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시절, 나는 유독 커피를 좋아했다. 일과를 마친 뒤 막사로 복귀해 후임들과 나눠마시던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은 지친 몸을 녹여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묵직한 향기와 혀 끝에 감기는 씁쓸한 맛. 동고동락하며 부대끼던 후임들과 나눠마시던 커피였기에 추억 한 스푼 보태져 더욱 진한 향기로 기억되는지도 모르겠다.


그 맛을 잊지 못했던 나는 전역 후 본격적으로 커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동네 문화센터를 찾아가 주부들 틈에 끼어 '홈바리스타' 강의를 열심히 듣고 관련 책도 사서 읽었다. 얼마 없는 용돈을 쪼개 커피를 내리기 위한 도구와 원두까지 구매해 직접 내려마시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런데 이 커피란 녀석은 알면 알수록 이해하기 힘든 녀석이었다. 커피콩이면 다 같은 콩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생산지와 로스팅(볶는 정도)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인 원두로 재탄생한다. 더욱이 같은 원두라고 할지라도 에스프레소와 핸드드립, 프렌치 프레스 등 내리는 도구와 방식에 따라 제각각의 맛을 내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매일 새로운 카페에 들러 다양한 커피를 맛보고, 바리스타들에게 맛있게 커피 내리는 법을 귀동냥하러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정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최고의 커피를 내릴 수 있을까' 고민만 깊어졌다.


그때 우연히 만난 바리스타 한 명이 내게 귀띔을 했다.


"커피에 정답은 없어요. 아무리 실력 있는 바리스타가 내려준 커피도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맛 없는 커피인 거죠. 굳이 정답을 찾고자 한다면 자기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커피가 정답 아닐까요?"


그 말에 나는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요리사가 만든 요리도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맛 없는 음식일 뿐이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사람들마다 호불호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단순하면서도 명징한 진리를 두고 나는 먼 길을 돌아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후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를 찾겠다는 미련한 여행은 끝났다. 이제 나는 커피를 마실 때면 커피를 내려주는 바리스타를 먼저 생각한다. 잠들어있던 커피콩을 깨워 그 속에 숨어있던 향과 맛을 살려내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리스타들이기 때문이다. 커피 본연의 성질에 자신만의 개성을 섞어 적절한 풍미로 되살려낸 바리스타들의 커피를 마시며 나는 드넓은 커피의 세계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커피는 '삶'을 떠올리게 한다. 커피에 정답이 없듯, 삶 역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천편일률적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각자의 몫이요, 서로 다른 꿈과 목표를 세우고 그를 위해 달려간다. 우리들은 결국 모두 삶을 추출하는 바리스타들인 셈이다.


* 수원대 2017학년도 1학기 교양 <문예창작의이론과실제> 과제를 위해 쓴 수필

* 블로그에 수필 끄적이는 건 자주 하던 일이거니와 <오마이뉴스>에서 그렇게 열심히 글을 써대는데도, 매번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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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http://omn.kr/mwjz


<오마이뉴스>에서 '내 안의 덕후'라는 공모전을 개최했더군요. 말 그대로 자신만의 특별한 취미생활에 대한 글을 공모하는 행사였습니다.


무술이라는 아이템은 어떻게 보면 마이너한 취미라서, 이 좋은 아이템 썩히기 아깝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글을 써봤습니다. 이미 비슷한 주제로 작년에도 글을 썼지만,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다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 글을 썼습니다. 역시나 좋은 아이템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 메인 기사로 배치됐고, 네이버와 다음 등 주요 포털사이트에도 전송되어 검색하면 제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무술계에서 제 무력은 어디 명함을 내밀 정도도 전혀 못되기에,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물전 망신 꼴뚜기가 시킨다고 소속 문파의 명성에 먹칠만하는 우려도 있을 수 있고요. 그래도 제 삶을 돌아본다는 생각으로 담담하게 써봤습니다. 그리고 표현에 최대한 신중을 기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무림고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무덕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상금 20만원이 걸린 공모전인데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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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시청역 근처에 볼 일이 있어 급하게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 안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의 행색이 심상치 않습니다.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이 오기 시작합니다. 손자에게 성조기를 쥐어준 채, 함께 동행한 어르신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알고보니 오늘 시청 앞 광장에서 태극기집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역사 밖을 나와 집회 현장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나 듣던 군가 <멸공의 횃불>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탄핵을 탄핵한다', '계엄령을 선포하라'의 구호가 들려옵니다. 



덕수궁 옆 테이블에는 탄핵을 비난하는 책자들이 잔뜩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수익금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에 기부금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 열심히 살펴보고 사진도 찍고 있자니 한 어르신이 다가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한다"며 "열심히 찍어서 홍보해달라"고 합니다.


또 다른 테이블로 이동해 책자를 펼쳐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책을 홱 낚아채갑니다. 테이블을 지키던 한 중년 여성이 제 행색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책을 낚아채간 것입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가라" 


순간 당황스러워 물어봤습니다.

"저 아세요? 언제 봤다고 반말이세요?"

"니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모르니까 가라고"


책을 낚아챈 것도 불쾌한 일이었지만, 초면에 반말을 내뱉는 행동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탄핵 반대 집회를 방해하는 어떤 행동과 발언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책을 보고 있던 제게 그 여성은 왜 시비를 걸었던 걸까요. 말그대로 '같은 편'이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어쨌거나 순간적으로 저도 젊은 혈기에 욱하는 마음이 들어 잠시 숨을 좀 고르고 있었습니다. 똑같이 반말을 해줘야하나, 욕을 퍼주어줘야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왔는데, 그 일로 계속 기분이 나빴습니다.



어쨌거나 그 여자가 왜 제게 시비를 걸었는지 답을 찾지 못한 채, 약속장소에 가서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앗차! 제 가방에 달려있던 노란 세월호 리본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쩌면 제게 가라고 요구했던 그 여성은 제 가방에 달린 세월호 리본을 통해 피아식별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적진 한 가운데에 뛰어든 셈이었습니다. 태극기와 성조기의 물결이 가득한 광장 한복판을 세월호 리본을 단 채 돌아다녔으니, 어쩌면 몰매 맞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태극기가 탄핵 반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세월호 리본을 찬 이들은 그들의 적으로 간주되는 이 상황도 매우 씁쓸하기만 합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광장에 핀 벚꽃들은 봄이 왔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여전히 경찰 바리케이드를 중심으로 갈라진 촛불과 태극기의 대립은 2017년 대한민국에 진정한 봄은 오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P.S 내내 기분이 나쁘군요. 얕잡아보인 것 같아서. 제가 한 덩치하고 험악한 인상이었다면 과연 그 여자가 말이나 붙였을는지. 차라리 저를 물리적으로 건드려줬으면 좋았을텐데. 그땐 그냥 확...!


P.S 2 태극기집회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디 감히 민족의 상징인 태극기를. '반국가소요', '내란선동소요'가 딱 알맞은 이름이지 싶습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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