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 입당 신청했습니다.


민주당은 온라인 당원이라는 제도가 있어, 굳이 지역 시/도당이나 중앙 당에 찾아가 원서를 제출하는 번거로움 없이 인터넷으로 마우스 클릭 몇 번 하면 신청이 끝나더군요. 사실 정치라는 건 특정 개인이나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접근성이 높아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민주당의 온라인 당원 제도는 선진적인 것 같습니다.


입당원서를 작성할 때, 뭐 이것저것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닥 많은 정보를 요구하지 않더군요. 5분도 안되서 신청이 끝났습니다. 당비도 매월 1,000원으로 저렴하더군요. 당비를 안 내도 당원이 될 수 있지만, 제 목소리를 내는 '권리당원'이 되려면 당비를 정기적으로 납부해야한다길래 흔쾌히 정기이체를 약속했습니다. 


통상 입당 심사가 2주 정도 걸린다고 하는군요. 요새 정국이 정국이다보니 민주당 후원과 당원 가입 신청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평상시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뭐 급한 것도 아니고... 언제든 문자가 오겠지 하는 느긋한 심정으로 기다릴 생각입니다.


사실 저는 26년 동안 정당 활동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정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죠.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기성세대에 만연한 불신 풍조에서 저 역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번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며 오히려 심화됐죠. 국민들은 추운 겨울에 주말도 반납하고 매주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드는데, 야당은 탄핵 시기와 절차를 놓고 지들끼리 싸우고 있으니... 솔직히 새누리당보다 민주당이 더 얄미워서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어쨌거나 정치를 외면하고 불신한 풍조가 박근혜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겁니다.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 정치가 더럽다고 외면하면 결국 나라가 산으로 가게 됩니다. 더러우면 오히려 그걸 정화시키도록 노력을 해야죠. 저 스스로 주권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정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민주당이냐? 세월호 변호사로 유명한 민주당 박주민 의원을 취재할 일이 있었는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정치권이 무심한 것 같아도 국민들의 촛불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실제로 탄핵하기로 결정한 후 민주당이 보인 행보는 일사천리였습니다. 더욱이 요새 들어 호감을 갖기 시작한 박원순, 박주민, 표창원, 안희정 등이 모두 민주당 소속이기도 하고요. 제 생각에도 제1야당에 힘을 실어주는 게, 정치 풍토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쉽다고 판단해서 민주당 입당을 결정했습니다.


당원이 된다고 해서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느냐마는... 일단 이렇게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보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심 갖고 참여하면서... 내 자신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 그리고 먼 미래에 이 땅에서 살아갈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목소리를 보태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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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외할아버지께서 향년 83세로 돌아가셨습니다. 3년 전부터 앓고 계시던 지병인 폐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신검안서에는 사인이 '신부전'으로 나오더군요. 오늘로 딱 일주일째가 됐네요. 시간 참 빨리 흐릅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함께 호흡하고 계셨던 분이, 이제는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11월 21일 월요일 오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한가하게 컴퓨터를 하던 중, 부고를 접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할아버지 돌아가셨대"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뒷통수를 망치로 맞은 것 같더군요. 차분하게 주어진 일을 다 마무리하고 장례식장이 있는 춘천에 천천히 합류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뭘 해도 집중이 잘 안되고 마음이 내내 불편하더군요. 결국 일정을 다 취소하고 저녁 늦게 아버지 차를 타고 춘천 빈소로 향했습니다. 빈소가 마련된 호반장례식장에 도착해 할아버지의 영정을 보는 순간 그제서야 눈물이 터지더군요. 비로소 할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게 실감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튿날, 할아버지 입관식을 치렀습니다. 솔직히 입관을 보기 위해서 결근까지 하고 일찌감치 춘천에 왔지만, 입관식을 앞두고서는 입관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습니다. 생전의 건강한 모습을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렇지만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니 꼭 보라는 주위의 충고에 따라 용기를 내서 영안실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이미 염을 끝내고 수의를 입은 모습으로 누워계시더군요. 얼굴에 흰 한지가 덮여있는 것을 보니 울컥했습니다. 사실 저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지켜봤는데,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이 오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차갑게 굳어버린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더 가슴이 아프더군요.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다시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간절히 빌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더군요. 입관을 마치고 할아버지를 다시 차가운 냉장고에 두고 나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빈소에서 할아버지댁까지 거리가 멀지 않은 관계로, 잠은 집에서 잤습니다. 집에 들어가니 할아버지께서 마지막까지 누워계시던 방이 있었습니다. 당일날 아침까지도 멀쩡하셨다고 하는데, 뜬금없이 집에 있던 가족들을 다 나가라고 내보내고 혼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마 본인의 마지막을 직감하시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남은 가족들은 유언도 못 듣고,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고 한스러워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잠자듯이 편안하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체취가 배어있는 방에 들어가서 침상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할아버지의 체취를 맡았던 것 같네요.


