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블로그에 포스팅을 자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블로그 방문자 횟수도 자연스럽게 많이 줄어들었네요. 방문자 횟수 늘어가는 맛에 블로그를 운영해왔는데 말이죠. 


사실 요즘은 <오마이뉴스>에서 주로 활동하다보니까 블로그 활동하기가 좀 벅찬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같은 경우는 글 하나 쓰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능력이 없으니 그런 것이겠지요. <오마이뉴스>에 글 한 편 쓰고 나면, 진이 빠져버려서 며칠 동안은 키보드를 두드리고 싶은 생각조차 나질 않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블로그도 자연스럽게 소홀해지는 것 같습니다. 여하간 오랜만에 짬을 내서 블로그에 근황을 전달합니다.


이번 주에 드디어 '이태원 대학교'가 개강했습니다. 제가 개설한 <조자룡창술배워볼과>를 비롯해서, 다른 학과장님들이 개설한 흥미로운 강좌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이태원 대학교 학과장의 가장 큰 혜택은, 다른 학과장님들이 개설한 과목을 무한대로 청강할 권한이 생긴다는 겁니다. 저 역시 듣고 싶은 강의가 많았으나, 스케쥴을 고려하여 제일 듣고 싶은 과목 네 가지만 청강하고 있습니다.



먼저 금요일 저녁에 열리는 <난 언제 제대로 연애해볼과>라는 과목은, 연애를 하고 싶지만 아직 하지 못하는 연애초보들이나, 연애 중 느끼는 권태기를 극복하고 싶은 커플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목입니다. 26년차 모쏠인 저로서는 과목명만 듣고도 구미가 당기더라고요. 그래서 청강을 신청했는데, 꼭 연애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과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시간에 서로 자기소개를 하면서, 서로의 매력포인트를 얘기해주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내 스스로 내 매력을 얘기한다거나, 남들로부터 돌아가면서 내 외모의 매력을 듣는 일이, 살면서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처음엔 쑥스럽고 민망했지만 그 과정을 겪고 나니 한층 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높아진 것 같아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나도 아나운서 해볼과>라는 과목은 실제 아나운서 출신 학과장님이 하는 강의였어요. 사실 이 과목이야말로 제일 실용적인 강좌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였는데, 전 아나운서를 할 건 아니지만 '스피치' 부분에 있어 교정을 받고 싶었거든요. 사실 남들 앞에 서면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 말을 좀 더듬는 경향이 있습니다. 발음도 많이 새고요. 말주변 어눌하다는 게 제 일생의 콤플렉스였는데, 어제도 남들 앞에서 발성연습하는 가운데 그런 문제점이 가감없이 드러나더군요. 그래서 아나운서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아나운서님이 "그럼 앞으로 수업 전에 스피치 한 번씩 하자"면서 "오히려 경험을 많이 해봐야 극복이 된다"고 하시더군요. 제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드러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제 경험을 통해 다시 한 번 제 문제점을 직시하고, 극복하기 위해 도전했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4주 동안 발성연습과 스피치 연습을 통해 남들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법을 터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 열리는 <커플대화 배워볼과>는 말이 커플이지, 사실은 그냥 '소통'에 대해 배우는 수업입니다. 저도 그 점에 주목해서 수강 신청을 했고요. 오늘 막 첫 수업을 듣고 왔는데, 역시 처음에는 낯설고 민망하고 여러모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수강생 분들과 터놓고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게임도 하고, '감정카드'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면서 남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특징을 '관찰'하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갈수록 소통이 중요해지는 시대에,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강의가 아닌가 합니다.



그외에 명상 관련 학과도 청강 신청했는데, 아쉽게도 어제 학과장님 사정으로 휴강해서 아직 들어보진 못했습니다. 명상도 꼭 듣고 싶은 강의 중 하나이므로, 기대 중입니다.


PS. <조자룡창술배워볼과> 이야기는 따로 빼서 포스팅하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

젊음의 거리에서 ‘대한민국 영웅, 명예 찾기!’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1조 오프라인 미션 수행기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1조입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유달리 매섭듯, 가을을 시샘하는 늦더위의 기세도 만만치 않은데요, 이처럼 무더위로 인해 대지의 만물도 모두 녹아버리는 듯했던 지난 8월 20일, 신촌 연세로에 검은 조끼를 입은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정체는...! 저희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조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저희는 왜 이 더운 날씨에 신촌에 있었을까요? 바로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오프라인 홍보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날씨만큼이나 뜨거웠던 현장의 열기 속으로 다함께 들어가보시겠습니다!



젊은 청년층을 공략하라!


오프라인 홍보행사를 준비하면서 저희가 가장 먼저 고민했던 점은 ‘누구를 대상으로 홍보할 것인가’ 였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주로 참전용사가 속한 노인층을 대상으로 홍보가 이루어진 점을 주목했습니다. 동시에 시간이 갈수록 청년층의 역사의식은 흐릿해져가고 있다는 점에도 함께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역발상으로 청년층을 대상으로 홍보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 그리고 6·25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에 대해 미래 대한민국의 주역이 될 청년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저희는 젊음의 거리, 신촌에서 오프라인 홍보 행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원한 얼음커피 한 잔 하실래요?


행사 당일인 20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저희는 아직 거리가 잠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행사 장소로 향했습니다. 거리에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부랴부랴 천막을 설치하고, 사진을 나열하는 등 부지런을 떨다보니 어느새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길을 오가는 시민들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오전 10시! 드디어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조의 오프라인 홍보 행사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날씨가 더운 점에 착안하여, 홍보 부스를 ‘간이 카페’ 형식으로 준비했습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잠시 다리쉼을 할 수 있도록 대형 천막 아래 의자들을 배치하고, 누구든 와서 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아울러 즉석에서 시원한 얼음커피를 제조하여 시민들에게 나눠드렸는데요, 시민들이 커피 한 잔 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련 사진들을 부스 주위로 전시했습니다.



(사진: 젊음의 거리 신촌에 설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홍보 부스)


열정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내다


그런데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홍보 부스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저조했기 때문입니다. 길거리 홍보행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저희들 역시 무관심한 시민들의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쭈뼛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더운 날씨 탓에 점점 미지근해지기 시작하는 커피를 보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각성한 저희 조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떠나 한 목소리가 되어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길 가는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시원한 얼음커피를 내밀며 홍보 부스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려 노력한 것입니다. 이런 저희의 열정에 시민들도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부스 앞에 멈추는 발걸음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희 부스를 찾은 첫 손님은 할머니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저희 사업에 대한 설명을 듣더니 “내 사촌오빠가 6·25 전쟁 때 금화지구 전투에서 돌아가셔서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요.



