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열정대학에 야심차게 개설한 무예24기 과목 '함께 무예 배워볼과' 1강이 열렸다.


마침 그날은 불광동 근처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열정Class'가 열리는 날이라, 클래스 강연이 끝난 뒤에 바로 모여서 수련하기로 했다.


화요일반 멤버 제외하고, 또 오늘 갑자기 사정이 생긴 한 명이 결석하니, 수강생은 두 명밖에 없었다. 단촐하니 오히려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우선 몸풀이와 입선(참장)을 복습하고, 이번에는 둘이서 짝지어 함께 푸는 몸풀이도 새로 지도하였다. 이어 주먹을 쥐는 법부터 주먹을 지르는 법, 발차기(단퇴), 발차기 막기, 보법(진/퇴보)을 지도하였다. 하나 하나 배울 때마다 계속 반복 연습하고, 어느 정도 잡혔다 싶으면 다시 새 진도를 나가다보니 1시간 30분이 훌쩍 흘러버렸다. 쉬는 시간 없이 1시간 30분 동안 계속 떠들면서, 수강생들의 자세를 봐주다보니 끝나고나면 나도 진이 쭉 빠진다.



사실 야심차게 과목을 개설했고, 스타트가 좋아서 아직은 순항 중이지만, 그럼에도 개설자 입장에서 여러모로 고민이 많다. 진도 문제가 가장 큰 걱정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권법 자체가 일반적인 중국권법에 비해 초식의 수가 적은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7주 안에 이것을 다 지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바로 투로를 들어갈 수도 없다. 무예를 수련하기 위한 기본공을 확실히 떼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지도하는 데만도 몇 주가 걸릴 것이다. (아니 사실 몇 주 안에 뗀다는 것도 불가능하지)


가르쳐주려면 하루에도 다 가르쳐 줄 수 있지만, 그건 굉장히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 어느 무술이든 기본이 잡힌 후에야 다음 기술을 배우는 것인데, 아무리 취미반이라고 해도 기본공을 대충 지도하고, 바로 진도를 빼버리면... 기본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련하다가 몸까지 망칠까 저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지도자의 책임이다.


그렇다고 기본기만 주구장창 지도하자니, 수강생들 입장에서 맥이 빠져서 무예 자체에 흥미를 잃을까봐 그것도 걱정이 된다. 지금 당장은 기본기도 새로 배우는 동작이기에, 다들 재밌다고 하지만... 7주 동안 이것만 시키면 아마 중간에 다 '과목포기'하고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일단은 '취미반'으로 개설했기 때문에, 기본기를 중점적으로 수련하면서도 적당히 진도를 나가는 쪽으로 절충하긴 해야할텐데, 그 절충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커리큘럼 상으로는 권법 진도를 다 나가자고 했지만, 그건 욕심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권법에서 간단한 기술들만 뽑아서 지도할까? 


아무튼 개인수련하기도 정신 없는데,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한 요즘이다. 


그래도 수강생들이 열의를 갖고 수업에 임해주니, 그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오늘은 수련 마치고 함께 집에 가는데, 한 학생이 가방에서 「조선무사」 책을 읽고 있다며 보여준다. 일전에 내가 열정대학 커뮤니티에 '무예 수련하면서 참고하면 좋을 서적 리스트'에 올려둔 책인데, 잊지 않고 책을 빌려서 읽는 것이었다. 



요새 열정대학 커뮤니티에 '수련하면서 참고할 서적'을 비롯해 매 수업이 끝난 뒤에 '수련일지'도 작성해서 올리고, 이런 저런 유용한 정보들을 꾸준히 올리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수강생들이 하나 같이 나에게 "개설자님 열정이 정말 대단하다", "지금까지 이렇게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개설자는 못 봤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여러분이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해주니까 저도 덩달아 열심히 하게 되는거죠"하고 대답한다.


실제로 수강생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을 때마다 절로 힘이 난다. 특히 나는 수강생들에게 매 수업이 끝난 뒤에 '수련일기'를 써서 각자의 블로그에 올릴 것을 주문하였다. 그런데 하나같이 열심히 써주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그들의 수련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행간에서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수강생들이 이토록 열의를 보여주니, 개설자 입장에서 어찌 열심히 하지 않으리오한 편으로, 나 역시 열심히 수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우리 사부님도 또한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PS. 이미 지난 화요일 첫 강의를 지도한 바 있지만, 그때는 인증샷을 찍지 않은 관계로... 벼르고 벼르다가 이번에서야 수강생들의 양해를 구하고 수련하는 사진을 찍어 짤막한 후기와 함께 첨부한다.

Posted by 가베치
,

- 1부에 이어 계속 -


그렇게 나까지 총 7명으로 시작하게 된 '함께 무예 배워볼과'.


참 신기하게도... 나 빼고 전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자들이야 당연히 지원할 거라 생각했고, 여자 분들도 한두 분 있으면 수련 분위기가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남자는 한 명도 없고 오로지 여성들만 지원해서 솔직히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다. (노린 것 절대 아님!)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과목 개설이 확정되고, 수강생들과 단톡방까지 만들어서 O.T 모임 날짜까지 잡았음에도, 마음 한 구석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그때 내 마음 속을 지배하고 있던 단 한 가지 생각.


'내가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두려움 반, 설렘 반이 함께 했던 첫 만남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마침내 지난 5월 28일 토요일 오후 7시, 남영동 열정대학 건물 3층 '즐거움'에서 '함께 무예 배워볼과' O.T 모임이 있었다.


사전에 미리 준비해 간 프린트물을 통해 먼저 과목 개설 배경과, 목표, 커리큘럼 그리고 과목에 대한 규정을 설명하고, 우리가 한 학기 동안 배워야 할 '무예24기', '권법', '무예도보통지' 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 열정대학 홈페이지 내에 개설한 커뮤니티)


수강생들이 자기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다들 지원동기가 제각각이었다. 실제로 태권도 검은띠까지 딸 정도로 무술 자체에 관심이 많은 분도 있었고, 뭔가 운동을 하긴 해야겠는데 남들과는 다른 색다른 운동을 해보고 싶어서 지원한 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다들 얼마 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인해 '내 몸은 내가 지켜야한다'고 생각하고 호신술을 배우고 싶어 지원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실 과목소개 때 이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서 소개했는데, 적절한 마케팅 효과였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달았던 시간


그러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옥상에 올라가 간단하게 몸풀이와 입선(참장)을 지도했는데, 다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해서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내 자신이 여전히 많이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간단한 몸풀이와 입선 하나 가르쳤음에도, 내가 혼자 수련할 때와 달리 그 이론과 자세를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하니 계속 버벅거리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수강생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계속 입이 턱 막혔다. '내가 그동안 열심히 수련해왔는데, 따로 수업준비를 할 필요가 있나'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 자신의 무지함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수업을 통해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새삼 사부님을 비롯해 '스승'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이리도 진이 빠지는 일일 줄이야... 수업 내내 정말 사부님을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티가 끝난 뒤, 근처 맥줏집에서 뒤풀이를 하며 "저를 사부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도 지금 배우고 있는 학생의 입장이고, 모르는 것도 많기 때문에 감히 사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순 없어요", "미리 양해를 구하자면,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저도 사부님께 여쭤보고 대신 가르쳐드릴게요. 제가 책임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언급하는 게 아닌 거 같아요. 대신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지도할게요"라고 미리 못을 박아두었다.