3일차인 수요일에 발인부터 화장, 납골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화장터야말로 정말 따라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입관보다 지켜보는 게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제가 유일한 손자인지라 영정과 위패까지 들고 모든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생각보다 눈물은 별로 안 나더군요. 정말 담담했습니다. 다만 역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2시간 가까운 화장 끝에 한 줌 뼛조각들로 나오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인생무상을 느꼈습니다. 뼛조각을 분쇄해 고운 뼛가루로 만든 뒤에 납골함에 담는 과정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더군요. 나중에 납골함에 담은 뼛가루를 코앞에서 봤습니다. 그 풍채 좋던 우리 할아버지가 한 줌 가루가 되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더라고요. 납골당에 안치하고, 마지막 제사까지 지낸 뒤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에는 솔직히 담담한 편이었는데, 돌아온 날 밤에 갑자기 울컥해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제서야 할아버지가 제 곁을 떠났다는 게 와닿기 시작했나 봅니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애틋합니다. 외삼촌들이 결혼을 못해 친손주가 없는 탓에, 제가 유일한 외손자로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방학만 되면 늘 춘천 외가댁에서 머물다 오곤 했습니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목욕탕에 가서 강제로 때를 밀리며 울었던 기억, 추운 겨울에 할아버지와 소양강변을 따라 운동을 다니던 기억,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사준다면서 손 잡고 데려갔던 달팽이집까지... 장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전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려있는 그 길들을 보면서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이제는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습니다. 성인이 되고서부터는 외가댁으로 가는 발길이 뜸해졌거든요. 제가 하도 안 가니 할아버지께서 먼저 전화를 하셔서 "왜 안 오냐"고 독촉하기도 했습니다. 방학 때마다 한 차례씩 들르긴 했어도, 거의 형식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어쩌다 놀러가도 춘천에 사는 지인들을 만나 술 마시고 오기 바빴습니다. 할아버지를 본 기억도 올해 여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아는 형들을 만나 술이나 마시고, 집에서는 잠만 자다 왔습니다. "하루 더 자고 가라"고 했던 할아버지의 말을 뿌리치지만 않았어도... 그때 하루만 더 자면서 할아버지와 좀만 더 얘기를 나눴어도... 이토록 후회스럽지는 않았을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너무나 후회막급일 따름입니다.


저희 외할아버지... 생전에 참 풍채도 당당하고 멋진 분이셨습니다. 키도 저보다 훨씬 컸고, 덩치도 산만 하셔서 젊은 저도 완력으로 못 당해내는 분이셨습니다. 워낙 강골이셔서 추운 겨울에도 야외운동을 꾸준히 하셨고요. 결과적으로 찬 바람을 오랫동안 쐰 것이 병의 원인이 되긴 했지만... 할아버지보다는 외할머니와 더 살가웠지만,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크나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할배', '할배'라고 부르면서 할아버지 특유의 말투를 따라하며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아직도 제 귓가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선한데...


이제 저도 성인이 되고 계속해서 나이를 먹다보니, 점점 더 많은 이별을 맞이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다른 친척들까지... 계속해서 주위 사람들과의 이별을 하게 될텐데요,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건 사실상 제겐 첫 이별이나 다름 없었기에 더 충격이 큰 것 같습니다. 어차피 태어나면 죽음도 있는 법이라지만... 남는 사람에겐 너무나 큰 고통과 슬픔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할아버지는 제 기억과 마음 속에 살아숨쉰다고 믿고 싶습니다. 


할배! 보고싶어! 나중에 꼭 보러 갈게! 좀만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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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열심히 글을 썼더니, '이 달의 게릴라'로 선정되어 부상으로 원고료 20만원을 받았습니다.


꽁돈이 생겨서 기분이 매우 좋더군요. 충동적으로 양주 한 병 질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후의 만찬 당시 즐겼던 술로 유명한 '시바스 리갈' 12년산이었습니다. 양주는 확실히 비싸더군요. 500ml 한 병이 3만원을 호가하다니... 중국 바이주나 우리 전통주가 정말 저렴한 편이었습니다. 사실 양주랑 저랑은 잘 맞지도 않는 터라... 어쩌다 한 번 기분 내려고 산 거지, 앞으로는 잘 안 먹을 것 같습니다.


원래는 혼술로 마시려고 했습니다만, 혹시 몰라 군 복무 당시 선임들과 함께 만든 단톡방에 "같이 시바스 리갈 깔 사람?" 하니 덥썩 미끼를 물어오는 친구가 있더군요. 덕분에 술 친구도 생기고 해서 좋긴 했습니다만... 술이란 게 끝도 없이 들어가는 게 함정이었습니다. 3만원짜리 양주 한 병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셔버리고, 그도 모자라 "중국 백주가 먹고 싶다"는 그 친구를 중국집으로 데려가 연태 고량주까지 두 병 마시고... 3차로 술국 하나 시켜놓고 소주를 4병이나 깠습니다.


