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년 전 일이다. 경북 안동으로 2박 3일 간 고적답사를 갔을 때였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안동에는 도산서원·병산서원 등이 남아있어 유림의 넋이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잠시나마 복잡했던 일상을 잊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발자취에 흠뻑 취해있을 무렵, 우리의 발걸음은 어느덧 조용한 시골마을에 자리 잡은 한 고택 앞에 멈춰섰다. 유려한 기와지붕을 얹은 서원들에 비해 볼품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에서 오랜 세월의 풍상이 느껴졌다.


김재봉의 생가인 '학암고택' 전경(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위치) ⓒ 김경준


안동의 한 고택에서 만난 죄인의 초상화


고택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사랑채에 걸려있는 웬 사내의 흑백 초상화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머리를 삭발한 채 수의를 입고 있어 영락없는 죄인의 형색이었다. 그럼에도 죄인답지 않게 표정에는 온화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어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풍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 고택의 주인이었던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이었다.



학암고택에 걸려있는 김재봉의 초상화와 안내문 ⓒ 김경준


김재봉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산파 역할을 맡아 국내에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의 초대 책임비서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김재봉이란 이름은 내게 너무도 낯선 이름이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다면서도 그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내내 민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찌 내 학문이 얕은 탓만 있겠는가. 그의 이름을 꽁꽁 감춘 채 역사의 뒤편에 밀어낸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현실 탓도 있을 게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내가 배운 독립운동사란 우익 민족주의 계열로 편향된 '반쪽짜리 역사'였다. 물론 고등학생 시절 내가 본 교과서에서는 나름대로 좌·우 균형을 맞춘답시고 좌익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었지만, 그 비중은 절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김재봉이니 권오설이니 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애시당초 접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별'들에 대한 장편 서사


최근 출간된 <조선공산당 평전>을 펼치자마자 유독 반가웠던 까닭도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김재봉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이 책은 김재봉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있는 책이다.


흔히 평전이라고 하면 역사 속 인물 한 사람의 일생에 초점을 맞춰 고찰하는 형식을 말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책은 특정 인물이 아닌 '조선공산당'이라는 정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 최백순은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으며, 노동자,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이기에 사람이 아닌 '조선공산당'에 '평전'이란 말을 붙였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조선공산당 평전> 표지 ⓒ 서해문집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 책에는 김재봉을 비롯해 이동휘, 권오설, 조봉암, 박헌영, 김사국, 김약수, 김알렉산드라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모두 한반도와 러시아,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있고,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이름도 있다.


저자는 이 한 권의 평전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그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하는 까닭을 강조한다.


"(조선공산당은) 참으로 오랫동안 금기시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라면 좌우를 떠나 누구나 조선공산당이 항일독립운동의 큰 흐름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인정이 결코 대중의 상식이 되어선 안 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3·1운동의 야심 찬 반복시도였던(하지만 기획자가 조선공산당이었던) 6·10 만세운동은 이름 정도만 알려지는 게 바람직했고, 해방 직전까지 국내 항일투쟁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이들이 공산주의자임은 더더욱 널리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p.4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를 찾아


책의 시간적 배경은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제의 침략과 수탈을 피해 러시아 땅에 모인 한인들은 춥고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하나의 군락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자치조직을 만들고 신문을 발행하며 자연스럽게 러시아 사회의 일원으로 흡수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봉건왕조가 무너지자 러시아 한인사회 구성원들 역시 자연스레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접하게 된다. 혁명으로 봉건왕조를 몰아내고 세워진 볼셰비키 정권의 사회주의 이론은 새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분투하고 있던 조선의 망명정객들에게도 솔깃한 이론이었다. 자연스레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그렇게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의 길은 쉽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좌·우익의 극심한 대결이 이어졌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한인사회당 출신 이동휘도 있었다. 대통령(이승만)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그는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열이 장악한 임시정부에서 그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갈등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김립 암살 사건'이다. 당시 코민테른은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동휘의 측근인 김립이 모스크바로 건너가 이를 수령해오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을 빚게 된 사건이다.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백범 김구는 이를 '임시정부 공금 횡령' 사건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 대낮의 골목길에서 김립을 암살했다. 그러나 저자는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를 토대로 자금의 소유권자가 한인사회당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공금 횡령범이라는 낙인으로 인해 김립은 여전히 신원되지 못한 채 우리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실정이다.