(사진: 함께 무예배워볼과 수강생들의 뜨거운 반응. 흐뭇하다)


교학상장의 의미


오티 모임을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정말 나부터 철저하게 수련을 하고,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며칠은 평소와는 달리 더 긴장한 상태에서 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다. 동작 하나 하나를 수련하더라도, 입으로는 계속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말하는 연습을 했다. 그러면서 내 자세를 돌아보게 되고, 의문 나는 점은 즉각 사부님께 여쭤봐서 나부터 이해하려 노력하게 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정말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화요일 수련반 1주차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평소 내가 무예를 연마하던 보라매공원에서 다른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무예를 수련하고 있으려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리고 오티 모임 때의 각성을 계기로 나름 철저하게 준비하고 수업에 임했던지라, 지난 번보다는 더 술술 설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스스로가 여전히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수강생들이 언제 어디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지 모르기 때문에, 매 시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더욱이 다들 수련의지가 대단해서, 그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크다. 그래서인지 지도자의 입장이 되고보니, 수련생일 때보다 더 열심히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각성도 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수업을 마친 뒤에도 혼자 남아서, 보충 수련을 하다가 왔다.


과목 개강을 하게 되면서...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이 과목을 이끌어가게 될텐데, 일단 초기 반응이 좋아서 개설자 입장에서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설자이자 무예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제일 바라는 것은 역시 '초심을 잃지 않는 것'과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들 화기애애하게 수련에 임하고 있는데, 앞으로 종강까지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해주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무예 지도자'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된 것 같아 뿌듯하고,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끝)


Posted by 가베치
,

지난 주 토요일, 남영동 열정대학에서 '함께 무예 배워볼과' 첫 O.T 모임을 가진 후, 오늘 정식으로 1주차 첫 수업을 진행했다. 


'함께 무예 배워볼과'는 열정대학 2016년도 3학기 학생선택과목으로 처음 개설된 과목이다. 바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24기'를 수련하는 과목인데, 이 과목을 개설한 이가 누구냐... 바로 나다.


내가 배우고 싶은 과목을 만드는 열정대학


참고로 열정대학은 기존의 대학교육이 해결해주지 못한 '진로 문제'에 대한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공존학교'로, 다양한 개성과 취미를 가진 학생들이 모여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뭔지, 또 잘하는 일이 뭔지 파악하고, 진로를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체다. 그러다보니 열정대학 본부 차원에서 다양한 전문가를 초빙해 전공 과목을 개설하기도 하고, 일반 학생들끼리도 자기가 해보고 싶은 분야를 과목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문가를 초빙해 수업을 듣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진: 열정대학의 교육방향)


나 역시도 진로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전역하고 특별히 할 일도 없고, 마냥 노느니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에 덜컥 등록금 20만원을 지불하고 23기 신입생으로 입학했었더랬다. 하지만 막상 수강신청 기간이 되고보니, 내 구미를 당기는 과목들은 별로 없었다. 몇 개 전공 과목이 있었지만, 그것도 선발되지 못해 줄줄이 탈락... 그러다보니 나중엔 짜증까지 나더라.


그런데, 열정대학 측에선 나에게 "직접 선택과목을 만들어보라"며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음... 그럼 무슨 주제로 과목을 만들지? 고민하다가 국궁(활쏘기) 과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도 전역하고 국궁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고, 기왕이면 열정대학에서 초보자들을 줄줄이 모아다가 사부님 밑에서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정대학 측에서는 "직접 국궁을 배워 지도하는 건 가능하지만, 외부인을 초빙해 강의하는 건 안된다"고 못 박았다. 타 단체에 대한 홍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무예24기 과목 개설을 결심하다


하지만 열정대학에서 뭔가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기에, 그럼 아예 '무예24기'를 과목으로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권법 정도는 지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사부님께 의견을 타진해봤는데, 사부님도 흔쾌히 허락하셨다. 


사실 열정대학 입학 후 첫 O.T 시간에 작성했던 버킷리스트 중에는 '문파를 세워 제자 양성하기'라는 것도 있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고 전수관을 열어 무예24기를 후학들에게 지도하는 것이 꿈이기 때문이다.



(사진: 열정대학 홈페이지에 올린 내 버킷리스트)


처음엔 반 농담, 반 진담으로 던진 말이라, 막상 허락을 받았음에도 자신이 없었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도 없거니와, 내가 권법을 지도할 정도로 실력은 있는가, 아무리 자문해봐도 자신이 없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사부님께 "제가 정말 권법 지도할 능력이 됩니까?"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봤는데, 사부님은 "너 정도면 훌륭하지. 자신감을 가져라"라고 해주셔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풀렸다.


'함께 무예 배워볼과'의 시작!


과목명은 '함께 무예 배워볼과'로 정했고, 과목소개를 위해 20장이 넘는 PPT를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과목 개설 버튼 클릭...!


(사진: 열정대학 과목소개에 올린 PPT 중 일부)


첫 과목 개설이다보니 너무 떨리고 궁금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열정대학 홈페이지를 들락날락거리며, 누가 수강신청을 했는지 확인했다. 과목 개설 초기에는 계속 지원자가 0명이길래, '역시 안되는 건가...' 싶어 자조의 한숨도 쉬었지만, 어느 날 들어가보니 누군가 수강신청을 했다! 그때의 감격이란... 그리고 수강신청 기간 종료를 하루 앞두고, 총 6명이 지원했다. 애초에 5명 모집이었는데, 6명이 지원했으니 초과 지원이라는 대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래서 기존 모집인원보다 1명을 더 선발해서, 나까지 총 7명이 이번 학기 동안 수업을 함께 하게 되었다.


- 2부에서 계속 -


Posted by 가베치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2부] 28명의 호국영웅 메신저, 마침내 첫 걸음을 내딛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1부에서는 발대식에 앞서 우리 서포터즈들이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견학했던 시간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오늘 2부에서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공식적인 첫 걸음을 내딛는 발대식 현장을 생중계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발대식이 열리는 생생한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마침내 서포터즈로서 내딛은 첫 걸음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현충원 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으로 복귀한 서포터즈들은 곧바로 국유단 본청 앞에 모여 발대식 준비를 마쳤습니다. 발대식은 이학기 단장(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는데요, 먼저 서포터즈로서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결의를 담은 ‘선서식’이 있었습니다. 선서 대표로 예비역 중사 출신의 신대식 씨(27,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성우과)가 활약해주었는데요, 성우과 재학생인만큼 멋진 목소리로 28인 서포터즈의 결의를 알렸습니다.