덕분에 그 친구나 나나 완전 꽐라됐습니다. 어떻게 집에 오긴 왔는데, 집에 온 이후로 기억이 없네요. 원래 아무리 취해도 집에 오면 무조건 씻고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고대로 뻗었더라고요. 나중에 카드 내역 확인해보니까 이날만 10만원 가까이 썼습니다. 아휴...  그 친구가 만취하는 바람에 제가 돈을 또 다 냈거든요.


꽁돈 생겼다고 너무 좋아했나봐요. 가난한 휴학생이 기분 탓에 내지른 돈 치고는 후유증이 너무 큰 듯 합니다. 차라리 이 돈으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사면 좋았을텐데,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뭔 소용인지... 당분간은 돈도 아낄 겸, 스스로에게 금주령을 내려야겠습니다.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살 것도 많으니, 앞으로는 돈이 들어와도 절약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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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지난 주부터 서울 소재 모 중학교 자유학기 선택과목 '전통무예 권법' 반이 개강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교실에서 간단하게 자기소개하고 몸풀이랑 기본적인 호신술 몇 개만 지도하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장에 나가 무예를 지도했습니다. 


아, 그런데 정말 한 번 수업할 때마다 진이 빠지는 듯 합니다. 확실히 성인들에게 무예를 지도할 때와는 달리 몇 배는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이야 대개 본인들이 하고 싶어서 온 데다가, 성인이라 굳이 제가 목소리 높일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키니까 온 거고, 더욱이 한창 혈기왕성할 때 아닙니까. 더욱이 인원은 어찌나 많던지... 


다른 애들 교정해주느라 잠깐 한 눈 팔고 있으면, 그새 딴 짓하고 있고, 그 딴 짓 하는 애들에게 주의주려고 하면 또 그 사이에 다른 애들이 딴 짓하고 있고... 딴 짓의 양상도 천차만별입니다. 핸드폰 꺼내서 게임을 하질 않나, 자기들끼리 철조망에 매달려서 메뚜기를 잡지를 않나,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있지를 않나... 그런 거 보면 맥이 탁 풀리는 느낌입니다.


최대한 재미있고 흥미롭게 진행하기 위해서 초장부터 공방 연습을 시켰지만, 애들한텐 그것도 지루한가 봅니다. 몇 번 깔짝깔짝하더니 그새 지루하다고 "새 기술 가르쳐주세요!" 하는데... 어린 애들 붙잡고 "무예란 반복 숙달이 가장 중요하다.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설교하는 것도 별무소용일 것 같고요. 여러모로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을 지도해야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듯 합니다.


어떤 애들은 첫 만남부터 어이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뜬금없이 "피자 사주세요!"하질 않나, 자기를 일진이라고 소개하지 않나... 저한테 "선생님 싸움 가르쳐요? 싸움 잘해요?" 당돌하게 질문하기까지.. 이쯤 되면 제가 얼마나 힘들지 감이 오시죠?


그래도 애들은 순수한 것 같더군요. 저런 모든 행동에 특별히 악의가 있는 것 같진 않고, 중학교 1학년 다운 순수함이 많이 보입니다. 나름대로의 편견도 있었지만 막상 얘기하다보면 애들답게 순진하다는 걸 금세 느끼겠더라고요. 그리고 개중에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꽤 있고요. 여기도 희한하게 여학생들이 더 많은데, 몇몇 여학생들 중에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그 친구들 보면서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 동안 지도 방식을 계속 고민하면서, 더 재밌게 해봐야겠습니다. 애들에게 진지하게 무예를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애시당초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냥 재밌게.. 무예란 게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네요.


PS. 역시 교직이수 안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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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해금 조율을 무리하게 시도하다가, 그만 주아가 부러지고 말았더랬습니다. 이 주아라는 건 해금의 현(줄)을 조이고 푸는 역할을 하는데, 워낙 뻑뻑해서 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도 안 돌아가는 바람에 홧김에 힘을 줘서 돌리다가 그만 부러지고 말았는데요, 이게 부러졌을 때는 눈 앞이 정말 캄캄했습니다.



일단 해금이 제 악기도 아니고, 대여한 악기인 데다가 아예 나무가 부러진 거라, 수리비로 얼마나 나올지 감이 전혀 오질 않았기 때문이죠. 돈 많은 귀족도 아니고, 가난한 휴학생 신분인지라 해금이 부러지자마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역시 '수리비' 걱정이었습니다.


거의 울상이 되어서 악기를 대여한 '류충선국악기연구원'에 연락을 했는데, 사장님이 시간 될 때 와서 수리하라고 하시더군요. 이거 뭐 걱정이 되어서 며칠씩 기다릴 수가 있나요. 당장 다음 날 가겠다고 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악기사로 갔습니다.