(사진: 홍보 부스를 찾은 첫 손님은 전사자 유가족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지금까지 이런 사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며 “설마 6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오빠를 찾을 수 있겠냐”며 회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꼭 찾아드릴 수 있다”고 약속드리며, 꼭 국유단으로 연락해주실 것을 신신당부했습니다. 이처럼 시작부터 특별한 손님을 맞이한 저희는 오프라인 홍보 행사의 효과를 새삼 느끼며 홍보에 더욱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사진전시회를 열다


시작은 커피 한 잔이었습니다. 단순히 목을 축이러 부스를 방문했던 시민들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전시된 사진들을 보고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져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국유단 예비역 병장 출신인 김경준 서포터즈의 이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발굴병 출신 서포터즈답게 전문 지식을 동원한 설명은 관람객들에게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페루 출신 한 외국인 관람객은 ‘설악산 상봉 유해발굴작전’ 사진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한국 관광지에 여러 번 가봤고, 설악산도 잘 알고 있다”며 “이 높은 산꼭대기에도 유해가 있느냐”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상봉 유해발굴현장에서 직접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던 김경준 서포터즈는 “상봉 꼭대기 바위틈에서 조명등을 비춰가며 유해를 발굴했다”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설명으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사진: 유달리 사진전시회에 관심을 보였던 페루 관광객)




(사진: 발굴병 출신의 경력을 되살려 국유단을 홍보하는 김경준 서포터즈)


전시된 사진들은 유해의 발굴과정부터 입관, 약식제례를 마치고 감식 절차를 거쳐 유가족에게 인도되기까지의 전 과정 뿐 아니라, 중국군 유해 인도 행사와 한·미 공동감식까지 국유단의 사업을 설명할 수 있는 사진들을 순서대로 전시하였는데요, 사진들을 유심히 관람하던 한 중년의 여성 관람객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해 모시는 줄은 몰랐다”며 “군대 가 있는 아들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데, 하물며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60년 넘게 돌아오지 못하는 이분들을 기다리는 유가족들의 심정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할 수 있는 작은 사진전시회 개최 모습)


인기만점이었던 O.X 퀴즈


작은 사진전시회와 함께 저희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국유단 O.X 퀴즈’였습니다. 사전에 미리 엄선하여 준비한 5가지의 질문을 바탕으로, 시민들이 즉석에서 퀴즈를 푸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특히 퀴즈의 정답을 모두 맞히는 시민들에게는 특별 주문제작한 ‘국유단 보틀’을 경품으로 지급했는데요, 모두들 보틀을 노리고 적극적으로 퀴즈 풀이에 임하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국유단 O.X 퀴즈’)


자, 그럼 현장에서 출제했던 O.X 퀴즈 문제를 한 번 옮겨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함께 풀어보실까요?


[국유단 O.X퀴즈]


1. 전세계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실시하는 나라는 2개 뿐이다?

2. 유해발굴사업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된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3. 북한군의 유해와 중공군의 유해는 발굴하지 않는다?

4.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 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2% 미만이다?

5.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총 2개 팀으로 구성되어있다?


[정답]


1. O (대한민국, 미국)

2. X (2000년 김대중 정부 당시,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

3. X (인도적 차원에서 발굴하고 있음. 북한군 유해는 파주 적군묘지에 안장하고 있고, 중국군 유해는 2014년부터 중국 측에 송환하고 있음)

4. O (국군 유해 9,182위 중 신원확인이 된 유해는 115위)

5. X (조사/발굴/감식/영현/대외협력/계획운영/본부중대 등 7개 부서로 구성)


여러분 정답을 얼마나 맞히셨나요? 많이 어려우셨나요? 


네, 현장의 시민들도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요. 실제로 문제를 2개 이상 맞히는 시민들이 별로 없었답니다. 그만큼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낮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언론매체와 예능을 통해 우리 사업을 홍보해왔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인식이 낮은 것을 보면서 저희가 하고 있는 홍보행사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더위를 잊고 홍보에 전념하는 저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 특별 주문제작하여 경품으로 지급한 국유단 보틀)


O.X 퀴즈의 정답을 맞히지 못하는 분들이 너무 많자, 저희는 새로운 방식으로 보틀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즉석에서 국유단 홍보 부스를 촬영해 개인 SNS에 업로드하는 시민들에게 보틀을 선착순 지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에 많은 시민들이 앞다투어 저희 홍보 행사 소식을 SNS에 올리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준비한 보틀도 금세 동나고 말았답니다.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던 외국인 관광객들


행사를 진행하는 내내 정말 많은 시민들이 저희 부스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셨는데요, 특히 신한은행 대학생 홍보대사 팀도 홍보활동을 하던 와중에 저희 부스에 방문하여 즉석에서 O.X 퀴즈를 풀고 사진전시회를 관람했습니다. 또 저희 부스 옆에서 홍보행사를 하던 식품의약품안전처 서포터즈들과 상호 교류 차원에서 서로의 부스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식약처 서포터즈들 역시 “이런 사업이 있는 줄은 몰랐다. 좋은 정보를 배우고 간다”며 관람 소감을 밝혔습니다. 



(사진: 신한은행 대학생 홍보대사들과 함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내 시민들보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페루 관광객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들이 홍보 부스로 모여드는 바람에 저희 조원들은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부족한 어학능력을 느끼면서 좌절감을 맛봐야만 했습니다.