비단 좌·우익의 갈등만 존재했던 게 아니었다. 같은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도 이념과 방법의 차이로 인해 격렬한 대립과 분열이 반복됐다. 당시 코민테른은 한 나라에 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1국 1당'을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서로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사회주의 정당 및 단체들의 대립이 나날이 격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감시 피해 요릿집에서 만들어진 조선공산당


이들의 갈등을 지켜보다보면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념과 방법이 달랐을 뿐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에서만큼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갈등은 독립을 쟁취하고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그들의 투쟁은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당으로 결실을 맺는다.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아서원. 평범한 점심 약속을 가장한 이날의 모임은 바로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자리였다. 최재형이 첫발을 내딛었던 극동의 낯선 땅 지신허,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그 먼 길을 돌아 독립과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경성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국요릿집이었다."- p.257


김재봉 등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요릿집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후, 서둘러 코민테른으로 밀사를 파견했다. 코민테른 간부회는 '9월 결정서'를 의결함으로써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다. 1918년 한인사회당 결성 이후 모두가 꿈꿔온 사회주의자들의 목표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도 조선공산당은 와해와 재결성을 반복하면서 부침을 겪지만,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는 투쟁의 길을 걸었다.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중국요릿집 '아서원' ⓒ 동아일보


금기의 역사는 현재진행형… 우리가 먼저 불러줘야


저자는 이들의 역사를 '남과 북이 모두 외면한 금기의 역사'라고 말한다. 해방 후 남과 북의 이념 대결 속에서 조선공산당의 존재는 뿌리채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해온 남한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 역시 최고권력자인 김일성의 유일지배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존재가 모두 지워졌다. 김재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만든 박헌영이 대표적이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미제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숙청당했다.


시간이 흘러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재봉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공적을 인정받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사회주의 전력으로 인해 발목이 묶여 있는 상황이다. 그들의 서훈 문제를 둘러싸고 지금도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역사는 여전히 금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알려지지 않은 별'들은 우리가 손을 내밀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먼저 그들의 이름을 알고 불러줄 때, 그들도 비로소 금기의 영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교과서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비중 있게 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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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1박 2일로 친구들과 서울 시내 박물관 답사를 다녀왔더랬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곳중에 용산 국립중앙박물관도 코스로 포함이 되어있었는데요, 그곳에서는 마침 '쇠, 철, 강 - 철의 문화사'라는 기획전시가 지난 26일부터 열리고 있었습니다.


인류가 가장 오래 사용한 금속이라는 '철'의 역사를 통해 인류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고 있는 전시였습니다. 동, 서양에서 철이라는 금속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해왔는지 살펴볼 수 있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시된 유품의 종류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제 눈길을 사로잡은 유품들은 '칼'들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중국 그리고 이란까지 다양한 나라의 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그러다보니 세계적으로 어떤 형태의 칼들을 운용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도'(실제 유물은 남아있지 않아 복제품으로 알고 있습니다)라던가 의병장들이 쓴 칼, 청나라 군인들이 쓴 칼(현재 중국무술에서 사용하는 연검의 형태와 동일합니다)들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요새 일본드라마 <신선조> 시리즈를 애청하고 있는 관계로 계속 일본도에만 눈이 가더군요. 보면 볼수록 멋있습니다.


아예 도검 전시회였다면 더 많은 칼들을 볼 수 있었을텐데, 주제가 그렇지 않다보니 전시된 칼의 종류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짧게는 몇 백 년에서부터, 길게는 천 년 이상 오래된 실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기회인만큼 연휴 때 한 번 들러서 관람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시는 11월 26일까지. 성인 6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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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링크: http://omn.kr/np5n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기 시작한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번엔 영혼의 강제동원이 이뤄지고 있던 '대동아성전대비'와 탐방단이 새롭게 찾아낸 '윤봉길 의사 구금소 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봤습니다. 


특히 윤 의사의 구금소 터를 찾아가는 여정은 흥미진진한 내용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슬프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입니다. 많이들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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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 선발하는 '2017 나라사랑 역사탐방단'에 최종 선발됐습니다.


사실 해당 행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는데요, 과 선배가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셔서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바빠서 계속 미루다가 신청 마감날 급하게 써서 냈는데 운 좋게도 선발됐군요. 30명 뽑는데 86명 지원했더군요. 최종 선발된 덕분에 올 여름 일본여행을 가게 됐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 참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인 것 같습니다.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여행도 많이 못 다녀봤는데 입학 후 1학년 때부터 안중근의사기념관,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장준하기념사업회, 청년백범에 이르기까지... 매년 여름마다 지역을 달리해 중국 내 항일독립운동사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때 사진을 보면 정말 중국에 다녀왔던 기억들이 꿈같기도 합니다.


