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수원대 이사회의 날치기 총장 임명을 규탄한다


지난 12일, 수원대학교 운영재단인 학교법인 고운학원 이사회는 이인수 총장의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총장은 사학비리 문제로 자신에게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학교발전을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말만 놓고 보면 이 총장의 자진사퇴는 학교를 위한 용기 있는 결단처럼 비춰진다.


과연 그럴까. 그동안 학생들의 꾸준한 사퇴 요구에도 버티던 이 총장이, 파면이라는 교육부의 중징계 방침이 발표되자마자 물러난 것은 아무래도 미심쩍다. 실제로 이 총장의 사표가 수리되자마자 많은 언론이 의문을 제기했다. 사표가 수리된 시점이 미묘하기 때문이다.


사립학교법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미스터리가 모두 풀린다. 현행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임원취임승인 취소 또는 파면된 자는 5년, 해임된 자는 3년 간 학교법인의 임원이 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총장이 중징계를 받기 전 자진사퇴하게 되면 언제든지 다시 총장직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 총장의 자진사퇴를 두고 ‘꼼수 사퇴’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셈이다.


더욱이 이사회는 이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 기습적으로 박철수 수원과학대 총장을 후임 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교육부는 이 총장 뿐만 아니라 그의 비위를 감싼 이사회에 대해서도 이사 8명 중 7명의 임원취임승인 취소라는 중징계를 내리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후임 총장을 기습적으로 임명한 것은 명백한 날치기 임명이며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꼼수로 가득 찬 행보일 수밖에 없다.


이사회의 날치기식 신임 총장 임명은 현재까지의 숱한 비리와 적폐에 대해 청산을 부르짖었던 수원대 구성원 모두의 목소리와 교육부의 징계를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일 수밖에 없다. 횡령· 배임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총장의 측근을 총장 자리에 앉히는 것은 변화의 불씨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이며, 지금까지의 과오를 똑같이 되풀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박철수 총장이 아니더라도, 우리 수원대 학생들은 이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총장을 우리의 총장으로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그들 모두가 중징계 조치를 받은 데서 알 수 있다시피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행보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사회의 일방적인 날치기 총장 임명을 규탄하는 바이다.


다행히 교육부는 이사회가 일방적으로 이 총장의 사표를 수리한 데 대해 “현행법상 위법”이라며 ‘무효’ 혹은 ‘취소’ 사유가 됨을 밝혔다. 이에 따라 이사회가 이대로 이 총장의 사표 수리를 강행할 경우,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이 총장의 사표 수리가 무효임으로 이사회의 신임 총장 임명 역시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 수원대 학생들은 교육부의 전례없는 강경한 조치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한다. 이제 우리는 이인수 총장과 고운학원 이사회에 대해 당장 신임 총장 지명을 철회하고 교육부의 징계 조치를 겸허히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수원대 학생 모두는 교육부에 공정하고 지혜로운 관선이사의 파견을 요구하며, 학생들이 직접 총장을 선출하는 ‘총장 직선제’의 실현을 희망한다. 교육부는 수원대 학생들의 이러한 바람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수원대 학생들은 더 이상 ‘수원대를 위해 떠난다’, ‘수원대를 사랑하고 발전을 꾀한다’는 뻔한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대학의 진정한 주인이자 지성인으로서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고, 앗아가는 자들의 최후를 지켜볼 것이다. 아울러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학교의 발전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총장과 이사회를 맞이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할 것임을 천명하는 바이다.


2017년 11월 14일

수원대 권리회복 민주학생운동(U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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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지금 다시 장준하와 <사상계>를 읽어야 하는 이유


지금으로부터 꼭 42년 전인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기슭에서 잡지 <사상계>의 발행인을 지냈던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채 발견됐다. 평소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암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정권 차원의 암살 의혹이 제기될 만큼, 당시 박정희 정권에게 장준하는 매우 두려운 존재였다. 그것은 한평생 조국의 독립과 독재 타도를 부르짖어온 그의 일생이 말해주고 있거니와, 특히 권력자들은 장준하의 분신과도 같은 잡지 <사상계>를 두려워했다.


