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무예24기 수련에 빠져있던 지난 가울, 이태원대학교라는 곳에서 <조자룡창술배워볼과>라는 과목을 개설해 무예24기 중 기창(창술) 과목을 지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번 7월에 이태원대학교 2학기 개강을 앞두고 고민 끝에 전혀 다른 성격의 과목을 개설해보기로 했습니다. 바로 <시민기자해볼과>라는 과목입니다. 기존의 무술 과목은 그닥 인기도 없거니와 사실 무예24기 수련을 관둔 이후로 전혀 수련을 하지 않고있다시피 하는 터라 어디 나가서 가르치기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과목은 제가 <오마이뉴스>에서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경험을 한 번 살려보자는 취지에서 개설을 결심했습니다. 저 역시 저널리즘을 말하기엔 매우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시민기자라는 플랫폼을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시민기자 제도의 장점을 널리 알리고 이 세상의 프로불편러들을 모두 시민기자의 세계로 인도해보고 싶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번 과목은 정말 가볍게, 그리고 글쓰기나 저널리즘에 대한 기초가 전혀 없는 분들이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미 글쓰기 기초가 탄탄하신 분들은 오히려 제 과목을 들으면 우습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정말 글 한 번 써보고 싶고, 세상에 목소리 한 번 던져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시는 분들이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번 학기에도 좋은 강좌들이 많이 개설됐습니다. 이번엔 제 동기를 꼬드겨 '음식으로 본 세계문화사'라는 역사강좌도 하나 개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좋은 과목들도 수강인원이 충족되지 않으면 모두 폐강이니 아무쪼록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태원대학 수강신청 링크: https://goo.gl/jZcqa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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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술을 꽤 즐기는 편이다. 평소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우선 주류코너부터 들러 새로 입고된 희귀 브랜드의 술이 있나 확인하는 버릇이 있을 정도다.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않다보니 눈으로만 구경하고 돌아올 때가 더 많다. 어쩌다 글을 써서 원고료가 들어오면 곧장 달려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술 한 병씩을 사들고 와 밤새 '혼술'의 낭만을 즐기곤 한다.


주종 역시 가리지 않는다. 필자의 지론은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셔보고 죽자'는 것이다. 맥주부터 시작해 막걸리, 고량주, 와인, 위스키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게 술 아니던가. 어찌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한 가지 술에만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가장 흔해빠진 '참이슬', '처음처럼'과 같은 희석식 소주 따위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는 한창 전통주에 빠져 살다가 최근엔 위스키로 눈을 돌렸다. 발효시킨 곡물을 증류한 다음 나무통에 넣고 숙성시킨 위스키는 알코올 도수가 기본 40도를 넘기에 그 향과 맛이 보통 독한 것이 아니다.  마개를 따자마자 올라오는 향을 '킁' 하고 맡으면 강한 향에 나도 모르게 '억' 소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릴 정도다. 다시 스트레이트잔에 부어 입에 한 모금 '탁' 털어넣었을 때, 목구멍에서부터 식도를 타고 창자로 내려가며 느껴지는 '싸르르'한 느낌은 위스키와 같은 독주(毒酒)만이 갖는 매력이라 하겠다.


위스키로 읽는 세계사


도대체 이런 술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한 번 궁금한 게 생기면 끝까지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기어이 동네 도서관을 뒤적이다 위스키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위스키의 지구사> 얘기다.


이 책은 한마디로 요약해 위스키의 역사를 톺아보는 책이다. 위스키 제조 과정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긴 하지만, 내용의 8할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 그리고 한국 등 전세계 각국에서의 위스키에 대한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술의 제조 공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면 위스키가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책에 의하면 위스키는 2,000년 전 고대 그리스나 서아시아에서 증류과정을 발견하며 시작됐다는 설이 있단다. 이후 아일랜드의 기독교 선교사나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인이 유럽에 전파하고, 다시 연금술사나 성직자들이 증류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위스키가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고대 이집트인과 히브리인이 곡물로 보리술을 만들었고 다양한 제조법을 실험해 만들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유럽인이 서아시아에서 보리술 제조법을 전수받은 것인지 스스로 익힌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3000년경 영국에서 보리술 양조를 했다는 증거가 있다. 하지만 위스키 제조는 그 후로도 수세기가 지나 발효와 증류 기술을 결합하는 방법을 알아낸 뒤에 시작되었다." - p.58~59


그렇다면 중세 유럽인들은 위스키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13세기 스페인의 의사 아르날두스 데 비야 노바(1235~1313)는 위스키를 가리켜 "이 생명의 물은 마시면 원기를 북돋아주고, 과하게 폭발하게 만들며,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황홀경을 느끼게 해준다"고 했다.