(사진: 발대식을 통해 첫 걸음을 내디딘 국유단 제1기 대학생 서포터즈)


선서 낭독이 끝난 다음에는 ‘서포터즈 조끼 및 국유단 뱃지’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을 비롯한 발굴과, 감식과, 대외협력과, 계획운영과 등 국유단의 조직을 대표하는 과장급 간부들이 직접 서포터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끼를 입혀주고, 국유단 뱃지를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사진: 국유단 조끼와 뱃지를 수여받는 서포터즈들)


이날 서포터즈들이 입은 조끼는 실제 발굴현장에서 발굴병들이 착용하는 국유단의 상징적인 유니폼이고, 단 뱃지 역시 국유단 소속 장병들에게만 지급되는 뱃지라고 합니다. 서포터즈들이 이를 수여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다 같은 국유단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이로써 국유단 서포터즈 1기가 마침내 첫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훈훈했던 간담회 현장


발대식을 마친 서포터즈들은 2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이학기 단장과의 간담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은 간담회에 앞서, 짧게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포터즈가 된 28명 모두 독특한 이력과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유일하게 국유단에서 발굴병으로 전역한 저를 비롯해, 예비역 육군 중사, 학군단(ROTC) 소속 장교후보생, 발굴병 지원 희망자 등 그 면면이 다채로웠습니다. 특히 28명 중 여성이 15명이고 남성이 13명으로 여성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각기 개성 있는 서포터즈들의 면면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이학기 단장은 “이 자리에는 예비역 육군 병장이나 중사도 있고, 또 앞으로 장교가 되어 군을 이끌어 갈 분들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해서 다양한 꿈을 펼칠 대학생들이 다 모인 것 같다”며 국유단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원해준 서포터즈들에게 감사의 말을 표했습니다.


(사진: 발대식 플래카드)


이어 이학기 단장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의를 설명하였는데요, “전 세계에 자국의 전쟁을 수행하다 산화한 전사자들을 발굴하는 부대가 단 두 곳밖에 없는데, 하나가 미국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다”라며 “전 세계 각국의 고위 인사들이 우리 단을 방문할 때마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존재를 알고 큰 감동을 받는데, 그때마다 뿌듯하다”고 밝혔습니다.


(사진: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발굴병들의 모습)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ormnd/17218590035


또한 현재 유해발굴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요, “국유단 소속 발굴 팀이 총 8개 팀이 있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을 8개 지역으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발굴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며 “지금이야 그래도 덜 힘들지만, 6~7월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호국영령의 유해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발굴병들이 매일 산에 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웬만한 사명감과 책임감 없이는 임무 수행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서포터즈들은 평소 궁금했던 사항들에 대해 가감 없이 질문을 던졌는데요, 특히 한 서포터즈가 “단장님이 목에 걸고 계신 군번줄(인식표)이 인상 깊다. 항상 인식표를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좌중에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이에 이학기 단장은 “물론이다. 육사를 졸업한 이후 지금껏 퇴근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인식표를 풀어본 적이 없다”고 밝히며, “마침 인식표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러분께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 점이 있다”고 하여 좌중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진: MBC <진짜 사나이 2 – 유해발굴감식단> 편에서 인식표를 발굴하는 장면)

출처: MBC <진짜 사나이 2>


이학기 단장은 “유해가 나왔을 때 신원확인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함께 나온 유품이다. 그리고 유품 중에서도 유해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식표가 확실한 증거인데, 이 인식표를 발굴하기가 정말 힘들다”며 “인식표가 없다면 유가족 DNA 시료라도 있어야 발굴한 유해의 DNA를 대조하여 유가족을 찾을 텐데, 남아계신 유가족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아 유해발굴사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운 감정을 토로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널리 알려져야 유가족 DNA 시료 채취가 활성화되고, 그래야 많은 분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서포터즈 활동에 임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간담회가 끝났습니다.


대학생 서포터즈, 어떤 활동을 하나요


이어 앞으로 서포터즈들이 수행해야 할 활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요, 국유단 서포터즈들은 앞으로 국유단과 국민 사이의 다리가 되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쉽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방편으로 매월 1건 이상의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해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게재하게 됩니다. 또한 28명을 지역별로 7개 조로 나누어 연간 2회 이상의 오프라인 팀별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전국 각지를 다니며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사진: 간담회 및 오리엔테이션이 열린 2층 회의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자원들이라는 것을 방증하듯, 오리엔테이션 내내 쉴 새 없는 질문이 쏟아져, 2층 회의실은 금세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습니다. 이에 이원웅 소령(공보장교·육군 소령)은 “여러분이 처음이라 누구보다 열의를 가지고 임하려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오히려 처음에 너무 열정을 불태우면 나중에 지칠 수 있다. 열심히 활동하되 임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항상 초심을 잃지 말아 달라”고 특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에는, 서포터즈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상견례’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 만나 어색할 법도 했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마냥 서로 명함도 교환하고, 조별로 단체사진도 촬영하는 등 금세 친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던 서포터즈들의 이야기


그럼 과연 이번에 출범한 서포터즈들은 어떤 지원동기를 가지고 서포터즈에 지원하였고, 또 어떤 각오로 활동에 임하게 될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앞서 선서 대표로도 활약해주었던 신대식 씨는 예비역 중사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요, 실제로 군 복무 중에 국유단의 홍보 포스터를 보고 국유단과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 시에 군인은 총을 들고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지만, 군 복무 당시에는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총을 들 일이 없었다”며 “그래서인지 전역하고서라도 나라를 위해 더 봉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태극기를 바라볼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 동기를 밝혔습니다.


(사진: 공보장교와 함께 찍은 1조 단체사진)


신드보라 씨(23, 창원대 국제관계학과)는 서포터즈를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진짜 사나이> 유해발굴감식단 편을 보고 알게 되었다”며 “주변에 국유단을 널리 알려, 국유단이 한 분의 유해라도 더 찾을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 특히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할 것이다”라는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허도휘 씨(23, 동국대 정보통신공학과)는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난 날이 되면, SNS에 관련 글을 올리거나 프로필 사진을 관련 사진으로 바꾸는 등 주위에 알리기 위해 작은 노력들을 해왔다”며 “국유단 서포터즈를 통해 우리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해준 호국영웅들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서포터즈를 지원하게 되었다”고 지원동기를 밝혔습니다.


앞으로의 활동 포부를 묻는 질문에는 “단 한 명의 유가족이라도 더 DNA 시료 채취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에 임하겠다”며 “현재 여러 지역축제나 학교축제들이 열리는 계절이기 때문에, 젊은 층을 겨냥한 학교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지역축제 현장에서의 홍보활동을 계획 중이다”라고 하여 벌써부터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나타냈습니다.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


이처럼 뜨거운 애국심과 열정을 갖고 출범한 서포터즈들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도 남다른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유해발굴병’이라는 보직을 부여받아, 지난 1년 9개월 동안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전역한 유일한 국유단 출신 서포터즈라는 긴 수식어는 제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사진: 16년 전반기 발굴작전 출동을 앞두고 후임들과 촬영한 단체사진)


그래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누구보다 국유단과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의미와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는 발굴병 출신으로서, 네티즌 여러분께 실제 발굴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나 유해발굴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들을 재밌고 생생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8개월 동안, 저를 비롯한 28인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들의 활동을 열심히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 2부 끝 -

Posted by 가베치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그 힘찬 출발의 현장을 가다!