1953년 장준하에 의해 창간된 <사상계>는 197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고, 시민들에게 민주화의 열망을 심어줬다. 4.19 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림으로써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잡지 역시 <사상계>였다.


장준하가 <사상계>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주권을 가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설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권자의 관용은 미덕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교살"이라고 부르짖었다. 집권층의 폭주에는 그를 수수방관하는 시민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왜, 어찌하여 오늘의 질곡을 용납하고 이 현실을 초래한 원인을 우리 주권자는 방관만 하였던가? 언제나, 오직 주권자의 권능만이 조국의 진로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그러하거늘, 집권층은 조국의 진로를 오도하면서 주권자의 나침반의 평형을 교묘히 교란시키고 있다. (···중략···) 주권자의 우(愚)는 조국을 난파선으로 침몰시키고 말 것이다" - <주권자의 관용이 민주주의를 교살한다> (<사상계>1967년 4월 호 권두언)


모든 권력을 틀어쥔 채, 우리의 권리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 앞에서 체념하고 방관한다는 것은 스스로 노예되기를 자처하는 꼴이다. 장준하는 "당연한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예로부터 노예라고 했다"며 노예정신에서 벗어나라고 일깨운다. 우리에게는 불의한 권력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상기시킨다.


"군정을 부인하고 번의와 의혹의 집권을 비판하고 부정부패와 폭력에 항의한 민중의 소리가, 체념 속에서 침묵과 굴종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오늘 이 집권체제의 정체를 정확히 직시하고, 민족사의 전진은 민중이 악한 집권에 대하여 준엄한 저항과 심판을 내리려는 결단을 선택할 때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저항의 자세를 적극화하자> (<사상계>1967년 2월 호 권두언)


오늘날 <사상계>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수원대 학생들이다. 각종 언론보도와 1심 판결로 드러났다시피 지금의 학교는 “이게 학교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학내 민주주의가 크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총장 일가가 교내의 모든 권력을 틀어쥔 채, 교수들을 부당 해고하고 학생들의 권리를 우롱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수원대가 2015~2016년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연속 D등급을 맞으면서 부실대학으로 전락하는 동안, 우리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비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총장이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총장 연임에 성공했을 때도 그 넓은 캠퍼스 어디에서도 총장의 연임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한 번 찾아보기 어려웠다. 보다 못한 몇몇 학생들이 뛰쳐나와 부착한 대자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뜯겨나가고, 학우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의무가 있는 총학생회는 앞장서 싸울 것을 요구하는 학우들의 호소에도 끝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분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성’이라 불리기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불의 앞에 분노할 줄 알고, 분노하면 일어설 줄 아는 이들이야말로 지성의 자격이 있다. 눈앞의 불의에 항거할 줄 모르면서 어찌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권리 위에 잠자는 자 결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우리의 권리회복을 위해서는 학교의 주인인 우리 학생들부터 먼저 정신 차리고 깨어나야만 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장준하와 <사상계>의 교훈은 유효하다. 그가 남긴 <사상계>는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내뿜으며 우리 학생들에게도 권리회복을 위해 각성하고 투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참다운 민중세력은 언제나 역사에서 승리한다. 겨울이 영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낙관을 지니고 우리는 지칠 대로 지친 이 암흑에서 그래도 지금 일어나야 한다. 봄이 온다. 꽃이 핀다. 저항의 계절에 우리는 민중의 새로운 승리, 민족사의 거대한 긍정을 다짐하자" - <저항의 자세를 적극화하자> (<사상계> 1967년 2월 호 권두언)


체념하고 방관함으로써 학생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는 그 순간,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시련을 청산하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 후배들의 몫이다. 우리 스스로 후배들에게 적폐사학의 유산을 떠넘기는 못난 선배가 될 수는 없다. <사상계> 권두언의 행간 속에서 "어서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들라"는 장준하의 준엄한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2017년 8월 17일

수원대 권리회복 민주학생운동(URD)

(http://www.facebook.com/urd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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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위협받는 국가유공자들의 삶, 국가무한책임은 어디로?