또 아일랜드 출신의 연금술사이자 작가인 리처드 스태니허스트(1547~1618)는 "적당히 마시면 노화가 늦춰지고 젋음을 강화시켜주며 가래가 줄어들고 우울증이 없어진다. 수사슴 고기의 맛을 돋우고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며 기분 전환을 시켜준다"고도 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위스키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아픈 곳을 치료해주는 '생명의 물'이었던 셈이다.


순탄치 않았던 위스키 과세의 역사


한편 책의 저자는 위스키 시장이 발전해감에 따라 술에 과도한 세금을 매기거나 '금주령'을 내림으로써 생산을 통제하고자 했던 각국 정부들과 이에 맞선 제조업자들과의 갈등 양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위스키의 역사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세금 징수원'들과 증류업자들의 에피소드는 당시 영국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어 흥미롭기까지 하다.


19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에는 위스키 세금 징수원들이 증류소마다 배치되어 증류기에 들어가는 술덧의 양과 생산되는 술의 양을 측정해 세금을 매겼다고 한다. 그러자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불법적으로 위스키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세금 징수원을 피해 증류기들을 다리 밑, 집안 마룻바닥 밑, 마을 시계탑 등에 숨겨놓은 것이다. 심지어 세금 징수원을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위스키 제조업자들 입장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세금 징수원들의 존재는 눈엣가시였을 게 뻔하다. 그러다보니 둘 사이에 티격태격하는 일도 잦았지만, 서로 담합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징수원이 실제 생산한 위스키의 양보다 줄여서 기록하고 세금을 낮게 책정해주는 대신, 징수원이 필요량 이상의 위스키를 담아가도 증류업자가 못 본 척 해준 것이다.


반면에 징수원이 증류업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경우, 증류업자들은 새벽에 증류작업을 하는 식으로 징수원에게 보복했다. 작업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는 징수원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괴롭힌 것이다. 이러한 영국의 세금 징수원 제도는 1983년에 이르러서야 폐지됐다. 오랜 시간 티격태격하며 함께 해왔던 그들은 헤어질 때 후련했을까? 아니면 서운했을까?


19세기 개항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위스키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 후반 개항과 함께 위스키의 역사가 시작됐다. 1882년 12월 29일자 <한성순보>에서는 위스키와 비슷한 발음의 한자음인 '유사길(惟斯吉)'로 위스키를 처음 소개했다.


당시 조선에 위스키를 들여온 서양인들은 한결같이 "조선인들은 위스키를 매우 좋아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젊은 양반들 사이에서 인기였다고 하는데, 한국의 소주(희석식이 아닌 증류식 전통소주) 역시 도수가 40도를 훌쩍 넘었기에 위스키의 높은 도수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을 거란 분석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경성을 중심으로 카페가 발달하면서 소위 '모던뽀이'들의 유흥문화를 중심으로 위스키가 활발하게 소비됐다.


그런데 놀라운 건 해방 이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마셔온 위스키들은 대부분 '가짜 위스키'였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는 위스키 수입을 공식적으로 허가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국민들은 제대로 된 위스키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됐다. 따라서 그를 대체할 가짜 위스키들이 판을 친 것이다. 결국 메틸알코올로 만든 가짜 위스키까지 만들어지면서 이것을 마신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눈이 멀거나 반신불수가 되고 심지어 죽는 경우도 종종 일어났다.