 

[1부] 서포터즈, 6·25 전사자 유해발굴현장을 가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지난 5월 13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 본청 앞에서 열린 발대식을 통해, 드디어 28명의 국유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하였는데요, 오늘은 그날의 뜨거웠던 현장 분위기를 전달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저와 함께 현장으로 가보실까요?

 

발굴지로 가는 길

 

아직은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오던 5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아침부터 젊은 대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바로 치열한 심사를 뚫고 최종 선발된 1기 국유단 서포터즈들이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발대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출범을 알릴 서포터즈들은 발대식에 앞서, 실제 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현충원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이상을 달려 도착한 곳은 강원도 홍천에 위치한 가리산. 바로 오늘 우리가 올라가야 할 발굴현장으로 이어지는 능선이었습니다. 이곳 가리산 일대는 6·25 전쟁 당시 매우 치열했던 '벙커고지 전투'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벙커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가 있었던 1951년 5월 16일부터 19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미 제2사단 38연대가 홍천 북방의 벙커고지(778고지) 일대에서 중공군 제12군의 침공을 저지한 방어전투입니다. 당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던 미 제2사단은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하루에 제한되어 있던 탄약소모량까지 넘겨, 하루 만에 3만 발의 엄청난 포탄을 쏟아붓는 등, 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끝내 홍천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였으며, 아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사 출처: http://www.korea-dmz.com/home/page/sub02/03/0054600547309805.asp)


 

하차지점에서부터 실제 유해발굴이 이루어지는 현장까지는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요, 가파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무수히 반복되는 등산로는 금세 서포터즈들의 등을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들었습니다. 발굴병 출신으로 얼마 전까지 산 타는 게 일상이었던 저조차도 오랜만에 타는 산이었던지라 힘들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중간 중간에 걸려있던 현수막의 문구들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오르는 이 길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어 힘들다는 생각을 잊게 했습니다.



숙연했던 발굴현장 견학

 

마침내 도착한 무명 755고지 발굴현장. 서포터즈들은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곧바로 6·25 전사자의 유해가 발굴되고 있는 현장을 직접 견학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출입금지' 라인이 둘러쳐진 트렌치(유해를 노출하기 위해 유해 주위로 넓게 판 굴) 안에는 이미 한 분의 유해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는데요, 서포터즈들은 먼저 헌화와 거수경례, 묵념으로 고인에 대한 예를 표한 뒤에, 이 지역의 발굴을 책임지는 안순찬 발굴팀장(육군 원사·발굴 1팀장)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순찬 팀장은 지표 위에 드러난 유해와 함께 나온 유품들에 대해 설명하며, 전문발굴병들이 어떻게 유해를 식별하고, 수습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종 선발된 서포터즈들이었던만큼, 누구보다 관심도 많고 질문들도 날카로웠는데요, 이날 서포터즈들이 던진 질문과 이에 대한 발굴팀장의 답을 정리해봤습니다.



Q. 아군인지 적군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A. 유해가 발견되었을 때, 함께 나온 유품이 신원확인의 결정적 단서가 된다. 현장에서 나온 유품을 통해 전문발굴병이 1차 피아판단을 하지만, 더 정확한 감식을 위해 중앙감식소로 모셔서 최종 판단을 하게 된다.

 

Q. 유해발굴을 하는 지역은 어떻게 선정되는가?


A. 기본적으로 '전사(戰史)'를 공부함으로써, 전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있었던 지역들을 분류해 선정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인 발굴작전을 하기 전, 선행 탐사를 통해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들을 식별하고 발굴에 들어가게 된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다해 수행하는 유해발굴작전

 

이날 현장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수습했던 송재홍 상병(발굴1팀 분대장)은 "현장에서 유해가 나오면, 전적으로 우리들이 맡아서 수습하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수습에 임할 수밖에 없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상태에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수습하려 노력한다"며 현장에서 유해발굴에 임하는 발굴병들의 남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서포터즈들 역시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해의 DNA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을 착용하고서 조심스레 유해를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에, 매우 큰 감명을 받은 듯 했습니다. 단 한 분의 유해라도, 이렇듯 항상 정성을 다해 수습하는 발굴병들의 모습, 참 믿음직스럽지 않나요?


이어 안순찬 팀장은 유해를 발굴할 때 쓰이는 장비들과 현장에서 나온 유품들을 소개했는데요, 실제 유해 탐사 시에 사용되는 '금속탐지기'의 운용 모습을 보면서, 모두들 신기함에 눈에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하지만 신기함도 장시, 서포터즈들은 다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전투화 밑창, 탄피, 탄창, 유리병, 대검 등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품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60여년 전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신필순 발굴과장(육군 중령)은 현장에서 나온 수류탄을 보여주며, "이 수류탄은 안전핀도 그대로 있는 상태라, 지금도 폭발 위험이 있다. 이처럼 발굴병들은 항상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지만, 호국영령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오늘도 산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禮를 다해 모셔지는 호국영령의 마지막 가는 길

 

이어 서포터즈들은 유해의 입관 과정을 지켜보았는데요, 입관 과정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수습한 유해들을 한지에 조심스레 약첩(한지로 유해를 감싸는 것)한 뒤 예단(고인의 마지막길에 보내는 예물)과 함께 입관하고, 다시 관 뚜껑에 '6·25戰死者之柩(6·25전사자지구)'라고 쓰여진 명정(관에 덮는 천)을 덮은 뒤, 마지막에 태극기로 관포함으로써 입관 의식을 마치게 됩니다.



유해가 모셔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서포터즈들은 현장에서 발굴되는 한 분 한 분의 유해가 최선의 예를 다해 모셔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입관을 하는 발굴병들의 손길을 지켜보며, 서포터즈들 역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경건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입관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자, 발굴부대인 11사단 장병들과, 국유단 전문발굴병 및 서포터즈 등 현장에 위치한 모든 인원이 태극기 앞에 도열했습니다. 바로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내드리기 위한 '약식제례'와 '유해봉송' 절차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인원들은 고인께 잔을 올린 뒤, 거수경례와 묵념으로 예를 표했습니다. 이어 유해를 봉송하면서 모든 의식이 마무리되었는데요, 이때 유해가 모셔진 관을 들고 봉송하는 역할은, 유해를 최초 발견한 발굴부대 병사가 맡아 수행하게 됩니다. 유해가 지나가는 길에서, 현장에 있던 인원들은 2열로 도열한 뒤, 다시 한 번 거수경례로 유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던 하산길

 

발굴현장 견학을 마치고 산을 내려가는 서포터즈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무거운 듯 했는데요, 교과서로만 접하던 전쟁의 흔적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역사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계시는 호국영령이 13만여 위나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서포터즈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역할이 막중함을 깨닫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유해발굴현장 견학을 통해 다시 한 번 활동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은 서포터즈들! 이제 공식적인 발대식을 통해 진정한 서포터즈로 거듭나는 일만 남았는데요, 호국영웅 메신저들의 힘찬 출발을 알리는 현장 소식을 2부에서 생생하게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2부에서 계속 -

Posted by 가베치
,

113번째 호국영웅, 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가족의 품

- 故 양만승 경위 유해송환 행사 현장에 다녀오다


안녕하세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 김경준입니다.


