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커피보다는 녹차, 홍차, 보이차와 같은 차(茶)에 관심이 많았다. 커피맛을 잘 모르기도 했거니와, 커피와 차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커피란 밥 먹고 입가심용으로 먹는다는 가벼운 느낌의 음료였다면, 동양의 차(茶)는 자기수양, 건강유지와 같은 보다 묵직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뜨거운 물을 찻잎에 부어, 찻물을 우려내는 과정부터, 향을 맡으며 한 모금 음미하면 온 몸에 퍼져나가는 차의 향기. 그런 다도(茶道)의 과정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을 깨고, 커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계기는 바로 군대에서 비롯되었다. 


군필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군대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바로 이등병-일병 시절이다. 나같은 경우 일병 5호봉 때까지도 팀내 서열이 막내여서 더욱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날 위로해 준 것이 바로 커피였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단 것이 땡긴다고, 사회 있을 때는 그닥 즐기지 않았던 믹스커피를 P.X에서 한 봉지(막대스틱 100개들이)나 사다가 관물대에 쟁여두고 매일 티타임을 즐겼더랬다. 처음에는 살찔 것 같아서 점심 먹고 한 잔씩만 먹다가, 나중에는 너무 땡겨서 하루에 2~3잔까지도 마셨던 것 같다. 점심시간에 믹스커피 한 잔 타서, 막사 옥상에 올라가 남산타워, 63빌딩, 한강, 현충원 일대를 바라보며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는 게, 그 시절의 유일한 낙이었다.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3024334)


하지만 이후로도 믹스커피를 꾸준히 마시진 않았다. 사회 있을 때도 그닥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가, 믹스커피의 그 인위적인 달달한 맛이 나중엔 거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시면 마실수록 입 안이 텁텁해지고, 살찌는 것 같아 어느 순간 믹스커피를 끊어버렸다.


그러다 15년 3월 영천으로 발굴하러 이동했을 때, 마침 발굴부대인 영천대대 P.X에 인스턴트 아메리카노 커피인 '수프리모'를 팔고 있길래, 냉큼 집어들었다. 인스턴트이긴 하지만 군대 안에서도 아메리카노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커피 마니아들은 알 것이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아메리카노 커피를 종종 즐기곤 했다. 믹스커피에 비해 커피 본연의 향과 맛에 가까워서 마음에 들었다.


이후 다시 한 번 커피의 신세계를 접할 일이 생겼다. 작년 9월, 추석 연휴를 쇠기 위해 잠시 단 복귀했을 때의 일이다. 출타를 나갔다가 영등포 롯데백화점에 들러 우연히 '비니스 아마레또 아몬드(Beanies Amaretto Almond Flavour)' 라는 커피를 집어들었는데, 그 커피를 한 잔 맛보고 나니 다른 커피는 입에 댈 수가 없었다.



(사진: 비니스 아마레또 아몬드 커피)


이 커피 역시 인스턴트 커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몬드향이 물씬 풍기는 블렌딩 커피로, 향만 맡아도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커피였다. 이때 당시의 나는, 발굴지에서 한창 분대장 역할을 수행하며 맘고생이 심했던 시기인데, 매일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텀블러에 커피 한 스푼씩 타서 마시곤 했다. 그럴 때면 지친 몸과 마음이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았다.


마침 내 맞후임도 커피를 무척이나 즐기는 친구여서, 카누 커피를 하루에 4~5잔 이상 마시곤 했다. 그 친구와 함께 커피를 나눠 마시며 군 생활의 고됨을 나누곤 했는데, 그러다보니 어느새 커피 마시는 시간은 내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또 가끔은 내 관물대에 있는 다양한 커피 브랜드들을 보고 팀장님이 커피를 타달라고 한 적도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커피를 타드리면 "김바리스타, 커피 맛 좋은데"라는 칭찬도 듣곤 했다.