이러한 가짜 위스키가 사회적 문제가 되었음에도 밀수 외에는 진짜 위스키를 마실 방법이 없다보니 주류업자들은 계속해서 유사 위스키를 만들어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진짜 위스키로 알고 마셨던 술들은 사실 증류식 소주에 여러 재료를 섞어 위스키의 색과 맛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박정희가 마신 '시바스 리갈 12년산', 그 진실은


다만 그 시절에도 외국산 수입 위스키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법 위에 군림하는 절대권력자들이었다. 박정희가 최후의 만찬에서 즐겼던 '시바스 리갈 12년산' 역시 유명한 외국산 위스키였다. 물론 시바스 리갈 12년산은 비교적 낮은 등급의 저렴한 위스키에 속한다. 그래서 이를 두고 "박정희는 위스키마저 저렴한 걸 마실 정도로 서민적인 대통령이었다"고 감격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일반 소시민들은 외국산 수입 위스키를 구경할 기회조차 없었던 상황에서 그 정도의 위스키를 즐겼다는 사실만 놓고 봐도 대단한 권력이자 사치였다. 다음과 같은 설명은 그러한 정황을 뒷받침 해준다.

"1990년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는 위스키 원액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유사 위스키와 기타 재제주 위스키, 그리고 불법 수입 위스키가 공존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외국산 수입 위스키를 마실 수 있었던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프리미엄급에 지나지 않는 '시바스 리갈'을 최고의 위스키처럼 즐겨 마신 것도 위스키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을 뿐더러 본고장 위스키라며 최고인 양 '생명의 물'을 대하듯 했기 때문일 것이다." – p.235~236


이처럼 한국에서 위스키는 1990년 수입이 합법화될 때까지 권력자들만이 즐길 수 있었던 귀하디 귀하신 몸이었다.


어찌할거나, 이 강렬한 위스키의 유혹을!


시인 신천희는 <술타령>을 통해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라고 노래했다. 애주가들의 술 사랑을 이렇게 절절하게 노래한 시도 없을 것이다.


필자 역시 원고료가 들어오는 족족 술값과 책값으로 쓰다 보니 통장 잔고에는 연일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 가난한 서생이 가까이 하기에 위스키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술이다. 늘어나는 뱃살도 요즘 고민이다. 그러니 술은 적당히 마시는 게 중요할 게다. 적어도 술 먹다 빚 지고, 몸 상했다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럼에도 책장을 덮고 나니 반쯤 남은 '조니워커 레드라벨'이 필자의 눈을 어지럽힌다. 어찌할거나, 이 강렬한 위스키 한 잔의 유혹을!


책 정보 | <위스키의 지구사>, 케빈 R. 코사르 저, 휴머니스트, 2016.3.21,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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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http://omn.kr/ne12


"귀하께서는 2017.5.25.(목) 10:00 서울법원종합청사 서관 417호 대법정에서 진행되는 전직 대통령 뇌물죄 등 관련 사건의 방청자로 당첨되셨습니다."


지난 19일 저녁 날아온 한 통의 문자메시지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19일 오전 서초동 서울회생법원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 방청권 추첨에 응모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그러나 방청권 당첨에 대해서는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찾아갔지만 법원 앞은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주의 기운'을 받은 것인지 7.7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재판 방청권을 따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카톡이며 페이스북에 당첨 소식을 공유했더니 많은 지인들로부터 "축하한다"는 덧글과 함께 '좋아요' 수가 쭉쭉 올라갔다. 언젠가 <오마이뉴스>에서 뉴스게릴라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올렸을 때보다 더 많은 축하인사를 받았다. 이게 정말 축하받을 일이 맞긴 한 건지 씁쓸하긴 했지만 어쨌든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내가 당첨된 건 5월 25일에 열리는 두 번째 재판 방청권이었다. 공교롭게도 온종일 수업이 몰려있는 날이었다. 평소 결석은커녕 지각조차 절대 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으나 이번 일만큼은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교수님들께 이메일로 사정을 설명하며 부득이하게 결석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러자 교수님들 모두 "역사적인 현장에 가기로 한 결정을 존중한다"라면서 흔쾌히 이해해주셨다. 덕분에 법정으로 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포인트①] 재판 전 법정 안팎 풍경


마침내 5월 25일 아침이 밝았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는 방청권 배부에 참여하기 위해 일찌감치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로 향했다. 청사 입구에는 돌발 사태를 대비해 경찰 병력들이 배치돼 있었다. 지난 23일 재판 당시 박사모 회원들이 진을 치고 앉아 방청객들에게 시비를 건다는 말을 듣고 나름 긴장했으나 법원 앞은 조용했다. 