이때 구세주처럼 신선정 서포터즈가 등장했습니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외국인 관광객들과의 대화를 주도하며 사업의 의미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신선정 서포터즈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6·25 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자, 6·25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사진: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열심히 통역하며 국유단을 홍보하는 신선정 서포터즈)


이에 발을 맞추듯 하지영 서포터즈와 이다솜 서포터즈 역시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지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으며, 국유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열정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현장에 바람이 불어 현수막이 찢어지고, 사진들이 바람에 날아가는 등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가 수시로 벌어져 계속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두 서포터즈의 발 빠른 대처 덕분에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답니다. 이렇듯 저희 조원들은 언제부터인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손발을 착착 맞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준비과정부터 행사까지 많은 것을 배웠던 시간


지금까지 젊음의 거리 신촌에서의 국유단 홍보행사 현장을 보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셨나요?이번 행사를 마치는 저희들의 소회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사실 이번 오프라인 행사를 준비하면서, 장장 수개월에 걸친 아이디어 회의가 있었습니다.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열정 많은 대학생들답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각자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으로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알려야한다’는 큰 뜻에는 다들 공감했고, 이에 따라 서로의 입장을 한 발짝씩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점점 하나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프라인 미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조원들 간의 양보와 배려, 단합과 소통이라는 덕목을 배울 수 있었기에, 저희에게도 뜻 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홍보부스를 찾아 진지하게 설명을 경청해주신 많은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홍보 행사를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행사의 의의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포터즈들의 소감 한 마디


그럼 행사를 진행하며 느꼈던 서포터즈들의 소감 한 마디씩을 들어보실까요?


김경준 서포터즈: “군 복무 당시 수행했던 임무의 가치를 직접적으로 알리는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사진 속 현장에 내가 있었음을 설명하자, 많은 시민들이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느껴서 뿌듯했다”


하지영 서포터즈: “준비 당시에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유해발굴 사업을 칭찬해 주시던 분, 말없이 전시된 사진을 계속 보시던 분, 한국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열심히 설명을 들어주시던 외국인 등등 많은 시민들을 만나며 걱정이 기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시민들의 관심을 통해 더 많은 홍보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다솜 서포터즈: “오프라인 미션이 처음이어서 긴장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잘 마무리되어서 뿌듯하다. 아쉬웠던 것은 이런 행사가 처음이라 초반에 다소 헤맸던 점이다. 렌트한 테이블과 천막의 크기가 맞지 않아서 급하게 부스 구조를 바꾸기도 했고 당일 아침에 물품을 구매하는 등 돌발 상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르신, 외국인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 한 편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심을 보면서 ‘영문 리플렛’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선정 서포터즈: “6·25 전쟁에 참전한 참전국의 외국인들이 우리의 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해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을 받았다. 한편으로 젊은 층들의 관심과 참여도는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반기에는 상반기의 미흡한 점을 바탕으로 좀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홍보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비석)


행사는 끝났지만, 이번 신촌 오프라인 행사는 시작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그들을 조국의 픔으로 모시는 그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국민 여러분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은 기간까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의 활약도 꾸준히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

청년들을 위한 대안대학 '이태원대학'이 10월에 정식으로 첫 개강을 합니다. 



저 역시 이태원대학에 과목 하나를 맡아 운영할 예정입니다. 이번에 제가 개설하려는 과목은 <조자룡창술배워볼과>라는 과목인데, 무예24기 중 기창(旗槍)을 지도하는 과목입니다.


○ 기창(旗槍)


- 깃발이 달린 단창(短槍)으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의 무예 중 하나

- 고려시대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던 군사들이 사용하던 병장기

- 조선군 원앙진의 대장이 사용하던 병장기

- 평시에는 군사신호용으로 활용, 위급 시에 호신용으로 활용


○ 이런 분들이 수강하면 좋습니다


- 무예에 관심이 있는 분

- 창술에 관심이 있는 분

- 뭔가를 들고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 분

- 근력, 체력, 유연성 등 전반적으로 몸 상태를 업그레이드하고 싶으신 분

- 남들과 다른 색다른 취미를 갖고 싶은 분



수강료 8만원을 납부하면, 두 가지 과목을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제 과목 말고도 각계각층에서 실력이 쟁쟁한 분들이 나서서 재능기부로 멋진 과목들을 만들어주셨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망설이지 말고 수강신청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수강신청: http://goo.gl/Zfc2vY



Posted by 가베치
,

오늘 저녁 이태원에 위치한 용산문화예술창작소 연습실에서 '이태원대학' 10월 개설강좌 PT 발표가 있었습니다. 저도 한양류를 대표하여 오늘 발표에 참여했습니다.


참고로 이태원대학은 열정대학, 신촌대학교처럼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학교'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대안학교의 일종입니다. 강의실로 활용하려는 용산문화예술창작소가 이태원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태원대학이란 이름이 붙었고요. 올 10월에 첫 학기가 시작되는데, 저 역시 초대 학과장으로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태원대학에 제가 개설하려는 강좌는 <조자룡창술배워볼과> 입니다. 강좌명은 이태원대학을 운영하는 MBN 윤범기 기자님이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역시 기자님답게 네이밍 센스가 보통이 아니시더군요.



<조자룡창술배워볼과>는 무예24기 중 하나인 기창(旗槍)을 수련하는 과목이 될 것입니다. 이태원대학 학사과정상 4주 커리큘럼이 원칙이지만, 4주 안에 기창을 배우는 것은 너무 짧은 것 같아 5주로 늘렸습니다. 무예를 익히게 5주도 당연히 짧습니다. 무예란 평생 수련하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선 최대한 하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주면 그래도 창과 친숙해지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라는 생각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 '무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거죠. 오늘 피티 발표 때도 그 점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무예하면 어렵고 위험하고 남자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도 겁이 많다. 위험하기 때문에 더 안전하게 한다"고 강조하면서, 무예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게 수업 목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더불어 이 관심이 실제적인 수련으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죠. 꼭 무예24기가 아니어도, 근처 무술도장에만 등록하더라도 좋겠습니다.


다행히 창을 대체할 수련용 봉은 이태원대학 측에서 운영비로 보조한다고 합니다. 고로 수업을 듣는 분들은 봉을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소는 보라매공원으로 하려다가, 창작소 옥상에 가보니 비교적 넓어서 할 만할 것 같더군요. 거기서 하면 봉도 보관해둘 수 있으니 운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이 될 것이고... 일단 5명 미만이면 폐강이라고 제가 기준을 세워놨습니다. 기왕지사 칼을... 아니, 창을 뽑았으니 뭐라도 찔러(?)야하지 않겠습니까. 폐강만 안된다면 좋겠군요.

Posted by 가베치
,

링크: http://omn.kr/kxwy


얼마 전 <오마이뉴스>의 연예 분야 자매지 격인 <오마이스타>에서 '내 인생의 OOO'이라는 주제의 공모전을 열었더군요. 자신에게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나 드라마, OST 등 대중문화 분야의 작품을 소개하는 공모전이었습니다. 