그때부터 커피에도 관심이 많이 생겼다. 지금까지 내가 마신 커피는 사실 인스턴트 커피에 불과했기에, 직접 좋은 원두를 구별하는 법도 배워보고 싶었고,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으로 내가 내린 커피를 마셔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그래서 휴가 나가서 커피 관련 서적까지 사들고 와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역시 책만 읽어서는 그 욕구를 해소할 수가 없었다. 직접 손으로 만지고, 내리고 해봐야 알텐데... 신체적 자유가 워낙 제한되는 곳이다보니, 별 도리가 없어 '나중에 전역하면 본격적으로 커피 공부해야지'하는 생각으로 인스턴트 커피에 만족해야했다.




(사진: 휴가 때 샀던 커피 책,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실제 해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전역한 지금, 이제 비로소 커피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질 기회가 왔다. 커피 공부를 하긴 해야하는데 카페 알바를 하면서 배워볼까, 아니면 커피 학원을 다녀볼까 계속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데 때마침 동네 문화센터에서 '홈바리스타' 과정을 연다고 해서, 오늘 낮에 냉큼 가서 신청하고 왔다. 주당 하루씩 3개월 동안 진행되는 과정인데, 수강료가 6만원이다. 자격증반이 아니고 취미반이라고 하는데, 나는 사실 커피에 관해서는 생초보니, 취미로라도 일단 커피의 세계를 접해볼 생각이다. 우선은 커피와 친해지는 것이 시작일테니. 그 다음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준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사진: 홈바리스타 과정 등록 영수증)


어서 커피 내리는 법을 배워서, 후임들에게 면회가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직접 내린 커피를 나눠 마시면서 함께 군 생활하던 추억을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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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한 다음 날인, 지난 주 목요일의 이야기다.


노량진 할머니댁으로 전역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할머니댁이 위치한 노량진 본동길은 내가 어릴 적에 살던 동네여서, 생각보다 아주 뚜렷하게 내 추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동네다. 최근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오랜만에 어릴 적 살던 동네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고 싶어서 본동길을 걸어내려왔더랬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옛 건물들이 점차로 철거되어, 내가 살던 풍경을 추억하기엔 너무 많이 바뀌어버려 아쉬움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푹푹 한숨만 내쉬며 걷고 있는데, 웬 어린 학생들이 구석진 골목길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거기도 옛날에 내가 살던 동네의 골목길이라서, 생각없이 따라 들어갔는데, 이런... 5~6명 정도 되는 학생 무리가 쪼그리고 앉아 구름과자를 열심히 피고 있었다. 당황해서 못본 척 그냥 나와버렸는데, 돌아오면서도 '훈계를 했어야 하는 건가' 싶어 후회도 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내 자신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그 시간대는 벌건 대낮이었고, 얼굴들을 보아하니 매우 앳된 것이, 고딩도 아닌 중딩쯤이나 된 것 같은데, 아무리 구석진 골목길일지언정 백주대낮에 교복을 입고서 몰래 흡연을 하는 행동이 결코 바람직해보이진 않았다.


어쨌거나 그 골목길은 공사를 위해 철거된 건물들로 향하는 길이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길이었기에, 백주대낮임에도 불량 학생들이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사실 흡연이야 결국 손해보는 것도 지들이고, 남들에게 폐만 안 끼친다면 딱히 터치해야 할 필요성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런 지역에 학생들이 자주 노출되면 흡연이 아니라 더 큰 피해(학교폭력, 성범죄 등)가 벌어지는 장소가 될는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첨부해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올렸다. '범죄위험지역이니 저 지역에 대한 지구대 및 인근 학교의 순찰 강화가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민원을 넣었는데, 며칠되지 않아 경찰청으로 민원이 접수되었다는 회신이 오더니, 얼마 후에는 경찰에서 전화가 와서 내가 보낸 민원에 대한 답변을 상세하게 해주었다.


그 결과는, 아래 회신 온 답변 메일의 내용을 캡쳐하는 걸로 대신한다.




내 이름이 왜 '황준하'인지 알 수는 없지만 (...)


여하간에 친절하고 상세하게 답변을 해주어서 고맙고, 부디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 순찰이 강화되어, 더 큰 범죄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뭔가 보람있는 일을 실천한 것 같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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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역했지만 그래도 나의 청춘을 바쳤고, 나의 추억이 깃든 부대라 애틋하다.