오늘은 서포터즈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렸던 행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해요.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귀환 행사인데요, 처음에는 덤덤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했던 저도, 행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어느새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니, 여러분도 어떤 행사인지 많이 궁금하시죠? 지금부터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었던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겠습니다.


호국영웅 귀환행사가 열리다


지난 5월 18일, 경기도 수원의 어느 식당 앞 골목.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적하던 골목이 갑자기 외부인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웅의 유해가 유가족에게 인도되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호국영웅은 바로 故 양만승 경위. 그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의 신분으로 적과 싸우다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는데요, 그의 생애를 잠시 알아보고 갈까요?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무궁화꽃 한 송이


故 양만승 경위는 1927년 4월 3일에 태어났습니다. 양 경위가 24세 때인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고, 적화통일의 위기에 처하자, 경찰 역시 ‘軍과 더불어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신념 아래, 적극적으로 국토 보위에 나서게 되었는데요,


1950년 7월 20일부터 25일 사이에 벌어진 ‘호남지역 전투’에 양 경위 역시 해남경찰서 소속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호남지역 전투는 전라북도 일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6사단에 맞서, 우리 국군 5사단과 7사단 그리고 경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벌인 방어 전투였습니다. 이때 해남경찰서 소속 1개 소대 병력들은 영광 삼학리 지역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방어전을 치르게 됩니다. 그리고 7월 23일, 치열한 접전 끝에 양 경위는 적군의 총탄에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렇게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발굴되기까지 6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113번째 신원확인의 주인공


유가족 송환 행사는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육군 대령)의 입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학기 단장은 행사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유가족인 외조카 김점덕 씨의 손을 맞잡으며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이에 김점덕 씨는 “감사합니다. 국방부에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어 김종성 감식과장에 의해 故 양만승 경위를 발굴하게 된 과정에 대한 브리핑이 이어졌습니다. 


1950년 7월 23일, 영광 삼학리에서 적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양 경위는 함께 전사한 동료 37명과 함께 집단으로 임시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7년의 어느 날. 영광 삼학리에서 전사한 경찰관들의 유해가 집단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은 유해발굴감식단은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이 지역 일대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전을 개시하게 되는데요, 마침내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38위의 호국영령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는 ‘독수리 문양 뱃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이 뱃지는 6·25 전쟁 당시 경찰관들이 소지하고 있던 뱃지라고 하는데요,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해남경찰서의 경찰사(史)를 대대적으로 조사하였고, 그 결과 해남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현 발굴지점에서 전투를 벌이다 순국한 것으로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수소문 끝에 전사한 경찰들의 유가족을 찾아 시료 채취를 한 뒤, DNA 대조로 38위 중 9위의 신원을 확인해 유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29위의 호국영령은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무명용사’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이 현충원 충혼당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바로 양 경위도 있었습니다.


이에 유해발굴감식단은 2014년 4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다시 유가족을 수소문해 찾기 시작했고, 추가적으로 9위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 경위 역시 이 과정에서 유가족을 찾아 신원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요, 이로써 양 경위는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전사자 유해 중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이루어진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선진국의 척도


김종성 감식과장의 브리핑이 끝난 뒤에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유가족 위로패’와 양 경위를 발굴할 당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를 담은 ‘호국의 얼’ 함을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곧이어 이학기 단장은 국방부 장관을 대신하여 유가족에게 ‘전사자 신원확인 통보서’를 전달함으로써 행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경찰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김태수 수원중부경찰서장은 “6·25 전쟁 당시 많은 경찰관들이 전사했는데, 경기도에서만 6,700여명이 전사했다. 아직 못 찾은 분들도 많은데, 나라를 지킨 호국영웅들에 대한 보답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오늘 행사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요, “아직 못 찾은 분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유가족들도 많이 있다. 그분들을 찾아서 전사자 신원확인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경찰도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군을 대표하여 참석한 51사단 168연대장 박일권 대령 역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故 양만승 경위의 유해를 발굴해주어서 다행스럽다”며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척도는 국가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얼마나 잘 대우해주는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나마 나라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을 찾아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남매의 상봉


故 양만승 경위에게는 유일한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다 결국 오빠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15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양 경위의 여동생은 임종 직전, 자식들에게 “나중에라도 꼭 너희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마침내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게 된 외조카 김점덕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습니다. 그녀는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외삼촌을 찾아 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다”고 연신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양 경위의 매제인 김용길 씨 역시 “아내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반갑겠는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오빠였으니까...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무 아쉽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저 역시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 이제는 하늘에서 남매가 상봉하여,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남매의 정(情)을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보았습니다.


15년 만에 받든 어머니의 유언


행사가 끝난 뒤, 또 다른 유가족인 김철현 씨(외조카)에게 오늘 행사를 지켜본 소회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며 “갑자기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가족 모두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또 그는 “외삼촌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께서 누누이 외삼촌에 대해 말씀하셨다”며 “어머니께서는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 당신이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에게 꼭 외삼촌을 찾아달라고 당부하셨는데... 벌써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회고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유가족 DNA 시료 채취, 그리던 가족을 찾는 길


이처럼 유해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것이 곧 국가를 위해 순국한 호국영웅들에 대한 국가의 마지막 책무라고도 할 수 있으며, 6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유가족의 한(恨)을 풀어드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발굴된 유해가 모두 신원을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고 합니다. 이번에 귀환한 故 양만승 경위 역시 113번째로 신원확인이 되었는데요, 유해발굴감식단이 15년 동안 발굴한 국군 전사자는 총 9,100여위. 그중 단 1.2%의 유해만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신원확인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굴된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 유가족의 DNA를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해발굴감식단에서는 유해발굴 뿐만 아니라, 전사자를 찾지 못한 유가족의 DNA 시료 채취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이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에, 유가족 DNA 시료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합니다. 또 유가족 DNA 시료 채취라는 것에 대해 생소한 분들은 복잡하고 무서운 병원검사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가족 DNA 시료 채취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면봉으로 입 안의 타액(침)을 적시는 것만으로, DNA 시료가 충분히 확보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단 1분의 투자가 여전히 60년 동안 차디찬 땅 속에서, 혹은 ‘무명용사’라는 이름 아래 현충원에 잠들어있는 호국영웅들의 이름을 되찾아주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Posted by 가베치
,

링크: http://blog.naver.com/makri5625/220718173026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대학생 서포터즈 1기가 출범한 후, 처음으로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글! 국유단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첫 번째 글이, 내가 쓴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특성상, 내가 보낸 원본 글이 100% 다 실리지 못하고, 반토막 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잘 써서 다 올리고 싶었지만, 용량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담당자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블로그 포스팅이란 것 자체가 너무 길면 또 지루해질 수도 있어서... 포인트만 담아 글을 짧게 쓰는 것도 중요한 글쓰기 요령인데, 나는 그게 부족한 것 같다.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볼까나.