재판정이 위치한 서관 입구에서 "재판을 방청하게 해달라"는 한 할머니와 "사전에 당첨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며 막아서는 법원 직원들 간의 사소한 실랑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줄을 선 방청객들은 '5번 법정 출입구' 앞에서 신분증 검사와 몸 수색을 거쳐야만 했다. 한 차례 엄격한 심사를 받고 난 뒤에도 재판정이 있는 4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계단마다 직원들이 대기하며 방청권을 재차, 삼차 검사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재판이 열리는 417호 대법정에 들어섰다. 150석 규모의 법정은 생각보다 아담한 편이었다. 내가 배정받은 좌석은 72번. 좌석 배치는 무작위로 이뤄졌다. 앞에서 다섯 번째 줄이라 결코 좋은 자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앉아서 난생 처음 구경하는 법정 안 풍경을 열심히 눈에 담기 시작했다.


법정은 방청객들을 인터뷰하기 위한 기자들의 취재 열기로 뜨거웠다. 한 언론사의 기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인터뷰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윽고 나를 타깃으로 삼은 그 기자가 질문을 던져왔다. 조용히 지갑에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명함을 꺼내 건네니 그는 "사방에 기자들뿐이네요"라면서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오전 9시 30분이 되자 박 전 대통령 측 변호인들인 유영하, 채명성, 이상철, 김상률 변호사 등 4명이 입장했다. 뒤이어 서울중앙지검 이원석 특수1부장과 한웅재 형사8부장 등 검찰 측 검사 8명이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검찰 측과 변호인 측은 각자 준비한 서류를 읽으며 쑥덕쑥덕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았으나 거리가 멀어 알아들을 순 없었다.


[포인트②] 다소 여유로워진 박근혜


"피고인은 들어와서 피고인석에 앉기 바랍니다."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김세윤 부장판사) 법관 3명이 입장하고 피고인의 입장을 주문하는 재판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청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법정 서쪽 출입구에 쏠렸다. 경위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일제히 방청석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청객들의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꼴깍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정적만이 법정에 짙게 깔렸다.


무거운 정적을 깬 것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또각또각' 소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명확하게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마침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바로 자신의 자리인 '피고인석'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변호인들과 가벼운 웃음으로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은 그는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재판관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갈음했다. 


이날 박 전 대통령은 단 한 번도 방청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과 정면 그리고 자신의 변호인들에게만 향했다. 어쩌다 슬쩍 곁눈질을 할 법도 한데 그는 결코 우리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말수도 적었다. 공식적으로 그가 내뱉은 말은 오전 재판과 오후 재판 종료 당시 "할 말이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대한 대답뿐이었다. 그마저도 "자세한 건 추후에 말씀드리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23일 첫 재판과는 달리 그는 다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검찰 측의 서증조사(검찰이 제시한 증거들 가운데 박 전 대통령 측의 동의를 얻어 채택된 증거들을 검찰 측이 법정에서 다시 설명하는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유 변호사와 간간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며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모니터 속 증인들의 신문조서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기도 했고, 고개를 가로젓거나 끄덕이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물론 그의 소통은 변호인들에게만 국한됐다.


[포인트③] 검찰과 변호인의 팽팽한 기싸움


재판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23일 첫 재판과 달리 박근혜 전 대통령 홀로 참석한 두 번째 재판은 검찰 측의 서증조사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박 전 대통령 측 변호인들은 재판부에 이의를 제기했다. 10만 쪽이 넘는 방대한 수사기록을 모두 검토하기도 전에 조사를 강행하는 것은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재판을 끌 여유가 없다"며 재판부가 기각을 했음에도 변호인들의 태클(?)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 측 유영하 변호사는 "주신문을 특검이 먼저 하는지 검찰이 먼저 하는지"의 절차 문제를 두고 또다시 딴죽을 걸었다. 보다 못한 검찰 측도 칼을 빼들었다. 검찰 측은 "절차 문제로 45분 이상을 끌어 실체를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라면서 변호인단에 일침을 날렸다.


결국 재판 시작 1시간 만에 검찰 측의 서증조사가 시작됐다. 검찰 측 검사들은 두툼한 서류뭉치들을 꺼내 카메라에 비춰가며 증인들의 신문조서 중 요지만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은 법정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방청객들에도 공개됐다.


이날 검찰 측은 대기업들을 상대로 한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강요 혐의 사건의 공판 기록을 중심으로 관련 증인들의 증언을 공개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고영태, 차은택,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등 등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 사건 주요 혐의자들 뿐만 아니라 전경련, 청와대, 대기업 관계자 등 증인 수십여 명의 법정 진술이 고스란히 공개됐다.