도착해서 사장님께 보여드리니 "누가 돌렸나요"라고 물어보시더군요. 저라고 대답하기가 참 민망했습니다. 그래도 사장님께서 "대여기간 연장하자마자 부러졌으니, 이건 계속 해금을 배우라는 계시인 것 같다"고 농담도 하시고, 제 마음을 많이 풀어주셨습니다. 게다가 "멀리서 오셨는데 그냥 가세요"라며 무상 수리까지. 수리비 걱정이 가장 컸는데, 사장님의 통큰 인심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장님 말씀이 "주아는 요령이 있으면 초등학생도 쉽게 돌릴 수 있지만, 요령이 없으면 천하장사 이만기가 와도 절대 못 돌린다"고 하시더군요. 실제로 사장님은 쉽게 잘만 돌리시던데... 도대체 왜 안되는 걸까 싶어서, 수리 끝나자마자 근처 공원 가서 30분 동안 낑낑거리며 계속 요리 돌리고 조리 돌리고 해봤지만... 오히려 더 풀리기만 할 뿐, 조여지지가 않더군요. 계속 주아를 잡고 씨름하다보니 양 손바닥은 물집이 잡히다못해 다 벗겨져서 지금까지도 쓰라릴 지경입니다. 아무튼 그러고 있자니 '이러다 또 부러지는 거 아닐까' 겁이 덜컥 났습니다. 당장 다음 레슨까지 연습을 못해가는 게 속상한 일이긴 하지만, 차라리 안전하게 선생님께 조율을 맡기고, 주아 돌리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주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니까, 전문가들조차도 주아로 미세한 음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아서 개량 주아를 쓰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여름철일수록 습기를 머금어 뻑뻑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틈과 틈 사이가 꽉 아물려 더 안 돌아가게 되는 것이고요. 이럴 때 무리하게 힘을 주면 안되고, 선풍기 바람도 쐬어가면서 살살 달래줘야 한다고...


다음 주 레슨 때는 주아 돌리는 요령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배워봐야겠습니다. 아무튼 한바탕 악기가 부러지는 난리 끝에 좋은 교훈을 얻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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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상으로는 이미 입추(立秋)가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날씨는 무덥습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유난히 매섭듯, 가을을 시샘하는 늦더위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은 것 같군요.


확실히 날이 덥다보니까 여러모로 기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사실 핑계에 가깝지만, 날이 덥다보니까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게 사실이에요. 무예 수련도 자꾸 거르게 되고, 가만히 앉아서 독서하는 것도 힘들고,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 두드리는 것도 귀찮네요. 집에 있는 에어컨은 누진세다 뭐다 세금 폭탄이 무서워 이미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랩니다. 


너무 더워서 집에 처박혀있는 것조차 괴롭기 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딱히 스케쥴이 없어도 아침만 되면 무작정 집을 나섭니다. 책 한 권 들고서요. 처음에는 어딜 가야할지 몰라서 무작정 도심을 배회했는데,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재밌는 구경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는 여의도 IFC몰에 갔습니다. 건물 전체가 에어컨이 빵빵하니 돌아다녀도 지치질 않더라고요. 오히려 춥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IFC몰에는 영풍문고가 있어서 거기 앉아서 밀린 독서를 했습니다. 책 읽다가 출출해지면 바로 아래층 푸드코트 가서 밥도 사먹고, 후식으로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받아들고 다시 서점가서 독서하고... 그러다 졸음이 쏟아지면 돌아다니면서 상점 구경하고...



어제는 해금을 수리하러 간 김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위치한 강남 센트럴시티에 갔습니다. 여긴 IFC몰보다 볼 거리, 즐길 거리가 더 많더군요. 이곳에 입점한 반디앤루니스는 여의도 IFC몰의 영풍문고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규모가 장난 아니더군요. 그냥 역사 코너 한 칸만 둘러봐도 그 방대한 양에 질릴 정도였습니다. 과장 좀 보태서 말하자면, 죽기 전까지 이 코너에 있는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아무튼 만날 집에만 처박혀있다가, 이렇게 도심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사람 구경, 건물 구경을 하니 나름 시간도 빨리 가고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누진세 걱정 없이 빵빵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으니, 이렇게 저렴한 피서도 없을 듯 합니다. 밀린 독서를 할 수 있으니 생산적이기도 하고요.


다만 충동구매의 유혹과 싸워야 하는 게 좀 힘듭니다. 워낙 먹을 거리, 볼 거리, 즐길 거리가 많아서요. 지갑은 얇은데, 서점에만 가도 사고 싶은 책들이 넘쳐나고, 백화점에 가면 산해진미가 몰려있다보니 자꾸 돈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역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돈만 밝히는 속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돈 없으면 이런 것도 못 즐기는 게 사실이니까요. 늘 산해진미를 즐기고, 명품을 수집하면서 귀족처럼 살자는 건 아니지만, 가끔씩은 내가 먹고 싶은 게 있거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지갑 걱정할 필요 없이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은 갖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역시 젊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겠죠.