PS. 개인 블로그이니만큼 나중에 원본 글도 따로 올릴 생각이다.

Posted by 가베치
,

어제 남영역 인근 열정대학 4층 열정스투디움에서 열정대학 O.T 특강 마지막 차수가 열렸다.


아침부터 한의원 가서 침 맞으랴, 오후에는 수원에 가서 유가족 송환 행사 취재하랴... 저녁에는 열정대학 O.T 특강 들으랴... 전역하고 이렇게 정신 없이 보낸 하루는 처음인 것 같았다. 가끔은 정신 없이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는 생각하는데, 정말 가끔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체질적으로 바쁘게 사는 게 안 맞는 사람인 것 같다. 딱 굶어 죽기 좋은 타입 ㅎ


아무튼 평일 저녁 특강은 처음이었는데, 주말 특강보다 오히려 사람이 더 많았다. 그리고 분위기도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주말 특강 때는 모인 사람들이 서로 얘기도 잘 안 하고, 인사도 잘 안 해서 덕수쌤이 억지로 인사를 시키는데 그때도 형식적인 인삿말만 오갈 뿐... 대화가 진지하게 이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보니 이미 많이 친해진 듯,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나도 옆에 앉아 있던 여성 분하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먼저 인사를 해주어서 대화의 물꼬가 트였지, 내가 먼저 인사할 생각은 하지도 못 했다. 이놈의 무뚝뚝한 성격... 정말 언제나 고쳐질까!


진로란 무엇인가


오늘 특강은 '열정대학으로 진로찾기'라는 주제로 열렸다. 덕수쌤은 가장 먼저 '진로란 무엇인가' 하고 학생들에게 화두를 던졌다. 덕수쌤은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진로란 '앞으로 나아갈 길'이라고 설명하며, 그렇다면 진로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육하원칙에 따라 정리했다.


1. 인생이란

2. 나는 누구인가

3. 왜 사는가

4. 어떤 사회(언제/어디서)에 사는가

5.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6. 어떻게 살 것인가


결국 올바른 진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위의 6가지 명제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해야하고, 누군가 물어봤을 때 지체 없이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핵심은 고민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깊이 있는 고민을 해야하며,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저 질문들에 대해 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뚜렷한 증거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직관'과 '권위'에 의존한 답이라면, 진정한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가 합쳐질 때만 느낄 수 있다


덕수쌤은 "즐겁기만 해서는 행복이 완성되지 않는다"며 "여러분이 정말 즐거운 일을 한다고 해서 항상 행복할 것 같냐? 결코 그렇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행복은 즐거운 일도 일이지만, 여러분이 그 일을 하며 의미를 느낄 때만이 느낄 수 있다"며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치)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여러모로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했고, 또 내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인지라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나는 '무예'나 '역사'를 좋아하지만, 한 편으로 정말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그쪽에서 찾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일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최종 가치... 즉, 군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어하는 이성적 가치를 더 우선순위로 상정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이 좋아하는 길이라고는 자신할 수 없기에... 고민이 큰 것이다.


덕수쌤은 또 "이제는 알파고와 같은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가 왔다"며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을 진로로 설정해야 한다.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지식'이란 무기를 활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계의 중간세대인 우리들이야말로 지금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주역"이라고 강조하였는데, 이것 역시 장기적인 안목에 있어서 내가 설정한 진로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지 생각해 볼 부분인 것 같았다.


대가가 되는 길


덕수쌤은 "본질을 이해하지 않으면 현실을 추구할 수 없다", "깊이보다 넓이를 중시하면 안된다", "끊임없이 정답을 의심하라"며 진로 설정에 있어서든, 세상 만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든, 그 본질의 깊이를 이해할 것을 주문하였다.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여서, 이 부분은 다소 어렵게 느껴졌는데, 하여간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얕고 넓게 아는 게 아니라, 한 분야만 파더라도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덕수쌤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정보수집'을 열심히 해야한다고 입이 아프도록 강조했다. 사실 많은 학생들이 "쌤, 저 이거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요", "쌤, 저는 이게 저한테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쌤, 저는 뭐를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는데, 그 말들은 곧 "쌤, 저 정보수집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라는 말처럼 들린다고 한다.


정말 무언가를 하고 싶고, 또 찾고 싶다면 방대한 정보가 쏟아져나오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정보수집으로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관련 책을 읽어도 좋고, 그것도 귀찮으면 네이버나 구글에서 키보드만 두드리면 홍수처럼 정보가 쏟아져나오는데, 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보수집을 한 뒤에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 뒤, '피드백'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렇기에 덕수쌤은 '독서'를 많이 할 것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덕수쌤은 우리에게 갑자기 질문 하나를 던졌다. "만약 지금 당장 오바마나 스티브 잡스가 와서 딱 3시간 동안만 대화를 하자고 하면, 거절할 사람이 있을까" 모두들 다른 일정을 다 빼서라도 그들과의 만남에 응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덕수쌤은 "지금 서점에 가면,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바마나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인생 역정,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적은 책을 출판해서 기다리고 있다. 그 책을 읽으면 곧 그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하게 되고, 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다면서 그 사람들의 책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는가"하고 반문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덕수쌤은 인생에 대해 '거인의 무등을 타고 달리기를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거인의 무등이란 곧 글과 말을 통해 겪을 수 있는 간접경험을 일컬음이고, 달리기는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덕수쌤은 "여러분의 성장 정도는 경험의 질과 양에 따라 결정된다"며 "직접경험도 많이 해봐야하고, 독서를 통해 간접경험도 많이 해봐야만 한다"고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 또 강조했다. 


그리고 책 중에서도 다른 사람의 전기, 즉 에세이를 많이 읽을 것을 특히 강조하였는데, 에세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간접경험함으로써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간 사람의 흔적을 읽으며, 전문가가 되기 위한 노하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덕수쌤은 에세이를 읽을 때 "내가 이 사람이다. 내가 곧 이 사람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덕수쌤은 인생을 바꾸는 목표설정에 대해 제시하였다.


1. 구체적으로 세워라

2. 측정가능해야 한다 (명확해야 한다)

3. 달성 가능해야 한다

4. 결과지향적이어야 한다

5. 마감시간이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


당장 거창한 목표를 세울 필요도 없다. 비현실적인 목표는 세우지도 마라.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라는 것이다. 정말 사소한 목표 하나일지라도, 내가 세운 목표를 실행한다면 목표를 실행하기 전보다 성장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그것들이 켜켜이 쌓이다보면 결국 인생이 바뀐다는 것이다.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때


이로써 3주에 걸친 열정대학 O.T 특강이 모두 끝났다. 솔직히 한 번 강의하는 데 3시간씩이라, 집중력이 젬병인 나로서는 엉덩이도 아프고, 가끔은 졸음도 쏟아지고, 딴 생각도 하게 되고...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온전하게 다 집중해서 들은 것 같지도 않아, 반성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노트 필기만큼은 열심히 했는데, 이렇게 매번 수강후기를 정리하면서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다보니 현장에서 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느껴지는 것 같다. 또 재정리를 통해 온전히 나의 것으로 습득이 된다고나 할까. 그러고보면 덕수쌤이 한 말들은 모두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고, 내가 이미 생각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생각만 하고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게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일 것이다.