16년에도 다들 안 다치고 무사히 발굴 임무 수행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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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병장 가베치, 2016년 4월 13일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사진: 7월 동기들과 전역 기념 단체사진)

 

그렇다. 내가 드디어 전역을 했다. 아직도 사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말년이 되어 종종 나오던 휴가를 또 나온 마냥, 언제고 부대로 복귀를 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전역하는 당일 새벽까지도 불침번 근무를 서고 나왔는데, 복도 벽에 걸린 전자시계에 찍힌 날짜 '4월 13일'을 보면서 같이 근무를 서던 부사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작년 1월에도 함께 근무를 서던 선임과 내년 4월이 과연 올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며 근무를 섰었는데, 벌써 그 선임은 전역했고 나도 날이 밝으면 전역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1년 9개월이란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욕도 많이 먹어보고, 서러움에 남몰래 눈물 흘리기도 했고, 또 평생 잊지 못할 인연들을 만나 즐거운 추억을 쌓기도 했고... 정말 다사다난했던 시간이었는데, 전역한 지금은 마치 그 시간들이 한바탕 꿈만 같다.

 

군 생활하며 다양한 경험을 해봤지만, 역시 남는 건 '사람'일 것이다. 미운 선임, 고운 선임도 만나고 반대로 미운 후임, 고운 후임도 만났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다 추억일 뿐이고, 군 생활하며 즐겁게 지냈던 선후임, 동기들과 앞으로도 연락이 끊어지지 않고 평생 우정을 잘 간직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내 군 생활의 기억들)

어찌되었건 1년 9개월의 군 생활은 결코 잊지 못할 인생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나의 軍 시절 약력]

 

2014년 7월 14일 - 논산 육군훈련소 입대 (29연대 1교육대 2중대 2소대 97번 훈련병)

2014년 8월 22일 -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전입 (발굴과 발굴4팀 이병)

2014년 8월 31일 - 14년도 후반기 유해발굴작전 출동 (경기 포천, 강원 고성, 충북 증평)

2014년 11월 1일 - 일병 진급

2014년 12월 23일 - 2014 국군 감동스토리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2015년 3월 5일 - 15년도 전반기 유해발굴작전 출동 (경북 영천, 문경, 경기 포천, 강원 화천, 고성, 강릉)

2015년 6월 1일 - 상병 진급

2015년 8월 25일 - 15년도 국유단 독서 경연대회 최우수 독후감 수상

2015년 9월 4일 - 15년도 후반기 유해발굴작전 출동 (강원 철원)

2015년 10월 16일 - 발굴4팀 분대장 취임

2015년 11월 13일 - 2생활관 분대장 취임

2016년 1월 1일 - 병장 진급

2016년 2월 1일 - 분대장 이임, 말년 병장 취임(?)

2016년 4월 13일 - 육군 병장 만기 전역, 예비역 편입

 

 

(사진: 전역 기념 단체사진)

 

전역 당일날 당직사령이었던 행보관님이 "밖에 나가보면 군 생활이 그래도 제일 편했다는 걸 알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는데, 벌써부터 그 말에 공감이 간다. 이등병 때 읽은 <서경석의 병영일기>란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전역을 하는 중대장이 병사인 서경석에게 "군대는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고, 나는 이제 전쟁을 하러 간다"는 말을 마지막 인사로 남긴 것이다.

 

이제 정말 전쟁을 치르러 사회에 나왔다. 다시 사회로 던져진다는 게 참 무섭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는 노랫말도 있듯이 또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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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1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군 유해 인도식'이 열렸습니다.

저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일원으로, 이번 행사를 참관할 수 있었답니다.

직접적으로 행사를 뛰어야하는 영현병들과, 촬영을 해야하는 사진병을 제외하고는 부대에서 유일하게 참관한 병사라는... ^^;


중국군 유해 인도식이란 '6.25 전사자 유해발굴'을 하면서, 발굴되는 유해들 중에 중국군 유해로 판명나는 유해들을 인도적인 차원에 입각해 매년 한 차례 중국 측에 송환하는 행사를 말합니다. 2014년에 처음 시작되어, 올해로 세 번째 행사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작년에 발굴한 중국군 유해 36구를 송환했답니다.