어쨌거나 이럴 때 노트북이 있었다면 시원한 카페 같은 곳에 죽치고 앉아 블로그 포스팅도 하고, 이런 저런 글도 좀 쓸텐데 휴대용 PC가 없는 게 한이네요. 어쨌거나 저녁엔 집에 돌아와야 하는데, 열대야 탓에 집에서는 집중해서 작업을 한다는 게 여전히 버겁더라고요.


그러니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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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블로그에 포스팅을 해봅니다.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면서, 도저히 가만히 앉아서 글을 쓸 기운이 나질 않더군요. 컴퓨터 앞에 잠깐 앉아 블로그 포스팅하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뭔가 온 몸의 기운이 쑥 빠진 느낌입니다. 집에 있는 에어컨은 무용지물에 가깝습니다. 누진세니 뭐니해서 에어컨 키는 문제로 가족들과도 자주 싸웁니다. 저는 더위는 정말 못 참는 주의라 가능하면 하루 종일 빵빵하게 에어컨을 틀고 싶은데... 더우니까 사소한 일로도 자꾸 짜증이 나서 더 신경질을 부리게 되는 것 같네요. 더우니까 무예 수련도 게을러지는군요. 여러모로 여름은 괴로운 계절입니다. 진심으로 여름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집에 있어봐야 에어컨도 못 키고... 답답한 마음에 오늘은 점심 먹자마자 책 한 권 들고 무작정 집 밖으로 나섰습니다. 더위를 피해 어딘가로 도망치듯 나온 건데... 막상 나오니까 밖에 돌아다니는 게 더 고통스럽네요. 주말이라 지하철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일단은 고궁박물관 가서 전시 좀 보다가, 광화문의 한 카페에 들러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죽치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래도 시원한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으려니, 잠시나마 더위는 잊을 수 있었습니다. 집에 있어봐야 더워서 책도 눈에 잘 안 들어오죠. 돈도 없고, 딱히 갈 데도 없는 저한테는 그래도 이 방법이 가장 경제적이면서 간편한 피서법인 것 같네요. 당분간 더위가 풀릴 때까지는, 이렇게 카페나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더위를 피해야겠습니다.


참고로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이명박 前 대통령의 자서전인 '대통령의 시간'입니다. 8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꺼운 양장이라 들고 다니면서 읽기 버겁네요. 그래도 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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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부터 오늘 30일까지, 2박 3일 동안 '어린이 백범학교'라는 캠프에 보조교사로 참여하고 왔습니다. 


이 캠프는 청년백범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매년 여름방학마다 공동으로 주관하는 행사입니다. 전국의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2박 3일 동안 캠프를 진행하면서, 근현대사 강의와 자연체험 등을 하는 행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번이 33회째랍니다. 역사가 오래됐지요. 아마 제가 초등학생 때도 했었던 것 같아요. 이번에 저랑 같이 보조교사로 활동했던 친구는 저랑 두 살 터울인데, 그 친구도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하니까요. 역사가 오래된만큼 축적된 노하우도 있고, 프로그램도 검증되었다고 봐야겠죠.



민족문제연구소야 워낙 유명한 단체다보니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요. 청년백범은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하는 청년들이 모여서 만든 친목단체인데,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청년백범에서는 매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백범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나이 제한 없이 누구나 갈 수 있는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저 역시 군대 가기 전이었던 2014년 초에, 청년백범 3기로 중국 지역 내 임시정부 사적지를 다녀온 적이 있었죠. 그때부터 청년백범과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회비를 안 내는 유령회원이긴 하지만...)


이러한 인연으로 '어린이 백범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자원봉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저같은 놈도 쓸모가 있구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불러주니까 고마운 마음에 선뜻 수락을 하긴 했습니다만... 수락해놓고보니 갑자기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오더군요.


천성적으로 무뚝뚝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붙임성 있게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특히 어린 애들 장단 맞춰주는 건 정말 자신이 없었거든요. 제가 애들을 다뤄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간다고 해놓고도 캠프 출발 전까지 심란하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행사가 시작되자마자 몇몇 애들이 벌써부터 대열에서 이탈해서 자꾸 장난치고, 떠드는 등 진지하게 활동에 임하지 못하거나, 대열과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뾰루퉁한 표정으로 혼자 다니는 애들을 보면서 막막함을 느꼈더랬습니다. 보조교사로 몇 명 같이 온 친구들이 있긴 했는데, 그 친구들 역시 경험이 없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누구에게 하소연할 데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열심히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원래 성격대로라면 저도 애들 다독이고, 끌고 가는 일을 절대 못했을텐데, 어쨌거나 저를 믿고 보조교사라는 막중한 역할을 맡겨주신 거고, 저 역시 제가 하겠다고 나선 것이니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만큼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애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도 걸고, 외톨이처럼 홀로 걷는 애들을 더 챙겨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보조교사들 중에는 그래도 애들이 제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틀째 되던 날부터는 애들이 아예 저를 가지고 놀더라고요. 여학생들이 특히 저를 더 괴롭히데요. '만만한 선생님'이라고 별명 붙여주면서, 저를 볼 때마다 자꾸 팔을 꺾는 통에 팔이 정말 아팠습니다. 무슨 여학생들이 이리 힘이 센지... 여학생들에게 시달리는 제 모습을 보던 남학생들은 '불쌍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오히려 여학생들로부터 저를 지켜주려고 하는 진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힘들긴 했지만, 애들이 저만 쫄래쫄래 따라다니는데,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엽기도 했습니다. 특히 워터파크에 가서 물놀이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자애들이 자꾸 제 팔을 잡고 물 속에 같이 들어가서 놀자고 하는 통에 체력적으로는 지쳤어도, 뭔가 뿌듯함이 있었어요. 처음에 제일 걱정했던 부분이 '애들이 나한테 다가올까', '내가 애들하고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였는데, 그 문제는 그래도 해결이 된 것 같아서 말이죠.