이런 공모전에 제가 빠질 수야 없죠. 뭐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영화, 드라마가 한두 편이냐마는... 몇 가지 손에 꼽은 것 중에 그래도 제 인생을 가장 크게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역시 성룡의 <취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무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도 결국 그 영화 한 편 때문이었으니까요.


평생 무술가로서 산다는 것... 약간 과장을 보태긴 했지만, 어쨌건 평생 무술을 수련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언젠가 문파를 열어 제자를 받는 것도 무술을 수련하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고요. 당장 전업 무술가가 되겠다는 건 아니겠지만, 언젠가 저만의 도장을 여는 게 목표인 건 확실합니다. 이쯤 되면 영화 한 편이 제 인생을 바꾼 게 맞죠?


아무튼 그런 내용으로 솔직하게 글을 써서 제출했는데, 오늘 <오마이뉴스> 메인에 올라왔더라고요. 제 개인사가 널리 소개되니까 속살을 보인 것 같아서 남사스럽기도 하네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은 영 아닙니다. 무술 독학을 시도했다가 하루 만에 포기하고 도장에 다니게 됐는데, 마치 제가 무술 독학으로 경지에 오른 것처럼 제목을 지어놔서... 제목 때문에 괜히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애초에 제가 지은 제목은 '술에 취해 비틀비틀... 현실이 된 소년의 로망'이었는데, <오마이스타>에서 일방적으로 바꾼 제목이 더 마음에 안 듭니다. 누구보다 '무술독학'의 폐해를 열심히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으로서 말이죠.


아무튼 여유가 생기면, 제가 거쳐온 무술 이력에 대해 시리즈로 한 번 연재해볼까 합니다. 지금 커피 이야기를 연재하는 것처럼요.

Posted by 가베치
,

특종! 발굴병 24시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3)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그동안 연재해왔던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도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그동안 다뤄왔던 주제들이 다소 무거운 주제들이었다면, 이번 주제는 여러분께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바로 ‘유해발굴병’의 24시간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와 함께 발굴병들의 일상으로 들어가보실 텐데요, 다들 준비되셨죠? 그럼 출발!



기상! 출동 준비! (AM 5:30~06:30)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어느 군부대 막사의 복도. 기상나팔이 울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생활관이 보이네요. 바로 발굴병 생활관입니다.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걸까요? 아직 덜 깬 눈으로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는 윤 이병에게 물어봤습니다.


“작전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섭니다. 부대에서 발굴지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조기 기상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06시 30분 기상이 원칙이지만, 숙영부대에서 발굴지점까지 이동시간만 1시간 이상 소요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조기 기상은 부득이하다고 합니다. 기상과 동시에 기계와 같이 빠른 동작으로 세면과 환복을 하고, 이른 아침식사를 한 뒤 다시 출동준비를 하는 모습이 매우 정신없어 보이는군요. 분대장 김 병장이 살짝 귀띔을 합니다.


“발굴병들은 사실 아침이 제일 바쁩니다. 혹시라도 빠진 게 없나 재차 점검하고, 아침식사도 다른 병력들보다 일찍 하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 아직 밥이 준비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취사장에 앉아 하릴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발굴병들이 출동준비로 정신없는 사이, 발굴팀장님께서 출근하셨네요. 팀장님은 간밤에 병사들이 잘 잤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먼저 확인합니다. 혹시라도 몸이 좀 안 좋은 병사가 있으면 생활관에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게 하거나, 의무대로 보내 진료를 받게 한다는군요. 다행히 오늘은 모두 건강한 모습입니다.


팀장님의 인솔 하에 차량을 타고 발굴지까지 이동한 발굴병들. 차에서 내리자마자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한 뒤, 본격적으로 산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분대장부터 이등병 막내까지 공평하게 나눠서 진다지만, 등에 멘 장비들이 상당히 무거워보이는데요. 힘들지 않나요? 


(사진: 발굴병들의 임무수행에 필요한 장비들. 발굴병들은 매일 같이 이 짐들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이등병 때는 맨 몸으로 산에 오르는 것도 죽을 맛이었지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다보니 이젠 힘든 줄도 모르겠습니다!” 


체력 좋아보이는 염 일병의 답변이 믿음직스럽군요.


오전 유해발굴작전 (AM 09:00 ~ PM 12:00)


드디어 작전 개시! 보통 유해발굴작전은 100명 단위의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데요, 이들을 ‘기초발굴병’이라고 합니다. 발굴하려는 지점에 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굴토를 하며 올라가는 방식으로 기초발굴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전문발굴병인 국유단 발굴병들은 기초발굴병력의 뒤에서 기초병력들이 제대로 발굴을 하고 있는지, 혹시 유해를 놓치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하며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한답니다.


그런데 그때! 


“팀장님, 유해 나왔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순간 발굴팀장님과 발굴병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달려갑니다. 유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식별되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뜯어보며 토의한 결과 인골(人骨)로 판정되었습니다. 


유해로 판정이 나자, 발굴병들은 각자 임무를 분담해 일사천리로 수습에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유해가 식별된 지점 주위로 나무 말뚝을 박고, 노란색 테이프로 사방을 두릅니다. 이 ‘접근금지’ 라인 안으로는 국유단 발굴병 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현장 훼손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이 공간을 전문용어로 ‘트렌치’라고도 합니다. 발굴병 역시 트렌치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라텍스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여 유해 훼손에 대비한다는군요.



(사진: 유해수습을 하는 국유단 발굴병들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구슬땀을 흘리며 정성스레 수습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이 매우 진지합니다. 전문발굴병의 숙련된 손길에 6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호국영령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분은 대체 왜 이곳에, 어떤 사연으로 잠들게 되신 걸까요. 드러나는 유해를 보며 발굴병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지기 시작합니다.


꿀맛 같은 잠깐의 휴식 (PM 12:00 ~ 13:00)


“오전 발굴작전 종료! 밥 먹고 하자!”