이번에 발굴한 유해 36구 중 2구가 제가 속한 발굴팀이 발굴한 유해라서, 더욱 의미가 있었는데요. 행사 참관 후에 공보장교님과 중대장님께 "오늘 행사 참관 후기를 국방일보에 기고하고 싶다"고 허락을 구하고, 참관 후기를 작성해봤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대충 휘갈겨써서 제출할 생각이었는데, 공보장교님이 계속 디테일한 수정을 요구하셔서 거기에 맞추다보니 몇 번을 수정하고, 새로 쓰고 나름 힘들었네요... ^^;;;


어찌됐건 공보장교님의 빠른 처리 덕분에 벌써 국방일보에 실렸습니다. 전역하기 전에 제가 발굴한 유해가 중국 가는 길도 지켜보고, 또 짤막한 기록도 남기게 되었으니, 나름 군 생활의 유종의 미를 거두고 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래 본문 복사해서 올려놓았으니 많이들 읽어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다만 프로필 사진이 좀... ^^;;;;;



[기고] 중국군 유해 인도식 참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병장 김경준



지난해 5월 내가 속한 발굴팀은 1951년 당시 국군6사단과 중공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강원도 화천 무명 943고지에서 유해발굴을 했다. 그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한 완전유해 2구가 발굴됐다. 그중 한 구에서는 ‘허충옥인(許忠玉引)’이라 새겨진 도장도 함께 식별됐다. 최종 중국군으로 확인돼 다소 아쉬운 감은 있었지만 피아를 떠나 현장에서 발굴되는 유해 중 국적 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국적을 찾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지난 3월 31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중국군 유해 인도식’ 행사가 열렸고 나도 이 뜻깊은 행사에 참석하게 됐다. 유해발굴병이라는 특수한 보직을 부여받고 임무를 수행하면서 우리가 발굴한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는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감격스러웠다. 특히, 이번에 송환된 36구의 유해 중 2구의 유해는 우리가 직접 발굴했기에 더욱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군악대의 진혼곡이 드넓은 활주로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유해발굴감식단 영현병과 중국군 의장대 병사가 유해를 인도받기 위해 마주 섰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두 국가가 이제는 나란히 마주 서서 지난날의 은원(恩怨)을 풀고, 화해와 협력의 파트너로 손잡은 한·중 관계의 역사적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유해가 모셔진 관이 인도되는 순간, 중국 측 관계자 모두가 거수경례 혹은 목례로 정중히 유해를 인도받고 그들의 예법에 따라 추모행사를 진행했다. 중국 측 대표는 인도주의 원칙을 구현해 준 대한민국과 유해를 발굴하고 잘 보관해준 유해발굴감식단에 경의를 표하며 양국의 우호 관계는 한 단계 더 발전할 것이라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30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제 곧 전역을 앞둔 나에게 있어 ‘6·25 전사자 유해발굴’이라는 그동안의 군 생활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갖게 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한때는 적이었지만 이제는 인도적 차원에서 중국군 유해를 송환할 만큼 향상된 우리의 국격과 이번 행사로 인해 더욱 발전될 한·중 관계를 생각하니 나의 21개월 군 생활도 너무나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의 무한책임. 그리고 우리는 현장에서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유해발굴사업은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관심 갖고 참여해야 하는 숭고한 호국보훈 사업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 전역한 뒤에도 이러한 보람과 긍지를 안고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업을 알리고 동참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 한 분을 모시는 그날까지…


출처: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160405&parent_no=2&bbs_id=BBSMSTR_000000000127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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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6년 3월 1일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1. 오늘부로 군 생활 93% 찍음. 총 복무기간 639일(1년 9개월) 중 596일(1년 7개월 16일)을 복무했고, 남은 복무기간은 43일(1개월 12일)이 되겠다.