뭐 중간 중간 짜증이 나는 일도 많았고, 목소리톤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일도 많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순수한 아이들을 보면서 그 천진난만했던 모습이 유달리 기억에 남습니다. 애들은 그냥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을 뿐인데, 말하는 표현 하나하나부터가 때 묻지 않았다는 게 느껴져서 어느새 저도 모르게 '아빠미소'를 짓고 있더라고요. 제가 초등학생일 때도 저랬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2박 3일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고보니,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는 표현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사소한 일로 토라지고, 쉽게 흥분하고, 집중하지 못하고 심한 장난을 쳐서 모두를 힘들게 하고... 그렇게 통제하기 힘든 아이들도 있지만, 그런 아이들조차 아침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의 침구류를 개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에 대해 어른들의 잣대로 함부로 평가하고, 섣불리 재단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아이들일수록 관심이 필요하다는 교훈도 배웠고요. 아직 어린 아이들일수록 어른들이 좋은 모습 보여주면서, 지속적으로 바른 길로 인도해주어야 바르게 자라날 수 있겠지요. 결국 원석을 다듬어주는 건 우리 어른들의 몫이 아닌가 합니다.


여하간 2박 3일 동안 힘들기도 힘들었지만, 참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캠프를 통해 또 다른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고,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 아이들하고 함께 할 수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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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촌 미플에서 열린 신촌대학교 <필살기논작학과> 특강을 청강하고 왔다. 신촌대학교는 내가 다녔던 열정대학과 비슷한 취지로 설립된 대안학교인데, 열정대학 기자학과에 강사로 왔던 MBN 윤범기 기자가 직접 창립한 학교다. 기자학과 강의가 인연이 되어, 윤 기자님이 나를 신촌대학 단톡방에 초대해주신 덕분에 신촌대학에서 열리는 다양한 강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번 특강 소식도 그렇게 알게 된 것.


특히 오늘 특강은 중앙일보 논설위원인 권석천 위원이 강의를 한다고 하여, 청강을 신청하게 되었다. 외부인의 청강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 열정대학과 달리, 신촌대학은 외부인의 청강을 자유롭게 허락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튼 권 위원의 특강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권 위원으로부터 들어야 할 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대학 기자학과 사전과제가 권석천 위원이 쓴 <정의를 부탁해>라는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는 것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었다. 그래서 권 위원께 따로 메일을 보내 나의 고민을 토로하고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게 바로 딱 한 달 전의 일이었는데, 워낙 바쁜 분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답장을 받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마침 특강도 있겠다, 오늘 직접 오프라인에서 강의도 듣고, 메일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듣고자 한 것이다.



강의는 1시간 30분 동안 이루어졌는데, 권석천 위원이 그동안 중앙일보에 써왔던 칼럼들을 사례로 들면서, '왜 이런 글을 썼는지', '해당 칼럼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등을 설명했다. '세월호', '진경준-우병우' 등 굵직굵직한 사회 이슈들에 대한 칼럼이 주로 소개되었다. 


그가 쓴 <정의를 부탁해>를 읽으면서도 이미 느낀 바지만, 그는 언론인의 역할에 대해 남다른 신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많은 기자들이 자신이 속한 신문사의 종군기자가 되어버렸다"며 기자들 대부분이 소속 신문사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나팔수가 되어버린 '어용 저널리즘'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한 것. 그래서 그런 기자들을 가리켜 '기레기'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글의 주제가 어떻든 간에, 그것을 꼭 좌와 우 혹은 진보와 보수 등 진영논리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해석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월호 문제와 같은 것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다툴 정치적 쟁점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사고가 있었던 원인을 분석하고, 진상을 파악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성을 해야한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은 어느 순간부터, 그 입장에 따라 좌파와 우파로 나뉘는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세월호 사건 이후 권 위원이 쓴 칼럼들은 대부분 그 원인을 세월호로부터 찾고 있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세월호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한국 사회의 안일함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지어 말한다.