링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49&aid=0000132522&sid1=001


2007년 창설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은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부대다.


국유단은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는 목적에 대해 그것이야말로 '국가무한책임'을 완수하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은 국가가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백 번 옳은 말이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꽃다운 청춘을 불살라가며 희생한 모든 국가유공가자들은 그에 걸맞는 대우와 보상을 받아야만 한다. 여전히 이름 모를 산야에 묻힌 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일을 영구 지속사업으로 국가가 주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국가무한책임의 범주에는 지금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생존 국가유공자들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우리나라에는 '국가보훈처'라는 기구가 있어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모든 국가유공자들에게 그에 걸맞는 대우와 보상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제1연평해전에 참전해 우리 해군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댓가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잃은 한 참전용사가 편의점에서 콜라를 훔치다 적발됐다는 사연은 보훈처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한다.


물론 보훈처에서도 국가유공자를 보살피기 위해 연금을 지급하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살 곳이 없어 고시원을 전전하거나 당장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해 폐지를 줍는 등 생계에 위협을 받는 국가유공자들의 이야기가 매년 들려오고 있으니, 과연 이들을 위한 보훈처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인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국가유공자를 위한 제도가 형식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보훈처가 미처 살피지 못한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고위공직자 중 '적폐청산' 1호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전격 경질하고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해 국가보훈처의 위상을 '장관급'으로 격상하겠다는 등 보훈사업에 적극적인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이제 그 의지에 걸맞는 실천이 필요할 때다.


2017년 6월 24일


역사독서모임 독사신론(讀史新論)

(http://facebook.com/suhistory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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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미생>을 다시 보고 있다. 처음부터 '정주행'을 하는 것까지는 아니고, 간간이 주요 장면만 돌려보는 정도다.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는데 드라마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같은 장면을 보고, 같은 대사를 들어도 그때 그때 다가오는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미생>은 고졸 출신 비정규직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담아낸 드라마다. 윤태호 작가가 그린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절절히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수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제목 미생은 바둑용어로 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있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어려운 바둑용어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지만 쉽게 말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삶이란 뜻이다. 그 반대의 뜻으로는 완성된 삶을 의미하는 완생이 있다. 즉, 미생이란 이제 막 사회생활에 첫 발을 내디뎌 어리숙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처지를 빗댄 표현인 셈이다. 


나는 군대에서 이 드라마를 처음 봤다. 당시 나의 계급은 일병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일병은 '일만 하는 병사'라는 우스개소리가 있을만큼 한창 바쁠 짬이다. 더욱이 그 당시의 나는 의지할 후임조차 없는 막내였다. 군 생활의 낙이랄 게 없는 그때, 선임들 틈바구니에 끼어 곁눈질로 보던 <미생>은 유일한 낙이었다. 애석하게도 항상 드라마가 끝나기 10분 전에 청소시간이 시작됐다. 매번 결정적인 10분을 놓치는 게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첫 휴가 계획을 짜면서 '<미생> 정주행'을 목록에 넣어놨을까.


아무튼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했던 까닭은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고졸 출신 낙하산으로 매번 실수 연발에, 선임들에게 깨져가면서 점점 직장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주인공의 처지는 당시 군대에 있던 내 처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잠시나마 드라마 속 그를 통해 나의 처지를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병장이 되면 저절로 완생이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막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병장이 되고 보니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후임들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여전히 미숙했고 팀의 리더로서 우리 팀을 최고의 팀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욕심만 앞섰을 뿐,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계급이 오를수록 늘 새로운 고민과 과제가 던져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전역증을 받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등병이었을 때나 병장이었을 때나 나는 늘 미생이었음을.


전역하고 돌아온 사회는 여전히 내가 미생임을 더욱 절감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동안 이뤄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과제들만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토익을 비롯한 어학·자격증 등 취직을 위해 쌓아야 할 스펙은 끝도 없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열심히 스펙을 쌓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하면 나는 완생이 되는 걸까? 아니다. 결혼도 해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도 꾸려야한다. 그리고 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직장에 살아남아야만 한다. 결국 나는 언제까지나 미생일 뿐이다.