O.T 특강은 끝났지만, O.T 특강을 통해 배웠던 팁을 이용해 내가 진정 하고픈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깊이 있는 고민'을 해봐야겠다.

Posted by 가베치
,

지난 번 O.T 특강에 이어 두 번째 특강 시간이 왔다.

오늘은 '열정대학 이야기 & 열정대학으로 찾는 진로'라는 주제로 3시간 동안 덕수쌤의 강의를 들었다.



(사진: 따뜻한 토요일 오후... 열정대학 강의를 들으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사실 오늘 강의는 열정대학 대표인 '유.덕.수'라는 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 시간이나 다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열정대학을 생각하고, 창립한 장본인이기에, 유덕수의 삶이 곧 열정대학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 이제부터 두 번째 O.T 특강, 곧 유덕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대 청년 CEO는 왜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까


덕수쌤은 어릴 적부터 청년 CEO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도 벤쳐중소기업학과로 진학하고, 기업에서 세미나를 연다는 소식이 들리기만 하면, 어디든 달려가 참석하곤 했단다. 하지만 아직 자신을 드러낼 아무런 스펙이 없었던 덕수쌤은,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들이 서로 명함을 교환하는 것을 보고, 마냥 부러워하기만 했단다. 그리고 "명함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몇 번 세미나 강사들의 명함을 받아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끊이지 않는 법. 이제는 명함을 받기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도 당당한 명함을 하나 파서 서로 교환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단다.


당시는 한글 도메인이 뜨기 직전이었는데, 덕수쌤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명함을 만들어보고자, 자기 이름으로 된 한글 도메인을 사서 명함에 새겼다고 한다. (ex. 유덕수.com) 그리고 기업 세미나에 참석해서 그곳의 고위 인사들과 명함 교환을 했는데, 그의 독특한 명함을 들여다본 사람들 중에는 종종 관심을 갖고 말을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덕수쌤은 당시 가장 잘 나가는 CEO였던 안철수 V3연구소장을 만나고 싶었지만, 당시의 안 소장은 너무나 바쁜 사람이라 10분에 하나씩 약속이 잡혀있을 정도로 스케쥴이 빡빡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덕수쌤은 안 소장만큼은 꼭 만나고야 말겠다는 일념 아래, 안철수 연구소의 한글 도메인을 먼저 사버린 뒤에, 배짱 좋게 안철수 소장에게 한 통의 이메일을 보냈다. 


그 내용인즉슨,


"안철수 연구소의 한글 도메인을 내가 갖고 있다. 나는 돈을 받고 당신에게 이걸 되팔려는 목적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당신을 만나고 싶은 CEO 지망생이다. 딱 1시간만 만나게 해달라. 3주 뒤에 군대를 가니 3주 안에 제발 1시간만 시간을 내준다면, 한글 도메인은 무상으로 드리겠다"


굉장히 당돌하지 않은가? 결과는 어땠을까?


안철수 소장의 답장이 왔는데, 안타깝게도 안 소장은 정말 바빠서 만나줄 시간이 없다고 했단다. 할 수 없이 만나지는 못 했지만, 덕수쌤이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해서 우연히 안 소장을 만난 자리에서, 안 소장은 덕수쌤의 이름을 보고 "벌써 전역했어요?"라며 자신을 기억해주더라는 것이다. 덕수쌤은 이 때를 회고하며 "역시 최고의 CEO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는구나", "또라이처럼 튀어야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구나"라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안철수는 만나지 못했지만, 덕수쌤은 이처럼 적극적인 노력으로 다른 CEO들을 만나는 데는 성공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군 복무 시절 옥션 CEO와의 만남이었다.


군 복무를 하고 있던 당시, 덕수쌤은 휴가 기간을 이용해 유명한 CEO들을 만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몸이 부대에 있다보니 아버지를 통해 대신 편지를 부치도록 했고, 며칠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자, 직접 옥션에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행동했던 이유에 대해, 덕수쌤은 "답장이 안 왔다는 것은 안 만나준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거절했다는 뜻도 아니지 않느냐. 보다 명확하게 답을 듣기 위해 한 번 더 전화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건 자리에서, 덕수쌤은 옥션 CEO와의 만남 약속을 잡을 수 있었고, 휴가를 이용해 직접 만나기까지 했단다.


덕수쌤은 CEO들을 만나기 위한 자신의 이런 노력들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두 가지 교훈을 소개했다.


(1) 내가 처한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다.

(2) 모든 것은 결국 내 마음(의지)에 달렸다.


사실, 덕수쌤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가는 바가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비슷한 일을 얼마 전에 겪었기 때문이다.


딱 2개월 전의 이야기다. 당시 전역을 한 달 앞둔 말년 병장이었던 내게 가장 중요했던 일은 밖에 나가서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 <엽문 3 - 최후의 대결>을 보는 것이었다. 입대 전부터 영화 <엽문>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었기에, 부대 안에서도 개봉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국내개봉소식이 전해졌는데, 개봉일이 내 휴가기간 안에 포함되어 있어 만세를 부르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휴가 나가기 직전에, 개봉일이 뒤로 미뤄지면서 개봉하기 며칠 전에 부대 복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너무 속상한 나머지,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다. 다른 영화 같으면 다음 휴가를 노렸겠지만, 비주류 중국영화는 보통 일주일~열흘 사이에 모든 영화가 내려가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만큼은 꼭 대형 스크린으로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했던 나는, 결국 영화 수입/배급사의 주소를 찾아내어 열심히 손편지를 써서 보냈다.


내용인즉슨,


"나는 군 복무 중인 현역 군인이다. 나는 원래 열렬한 <엽문> 매니아이기에, 이번에 <엽문 3> 개봉 소식을 접하고 일부러 휴가까지 개봉일에 맞춰서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개봉일이 미뤄지는 바람에 못 보고 들어가게 됐다. 그러므로 내 휴가 기간 중에 시사회가 열린다면 티켓 한 장만 달라. 그건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만약 영화사에서 이런 배려를 베풀어준다면 감동한 내가 주위에 입소문을 내서 영화 홍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니, 서로 윈윈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휴가 나가서 영화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병장님의 휴가 기간 중에 시사회가 없어 초대하고 싶어도 초대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열정에 감동을 받아서, 개봉 전에라도 우리 사무실에 놀러오시면 부족하지만 빔프로젝터로라도 영화를 틀어줄테니, 놀러와서 보라"는 것이었다. 사실 대형 스크린이 아니면 나에겐 큰 의미가 없었기에 거절했지만, 일단 그렇게까지 신경써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러자 영화사 측은 "정 그러시면 다음 휴가 때 나와서 연락달라. 그때도 영화가 상영되고 있으면 티켓을 구해드리겠다"고까지 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직접 쓴 손편지 한 통이 이토록 큰 호의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덕수쌤이 말하는 CEO와의 만남만큼이나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에겐 따뜻한 경험이었다.