그러나 서증조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변호인들이 제2차 공세를 시작했다. "검찰이 검찰 측 신문만 공개하고 반대 신문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라면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유 변호사는 "방청객에 기자들이 많은데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검찰 측 의견만 언론 보도로 나갈 것 아니냐"라면서 "검찰 수사도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면 그에 맞춰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이런 식으로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번에도 "기록이 너무 방대해서 전부 낭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며 기각했다. 이에 변호인 측이 "재판을 진행하는 데 시간에 쫓겨서 한다는 건 어폐가 있다"라면서 여전히 굴복할 수 없다는 태도로 맞서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검사들은 꿋꿋하게 신문조서를 읽어 내려갔다. 검사들과 변호인들의 팽팽한 기 싸움 사이에서 재판관은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양 측이 서로 잘 합의하라"고 다독였다.


[포인트④] 졸고, 깨우고... 다이내믹했던 재판정 풍경


이날 검찰 측 책상에는 서류로 만들어진 탑이 많이 쌓여 있었다. 서증조사 때 낭독하기 위한 증인 신문조서들이었다. 오전 재판 당시 조서를 낭독하던 검사가 세 번째 서류뭉치를 꺼내들자 방청석에서는 '어휴' 하는 한숨이 터져나왔다.


점심식사 후 오후 2시 10분부터 재개된 오후 재판에서는 '황금빛 보따리'가 등장했다. 주섬주섬 풀어헤친 보따리 속에서는 새로운 서류뭉치들이 쏟아져 나왔다. 휴정한 사이 그새 보충해온 자료들인 듯했다. 내심 '검찰이 단단히 벼르고 왔구나' 혀를 내둘렀다. 


오후 재판은 변호인 측의 요청에 의해 15분 휴정한 것을 제외하면 검찰 측의 '마라톤 조서 낭독'으로 진행됐다. 목소리톤의 변화 없이 나긋나긋 읊어대는 조서들은 자장가나 다름없었다. 어렵고 낯선 법률용어들로 점철된 데다가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난 직후였던지라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많은 방청객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나 자고 싶다고 마음대로 잘 수도 없는 게 법정이다. 매의 눈초리로 방청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경위들은 졸고 있는 방청객들을 흔들어 깨웠다. 졸음을 깨기 위해 다리를 꼬아보기도 하고, 휴대전화를 열어 뉴스를 보기도 했지만, 한 번 쏟아진 졸음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견디다 못해 중간에 퇴정하는 방청객들도 있었다. 재판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군데군데 빈 자리가 많이 보였다.


오후 5시 20분. 마침내 검사가 설명을 마치자 방청석에서 안도의 한숨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설명이 길어지며 잦아들었던 기자들의 타자 소리도 변호인 측의 '간이의견' 발언과 함께 다시 활기를 찾았다. 유 변호사는 검찰 측 설명에 대해 차분히 반박하며 "검찰이 법과 원칙에 따라 정의롭게 수사했다고 믿지만 증거를 보는 관점에 따라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라며 의견을 갈무리했다.


이에 김 부장판사가 "기록을 다 파악하고 계신다"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자 방청객들은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이날 재판은 재판부의 종료 선언과 함께 '7시간 50분'만인 오후 5시 50분에 마무리됐다.


[포인트 ⑤] 당당했던 표정에서 굳은 표정으로


이날 나는 법정을 떠나는 박 전 대통령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몹시 초췌해 보였고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두 눈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났다.


나는 박 전 대통령의 표정을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가 18대 대통령에 취임하던 해, 나는 통일부와 국가보훈처에서 대학생 기자단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취임식부터 시작해서 각종 정부 기념식에 참석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고 글로 풀어내야만 했던 나는 그의 당당했던 표정을 여전히 기억한다. 먼 발치에서나마 바라본 그는 늘 당당했고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마주한 그의 표정에선 예의 그 당당함은 사라진 채 초췌함과 한 서린 눈빛만이 남아있는 듯했다. '쫓겨난 독재자들이 모두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도 들었다. 그는 그렇게 마치 오욕으로 얼룩진 자신의 삶을 표정을 통해 말해주겠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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