사실 완생이란 내 삶이 다하는 그 순간에서야 마주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이뤄지지 못할 허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딱히 절망스럽지는 않다. 산을 정복한 뒤에 느끼는 정복감은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산에 오른 뒤에는 내려올 일밖에 없다. 그러나 미생들에겐 올라야만 하는 산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아직 오르지 못한 산을 찾아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 그러니 완생을 꿈꾸며 나아가되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눅들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드라마 <미생>이다. 결정적인 한마디로 주인공을 늘 응원해주던 직장상사 오과장은 말한다. "결국 우리 모두 미생일 뿐. 그렇게 완생을 향해 나아가는 거지" 


* 이 글은 2017학년도 1학기 수원대학교 교양과목 '문예창작의 이론과 실제' 수업 중 작성한 글을 과제용으로 다듬어본 것입니다. 무단 불펌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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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 이 글은 2010년 11월 11일에 작성한 글이다


최근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정신을 기리기 위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재개관하였다. 


70년대 군사 정권 시절, 애국지사 숭모 사업의 일환으로 남산 조선 신궁 자리에 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워진지 꼭 40여년 만이다. 기존의 낡고 협소한 기념관을 허물고, 비둘기의 오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성금 35억여원을 들여 세련된 유비쿼터스식 새 기념관과 새 동상을 건립한 것은 기쁜 일이다. (사실, 안중근 의사 동상은 친일파 김경승이란 자가 조각한 것이기에 애초에 철거를 거세게 요구한 적이 있었다)

 

필자 역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1주년 기념으로 열렸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하였다. 많은 귀빈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의 동상 개막식과, 기념관 개관식을 지켜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2008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안중근 의사에 대해 개인적으로 집착에 가까운 연구를 시작한 이후로, 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여러 번 다녀왔었다. 그렇게 낡은 기념관이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란 것에 안타까워했었던 기억, 새 기념관이 지어진다는 소식에 기뻐서 저금통을 몽땅 건립위원회에 기부했던 기억,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일본인들이 찾는 것에 대해 감동받았던 기억 등..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얽혀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이제 새 기념관을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기념관의 건립을 적극적으로 축하해줄 수도 없는 현실에 다시 한번 서글퍼졌다. 비록 기념관이 건립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나, 한편으로는 기념관의 건립에 대해 이런저런 안타까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국내의 안중근 의사를 숭모하는 단체들이 얽힌 문제들 때문이다.

 

국내에는 안중근 의사를 숭모하는 단체가 크게 두 곳으로 양분되어 있는데, 첫째가 바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위탁 운영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이며, 둘째가 숭모회에 반발하여 세워진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이다. 두 단체는 공식적으로는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단체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항상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에서는 사실상 숭모회를 안중근 의사 추모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념사업회에서는 이번 새 기념관 건립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였고, 반민특위나 민처협 같은 일부 진보적 민족주의 단체와 연계하여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립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럼 기념사업회는 왜 이러한 반대 운동에 뛰어들었는가? 그것은 기념관의 운영을 맡고 있는 숭모회의 전력 때문이다.

 

사실 숭모회는 안중근 의사 추모 단체라는 이름이 부끄럽게도 초대 이사장이 '윤치영'이라는 친일파 출신의 관료였다. 숭모회의 역대 이사장 계보나 주요 임원진들이 친일 전력을 가졌거나, 군사 정권 시절, 정권에 협력한 인물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숭모회에서도 사실상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더군다나 현 숭모회의 안응모 이사장 역시 전두환 정권 시절, 내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라는 것이 기념사업회의 숭모회 부정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념사업회에 방문하여, 숭모회의 지난 전력을 전해듣고 깊은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한 쪽의 말만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숭모회 측에도 이 사실에 대해 해명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숭모회 측에서는 "이미 역대 친일 출신 관료들은 죽고, 주요 임원진들이 싹 바뀌었는데 친일파 단체란 것은 말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념사업회에서는, "사람만 바뀌었다고 그 역사와 전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하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두 단체에 모두 발을 담그고 각 단체의 관계자 분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기에 두 단체 간의 이러한 알력은 심히 유감스럽고 안타까우며, 하늘에 계신 안중근 의사께 면목이 없어 눈시울이 붉어질 뿐이다.