아무튼 전역 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창업 동아리를 만들어 이끄는 등, CEO가 되기 위한 발판을 차근차근 밟아갔던 덕수쌤은 결국 원하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남들이 쉽게 만져보지도 못하는 거금을 하루가 멀다하고 만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덕수쌤의 이러한 입지전적인 삶은 언론의 주목까지 받아, 덕수쌤은 성공한 청년 CEO로 각종 매스컴에도 나왔다.


하지만 막상 큰 돈을 쥐고서, 자기가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다 누리며 살아가는 와중에도 삶에 만족할 수가 없었던 덕수쌤은 마음에 큰 공허함을 느끼고, 결국 다른 길을 찾아나서게 된다. 지금은 별세하신 故 구본형 선생(덕수쌤은 사부님이라고 불렀다)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동행을 하게 되고, 그 여행을 통해 CEO라는 직업을 버리고 자기계발 전문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나이 서른에 쉽지 않은 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열정대학의 탄생 비화를 듣다


이때 덕수쌤은 책을 읽다가 우연히 "좋은 스승은 좋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고, 위대한 스승은 존재 자체로 가르침이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게 되고, 그 구절에 큰 감명을 받아 많은 이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열정대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초창기 50명으로 탄생한 열정대학은, 정말 황무지나 다름 없었다. 지금처럼 수많은 수강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홈페이지가 없어 싸이클럽에서 활동해야했고, 강사료를 지급할 자본도 없어 '재능기부'를 조건으로 강사들을 섭외해야만 했단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덕수쌤의 노력과 의지에 감동받아 흔쾌히 재능기부를 해주었고, 덕수쌤과 열정대학 멤버들은 꿋꿋하게 커리큘럼을 발전시켜나갔다고 한다.


덕수쌤은 열정대학의 의의에 대해서도 길게 설명했다.


덕수쌤은 열정대학의 열정을 '어떤 일에 열렬히 애정을 갖고 대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여기서 강조하는 부분은 '모든 일'이 아니라 '어떤 일'이라는 것이다. 덕수쌤은 모든 일을 다 잘하고 열심히 할 필요가 없고, 자기가 정말 잘하고 좋아하는 일 하나만을 찾아서 그 길을 걷는다면 열정대학의 교육 목표는 달성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인 열정대학의 성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사회적 기업은 '특정 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며 지속가능성을 이어가는 기업'이다. 덕수쌤은 "열정대학은 여러분에게 물고기를 잡아주지 않는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여러분이 서 있는 저수지를 통째로 바꿔서 여러분 뿐만 아니라 모두가 물고기를 먹으며 잘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덕수쌤은 "열정대학이 사라지는 것이 목표다. 이 사회가 열정대학을 필요로 한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아준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길을 모두 걷게 된다면, 더 이상 열정대학이 필요하지 않을테고, 열정대학은 사라질 것이다."라며 열정대학이 사라지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덕수쌤은 "여러분 각자가 열정대학에서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직업으로 삼는 것이 곧 사회적 공헌활동이다."라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산다면,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도 여러분의 삶을 보고 변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점점 사회 전체가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열정대학의 의의를 설명하며, "누구나 쉽게 들어오고, 누구나 자랑스러워하는 학교가 되길 바란다"는 작은 소망을 이야기했다.


중요한 건 환경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


3시간이라는 긴 특강 시간 동안 덕수쌤이 강조한 키워드들은 '환경'과 '노력'이었다. 여기서 환경이란, 환경에 안주하고 만족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환경을 노력으로 극복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앞서 설명한 CEO와의 만남에서도 알 수 있거니와, 덕수쌤은 몇 가지 사례를 더 들었다. 


"인간은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약하다고 탓하지 말고, 환경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덕수쌤은 소설가 이외수 이야기를 했다. 이외수도 가만히 책상에만 있으면 글을 못 쓰고, 자꾸 트위터 등 딴짓만 하게 될 것 같아, 스스로 철창에 들어가 글을 다 쓸 때까지 가족들에게 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처한 환경을 바꾸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나 역시 내가 처한 환경에 안주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환경의 벽에 가로막혀 스스로 벽을 넘어설 수 없다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스스로의 시선보다 타인의 시선에 더 신경쓰면서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일부러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곧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덕수쌤이 들려준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인용하며 두 번째 O.T 특강 후기를 끝맺음한다.


"나도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세상 또한 날 바꾸지 못한다"

Posted by 가베치
,

■ 기사 링크: http://omn.kr/k0jn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 탄신 130주기를 맞아, 다음 주 토요일인 21일에 기념행사를 연다고 한다. 나도 이 날 행사에 초대받았고, 아예 스태프로 참여해서 일 좀 도와달라는 제의까지 받은 터다. 전역하고서 열심히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했고, 워낙 나에겐 소중한 인연들이라 그날 다른 스케쥴도 모두 취소하고 행사에 참석하겠노라 말씀드렸다.


그리고 오늘 행사 일정이 나왔길래, 부랴부랴 <오마이뉴스>에 스트레이트성 기사를 하나 써서 올리고, 정식 기사로 등록되자마자 깜짝 이벤트(?)로 기념관 측에 전달했다. 기념관 측에서는 갑작스러운 홍보 기사에 적잖이 고마워하는 눈치다. 나 역시도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이런 식으로라도 도울 수 있어 뿌듯하다.


다만, 몇 가지 잘못된 부분이 있어 정정요청을 받았다.


1. 유족으로 소개된 여인영 대구중공업 회장은 '대구중공업'이 아니라 '대진기계' 회장이다.

2. '독립운동 체험마당'은 '독립운동 체험한마당'이 풀네임이다.

3. 참석자들에게 도시락을 제공하는 건 맞지만, 선착순 600명이란다.


본인의 블로그를 통해 저 기사를 접하시는 분들은, 위의 내용을 참고하시면 될 듯 하다.


PS. 그리고 한 가지 불만은, <오마이뉴스>는 시민기자가 쓴 내용을 임의로 바꾸거나, 제목도 아예 바꿔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편집부 측에서 봤을 때, 시민기자가 잡은 초안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편집부가 시민기자와의 어떠한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제목이나 내용을 바꾼다던지, 빼버리면 시민기자가 의도한 방향과 전혀 다른 글이 도출될 수가 있다. 얼마 전에 내가 쓴 기사도 그렇고, 오늘 기사도 내가 뽑아낸 제목이 더 괜찮은 제목이었다고 생각했는데, 편집부가 임의로 바꿔버린 제목은 설명 나열이라 밋밋하고 지루한 느낌을 준다. 내 기사를 대중들에게 노출시켜주고, 원고료까지 지급해주는 건 더할 나위 없이 고맙지만, 어쨌든 '글쟁이'로서 요즘 <오마이뉴스>의 이런 처사에 대해서는 불만이다.

Posted by 가베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