다만 졸업하기 전까지 일본을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던 차였습니다. 실제로 전 태어나서 일본에 가본 적이 없거든요. 어쩌면 제 전공과도 가장 밀접한, 만악(萬惡)의 근원인 일본에 가보지 못했다는 게 모순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졸업하기 전에 이렇게 대학생의 특권을 이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일본 답사를 다녀오게 됐습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 그리고 의열단원들의 흔적을 좇아갑니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도 간다고 합니다. 과연 그곳에 가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벌써부터 감정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일본 열도에 남아있는 선열들의 흔적과 여전히 살아숨쉬는 극우정치의 망령을 가슴 속 깊이 새기고 돌아오겠습니다.


참가비는 40만원이라고 하는군요. 요새 재정적으로 쪼들려서 난감한 상황입니다만, 미친듯이 글을 기고해서 원고료를 벌어야겠습니다. 오랜만에 여권도 만들고 분주하고 보내겠군요. 가서 사진도 많이 찍고, 돌아와서 <오마이뉴스>에 기행문을 기고해서 여러분과 경험담을 나누고 싶습니다. 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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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몽양 여운형 역사탐방>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역사유적지 탐방행사에 다녀왔다. <몽양 여운형 역사탐방>은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탐방 프로그램인데, 이번이 18회째라고 한다. 


2014년 7월 6일이었던가. 군 입대를 딱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는데, 그때도 탐방 행사가 있었다. 그때는 또 1박 2일로 경남 밀양까지 다녀오는 꽤 큰 행사였다. 당시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좀 의미있는 활동을 해보고 싶었기도 하고, 그간 친하게 지냈던 기념관 관계자 분들께 입대 인사도 드릴 겸해서 참가했었더랬다.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전역하고 다시 탐방에 참여하려니 감회가 어찌 남다르지 않을손가. (그때는 12회 행사였다)



(사진: 2014년 7월 5일, 제12회 몽양 여운형 역사탐방 당시 밀양 박차정 선생 묘소에서)


어쨌건 이번 행사는 당일치기로, 그것도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짧게 진행하는 답사여서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오후 1시가 다 되어, 집결지인 삼양교통 종점 앞으로 가니 이미 많은 회원들이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나도 재빨리 대열에 합류하여, 가장 먼저 기념관의 장원석 학예사님과 강대운 시설팀장님께 오래간만에 인사를 드렸다. 입대 전 청년백범 답사단의 일원으로 함께 중국을 다녀오면서 첫 인연을 맺었고, 입대 후에도 휴가 나와 연락드렸을 때, 지체없이 달려나와 소주 한 잔 사주시며 군 생활을 위로해주던 매우 고마운 인연들이다.


일행이 다 모이자 첫 답사지인 '봉황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봉황각 앞에 도착하니, 장 학예사님이 갑자기 내 소개를 하시며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경준씨가 오늘 몸풀이 겸 모두 앞에서 국군도수체조를 지도해보라"고 즉석 주문을 하셔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사진: 봉황각으로 가는 입구)



(사진: 봉황각 입구에 모인 탐방 회원들)


할 수 없이 맨 앞에서 국군도수체조를 하긴 했는데, 사실 말년이 되고서부터는 점호 때마다 생각없이 대충 체조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조를 하긴 처음이라 동작들도 중간 중간 까먹고, 구령과 동작이 안 맞아서 애를 먹기도 했다. 


체조를 마치고 나니, 이미 군대를 다녀온 군필자 회원들은 "나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라는 말로 군 생활을 추억하기도 하고, "아까 동작이 틀렸다"며 지적하기도 했다. 심지어 "빠졌네"라고 한 마디 툭 던지는 분도 계시던데... ㅎ 얼마 전까지 말년 병장이었던 예비역한테 뭘 더 바라십니까...


한바탕 체조 소동(?)을 겪은 뒤에, 봉황각에 올라가 가이드 선생님으로부터 봉황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사진: 봉황각 전경과 설명해주시는 가이드 선생님)


봉황각은 경술국치 이후인 1912년에 천도교(동학)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이 세운 목조건물이다. 손병희 선생은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천도교 정신으로 무장한 투사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투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망이 소홀한 서울 변두리에 이 봉황각을 지었던 것이다. 실제로 손병희 선생의 3.1혁명 구상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이곳을 거쳐간 많은 지도자들이 3.1혁명의 주체세력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고 하니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참고로 봉황각의 현판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였던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다고 하며, 건물의 양식은 경복궁의 건청궁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봉황각에서 좀 떨어진 곳에 오르막길이 있는데, 그 길을 오르면 봉황각의 설립자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가 있다. 우리는 묘소를 참배한 후에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위해,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어 몽양 여운형 선생의 묘소로 향했다.