벌써 점심시간이군요. 유해 수습에 전념하던 발굴병들도 그제야 허리를 펴며 한숨을 돌리네요. 임무를 수행하느라 지친 병사들이 그늘 진 곳에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달콤한 휴식 시간입니다. 병사들은 전투식량으로 허기를 달래며 즐거운 휴식을 만끽합니다. 매일 같이 먹는 전투식량이 물리지는 않을까요?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사진: 발굴병들의 주식인 ‘전투식량’)


“당연히 물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 주먹밥을 만들어오기도 합니다. 도시락을 싸오기도 하는데, 시장이 반찬이라고 전우들과 함께 나눠먹는 밥은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특히 산에서 먹으니 운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병사들 중에는 돗자리에 누워 쪽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네요. 국유단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Y씨는 “점심 먹고 한창 나른할 때, 산바람 맞으며 잠깐 누워 자던 그 잠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유해발굴작전 개시 (PM 13:00 ~ 17:00)


잠깐의 달콤한 휴식도 끝나고, 오후 작전이 개시됩니다. 오후 작전은 오전에 비해 좀 더 바쁘게 돌아갑니다. 오전에 식별한 유해를 오늘 안에 수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해발굴작전의 원칙 중 하나는 바로 ‘당일 수습’이라고 합니다. 유해를 현장에 방치하고 내려올 경우, 까마귀와 같은 산짐승들이 유해를 물어가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래서인지 발굴병들의 손길 역시 오전보다 더욱 분주해보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국영령의 모습이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60여 년 전 당시 모습 그대로 당신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노출이 완료된 유해의 형태는, 전사 당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떻게 돌아가신 것일까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착잡한 표정으로 노출된 유해를 바라보던 박 일병이 입을 열었습니다.


“보통 유해라고 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오는 것처럼 완전한 형태의 유해를 많이들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영화와 다릅니다.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수류탄에 온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여기 누워계신 이분 역시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참혹한 양상으로 전사하신 게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사진: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노출된 유해 – 출처: 국방부 블로그(http://mnd9090.tistory.com/1959))



(사진: 태극기로 관포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유해의 노출을 마무리한 발굴병들은 유해의 노출 양상을 직접 그림과 사진 등으로 기록하고, 정성을 다해 입관 절차에 들어갑니다. 이제 또 한 분의 호국영령께서 60여 년 만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군요.


작전 종료 및 막사 복귀 (PM 17:00 ~ 18:00)


금일 작전 종료. 하산 준비를 마친 병력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수습한 호국영령을 보내드릴 시간입니다. 태극기로 정성스레 싸여있는 관 앞으로 제기상이 놓이고, 발굴부대를 대표하여 대대장님이 직접 제주를 올립니다. 


‘부대 차렷! 호국영령님께 대하여 경례! 일동 묵념!’


발굴팀장님의 구호에 맞춰, 병력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거수경례와 묵념을 올립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60년 동안 오매불망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을 호국영령이시여. 이제 편히 쉬소서.



(사진: 약식제례를 지내는 모습)


유해봉송을 마친 발굴병들도 하산길에 오릅니다.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을 모셨다는 생각에 뿌듯함과 홀가분한 감정을 가지고 내려가는 발굴병들의 발걸음이 가벼워보입니다. 함께 내려가던 김 일병이 이런 말을 덧붙이네요.


“만약 오늘 안에 수습을 하지 못했다면, 조명장비까지 이용해서 야간 발굴을 했을 겁니다. 예전에는 밤늦게 하산한 적도 있었습니다.”


작전 종료 후에도 이어지는 임무수행 (PM 18:00 ~ 22:00)


막사로 복귀한 발굴병들의 표정을 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하네요. 하지만 발굴병들의 일과는 막사 복귀 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복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 수습한 유해에 대한 기록을 전산화하는 것. 현장에서 그림까지 그려가며 열심히 받아 적은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키아티스(KIATIS: 6.25 전사자 종합정보체계)라는 국유단 고유의 전산망에 업로드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오늘 작전 수행 간 사용한 발굴 장비의 정비와, 내일 작전을 위한 출동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아니, 그럼 대체 언제 쉬나요?


“유해가 많이 나올 경우에는 그만큼 업무량이 많아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군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노하우가 생기기 때문에 지금은 예전보다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빠듯하긴 하지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각자 체력 단련이나 독서 등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이젠 발굴병 생활에 도가 텄다는 한 상병의 답변에 여유가 넘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깨어 있는 사람 (PM 22:00)


막사 내 모든 불이 꺼집니다. 이제 발굴병들도 취침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침상에 등을 붙이자마자 다들 금세 곯아떨어지는군요. 오늘 하루도 참 고단했나봅니다. 그런데 분대장 김 병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군요. 혹여 후임들이 잠에서 깰까봐, 이불 속에 들어가 라이트펜을 켜고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분대장 수첩이라는 겁니다. 매일 매일 작성하는 건데, 우리 발굴 팀의 일기와도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 임무수행 간 있었던 실수나, 분대장으로서 좀 더 매끄럽게 지휘하지 못했던 점, 고민이 있거나 아픈 병사들이 있는지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아무래도 호국영령을 모시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니, 이런 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내일은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작전에 임해야겠노라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진: 분대장은 매일 병사들의 애로사항과 임무수행의 결과를 기록한다)


발굴병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여러분, 지금까지 발굴병들과 하루 일과를 함께 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에 놀라셨나요? 실제로 발굴병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사명감이나 자부심 없이는 하기 힘든 임무라는 생각까지 드는데요, 발굴병 출신 예비역 병장 S씨에게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이등병 때는 산 타는 것도 힘들었고, 임무수행 간 잦은 실수 탓에 선임들에게 혼나면서 국유단에 지원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매일 밤 침상에 누우면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지더군요. 호국영령을 모시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정도 고생도 감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나약하게만 느껴졌던 겁니다. 매일 매일이 반성의 연속이었죠. 전역한 지금은 오히려 발굴병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사진: 정교한 손길로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이처럼 오늘도 호국영령을 모시기 위해 묵묵히 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이 있기에 또 한 분의 호국영령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Posted by 가베치
,
기사 원문: http://omn.kr/kse0

(가급적 링크를 통해 원문 기사로 보는 것을 권유함)

시간이 흘러 또다시 광복절을 맞았다. 으레 그렇듯 오늘도 정부는 성대한 기념식으로 이날의 의미를 축하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광복절의 의미를 설파하고,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을 발표했다. 누구나 다 아는 의미를 새삼 언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정부의 역행하는 역사의식에 비추어봤을 때 국민들은 과연 그 말에서 어떤 신뢰를 느낄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한 애국지사가 대통령에게 던졌다는 직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로 92세의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김영관 선생이 주인공이다. 아흔을 넘긴 노령에도 불구하고 꿋꿋한 자세와 단호한 목소리로 "건국의 기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이다", "국군의 날을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9월 17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병(老兵)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사실상 현 정부의 역사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야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대통령의 면전에 대고 언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져 싸웠고, 지금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와 신념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지조로 일관하는 모습에 국민들도 감동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실 모든 이들이 이렇듯 지조로 일관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은 아니었다.