 

필자는 겉으로는 우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건립에 참여를 하였다. 왜냐하면 우선 안중근 의사의 구 기념관 상태가 정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거니와, 이제 와서 반대를 한다고 이미 지어지고 있는 기념관 건립이 무산될 확률도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동시에 숭모회 측에 지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숭모회 내부 자체 개혁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숭모회에 대한 어떠한 연민(?)이 있었다라기보다는 안중근 의사를 숭모하는 단체들이 난립하고 서로 반복하여 분열되는 작금의 행태가 너무 안타깝고 분개할 수 밖에 없었기에, 어떻게든 두 단체를 중재하여 가장 나은 방안으로 나아가자고 그런 주장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숭모회 측에서는 그 이후로 어떤 답변도 없었고, 따로 사과나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념사업회는 여전히 숭모회를 부정하며, 숭모회의 자체 개혁을 요구하면서 기념관의 운영권을 포기할 것을 주장하는 분위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가 난 필자는 국가보훈처에 차라리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국영화하거나,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을 모아 유족 중심의 추모 단체를 따로 만들어, 그들에게 기념관 운영권을 부여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나 이미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운영권이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 있는 이상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요구에 가까웠다.

 

벌써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개관한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새로 지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들어가 안중근 의사의 좌상을 마주할 때마다, 애증의 감정이 피어오른다. 평생을 평화와 협력을 주장하신 안중근 의사께서, 정작 자신을 추모하는 단체들의 분열과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러한 상황을 하늘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그저 기가 막히고 안 의사께 면목이 없을 따름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라진 유해를 찾는 것이 당장 시급한 일이겠으나, 안중근 의사의 뼛조각을 찾는 것에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정작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후손들은 반성해야할 것이다.

 

후일, 지하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뵈었을 때, 나는 그분 앞에서 과연 고개를 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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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 이 글은 2012년 2월 16일 새벽 3시에 쓴 글이다.


옛날부터 정치인들이 툭하면 위인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들을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인습이다. 최고 지도자에서 말단 의원들까지 선거철만 되면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위인들을 이용한 자기 미화를 하는데, 그런 미화에 이용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순신이란 인물이 차지하는 위상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많은 정치인들은 툭하면 이순신의 이름과 그의 업적을 들먹이며 국민들에게 자신을 이순신과 동일한 이미지로 봐달라고 선전을 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툭하면 이순신의 사당인 아산 현충사를 찾아 참배하는 것도, 공개 석상에서 툭하면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를 들먹이는 것도 모두 그러한 행보의 일환이다. 정치적 색깔과 어떠한 이념에 구애됨 없이 오로지 순결한 마음으로 이순신을 앙모하는 나로서는 눈에 뻔히 보이는 정치인들의 이러한 행보가 참으로 불쾌하게만 느껴진다.

 

요새는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순신과 같은 위인들의 이름을 들먹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 도가 지나쳐서 황당하기까지 하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시위를 하거나 집회를 벌이고선 이순신 동상 앞에서 했으니 이순신 역시 자신들의 목적을 지지한다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이쯤 되면 망상에 시달리는 중증 환자가 아닐까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특히나 정치적 선동에 이순신을 끌어들이는 이들도 있는데, 이순신은 오로지 국가와 백성만을 생각한 군인이었다. 군인에게 정치적인 색깔과 이념이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특히나 이순신의 경우 지기인 류성룡이 동인이었다는 것 때문에 동인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동인도 아니고 서인도 아닌 오로지 왜적을 맞아 싸울 생각에만 전념했던 참 군인이었다. 그런 그를 현대 정치판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위인들의 이름을 걸어 자신들의 행동을 미화하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느냐마는 죽은 위인들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며 여기저기 갖다붙이는 행동은 그 위인들을 두 번 죽이는 행동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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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www.korea100.kr/tc/241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운영하는 '100년 편지'란 홈페이지가 있다. 다가올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2019년)을 기념하며 만든 이벤트 홈페이지인데, 내가 김구, 안중근이 되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혹은 우리가 김구, 안중근 등 독립투사들께 편지를 써서 올리는 홈페이지다. 편지를 보내면 기념사업회의 심사를 거쳐 선정이 된 편지가 올라가며, 격주로 업데이트 된다.