오늘 권 위원이 한 이야기 중 "글을 쓸 때는 가장 먼저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무릇 기자라면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원칙일 터인데, 감정이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사건을 접하든 간에 먼저 그 사건에 대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칼럼처럼 필자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는 글일수록 그렇다. 자신이 쓰고자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연민이 됐든 분노가 됐든, 감정을 느껴야 보다 생생한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감정이 곧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된다고. 


뉴스를 취재할 때도 당연히 감정이 필요하다. 세월호를 예로 들어보자. 수많은 유족들이 언론을 적대시하던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왜 유족들이 언론을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나. 수많은 기자들이 '특종', '속보'에만 집착하며, 감정 없는 취재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들이 차가운 바닷 속에 갇혀있는 것에 분노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유족들에게 카메라 셔터를 들이밀며 '업무'를 수행하는 기자들의 행태는 가히 기레기라고 할 만 했다. 그들에겐 피도 눈물도 없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감정 있는 글쓰기와 취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자, 이제 내가 권 위원에게 보냈던 고민을 이야기해보자. 사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언론인(기자)에 대한 로망도 있다. 아직 갈팡질팡하고는 있지만,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이루어진다면, 언론고시를 준비할 마음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기자가 되기엔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계속 망설이는 중이다.


기자가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원인 중 하나는 '줏대 있는 글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만의 관점과 논리를 가진 글을 쓰기가 어렵다는 점이 내 한계였다.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도 'A의 말도 맞는 것 같고, B의 말도 맞는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중립의 입장에서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고자 하는 신념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사안을 바라볼 때, 누구 말이 맞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논리적으로 글을 써야하는 기자가 자신의 논리에 자신감이 없다는 건 심각한 함정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줏대 있는 글쓰기', '깊이 있는 글쓰기'를 하는 방법에 대해 권 위원께 메일을 보냈었다.


그리고 오늘 강의를 통해 그런 답답함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고 본다. 정답을 얻었다기보다는, 권 위원 당신의 경험이 녹아든 조언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권 위원은 "완벽하게 글을 쓰려고 하지 마라"고 계속 강조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충족시키는 글은 없다. 나조차도 내가 쓴 칼럼에 대해 반박하고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내가 쓴 글에 대해 동의하는 독자가 3~40% 정도만 된다고 해도, 그 글은 성공한 글이다"라는 것이다. 또한 "편견 없는 글쓰기 역시 불가능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논리도, 모두의 동의를 얻어내는 완전한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논리를 갖추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신의 논리가 완벽한 논리라고 생각하고 밀어붙여라"라는 조언도 도움이 되었다.


다시 한 번 구체적인 조언을 구하는 내게, 권 위원은 "정치적 쟁점이 치열한 사안일수록 공부를 많이 해야한다"며 "책도 많이 읽고, 해당 사안에 대해 많이 공부한 뒤에 글을 쓰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예로 들었던 '메갈 사태'에 대해서, 그 역시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잘 몰라서 함부로 대답하기 어렵다"고 답변해주었다. 그런 권 위원을 보면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베테랑 기자라고 해서 모든 사안에 대해 전문가도 아니며, 글을 쓸 때도 자신의 논리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점이었다. 베테랑 기자도 이럴진대, 풋내기 기자지망생이 이런 고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일터. 그런 점에서 다소 위안이 되었다.


아무튼 권석천 위원 역시 지금도 글을 쓸 때, 막연하고 두려워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26년차 베테랑 언론인이자 대한민국 메이저 신문 중 하나인 중앙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수많은 칼럼을 써왔지만, 여전히 "텅 빈 화면에 커서만 깜빡이는 것을 보면 막연하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머리가 아닌 그저 두 손을 믿고 글을 쓴다"고 한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고 4~5시간을 쓴 뒤에, 다시 다음 날 수정하는 식으로 계속 쓰고, 고치고를 반복한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몇 년만 더 글을 쓰고,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그에게도 글쓰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렷다.


고작 2시간 남짓한 강의였지만, 충분히 유익했고 즐거운 강의시간이었다. 사실 장준하 선생 이후로 내게 깊은 인상을 준 언론인은 없었는데, 권석천이란 언론인에게 점점 호감이 가기 시작한다. 그가 쓴 모든 칼럼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혀있는 한국 사회의 기형적인 구조에 대해 비판하는 모습에서 내가 지향하는 언론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특히 비판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도 '남에게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으려' 배려한다는 그의 글쓰기 원칙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앞으로는 그의 칼럼을 자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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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로에 관하여


사실 자나깨나 제일 근심걱정이 많은 부분은 바로 '진로' 문제입니다. 전역하기 전부터 계속 고민을 해왔던 문제지만, 확실히 군대를 갔다오니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년에 정상적으로 복학하게 되면 1년을 더 다녀야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으로서는 학교를 더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전공인 역사학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끼고 있고, 대학원에 가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당장 취직할 자신이 없어서 대학원에 가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자퇴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일단 "그래도 졸업장은 따두는 게 낫다"고 주위에서 만류하는 통에, 이 부분은 저도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내키지 않는 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한다는 게 상당히 고역입니다만, 지방대 4년제 졸업장조차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라고 하니까요.