신념을 꺾고 변절한 이들

지조(志操).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에 대해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꿋꿋한 의지. 또는 그런 기개'라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지조를 잃고 종국에는 변절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들은 처음부터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이들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친일행위를 하기도 했다.

3.1 운동을 촉발시킨 민족대표들 중 최린, 정춘수, 박희도도 그랬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의 주필을 지내며 민족시인으로 추앙받았던 춘원 이광수 역시 '조선인 마빡을 바늘로 찌르면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 모두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부르짖는 철저한 민족반역자로 변절했다.

기개와 충절을 덕목으로 요구하는 군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선진기술을 배워와 독립전쟁에 보탬이 되자'며 일본으로 건너갔던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마지막 생도 45명 중 실제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5명에 불과했다.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이들이 '친일'이라는 명찰을 달고 일본군 혹은 만주군에 복무하며 동포를 억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후에 지조를 꺾은 이들

그런데 정작 일제강점기에는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해방된 조국에서 변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으로 <압록강 행진곡> 등의 독립군가를 작사하며 광복군의 사기를 고취시켰던 한 소설가는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 <광복군>이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이 소설 속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물론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박 대통령조차 어이가 없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쳤던 걸까.

이에 대해 또 다른 광복군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청와대로부터 돈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랬다는 것이다. 결국 돈 몇 푼에 광복군 출신이라는 명예를 스스로 짓밟은 셈이었다. 이는 그 자신 뿐 아니라 광복군 전체가 우스갯거리로 전락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가문이, 일본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사실도 존재한다. 독립운동계의 양대 산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가문과 안중근 의사의 가문도 이러한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의 차남으로 얼마 전 작고한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전투기 비행사 교육을 받은 바 있다. 그런 그도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력했다. 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함께 했던 그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타이완 주재 대사, 교통부 장관 등의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집권이 시작되자 제9대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낸 전력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 그 자신 역시 광복군이었던 안춘생 전 독립기념관장(2011년 작고) 역시 김신 장군과 나란히 제9대 유신정우회에 입성하며, 독재정권에 협력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지조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물론 한 평생 지조로 일관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욕망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독립운동가의 삶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에겐 한 평생 풍찬노숙하며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 요구되었다. 

일신의 부귀영화는 꿈도 꿀 수 없었으며,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한 삶도 사치였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용기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일본 경찰의 고문을 이기지 못한 김구 선생 역시 <백범일지>를 통해 "차라리 아내가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음식을 들여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할 지경이었다.

해방 후의 삶이라고 달랐을까. 한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는 "예전에는 광복군 출신이라고 하면 취직이 되질 않아 일부러 그 이력을 숨기기도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인사들이 다시 정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알게 모르게 배제되는 상황에서 지조로 일관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시류에 순응하는 삶을 택했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냉혹하고 엄정한 법이다. 변절한 이들은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죽은 뒤 역사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이들은, 현실에선 고된 삶을 살았을지언정 역사에 위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광복절은 바로 그런 이들을 기리는 날이다. 눈앞에서 가족이 굶어죽고, 그 자신이 고문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꿋꿋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신념을 고수하며 살았던 이들 말이다. 그런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광복절을 기리는 방법이 아닐까.

그러니 이젠 우리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보자. 분명 우리들 삶에도 각자의 본분에 요구되는 지조가 있을 것이다. 군인에겐 군인의 지조가, 언론인에겐 언론인의 지조가 있다. 어찌 그들 뿐이랴. 저마다의 삶에서 지켜가야 할 신념과 가치가 있는 법이다. 이번 광복절에는 바로 우리들 스스로의 지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우리들 삶에 어떤 지조가 요구되는지, 그리고 우리 스스로 지조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Posted by 가베치
,

■ 기사 링크: http://omn.kr/kikp


어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스토리도 나름 괜찮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역사적 작전 뒤에 가려진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도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을 일깨워주는 영화였기에, 더욱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이 영화를 마냥 고운 시선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더군요. '시대착오적인 반공영화', '멸공의 촛불', '21세기판 똘이장군' 등 영화에 반공적인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 반공영화라고 매도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영화를 '반공영화' 혹은 '안보영화' 등 정치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아울러 꼭 반공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시각도 편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비판의 근거로 들고 있는 두 가지 논리인 '시대착오적인 반공영화', '맥아더 우상화 영화'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는 기사를 한 번 <오마이뉴스>에 써봤습니다. 기사의 등급이 '버금'에 그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뭐 제 필력이나 설득력, 논리력이 그 정도밖에 안되는가보다 해야죠.


아무튼 블로그에 개인적인 리뷰도 올렸지만, 좀 더 많은 네티즌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기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기사라는 성격상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봤습니다. 


혹여 이 기사를 읽는 분들 중에 저와 생각이 다른 분들도 많겠지만, 미리 밝히건대 그분들의 생각/의견도 존중합니다. 이 영화를 반공영화라서 보기 싫다고 주장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반공영화라고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는 제 의견도 존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