언제고 한 번 써봐야지, 써봐야지 하면서도 내내 미루다가 지난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5주기를 맞아 김구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군 입대를 앞두고 더는 미룰 수 없어서다. 그리고 8일에서야 내 편지가 192번째 편지로 게재되었다.

원래는 4월 말에 야심차게 시작했던 <백범일지> 필사를 마치고 당당하게 편지를 쓰려했는데, 게으른 탓에 '상권'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입대를 하게 되어 더는 미룰 수 없겠기에... 그래서 편지 말미에 필사를 다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도 담았다.

그간 100년 편지를 쓴 분들을 보면 대부분 역사학계에서 활동하시는 교수님들이나 역사 관련 학술단체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주로 썼고 나와 같은 젊은 사람들이 쓴 편지는 드문 것 같다. 보다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심히 써주었으면... (소정의 원고료도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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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얼마 전 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대표발의한 '효창원 국립묘지화' 입법추진에 대해 그 지역 주민들과 구의회 등에서 강하게 반발하며, 심지어 효창공원 앞에서 대대적으로 반대서명운동까지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하필 이 소식을 접한 오늘은 8월 29일, 103년 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로 국권을 강탈당한 날이기에 더더욱 가슴 아픈 소식으로 들려온다. 하놀도 무심치 않았는지 오늘따라 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린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위치한 효창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효창공원은 원래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은 이곳에 주둔하며 효창원을 효창공원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난 뒤에는 미군이 다시 이곳에 주둔하게 되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 직후 외세의 교두보나 다름 없던 이곳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민족영웅들의 유해를 찾아 안장한 바 있다. 그것은 외세의 교두보나 다름 없던 이곳에 민족영웅의 유해를 안장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불어넣고 성지화하고자 했던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범 선생 당신도 서거하신 뒤에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를 비롯하여 앞서 언급한 세 의사의 묘역(여기에 훗날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기 위해 마련해둔 안중근 의사의 가묘 포함)과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이 있다. 즉, 이곳이야말로 민족의 성지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발생한 지역주민들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할 만한 일이었다. 김구 선생에게 열등감을 느껴 공권력을 동원해 효창원 내 백범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하지 못하게 막고, 그도 모자라 그 주변에 효창운동장을 짓는 등 민족의 성지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던 이승만 독재정권의 그런 잔혹한 행위들이 바로 오늘의 분란이 일어나게끔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효창원을 탄압해 공원화했을 때부터 이미 지역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이 언제 어느 때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써 자리매김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효창원 국립묘지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머리 끝까지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고, 당장 자신들의 편의부터 생각하는 그 지역 주민들의 이기적인 마인드에도 환멸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효창동 주민도 아니고, 또 그들 나름의 속사정이 있을텐데 내가 무턱대고 "이곳은 민족의 성지이니 당신들이 무조건 양보하시오!"라고 할 자격도 없다.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역 주민들의 동의 없이 무조건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체부지를 선정해 효창원 내 선열들의 유해를 그곳으로 이장하자는 저들의 의견 역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의견이다. 효창원은 김구 선생께서 깊은 뜻을 가지고 직접 조성하신 곳이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민족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곳인데 이곳을 완전히 공원화시키고 선열들의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설득에 나서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도 어렵다면 서로 합의를 볼 수 있는 타협안을 모색해봐야 할 것이다. 국립현충원만큼은 아니어도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면서도 국립묘지로서의 격(格)은 갖추고 있는 그런 장소로 만드는 것도 생각해봄직 하다. (일반인이 편안하게 다가서기 부담스러운 지금의 현충원보다는 오히려 주민들이 편안함을 느끼고 자주 찾는 장소가 된다면 그것이 민중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뜻에도 부합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효창원은 언제까지 이런 수모를 겪어야하는 것인지... 새삼 분란을 일으키도록 원인을 제공한 이승만이 사무치게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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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

