싸는 것)한 뒤 예단(고인의 마지막길에 보내는 예물)과 함께 입관하고, 다시 관 뚜껑에 '6·25戰死者之柩(6·25전사자지구)'라고 쓰여진 명정(관에 덮는 천)을 덮은 뒤, 마지막에 태극기로 관포함으로써 입관 의식을 마치게 됩니다.



유해가 모셔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서포터즈들은 현장에서 발굴되는 한 분 한 분의 유해가 최선의 예를 다해 모셔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입관을 하는 발굴병들의 손길을 지켜보며, 서포터즈들 역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경건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입관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자, 발굴부대인 11사단 장병들과, 국유단 전문발굴병 및 서포터즈 등 현장에 위치한 모든 인원이 태극기 앞에 도열했습니다. 바로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내드리기 위한 '약식제례'와 '유해봉송' 절차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인원들은 고인께 잔을 올린 뒤, 거수경례와 묵념으로 예를 표했습니다. 이어 유해를 봉송하면서 모든 의식이 마무리되었는데요, 이때 유해가 모셔진 관을 들고 봉송하는 역할은, 유해를 최초 발견한 발굴부대 병사가 맡아 수행하게 됩니다. 유해가 지나가는 길에서, 현장에 있던 인원들은 2열로 도열한 뒤, 다시 한 번 거수경례로 유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던 하산길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산을 내려가는 서포터즈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무거운 듯 했는데요, 교과서로만 접하던 전쟁의 흔적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역사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계시는 호국영령이 13만여 위나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서포터즈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역할이 막중함을 깨닫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유해발굴현장 견학을 통해 다시 한 번 활동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은 서포터즈들! 이제 공식적인 발대식을 통해 진정한 서포터즈로 거듭나는 일만 남았는데요, 호국영웅 메신저들의 힘찬 출발을 알리는 현장 소식을 2부에서 생생하게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2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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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번째 호국영웅,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가족의 품

- 故 양만승 경위 유해송환 행사 현장에 다녀오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오늘은 서포터즈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행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귀환 행사인데요, 처음에는 덤덤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했던 저도,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어느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니, 여러분도 어떤 행사인지 많이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겠습니다.


호국영웅 귀환행사가 열리다


지난 5월 18일, 경기도 수원의 어느 식당 앞 골목.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던 골목이 갑자기 외부인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웅의 유해가 유가족에게 인도되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호국영웅은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그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의 신분으로 적과 싸우다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는데요, 그의 생애를 잠시 알아보고 갈까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무궁화꽃 한 송이


故 양만승 경위는 1927년 4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양 경위가 24세 때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고, 적화통일의 위기에 처하자, 경찰 역시 ‘軍과 더불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신념 아래, 적극적으로 국토 보위에 나서게 되었는데요,


1950년 7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벌어진 ‘호남지역 전투’에 양 경위 역시 해남경찰서 소속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호남지역 전투는 전라북도 일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6사단에 맞서, 우리 국군 5사단과 7사단 그리고 경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벌인 방어 전투였습니다. 이때 해남경찰서 소속 1개 소대 병력들은 영광 삼학리 지역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방어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7월 23일, 치열한 접전 끝에 양 경위는 적군의 총탄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렇게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발굴되기까지 6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113번째 신원확인의 주인공


유가족 송환 행사는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은 행사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유가족인 외조카 김점덕 씨의 손을 맞잡으며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이에 김점덕 씨는 “감사합니다. 국방부에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어 김종성 감식과장에 의해 故 양만승 경위를 발굴하게 된 과정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습니다. 


1950년 7월 23일, 영광 삼학리에서 적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양 경위는 함께 전사한 동료 37명과 함께 집단으로 임시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7년의 어느 날. 영광 삼학리에서 전사한 경찰관들의 유해가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은 유해발굴감식단은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이 지역 일대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38위의 호국영령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독수리 문양 뱃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 뱃지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들이 소지하고 있던 뱃지라고 하는데요,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해남경찰서의 경찰사(史)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였고, 그 결과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현 발굴지점에서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것으로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전사한 경찰들의 유가족을 찾아 시료 채취를 한 뒤, DNA 대조로 38위 중 9위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29위의 호국영령은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용사’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이 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로 양 경위도 있었습니다.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다시 유가족을 수소문해 찾기 시작했고, 추가적으로 9위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 경위 역시 이 과정에서 유가족을 찾아 신원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요, 이로써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이루어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선진국의 척도