이등병 때 만날 달력 보면서 하루 하루 날짜 지우는 재미로 살았는데, 일병 꺾이고서부터 어느 순간 날짜 지우는 취미를 잃어버렸다. 날짜 세는 게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건지, 그냥 귀찮아서 그랬던 건지... 이제는 굳이 안 세고 싶어도 동기, 후임들이 알아서 며칠 남았다고 알려준다. 100일까지는 참 더럽게 시간이 안 가더니, 두 자리로 깨진 뒤로는 시간이 쭉쭉 가는 느낌이다.

이번에 나온 휴가를 포함해 남은 휴가가 24일이니 사실상 실질적인 군 복무기간은 한 달도 안 남았다. 어느 덧 전역을 바라보게 되는 짬이 되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2. 오래간만에 아파트 옥상에서 저녁 운동을 했는데, 옥상에서 내려다 본 서울 시내는 1년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닥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입대 전에는 보이지 않던 몇몇 고층 빌딩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밤하늘에 뜬 별들이며 야경들이 입대 전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던 그때의 정경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밤하늘의 별들과, 서울 시내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내 자신의 처지를 보는 것 같았다. 군 생활 1년 9개월은 내 인생에 있어 '일시정지'였던 것 같은 느낌이다. 바깥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남들은 그 시간 동안 거듭 성장해왔는데, 나는 그저 1년 9개월 동안 일시정지했다가 전역 후에 다시 2014년 7월 13일. 입대 전 원점의 나로 복귀하는 것이 아닐까.

3. 요즘은 故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예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들린다. 입대 전 이등병의 편지를 자주 들었는데, 그때는 입대를 앞둔 시점이었기에 마냥 우울하게만 들렸더랬다. 음악이나 가사 자체도 굉장히 우울하지 않던가.

그러다 휴가 나오기 전날인 엊그제 밤에, 침낭 속에 들어가 CD플레이어로 '이등병의 편지'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음악이 그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들린다. 특히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생)이여'라는 구절... 이 구절이 가슴에 콕콕 박혀온다.

예전에는 이 곡이 입대를 앞둔 청춘들을 위로해주는 곡으로만 생각했는데, 사실 이 곡의 진짜 의미는 전역할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게 아닐까 싶다. 전역 후의 삶에 대한 막막함을 느끼는 말년에게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고 말해주는... 말년을 위한 위로와 희망의 노래가 아닐는지.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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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6년 2월 26일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1. '다나까', '압존법' 폐지. 이제 군대에서 선임한테, 간부한테 '요'자 써도 된다네요. 진작에 이러길 바랐는데, 막상 후임이 나한테 요자를 쓰면 어색하기도 하고 기분이 참 이상할 듯...? 나부터 간부한테 요자를 쓸 수 있을지.

2. 사지방 컴퓨터도 완전 새삥으로 교체. 정말 빠르다. 근데 어차피 전역하면 집에서 실컷 할텐데. 별 감흥은 없다.

전역하기 전에 참 많은 변화를 겪는구나.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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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6년 2월 20일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월요일부터 휴가를 나와 내일 복귀를 앞두고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일주일 간의 휴가 기간 동안 푹 쉬고 싶었는데 뭔가 몸은 쉬어도 마음에는 끊임없이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다.

이제 슬슬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바깥에 나가기가 왜 이리도 두려운 것일까. 대인관계도 어렵고 장래 진로도 어둡고 막막하다.

이번 휴가 중 일부러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좀 갖고 싶어서 일부러 주위에 휴가 나왔다고 알리지도 않고, 만남 약속을 잡지도 않았다. 불가피한 이유로 마주치게 된 사람들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어울리지 않는 쑥스러움을 타며 말을 아꼈다. 특히 초면인 사람들을 한꺼번에 여럿이 만나는 게 제일 큰 스트레스였다.

입대 전에도 사람 대하는 게 서툴렀다는 걸 스스로도 인지하고는 있으나, 군 생활을 하며 마주치는 얼굴들이 굉장히 한정적이다보니 그 서투름이 더욱 심화된 것 같아 참 걱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로 걱정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 입대 전까지만해도 가장 큰 걱정은 군대 문제였는데 막상 군 복무를 마칠 때가 되니 이젠 취업이라는 더 거대하고 막막한 현실이 앞을 가로 막고 있으니...