20세기 초, 일제의 침략과 억압에 맞서 싸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역사상 3.1운동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의 청산리대첩과 더불어 그 의의가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만세 운동으로 시작되었던 3.1운동은 전국적인 봉기로 이어져 마침내 일제의 조선에 대한 통치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결과를 이끌어냈으며,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정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운동은 중국, 인도 등 이웃 국가들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그 의의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3.1 운동을 처음 계획하고 주도한 것은 소위 민족대표라 불리는 33명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종교계, 예술계, 학계에 종사하는 이들로서 신지식을 습득하고 사회의 원로로 대접받는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31, 중국집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발적으로 종로경찰서에 신고하여 연행되었다. 그렇기에 3.1 운동을 계획한 것은 민족대표라 불리는 33명의 인사들이었으나, 사실상 주도한 것은 학생, 노동자 등 일반 민중들로 이들은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를 벌이며 조선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3.1 운동의 주역은 결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를 자임한 그들은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었기에 그 당시에 조선 민중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사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3.1 운동에 앞서 조금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더라면 민족대표로서 3.1 운동의 구심점이 되어 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왔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이 구상한 독립운동에 대한 방략은 그 자체로 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그들이 구상한 독립운동 방략엔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을까? 

 

우선 그들은 국제적인 현실 감각이 부족했다. 그들은 3.1 운동을 계획하기에 앞서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모든 민족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의 민족자결주의는 얼핏 듣기엔 조선에게도 희망이 될 수 있는 말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이는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따라 조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들의 식민지에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일본은 강화회의에서 전승국의 자격으로 참여했고, 그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에게는 자연스레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이러한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고, 그것이 국제 열강의 조선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열강에 독립청원을 하는 방안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통해 각각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를 묵인하기로 약속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현실감각이 떨어진 민족대표들은 원수의 나라나 마찬가지인 미국에 독립청원을 하려하고 있었다. 사실 독립청원이라는 것 자체도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독립을 하려고 남의 나라에 청원을 한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식민지 국민으로서, 주권을 회복하려고 하면서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할 생각은 하지 않고, 되레 남의 나라에 독립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과연 미국이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들의 힘을 들여 조선을 독립시켜주겠는가? 분명 그들은 더 큰 것을 요구할 것이고 아마 일본보다 더 잔혹하게 억압하여 조선을 완전한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그것은 훗날 광복 후 미국이 한반도 남부에 미군정을 설치하고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농단한 사례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다. 

 

민족대표 33인들은 결국 국제적인 현실감각이 떨어지는데다가, 우리 민족의 힘을 모아 스스로 주권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일본보다 더 강한 세력에 기대어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늑대를 잡으려고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격이 아닐까? 

 

게다가 그들은 조선 민중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훗날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손병희는 사의천박한 민중들이 모였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라는 말로 조선 민중을 폄훼했다. 민족대표라는 자들이 되레 조선 민중을 천박하다고 욕하며,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폭거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찌 민족대표라는 숭고한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그들에게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처럼 독립에 대한 의지가 없던 그들이 변절하여 친일로 돌아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른다. 결국 최남선, 최린과 같은 이들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돌아서서 일제의 침략 정책에 부합하게 되니, 그들에겐 민족대표의 자격도 없으며 방략 또한 독립에 대한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나온 무의미한 방안들이었을 뿐이다. 

 

93주년 3.1절을 맞아 다시금 생각해보는 것은, "역사는 민중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이다. 비록 그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고위층일지 몰라도,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민초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유관순 의사와 같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이야말로 진정 민족대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도 스스로를 '민족대표'라 생각하고 진취적으로 조국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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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베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