진로에 관해서는 제가 뚜렷하게 하고 싶은 일들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은 많지만 그 일들을 직업으로 삼았을 경우,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커피가 좋아 카페를 차리고 싶어도, 자본도 없거니와 대형 프렌차이즈가 장악하고 있는 정글 같은 카페시장에서 살아남기가 힘들고, 무예 전수관을 차리자니 무예 전수관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런데 요즘 고민이 생겼습니다. 재입대에 관한 고민입니다. 군필자들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사실 요즘은 취업난 탓에 대위로 전역한 사람이 하사로 재입대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고 하죠. 물론 저는 취업난 때문에 재입대를 꿈꾸는 건 아닙니다. 


원래부터 꿈이 직업군인이기도 했고, 실제로 군 생활을 해보니까 군대나 사회나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거기나 여기나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건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생각없이 재입대하는 사람에 비하면 동기 자체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군복만 보면 마음이 많이 설레고, 제가 입고 있어야 할 옷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군대에서 워낙 훌륭하고 모범적인 지휘관들을 많이 봤는데, 그런 분들 영향도 있고요. 군 복무 시절, 직속상관으로 모셨던 중대장님 역시 "너는 군인 체질이야"라고 하시면서, 진지하게 재입대를 권하시더군요. 


일단 아무리 요즘 군대가 편해졌다고는 해도, 재입대라는 게 엄청난 각오와 결심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인지라, 계속 고민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냥 고민만 하다가는 시간만 어영부영 보내고 이도저도 안될 것 같아서, 일단 간부사관 시험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미리 시험공부는 하고 있다가, 원서접수할 때 되어서도 이 길을 가야겠다는 판단이 서면, 뒤돌아보지 않고 전진하려고 합니다.


2. 요즘 하고 있는 일들


뚜렷하게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젊으니까 이것 저것 부딪쳐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특히 군대에 있을 때 했던 생각들이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1년 9개월 동안 지내다보니, 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바깥에 나가면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든요. 그래서 말년 병장 시절, 밖에 나가서 하고 싶은 것들을 '버킷리스트'로 작성했고, 전역하자마자 실제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커피가 좋아 커피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은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남자라면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해금'을 배우고 있고요. 군대 있을 때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막상 나오니까 이런 저런 유혹들이 많아 책을 들여다보질 않게 되더군요. 얼마 전부터는 작정하고 독서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전역하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에 듣게 된 '열정대학' 같은 경우, 결과적으로 안 좋게 끝맺음을 하고 말았지만, 어찌되었건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또 '기자학과' 수업 같은 경우는 매우 유익했어요. 하지만 다음 학기 등록은 안 할 생각입니다.


글쓰기는 제 평생의 또다른 취미 중 하나라, 이렇게 개인 블로그를 열심히 운영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하려 노력합니다. 소통도 소통이지만, 블로그에 글을 매일 써주는 것만으로도 필력이 많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사람들이 반응하건 안 하건 간에 거의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오마이뉴스>에 가끔씩 기사를 쓰면서, 원고료로 용돈을 충당하는 등 제법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원고료가 36만원 정도 들어오는 덕분에, 보고 싶었던 책도 사고 스타벅스 원두도 샀더랬지요)


저는 주로 서평 기사를 쓰거나, 제가 활동하던 역사단체에서 개최하는 행사의 홍보기사를 써주곤 합니다. 얼마 전부터는, 동작문화원에서 수강했던 홈바리스타 강좌를 바탕으로 '어느 청년의 좌충우돌 홈바리스타 도전기'라는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8월 말부터는 서울 소재 모 중학교에서 자유학기 체육프로그램 강사로 선발되어, 당분간 제 앞가림은 충분히 하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무예 수련


무예24기를 수련하면서 권술적 한계를 느낀 뒤로는, 이를 보완해줄 만한 무술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무술이 제게 맞을지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레 여러 도장을 참관하게 되었죠. 지금까지 형의권, 영춘권, 위대태껸 등 평소 관심 있던 무술 도장을 찾아가 참관도 하고, 지인들로부터 정보도 계속 수집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드는 무술을 아직까진 찾지 못했습니다. 일단 금전적 여유도 부족하고, 이래저래 벌려놓은 일들도 감당하기 버거워서 당분간은 무예24기 수련에만 전념할까 합니다.


사실 제가 정말 배우고 싶은 무술은 홍가권입니다. 홍가권을 배우러 홍콩 쪽으로 무술 유학을 갈까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이 역시 젊으니까 할 수 있는 고민인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고 직장이 생기고, 부양해야 할 가정이 생긴다면 실천에 옮기기 힘든 꿈이죠. 그래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정말 무술로 업을 삼을 수 있을지, 홍콩에 가면 제대로 홍가권을 배워올 수 있을지... 계속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면서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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