긴긴 휴가 기간 동안 외로운 심사를 달래려고 사방팔방 열심히 돌아다니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도 열심히 가져보았지만 우울한 심사는 쉽게 달래지지가 않는 것 같다. 그냥 하루 빨리 복귀해서 쉬고 싶은 마음 뿐. 쉬러 나온 건데 전혀 쉬지 못하는 느낌이니 참...

원래 말년엔 다 이런건지 군대 다녀온 인생 선배님들의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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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6년 2월 9일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근황 겸 푸념>

중대장님의 배려로 지난 1월 외박 때 목검(木劍)을 반입하여 요즘은 검술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까지는 아니어도 거의 매일 같이 막사 옥상에 올라가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취해 신나게 검을 휘두르며 땀을 흘리고 있다. 입대한 이후로 얼마만에 칼을 잡아보는 건지,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마냥 참 반갑다.

그러고보면 칼이란 참 정직한 벗인 것 같다. 내 심사가 혼란스러우면 칼의 길도 곧게 내려가지 않는다. 집중을 하면 비로소 길이 제대로 잡혀 내려간다. 하지만 요즘 휘두르는 내 칼은 늘 곧게 내려가질 않는다. 수련이 부족한 탓일까, 내 마음의 중심이 잡혀있지 않아서일까. 여하간 이 목검이 현재로썬 유일하게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벗이나 다름 없다.

요즘 들어 예전보다 더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다. 이등병 때 잠깐 탔던 외로움보다 더 쓸쓸한 느낌이랄까. 분대장을 떼고 난 뒤로, '말년'이라는 이름 아래 아예 기존 팀 생활관을 떠나 다른 말년 병장들과 독립 생활관에서 지내다보니 내 스스로가 뭔가 '퇴물'이 되어버린 느낌이 종종 든다. 찾아오는 후임들도 없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없다.

말년의 자유를 즐기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밖에 나가서 뭘 해야할지 막막함에 몸은 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쓸쓸하고 불안하다. 특히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지인들의 취업, 합격 소식 등은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밖에 나가서도 맘 편히 칼이나 휘두르며 여유 있게 살고 싶은데, 가진 것도 없고, 뚜렷한 꿈도 없으니... 이젠 진짜 먹고 살 걱정을 해야할 때라 전역이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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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6년 1월 30일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우리 부대에도 병 수신 전용 핸드폰이 들어왔어요. 심플한 디자인의 폴더폰인데, 생활관별로 1대씩 비치됐네요. 전역하기 전에 병사 핸드폰이 들어오는 것도 보고... 참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근데 이게 수신 전용이라 전화를 받는 것만 되고, 문자도 저장되어 있는 상용문자(ex. 예, 그렇습니다 / 휴가 복귀했습니다 / 훈련 중입니다 등등...)만 답장으로 보낼 수 있어서 문자 톡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보내주시는 문자는 자유롭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외 게임, 카메라 등등 요즘 핸드폰에 기본적으로 있는 모든 기능이 없어요. (카메라가 달려있긴 한데 촬영 버튼이 없음;) 진짜 전화랑 문자만 됩니다. 처음에 핸드폰 들어왔을 때는 다들 신기해서 너나 할 것 없이 만져보겠다고 하더니만은 기능이 별로 없으니 생활관 구석에 내팽개쳐두고 아무도 거들떠도 안 보네요.

그리고 이조차도 개인정비시간에만 사용 가능하고, 일과 시간하고 점호 이후로는 행정반에 반납해야해서 그때 전화하시면 엄청난 민폐랍니다. 22시 이후로 전화하시면 저희가 당직사령한테 욕 먹을지도 몰라요.

말년에 핸드폰으로 전화 올 일이 있기는 할까 싶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연락처 남겨드립니다. 안부 궁금하신 분들은 가끔 연락주셔요.

연락처: 010-8054-5665

(주말엔 07:30~21:30 통화가능)
(평일엔 07:30~09:00 / 11:30~13:00 / 18:00~21:30 통화가능)


Posted by 가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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