(사진: 의암 손병희 선생 묘소)


몽양 여운형 선생의 묘소는 강북구 변두리의 한 주택가에 조촐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인가 나도 입대 전에 이곳에 혼자 찾아왔을 때, 도저히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 기념관에 전화해 계속 위치를 물어보고, 여기저기 발품을 파는 등 한바탕 소동을 벌인 끝에야 간신히 찾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분의 묘소야말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잘 모셔져야 할 터인데, 유족들이 그건 또 원치 않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사진: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로 가는 북한산 둘레길의 와중에서... 꽃이 참 예뻤다)


여운형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후에, 우리는 백설기 떡과 막걸리로 음복을 하며 잠깐 휴식 시간을 가졌다. 휴식 시간에 잠깐 여운형 선생 묘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운형 선생의 서거 후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에서 특별히 제작해 공수해온 관에 선생의 시신을 안치하도록 배려했고, 포르말린 용액으로 방부처리를 하여 미라 상태로 입관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향후 3~40년 내로 통일이 되면 이장하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사진: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에서 참배하는 탐방단 회원들)


장 학예사님은 "이런 조치들을 했던 것을 보면,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3~40년 내로 우리가 분명 통일이 될 거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오늘까지도 우리가 통일이 되지 못한 상황이니 참 부끄럽고, 여운형 선생님 앞에 반성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게 된다"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여운형 선생의 시신이 미라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처음 듣기에 신기하기도 했거니와, 장 학예사님의 부연설명에 가슴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사진: 매번 역사탐방 때마다 고생해주시는 장원석 학예사님)


딴지는 아니지만 아마 여운형 선생의 시신이 현재까지도 미라 상태일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미라 상태로 보존 중인 김일성-김정일 시신 같은 경우도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수 억원의 비용이 투입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조금씩 시신이 쪼그라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포르말린 용액으로 한 번 방부처리한 여운형 선생의 시신이 여전히 원형 그대로일지는 의문이다. 물론, 묘를 쓸 때 조선시대처럼 회곽묘(석회로 석실을 만들어 공기가 안 통하게 안치하는 방식)를 썼다면 몰라도... 근데 그렇게까지 묘를 썼을 것 같지는 않고. 논지에서 조금 벗어났는데,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여운형 선생의 장사가 제대로 치뤄지길 고대해 볼 따름이다.


여운형 선생의 묘소를 나온 후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인근 '국립 4.19 민주묘지'로 향했다. 이곳은 1960년 4.19혁명 당시 순국했던 호국영령들과, 혁명 당시 부상을 입었던 분들의 묘역이 위치한 국립묘지다. 불과 며칠 전이 4.19 혁명 56주기이기도 해서 더욱 의미 있는 코스였던 것 같다.



(사진: 국립 4.19민주묘지의 기념탑)


우리는 이곳에서도 가이드 선생님을 따라 설명을 들으며 이동했다. 맨 먼저 기념탑 아래서 4.19혁명 당시 순국한 호국영령들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묘역을 이동하며 설명을 듣기 시작했는데, 참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분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일단 대부분 학생이었던 점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꽃다운 청춘들이었기에... 한편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에, 아니 나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도 자유와 민주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다 돌아가신 그 용기와 신념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사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 최루탄 사건'의 주인공, 김주열 열사의 가묘)


묘역을 둘러본 후에, 유영봉안소에 올라가 또 한 번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기념관에 들렀다. 기념관에서는 4.19혁명의 역사적 배경과 경과, 결과, 의의를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일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념관 관람은 좀 띄엄띄엄 보고, 2층 영상관에 올라가 10분 정도 되는 영상물을 시청했다. 4.19 혁명 전후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촬영한 흑백영상들을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가슴이 저미어왔다.


기념관 전시관람을 끝으로, 오늘의 <몽양 여운형 역사탐방>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탐방의 여운은 뒤풀이를 위해 이동한 인근 식당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여운형 선생을 추모하는 노래를 직접 지었다는 어느 어르신은 흥에 겨워 즉석에서 직접 노래 열창도 하시고, 각자 자기소개를 하며 오늘의 탐방소감을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어제 사람들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개인 블로그를 빌어 내 개인적인 소감도 말하고 싶다. 


전역한 지 열흘째... 딱히 할 일도 없어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다가 오래간만에 사람 많은 곳에 나오니,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 즐거운 시간이었다. 정말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사실 어제 탐방 같은 경우는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보다는 그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전역인사도 하고, 오랜만에 사람 많은 곳에 나가서 사람 향기를 맡고 싶다는 목적이 컸다. 그래서인지 어제는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며 맡았던 꽃향기가 더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 어제 탐방을 계기로 계속 집에만 있을 게 아니라 더 자주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역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지만, 계속 집에만 있다보니 여전히 사고방식과 언어습관이 군대식이어서, 사람들을 만나도 말투도 그렇고, 대하는 것도 어색하기만 하다. 


매일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하루 빨리 민간인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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