열정대학에서의 첫 무예 강의가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뒤로, 당분간은 개인수련이나 열심히 하면서 실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기로 마음 먹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한 군데에 가있으면, 계속 그 쪽으로 기회가 생기나 봅니다. 열정대학과 비슷한 플랫폼을 가진 대안학교인 '이태원 대학교'에서 또다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계기는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한 장 때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수련터에 나가서 기창 수련을 하고 찍은 사진을 제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 사진을 MBN 윤범기 기자님이 본 겁니다. 참고로 윤 기자님과는 열정대학 기자학과 강의를 통해 서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요, 그분은 신촌대학교와 노량진대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번엔 이태원대학교 개강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윤 기자님께서 그 사진을 보자마자 제게 "우리 창술배워볼과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떨까요?"하고 제의를 하신 겁니다. 사실 기창은 제가 배운 지 오래 되지 않기에, 누군가를 지도할 만한 실력은 당연히 안된다고 생각했고, 열정대학에서 받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이라서 망설여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 사부님과 먼저 의논을 하겠다고 했는데, 사부님께서는 또다시 "한 번 만들어보라"고 하시더군요. 윤 기자님 역시 집요하게 개설을 독려하기도 했고, 사부님도 제가 기창을 지도하는 것에 대해서 허락하셨기에... 다시 한 번 무예를 지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슬슬 들더군요. 그래도 약간의 망설임이 남아 있었기에, 오늘 열리는 사전 모임에 참여해서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나 확실히 보고 듣고 난 뒤에 판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태원 대학교의 강의실로 활용될 '용산문화예술창작소'에서 열린 사전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다른 강의 개설자 분들을 보니, 아무래도 나이는 제가 제일 어린 듯 합니다. 사는 곳도, 직업도 제각각이더군요. 교수, 변호사, 공무원 등등 면면히 정말 화려했습니다. 북놀이, 고전무용과 같은 무형문화재를 이수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계신 분들이, 자발적으로 재능기부를 위해 모인 것을 보니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다들 자기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인 듯한데, 제가 여기 낄 자격이 되나 싶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인 이태원 대학 소개에 앞서, 앞으로 강의실로 활용될 공간을 둘러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인원 구성에 따라 30명 정도 수강이 가능한 소강의실부터, 최대 6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강의실까지 있고요, 예·체능 과목을 위한 '공연연습실'도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여기서 창술을 지도하게 될텐데, 오늘 둘러보니 평수는 충분하지만 천장이 낮아서 창을 휘두르기엔 문제가 있지 않을까 걱정되긴 합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의견 조율이 있었는데, 정 안되면 옥상이나 주차장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보니까 주차장은 버스 전용 주차장이라 아주 넓더군요.


오늘 설명을 들어보니, 열정대학보다는 여러모로 안정적인 구조인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열정대학의 맹점 중 하나는 전공 과목이 아닌 이상 개설자가 수강료를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수강료가 없으면 개설자 입장에서도 무책임해지기 쉽고, 수강생들도 자기가 수강하는 과목의 가치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죠. 수강료를 내지 않기 때문에, 듣다가 마음에 안 들거나 귀찮으면 '안 들으면 그만' 하고 잠수타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함께 무예 배워볼과' 역시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태원 대학은 일단 그런 점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수강료'를 받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돈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수강료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소액의 수강료고, 그것도 개설자와 이태원 대학 운영위원회 측이 5:5로 나눠가집니다. 


여기에 대해 윤 기자님도 "돈 벌자고 이런 일 하는 거면 차라리 다른 데 찾는 게 맞다"며 "수강료는 서로 무책임해지지 않기 위해서 내는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확실히 수강생들 입장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자신이 낸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듣지 않을까요? 그리고 강사 입장에서는 소정의 수강료라도 받으니 조금 더 책임감 있게 과목을 지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강의를 개설한 개설자를 '학과장'이라고 대우하면서, 이태원 대학에서 개설되는 모든 강의를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도 마음에 쏙 들더군요.



게다가 이태원 대학은 용산구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해주고 있어 전망도 밝은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용산구에서 이태원 대학을 지역사회를 이끄는 시범 모델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줄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용산문화예술창작소도 무료 대관을 해주는 것이고, 오늘 구청 직원들도 나와서 적극적으로 저희의 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습니다. 


창술을 지도하기에 장소가 비좁은 것 같다는 제 의견에 대해서도 "주차장이나 옥상에서 강의를 지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겠다"고 하고, 커피 관련 학과를 만들려고 하는 바리스타 한 분이 "커피용품이 없는 점이 애로사항이다"라고 하니 "그 역시 구에서 물품을 준비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더군요. 여러모로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후원을 해주니 든든하기도 하고, 잘하면 용산구에 무예24기를 뿌리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소 외에도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무기 마련'입니다. 창술 같은 경우 당연히 창이 준비되어야 하는데, 수강생들이 개개인별로 창을 구비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봉으로 대체한다 하더라도 봉을 구매할 의사가 얼마나 될지 막막한 게 사실입니다. 한 번 배우고 말 수도 있는데, 봉을 사야한다고 하면 부담스러워서 안 들으려고 할 사람들도 있겠죠. 더욱이 봉을 들고 다니기도 버겁고. 


그런데 이 문제 역시 한 방에 해결됐습니다. 일단 이태원 대학 측이 운영비로 봉을 구입해주겠다고 합니다. 또 봉을 가지고 다니는 게 힘들다면, 창작소 건물에다가 보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겠다고도 하더군요. 걱정했던 부분들이 시원시원하게 해결되고, 빵빵한 지원까지 곁들여지니 흡족합니다.


일단 8월 말에 공식 PT를 한다고 하니, 잘 준비해봐야겠습니다. 10월 개강 전까지 수련 역시 열심히 해서 다시 한 번 열정을 불태워봐야겠습니다. 이번엔 열정대학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용두사미'가 안되도록 최선을 다해보렵니다.

Posted by 가베치
,

마지막 안식처로의 인도자들, 영현병을 만나다


-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2) -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짧았던 장마도 지나고, 7월 초복(初伏)이 지나 이제는 완연한 여름 날씨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폭염에 몸도 마음도 지치기 쉬운데요, 이럴 때일수록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건강관리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김 병장이 들려주는 국유단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릴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국유단에 소속된 조금 특별한 병사들의 특별한 임무수행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년 365일 현충원에 상주하면서, 그들만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다


착, 착, 착... 한 눈에 봐도 경건한 표정을 하고 있는 병사들이 발을 맞추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엄숙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데요, 지켜보는 이들도 절로 숙연해지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정체는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영현소대’ 병사들이었습니다. 영현소대 병사들은 호국영령의 유골함을 높이 받은 채, 그들이 마지막 안식을 취할 충혼당(납골당)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영현병들의 경건하고 엄숙한 인도에 따라, 호국영령들 역시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지난 3월에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에서 중국군 유해를 인도하는 영현병들)


​오늘은 바로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들, 국유단 영현병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영현소대와 영현병


​국유단 본부중대에는 발굴병들이 소속된 ‘발굴소대’, 감식병들이 소속된 ‘감식소대’와 더불어 영현소대라는 독립소대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소대에 소속된 병사들이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요, 이들을 일컬어 ‘영현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현(英顯)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표현’으로서, 호국영령을 의미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영현병은 대체 어떤 보직이며, 이들이 소속된 영현소대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먼저 그 유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현소대의 탄생과 역사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현병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부산에서 ‘묘지등록중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영현소대는 1952년 9월 ‘81영현중대’로 부대 명칭을 개정한 뒤, 1986년 10월 5군수지원사령부, 53군지단을 거쳐 2006년 8월 국방부 근무지원단 의장대대에 예속되었습니다.