김종성 감식과장의 브리핑이 끝난 뒤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유가족 위로패’와 양 경위를 발굴할 당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를 담은 ‘호국의 얼’ 함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이학기 단장은 국방부 장관을 대신하여 유가족에게 ‘전사자 신원확인 통보서’를 전달함으로써 행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경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김태수 수원중부경찰서장은 “6·25 전쟁 당시 많은 경찰관들이 전사했는데, 경기도에서만 6,700여명이 전사했다. 아직 못 찾은 분들도 많은데, 나라를 지킨 호국영웅들에 대한 보답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행사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요, “아직 못 찾은 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유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분들을 찾아서 전사자 신원확인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찰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군을 대표하여 참석한 51사단 168연대장 박일권 대령 역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故 양만승 경위의 유해를 발굴해주어서 다행스럽다”며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국가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얼마나 잘 대우해주는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을 찾아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남매의 상봉


故 양만승 경위에게는 유일한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 결국 오빠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15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양 경위의 여동생은 임종 직전, 자식들에게 “나중에라도 꼭 너희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마침내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 외조카 김점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그녀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외삼촌을 찾아 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다”고 연신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양 경위의 매제인 김용길 씨 역시 “아내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반갑겠는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오빠였으니까...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무 아쉽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 이제는 하늘에서 남매가 상봉하여,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남매의 정(情)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았습니다.


15년 만에 받든 어머니의 유언


행사가 끝난 뒤, 또 다른 유가족인 김철현 씨(외조카)에게 오늘 행사를 지켜본 소회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며 “갑자기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가족 모두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또 그는 “외삼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께서 누누이 외삼촌에 대해 말씀하셨다”며 “어머니께서는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에게 꼭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회고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유가족 DNA 시료 채취, 그리던 가족을 찾는 길


이처럼 유해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것이 곧 국가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들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책무라고도 할 수 있으며, 6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유가족의 한(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발굴된 유해가 모두 신원을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번에 귀환한 故 양만승 경위 역시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되었는데요, 유해발굴감식단이 15년 동안 발굴한 국군 전사자는 총 9,100여위. 그중 단 1.2%의 유해만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신원확인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 유가족의 DNA를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유해발굴 뿐만 아니라, 전사자를 찾지 못한 유가족의 DNA 시료 채취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에, 유가족 DNA 시료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또 유가족 DNA 시료 채취라는 것에 대해 생소한 분들은 복잡하고 무서운 병원검사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가족 DNA 시료 채취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면봉으로 입 안의 타액(침)을 적시는 것만으로, DNA 시료가 충분히 확보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단 1분의 투자가 여전히 60년 동안 차디찬 땅 속에서, 혹은 ‘무명용사’라는 이름 아래 현충원에 잠들어있는 호국영웅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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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18173026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한 후, 처음으로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글!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첫 번째 글이, 내가 쓴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특성상, 내가 보낸 원본 글이 100% 다 실리지 못하고, 반토막 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잘 써서 다 올리고 싶었지만, 용량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담당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블로그 포스팅이란 것 자체가 너무 길면 또 지루해질 수도 있어서... 포인트만 담아 글을 짧게 쓰는 것도 중요한 글쓰기 요령인데, 나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볼까나.


PS. 개인 블로그이니만큼 나중에 원본 글도 따로 올릴 생각이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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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최종 합격자 발표가 떴다.


결과는... 최종 합격!


솔직히 지원자 중 유일한 전역자 출신인데다가, 얼마 전까지 한솥밥 먹던 식구들이었는데 안 뽑아줬으면 정말... 서운할 뻔 했다. 뭐 어쨌거나 붙었으니까... ㅋㅋㅋ


어제 면접 때도 강조했지만, 나의 유일하다시피 한 강점은 '국유단 출신'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국유단 출신이라고 해서 내가 특별한 존재라거나, 남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1년 9개월 가까이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면서, 유해발굴에 대해 빠삭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점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그래도 국유단 출신인데 비국유단 출신보다 더 잘해야지,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부담감이랄까?


아무튼 전역자 출신으로서 전역 후에도 부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몸소 보이고 싶다. 그래야만 앞으로 2기, 3기가 계속 배출될 때에도 또 다른 전역자들이 열심히 지원할테니까...


PS. 다음 주 금요일 발대식 때 발굴현장 체험 간다는데... 우리 팀 발굴지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ㅋㅋㅋ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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