하지만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반영구적 국가사업으로 활성화되고, 그 사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면서, 국유단 휘하 소대로 소속이 변경되었고 그 편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2009년 6월에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던 ‘영현 및 의장중대’가 해체됨에 따라, 국유단 영현소대가 영현행사를 담당하는 전군 유일의 특수소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2010년에는 병참병과의 특기로 사무처리를 의미하던 영현등록병(2112)에서 행사지원의 영현행사병(1111)으로 직책 명칭 및 특기가 변경되면서, 영현병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로써 국유단 영현소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유일의 영현 전담 특수소대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이쯤 되면 영현병들이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만하죠?



(사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영현소대)


영현병들은 어떤 임무를 수행할까


그렇다면 영현병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될까요?


영현병들은 6·25 전사자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봉사한 국가유공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충원에서는 매일 두 차례씩 국가유공자의 안장식이 거행되는데요, 영현병들은 바로 이 행사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안장행사는 평일/주말 구분 없이 매일 열리기 때문에, 영현병들 역시 주말의 달콤한 개인정비(휴식) 시간을 반납하고 행사 지원을 나가는 게 일상이라고 합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행사 지원에 피곤할 법도 하지만, 자신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숭고한 가치를 알기에 자부심 역시 남다르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년 연말마다 국무총리 주관으로 열리는 ‘6·25 전사자 합동봉안식’ 및 사단/군단 단위의 영결식·합동봉안식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북한에서 미군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인도받거나, 국유단이 발굴한 미군 유해를 미국 정부에 인도하는 행사가 개최될 때면, 우리 영현병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진: 2015년 12월에 열린 ‘6·25 전사자 합동봉안식’에서 영현병들이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사진: 지난 4월 28일 열린 ‘한·미 전사자 유해 상호 봉환행사’에서 미군으로부터 인도받은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봉송하고 있다)


​특히 2014년부터는 중국 정부와의 협약으로 ‘중국군 유해 인도 행사’가 매년 한 차례씩 개최되면서, 국유단에서 발굴한 중공군 유해를 중국 정부에 인도하는 행사에서 영현병들의 임무수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진: 지난 3월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에서 우리 영현병이 중국군 의장대 병사에게 유해를 인도하고 있다)


저 역시 전역하기 전에 이 행사를 참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요, 중국군 의장대 병사들 앞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보무도 당당했던 우리 대한민국 영현병들의 늠름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행사를 지켜보는 내내 영현병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얼굴이라는 생각에, 새삼 영현병들이 맡은 역할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주특기 훈련


수행하는 보직 자체가 특수한 임무이기 때문에, 영현병들이 받는 주특기 훈련 역시 독특할 수밖에 없는데요, 영현병들은 훈련소 혹은 신교대에서 5주 간의 신병훈련을 수료한 뒤, 바로 국유단으로 전입을 와 선임들로부터 직접 ‘주특기교육’을 받게 됩니다. 선임들 역시 그동안 수많은 행사를 치르며 축적되어 온 노하우를 신병에게 전수하며, 영현병으로서의 몸가짐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받는 훈련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대표적인 훈련으로는 ‘발걸음’ 훈련을 들 수 있습니다.


영현병들은 일반적인 걸음보다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중간에 공중에서 멈췄다가 다시 천천히 지면을 내딛는 방식의 걸음걸이를 계속 반복 연습하는데요, 앞 사람과의 거리는 4보로 유지해야하며, 행진을 마치고 도열할 때에는 오른발의 무릎이 지면과 90도를 이루도록 올려준 자세를 2초 간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군 복무를 하며 가까이서 지켜본 영현병들은 쉬는 시간, 일하는 시간 구분 없이 수시로 소관을 들고 발걸음을 옮기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역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은 참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진: 영현병들이 발을 맞추는 것은 고인에 대해 최고의 예를 다하기 위함이다)


이런 규칙의 명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1955년 국군묘소가 설립되고 의장행사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미국 의장병들의 행진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하는데요, 유래가 어찌되었든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에 최고의 예를 다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해 영현소대를 이끄는 영현소대장 함성제 상사는 “국유단에 영현소대가 창설된 이래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영현소대만의 고유한 규범과 의전 절차를 확립했다”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영현병들이 받는 훈련으로는 ‘영정과 영현 인수하기’, ‘우천 시 우산 인수와 우산 펴기’, ‘유가족에게 영현 인도’ 등 다양한 의전 훈련이 존재합니다. 영현이 모셔진 유골함을 감싸는 봉송천(소창) 매듭법도 익혀야 하며, 복장 역시 언제나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림질 등을 통해 수시로 정비한다고 합니다.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만큼, 복장과 몸가짐에 있어서 한 치의 실수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 영현병들의 임무 수행은 사전에 철저한 훈련을 반복-숙달한 뒤에 이루어진다)


이처럼 영현병들의 임무 수행은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내려놓았다간 큰 실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영현병들의 임무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열리는 행사지만 한 번 행사를 할 때마다 사전에 철저한 연습을 통해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노력한다고 합니다.


영현병들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


그렇다면 영현병들이 임무수행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영현병들은 하나같이 “행사가 끝난 뒤, 유가족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를 가장 보람 있는 순간으로 꼽았습니다.


실제로 영현병들이 행사를 집전하는 동안, 유가족들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를 지켜보게 되는데요, 최고의 예(禮)를 다해 자신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를 모시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사가 끝난 뒤에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는 유가족들도 있다고 하는데요, 영현병들은 바로 그 순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보직을 맡았으면 이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영현병으로 선발되어 온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고도 고백했습니다.


묵묵히 임무수행하는 그들에게 응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국유단에는 발굴, 감식병 외에도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영현병들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정성 어린 인도가 없었다면, 호국영령들 역시 편안한 안식을 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진: 지난 3월에 열린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를 마치고 촬영한 단체사진)


영현병들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의 숭고한 가치를 알기에, 한 마디 불평 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임무 수행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영현병들이 앞으로도 자신의 임무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고 임무 수행에 임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가베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